소설
연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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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문 석
지원금으로 전체 학생들 멋진 견학수업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전문대학 재단에선 민식을 따로 불렀다. 김해에다 현장캠퍼스란 이름으로 3개 학과 분교를 설립하는데 그 책임을 좀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민식은 그럴 능력도 안 되지만 우선 그는 싸돌아다니는 게 취미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사진을 찍고 산을 오르고 사람을 만나면서 세상을 주유하는데 중독된 것 같았다. 분교 학생모집을 위해 대형버스도 한 대 주문해서 카페처럼 실내를 꾸민 차량이 학교에 도착했다.
민식의 현장 캠퍼스 학장 자리 사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단으로부터 금일봉과 학장 명함까지 받았다. 명함엔 전기공학 자동차공학 컴퓨터공학까지 3개 학과가 찍혀 있었다. 매일 교수 서너 명이 탄 대형버스는 김해로 향했다. 버스는 덩치가 너무 커서 안동공단 내 엘지에만 겨우 들어갈 수 있었고 다른 곳은 핸들이 꺾이지가 않았다. 전기공사협회 정기총회에 참가하고 전기기사협회를 통해서도 홍보하여 전기과 40명 모집은 목표를 겨우 달성했지만 컴퓨터학과는 절반도 채우지 못했고 자동차학는 겨우 아홉 명을 확보했다.
김해지역 구석구석을 돌면서 학생모집을 하기 위해 김해시청 상공회의소를 찾아갔더니 담당자가 김해 자랑을 해댔다. 구미나 울산 창원 등 대형공단 도시를 빼곤 김해가 안산 다음으로 산업체 수가 많다면서 5300개가 넘는 다고 했다. 우린 주촌 진례 진영 등 외곽까지 훑었고 비탈진 구석구석까지 산업체 시설이 들어찬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부에선 건물 임대차 계약으론 인가를 못해준다고 하여 민식의 대학원 동기가 안동공단 입구 큰 땅에 지은 건물 중 일부를 매입하는 식으로 서류를 꾸며 제출했지만 학생 수 미달로 문을 열지 못하자 접수한 지원자는 부산 본교에 등록토록 조치하고 현장 캠퍼스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오래 전 부산교도소는 대신동에 있었지만 김해로 옮겨간 지도 꽤 세월이 흘렀고 공교롭게 교도소는 다시 부산 강서구가 되었다. 교도소 재소자 백일장 때 민식은 주최 측인 부산가톨릭문협 일을 맡고 있었다. 재소자 작품을 미리 제출받아 수상자를 결정해서 상을 수여코자 문협 회원 10여명이 교도소를 들어섰다. 그때 구중궁궐 생각이 떠올랐다. 행사장인 강당까지 굳게 닫힌 철문 다섯 개를 지나야 했다. 하나하나 자물통이 엄청 컸고 문을 딸 때마다 철커덕거리는 금속성 소리가 높은 교도소 담장을 넘는 듯했다. 교도소는 소년범만 가둔 곳이 아닌데도 행사장엔 대부분 젊은이들만 참석해 한참 꿈을 키워야할 시기에 갇혀 있으니 민식은 안타까운 마음이 컸었다.
민식의 직장 퇴직동기 L은 현직 땐 서로 소원한 사이였다. 그는 바른 사람이었지만 직장 풍토는 그런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의 강점이자 약점은 윗사람에겐 무조건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윗사람과 어울려 점심을 먹는 일은 그의 사전엔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는 윗사람이 사무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라디오를 틀었다.
현직 때 그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김해 외동에다 집을 지었다고 자랑했다. “형, 우리 김해 집 얘기 한 번 들어 볼라요?” 이야기의 골자는 부실공사였다. 문을 당기면 문짝이 같이 딸려온다는 것이다. 민식과 퇴직동기가 된 L은 제2인생 직장을 김해에서 보내면서 자주 민식을 불렀지만 바쁘게 싸돌아다니는 민식인지라 한 번도 그기에 응하지 못했다. 젊은 날부터 간이 성하지 못하다면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은 L이었지만 퇴직 후 대학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났다고 술과 노래방을 찾는 걸 보고 민식은 크게 놀랐는데 이제 그가 떠난 지도 제법 세월이 흘렀다.
민식은 일전에 떠난 시인이 남긴 시를 단톡방을 통해서 받았다. 시인은 19살 고3 때 신문을 통해 등단했으니 70년 가까이 시인으로 살았던 위인이다. 민식과는 20년 전에 만나 서로 정을 주고받은 사이였다. 우직한 경상도 머슴아였던 시인의 시 <만남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렇다. ‘나에게 오늘 죽음이 온다면 기쁘게 맞이하리라. 살아야겠다 발버둥치는 그들과는 다르게 웃으며 정말 웃으며 맞이하리라 죽음은 돌아가는 것 돌아가는 그곳이 어딘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어머니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돌아간 그곳 아마 우리 모두가 그 옛날 함께 살았던 지극히 좋은 곳이 아닐까 그러기에 다들 돌아간다고 하지…하략…
민식이 연지공원에 닿은 시각은 이미 해가 서녘으로 많이 기운 때였다. 인구가 많은 김해에 위치한 명품공원이라 산책하는 젊은 부부에서부터 노파들까지 이어졌다. 두 손에다 애완견 세 마리 줄을 잡은 중년사내도 보였고 호수에서 보트를 타는 청년들도 있었다.
민식은 아름다운 호수 풍경에 취해 한동안 넋을 놓고 멍을 때리며 호숫가에 서 있었다. 사실 오늘도 민식은 해운대와 황령산 부산항 세 곳 중에서 한 곳을 가고자 했었다. 체력센터가 붙은 지하철 거제역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피해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그냥 지나치지 못해 30분을 얼쩡대느라 시간을 까먹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지키는 다섯 노인도 민식처럼 직접 원폭피해를 당한 생존자들이었다.
해가 더 기울기 전에 민식은 빠르게 공원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사반세기 전 개장한 공원은 이제 김해 랜드 마크로 자리 잡았다는 자랑도 인터넷에 들어 있었다. 전체 면적은 10만 평방미터쯤인데 그 4분의 1이 호수란다. 언젠가는 야간에 찾아 음악분수를 만난 적도 있는 민식은 그 추억을 지금도 떠올린다. 음악에 맞춰 분수와 레이저를 쏘아 화려한 시각효과를 보여주는 분수로 워터스크린을 만든 영상이었다. 민식은 그날 분수 쇼 영상을 갈무리해 그가 살고 있는 기초단체에도 보냈으나 물금 워터파크엔 지금껏 적용하지 않고 있었다.
민식이 생각하기에 공원에다 특별히 인도의 간디 어록과 그의 치적을 알리기 위한 공간을 크게 만든 건 가야국을 건설한 김수로왕이 인도의 허황후를 왕비로 맞아들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마침 젊은 부부가 간디 동상 앞으로 들어서기에 민식은 폰을 내밀면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간디 광장은 그리 넓지 않게 자리 잡았고 설치물들은 튀지 않고 차분하여 격조가 느껴졌다.
공원 남쪽 들머리에 설치된 거울은 탐방객이 재미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고급스럽게 만들었는데 관리가 안 돼 먼지가 덕지덕지 쌓여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거울 하나를 닦고 나서야 민식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폰 카레라에 담을 수 있었다.
연지공원은 졸업 앨범에 담길 사진 촬영지로 낙동강 건너 부산 북구 쪽 중고등학교에서도 즐겨 찾는다는 것도 민식은 들었다. 과거 농업용수를 궁금하던 저수지가 곡창지대 평야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도시가 들어섰고 저수지가 명품공원으로 탄생했으니 세월이 지나도 이 이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민식은 공원을 나섰다. 민식은 한 블록 지나 거대한 덩치의 홈플러스 할인매장을 들어서니 흡사 미국 뉴욕 우드wood 아웃렛 매장처럼 건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