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포의 계절
초여름의 햇살이 물가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연못 가장자리에는 노란 창포꽃들이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물 위에 떠 있는 수련 잎들은 조용히 햇빛을 품고 있었다. 초록은 더욱 짙어졌고, 계절은 어느새 봄을 지나 여름의 문턱에 서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앞에 오래 머물렀다. 창포는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마음에 남는 꽃이었다. 마치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 주는 사람처럼 말이다.
창포는 물 가까이에서 피어난다.
늘 젖은 땅을 품고 살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길고 곧은 잎은 바람에도 쉽게 눕지 않고, 노란 꽃잎은 햇살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도 저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세상의 습기와 슬픔을 가까이 두고도 자기 빛을 잃지 않는 삶. 창포는 그런 삶의 태도를 닮아 있었다.
연못은 잔잔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물결이 살짝 흔들렸고, 나무 그림자는 물 위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 자연은 늘 소리 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 꽃도, 나무도, 물도 다투지 않는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계절을 살아낼 뿐이다. 그런데 사람만 자꾸 조급해진다. 더 빨리 가야 하고, 더 높이 올라야 하며, 남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창포 앞에 서 있으니 그런 마음들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노란 꽃들은 마치 작은 등불 같았다.
초록 사이에서 환하게 빛나는 그 색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창포의 아름다움이었다. 사람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큰 소리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 말이다.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고, 햇살의 결이 깊어지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창포는 그런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 주는 꽃 가운데 하나다. 봄의 끝과 여름의 시작 사이에서, 창포는 물가에 노란 불빛처럼 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단오 무렵이면 창포를 삶 가까이에 두었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문 앞에 창포 잎을 걸어 두며 액운을 막고 건강을 빌었다. 자연 속의 식물 하나에도 삶의 기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연못 옆 길을 천천히 걸었다.
자갈길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고, 나무 덩굴이 만든 그늘은 한낮의 더위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 길 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의 계절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어떤 날은 겨울처럼 차갑고, 어떤 날은 봄처럼 설레며, 또 어떤 날은 여름처럼 뜨겁게 살아간다. 지금의 나는 어떤 계절 속을 걷고 있는 것일까.
창포는 바람이 불 때 더 아름답다.
꽃잎이 흔들리고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낸다. 그 모습은 꼭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같았다.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다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인지 모른다. 창포는 그렇게 말없이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연못 위에 비친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물속의 하늘과 진짜 하늘이 맞닿아 있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에도 저런 연못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힘든 날이면 잠시 들여다보며 마음의 먼지를 씻어 낼 수 있는 고요한 물빛 하나쯤 말이다.
흰 꽃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에 섰을 때, 바람이 꽃잎 향기를 실어 왔다. 꽃향기는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 더 아름답다. 잠시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짧은 순간이 마음 깊이 남는다. 사람의 인연도 어쩌면 그렇다. 오래 곁에 머문다고 다 깊은 것은 아니고, 짧은 만남이라도 마음에 오래 남는 사람이 있다. 꽃향기처럼 말없이 다녀간 사람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얼굴들.
창포의 계절은 그렇게 사람을 추억하게 만든다.
지나간 시간과 지나간 사람들, 그리고 오래전의 자기 자신까지도 조용히 떠오르게 한다. 나는 문득 어린 시절 시골 개울가를 떠올렸다. 물가에는 늘 창포가 피어 있었고, 바람은 논둑을 따라 천천히 지나가곤 했다. 그 시절의 하늘은 지금보다 더 높아 보였고, 여름은 지금보다 더 느리게 흘렀다.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꽃은 변하지 않는다.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계절에 피어난다. 그래서 꽃을 바라보면 마음 한구석이 안심된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창포는 올해도 물가에 피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약속처럼.
나는 벤치에 잠시 앉아 햇살 속의 창포를 바라보았다.
노란 꽃잎 위로 오후의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 풍경은 참 조용하고도 따뜻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순간들을 마음속에 하나씩 담아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기억되는 풍경들. 꽃 한 송이, 바람 한 줄기, 햇살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날들 말이다.
창포의 계절은 짧다.
그러나 짧기에 더 눈부시다. 꽃은 자기 시간을 다하면 미련 없이 계절 속으로 돌아간다. 사람도 언젠가는 그렇게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겠지. 그래서 오늘의 햇살이 더 소중하고, 오늘의 웃음이 더 귀한 것인지도 모른다.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연못은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창포들은 저녁 바람 속에서 마지막 빛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돌리며 마음속으로 작은 인사를 건넸다.
“올해도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 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창포의 계절은 자연 속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도 찾아온다는 것을. 조용히 흔들리며, 깊어지고, 마침내 자기만의 빛으로 피어나는 시간. 지금의 나 역시 그런 계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