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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궤적(軌跡)과 신앙의 반추(反芻)
◆ 들어가며
6.25 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에 고령 땅 한 끝 논실 마을에서 4남 3녀의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그 시대는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 하루 세끼 배를 채우기도 어려웠다. 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흘러 넓은 들판에는 수리 시설로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높드리의 논은 천수답으로 하늘에 의지하는 어레미논이었다.
우리 집은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형편이 나은 쪽에 속했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공부한 학자로 서당을 여시어 가르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글방 문 앞에도 못 오게 하시며 농사일을 시키셨다. 그러나 틈틈이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치며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셨다. 집안의 대소사와 농사의 절기에 따른 농법, 이웃의 한옥을 짓는 설계까지 맡아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에게 베푸셨다. 형들은 초등학교 졸업 후에 대구로 유학을 보내셨다. 형들의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해마다 전답이 잘려 나갔다. 주위에서 저 집은 머잖아 빌어먹을 것이라며 흉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두 형을 뒷바라지하느라 토지는 반토막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신념은 자식에게 땅을 물러주는 것보다 지식을 넣어주는 사려 깊은 분이셨다.
나는 지천명에 이르러 신앙의 줄을 잡았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 신앙을 계기로 여러 변화를 맞이했다. 성령의 이끄심에 십여 년간 마라톤으로 체력과 자신감을 길렀고 문학에 입문하여 펜을 들었다. 신앙의 주체를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여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3년에 학교에서 물러났다. 쳇바퀴 돌듯한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어디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다닐 수 있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어 그런대로 풍요로운 일상이다. 테니스와 파크골프로 체력을 관리하며 신앙생활에 정진할 수 있어 큰 기쁨이다. 한가한 시간에 글을 쓸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의 화살에 얹혀 과녁을 향해 가고 있다.
시간의 화살을 타고 일흔을 넘긴 지금에 와서 나의 삶을 반추하며 그 궤적을 추적하며 돌아본다. 제1부는 유년 시절, 제2부는 청소년 시절, 제3부는 켐퍼스 시절, 제4부는 병영 시절, 제5부는 마라톤 시절, 제6부는 문학의 길, 제7부는 봉사의 길, 제8부는 성령께 청원으로 되어 있다.
제1부
◆ 유년 시절
당시에는 홍역이 유행하여 어린아이가 홍역을 치른 다음에야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니 본 나이보다 두세 살 적은 것은 보통이었다. 나도 홍역으로 죽음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목동이었다. 소 등에 얹혀서 들로 산으로 다니며 소를 살찌우게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형들은 도시로 유학을 떠나 형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로웠다. 공부는 뒷전이고 이웃 아이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렸다. 그믐이 다가오는 밤에는 편을 갈라 동네 중심을 흐르는 도랑을 경계로 전쟁놀이를 했다. 보통 때는 숨바꼭질, 씨름, 땅따먹기, 구슬치기, 굴렁쇠 돌리기, 연날리기, 스케이트 타기, 제기차기, 딱지놀이 등을 하면서 동네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놀았다.
나는 저학년 때에는 한글을 해득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 국어 시간에 손을 들어 선생님이 지명하면 일어서서 읽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더니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하셨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떠듬거리며 읽었다. 선생님께서는 잘 읽었다고 칭찬하셔서 기뻤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일어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에 한글을 읽을 수 있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선생님의 칭찬이 동기가 되어 공부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조금씩 공부를 하게 되었다. 거기다 주말에 형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가 놀 수가 없었다. 둘째 형이 형제들의 군기 부장이었다. 회초리를 들고 형 앞에 꿇어앉아 가르침을 받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못할 때는 사정없이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형이 믿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도움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초석이라 생각된다.
형의 도움으로 공부도 곧잘 하여 4학년부터는 줄곧 우등상을 받았다. 초등을 졸업하고 아버지께서 당신의 후계자가 되라며 진학을 막으셨다. 담임 선생님과 결탁하여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도록 내 실력에 맞지 않는 학교에 원서를 냈다. 당연히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계획대로 나를 농사 후계자의 길로 이끄셨다. 밭고랑을 누비며 농사일을 배웠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은 곧잘 완수하여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주말에 도시로 유학 간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집에 오는 모습을 보고 나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몰래 누나의 도움으로 시골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2부
◆ 청소년 시절
1965년 3월에 중학교 입학 날이 다가왔다. 두려운 마음으로 아버지께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일렀더니 언짢아하였지만, 불벼락은 맞지 않았다. 그때 중학교 입학으로 내 삶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가 가장 열심히 책과 친한 시절이었다. 등교나 하교 시에도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노트를 들고 공부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는데 할머니께서 전기를 아끼라 하시기에 문에 보자기를 가려서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면서 공부에 전념했다.
고입 시험일이 다가왔다. 막내 남동생은 초등 6학년이었는데 집 앞 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얼음이 내려앉아 목숨을 잃었다. 부모님의 아픔은 얼마나 컸었으며, 고입 시험을 치르는 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뒤에 동생의 죽음을 알았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동생은 똑똑하여 아버지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채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화나 동화를 들려주셨고 덧셈, 뺄셈 등의 문제를 내시곤 했다. 항상 답이 동생이 빨랐으며 중간에 나는 잠이 들곤 했다.
중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응답이 없었다. 누나들은 형들 졸업하는데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며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날 졸업식이 강당에서 있었다. 뒤돌아봐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에서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뒤를 가니까 아버지께서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쓰시고 말없이 서 계셨다. 얼마나 반가운지 아버지 품에 안겼더니 아버지께서는 내 등을 토닥토닥하며 두드려주셨다.
아버지께서 보실 때 형들은 집 앞의 무논이나 고논처럼 여겼지만, 나는 높드리의 어레미논에 지나지 않은 눈 밖의 자식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농사 후계자로 찍혔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께 인정받은 날이었다. 그 뒤로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듬뿍 담아 주셨다.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형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더 기대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시골의 문전옥답을 처분하고 나를 위해 대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께서 사범대학에 가서 졸업하고 선생이 되라고 하셨다, 고3 때 아버지께서 세상 삶을 내려놓으셨다. 형님과 함께 아버지의 운명을 지켜보았다. 아버지께서 형에게 “자 사범대학에 붙거든 꼭 공부시켜 주라‘하고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형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신 고마운 분이시다.
예비고사를 치르고 난 뒤에 본고사가 한 달 정도 남아있다. 본고사 준비하려고 시골 삼촌 댁에 갔었다. 일주일 정도 공부하고 나니까 몸이 아파서 대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몸져누웠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비몽사몽이었다. 시험도 포기한 체 병마와 싸웠다. 입시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 상태로는 도저히 시험을 치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환시가 나타났다. 어떤 분(선친?)이 나타나 내일 시험인데 왜 잠만 자고 있나?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같이 공부하자면 선택과목(국사, 화학)에 대해 시험에 출제될 만한 것을 짚어 주셨다. 그러고는 훌쩍 떠나가셨다.
다음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쇠고기국을 끓어서 먹으라고 했다. 이십여 일 만에 먹어보는 밥이었다. 밥과 국을 말끔히 비우고 택시를 타고 갔다. 그날따라 정신이 맑았으며 아픈 것도 없었으며 더군다나 설사도 멎어 시험 치르는 내내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또 어젯밤에 그분과 환시 속에 공부했던 내용이 그대로 출제되었다. 만족하게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후 합격의 소식을 받았다.
제3부
◆ 캠퍼스 시절
1971년 3월,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른 세계로 자유와 해방이었다. 술과 담배를 접했으며 여학생과도 만날 수 있어 새로운 삶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후문 쪽에 있는 열차 식당에 가면 선후배를 만날 수 있었다.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랫가락이 이어지며, 막걸리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간다. 거나하게 취하면 시내 향촌동으로 간다. 그야말로 낭만의 젊음이 흐르는 공간과 시간이었다. 통금 시간의 임박으로 급기야 뛰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주말이면 과에서 등산을 자주 갔다. 동급생 중에는 등산에 일가견을 가진 친구가 있어서였다. 팔공산을 비롯하여 금오산, 황악산, 가지산, 속리산 등 등산의 묘미를 느꼈다. 3학년에 진급하여 학군단에 입단하여 장교 후보생으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여름 방학에는 군 사단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4학년 졸업여행을 떠났다. 지리산을 넘어 하동으로 갔다. 시골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막걸리를 마셨다. 몇 시간을 마신 뒤에야 버스가 왔다. 하동에 와서 여관에 짐을 풀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갔더니 윗목에 박카스 병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마시자‘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덜렁 들이켰다. 웬걸 목을 넘어가지 않고 도로 뱉어냈다. 친구들은 내가 술을 많이 먹어 토해내는 줄 알았다. 그것은 박카스가 아니라 암모니아수였다. 어느 누가 벌에 쏘여 약국에서 암모니아수를 박카스 병에 옮겨 가져와 사용하고 그대로 둔 모양이었다, 그 덫에 걸린 셈이다. 입 안이 헐고 혓바닥이 벗겨졌으며 얼굴이 퉁퉁 부었다. 다음날 여행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동안 화학과에서 ’하동 박카스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선후배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제4부
◆ 병영 시절
1975년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이 되어 광주 보병학교로 갔다. 4개월 동안 보병 장교로서의 소양을 쌓는 훈련을 받았다. 저녁에 취침 점호가 끝나면 당번을 정해 더블백을 매고 PX로 가서 황남빵을 한 가방 가지고 와서 10개씩 돌렸다. 누운 상태에서 10개를 다 먹고 잠을 자곤 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탈이 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빵 소위‘였다.
훈련을 마치고 전방 임지로 갔다. 춘천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양구로 가야 했다. 군 악대가 나와 소양강 처녀를 연주하며 마중하고 배웅하였다. 보병 2사단에서 사단장께 전입신고를 하고 바로 보병 17 연대로 배속받았다. 연대장께 신고에 앞서 10km 구보를 했다. 돌아올 때 낙오하여 민간인 트럭에 얹혀 와 겨우 대열에 합류하여 연대장께 신고했다. 다시 2대대로 와서 대대장께 신고하고 6중대 3소대장의 보직을 받고 병영 생활을 시작했다.
동계 훈련이라 해서 한 달 내내 산에서 땅을 파서 천막을 치고 밖으로 굴뚝을 내 불을 밝히며 추위를 이기는 훈련을 했다. 또 한 겨울에는 훈련을 접고 스케이트를 탔다. 사단에서는 대대별, 연대별로 시합이 있어 매일 스케이트 훈련을 했다. 그때 스케이트를 구하여 훈련에 임했다. 초보자로 창피하여 야간에 가서 관리병에게 양해를 구하고 훈련하기도 했다.
그곳 병영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우리 대대와 인접 대대와 간부 간의 축구 시합이었다. 나는 골문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 선수가 상대에게 페널티 킥을 허용하고 말았다. 대대장은 왼쪽으로 중대장은 오른쪽을 맡으라고 주문했다. 나는 두 분 상관 누구의 명령을 쫓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순간에 공이 똑바로 굴러오고 있었다. 오는 공을 손쉽게 덥석 안았다. 두 분의 명령을 어겼는데도 대대장과 중대장은 나에게 와서 잘했다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뒤에 우리가 한 골을 넣어서 승리하였다. 경기가 끝나자 회식을 한다며 인제의 어느 곳으로 오라고 했다. 대대장께서 나를 불러 당신의 지프차에 타라고 했다. 그날 대대장 옆자리에서 대대장이 따라주는 술을 마음껏 마셨다. 대대장은 내일 출근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하나는 한 병사가 중대장실 탄약 창고를 점령하여 실탄을 장전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누구도 들어오지 말고 중대장을 찾았다. 그 병사는 중대장에게 구타를 당해 이빨이 부러지는 상해를 입고 중대장을 불렀다. 그러기를 한참 시간이 흘러 밖에는 헌병대가 출동했다. 아무도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 병사와 나는 평소에 아주 좋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나와 같은 종씨로 ’식(植)‘자 돌림으로 ’병(丙)‘자 돌림자인 나에게 아저씨뻘 되는 병사였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아제라고 불렀고 나이도 나보다 많았으며 군대 늦깎이로 들어왔다. 나는 문밖에서 ”아제, 나 민 중위 들어간다“하고 문을 열었다. 차마 쏘지 못하고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그사이 군 헌병대가 그를 낚아채어 수갑 채워서 데리고 갔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그 병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번은 통신 보안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소대장으로 같이 근무했던 친구가 군사령부로 전출하여 갔다. 어느 토요일,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군사령부 직통 전화로 사적인 얘기를 오랫동안 통화했으니 전화를 끊자마자 통신 보안에 저촉되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에 ’군 회보‘에 실려 연대로 왔다. 그 내용은 징계 처리 후에 사령부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징계위원장은 부연대장이다. 연대 인사참모께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징계위원회가 열릴 때 서류상 휴가를 간 것으로 처리해 놓을 테니 징계하는 날 자리를 피하라고 했다. 그 뒤 곧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징계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른다.
제5부
◆ 마라톤 시절
군 생활을 마친 뒤에 공립학교에 일 년 근무하다가 가톨릭 재단 산하의 고등학교에 옮겨 교편을 이어갔다. 비신자로 20여 년을 지난 뒤 지천명에 이르러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 그분의 자녀로 살아감에 있어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다. 내 뜻대로의 능동적인 삶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수동의 삶으로 살아갔다.
내가 몸담은 학교는 가톨릭 정신으로 세워진 ‘미션 스쿨’이다. 이십여 년의 삶을 돌아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무기력한 삶이었다. 삶의 변화를 찾아 시도했다. 나약한 나를 강하게 만들기로 다짐하고 영화 ‘십계’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험난한 광야 생활로 수련과 정화를 했듯이 마라톤이라는 험난한 벌판에 몸을 던졌다.
새천년 국민소득 일만 불의 시대에 접어들어 마라톤 붐이 일어났다. 도로에 달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나도 막무가내로 도로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차츰 거리를 늘려가면서 달렸다. 뛰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으며 하루의 일과가 순조롭게 풀렸다. 경주 벚꽃 마라톤을 시작으로 마라톤을 즐기며 사랑하는 마니아가 되었다. 매번 대회에 참가하여 뛸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2002년 첫 마라톤(42.195km)에 도전한 대회가 ‘경주벚꽃마라톤’이었다. 무작정 신청해놓고 보니 토요일이었다. 당시에는 토요일이 휴무일이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꼭 완주하라며 흔쾌히 연가를 허락하셨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는 4시간 30분에 완주하겠다고 약속하고 대회에 참가했다.
제자들에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다. 몸 상태도 양호하여 30km까지는 별 무리 없이 갔다. 그 후 에너지가 고갈되어 포기할까도 싶었지만, 제자들이 눈에 아른거려 정신력으로 버티었다. 그럭저럭 결승점이 보였다. 다리에 근육통이 심해 절뚝거리며 결승점에 들어왔다. 결승점을 통과하니 4시간 31분이 흘렀다. 제자들과 약속은 일 분 늦어 못 지켰지만, 최선을 다하고 완주한 첫 경험이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첫 도전 성공에 감사했다.
그 후로 나에게 붙여진 별명이 ‘마라톤’ 선생이었다. 특활 부서에 달리기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호흡을 같이하며 뛰는 순간이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외부에서 누가 나를 찾아와서 학생들에게 물으면 내가 담당하는 과목과 성함은 몰라도 마라톤 선생이라고 하면 학생들은 다 나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한 번은 2학년 담임을 맡았다. 학급을 어떻게 잘 지도할까 궁리 끝에 ‘마라톤’을 학급 경영에 접목하면 어떨까 싶었다. 교장 선생님께 허락받아 학급 활동 시간을 이용하였다. 먼저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하면서 5월에 인근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데 우리 반 35명이 건강달리기 5km에 참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체력장 800m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5km를 뛰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제의는 ‘할 수 있다’라는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의 석연치 않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200m 코스를 돌았다. 몇 바퀴 돌고 포기하는 학생이 여럿이었다. ‘한술 밥에 배부르랴’를 생각하며 바퀴 수를 늘려가면서 두 달 동안 훈련을 했더니 마지막에는 포기하는 학생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우리 반 1명이라도 참가를 포기한다면 출전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전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근에 소재하는 대학에서 ‘영남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은퇴하고 대회에 초청되어 우리와 같이 건강달리기 5km를 뛰었다. 출발 총신호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출발했다.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면서 선두에서 뛰었다. 2.5km 반환점을 돌아서는 모두가 나를 앞질러 도망치듯이 가버렸다. 결승점에 와보니 35명 전원이 나보다 먼저 완주하여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전원 완주하여 단체상으로 금일봉을 받았다. 그 돈으로 학생들에게 대학노트와 볼펜을 사서 나누었다.
그 뒤 아침 자습 시간에 그렇게 소란했던 자습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뛰는 것 보다 공부가 쉬워요.’하는 것이 아닌가. 두 달 동안 고생은 했지만,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를 조금이나마 심어준 게 큰 보람이었고, 학생들이 잘 인내하며 따라준 것이 고마웠다. 그 뒤로 학급은 자학 자습의 공부하는 분위기로 변해 갔다.
2006년 8월 토요일,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실시하는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했다. 태풍이 비바람을 몰고 왔다. 그런데도 경기는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요트경기장 2층 로비에 선수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부산 가톨릭 마라톤 동호회에서 지도 신부님 집전으로 특전 미사가 진행되었다. 비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신부님은 강론을 통해 이 비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니까 기쁘게 피정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완주하라고 했다. 포기할까도 싶었는데 신부님의 강론에 힘을 얻어 대회에 임했다. 미사가 진행하는 동안 비신자들은 누구 하나 말하는 이도 없이 미사가 끝날 때까지 주시하며 함께했다. 선교의 한 방편이 아니었나 싶다.
저녁 6시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울산 방면으로 50km 반환점을 돌아오는 대장정이었다. 거기까지는 별 무리 없이 잘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한 사람이 나를 반기며 국밥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는 지난해 일본 이브스키 마라톤에 참가한 룸메이트였다. 그도 50km를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배려를 베풀고 먼저 떠나갔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돌아올 때 몸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신부님의 강론 ‘성령과 함께 피정하는 마음’으로 달리라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성가 151번 ‘주여 임하소서’를 부르며 왔다.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사라지면서 오다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90km 지점의 푯말이 보였다. 근육통이 올라와 더 이상 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느님과 약속을 맺었다. 끝까지 완주하게 해주시면 오늘 오후에 본당에서 실시하는 가두 선교 활동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해맞이 언덕과 동백섬을 돌아서니 저 멀리 종착점이 보였다. 아침에 산책하러 나오신 분이 박수를 보내면서 힘을 보태주었다. 있는 힘을 다해 결승점에 도달하여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성호경을 그었다. 집에 돌아와 2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절뚝거리며 하느님과 약속한 선교하는 장소에 가서 함께 활동했다.
어느 날 학교 교직원이 피정을 떠나게 되었다. 지도는 교목 신부님이 맡으셨다. 신부님께서 나에게 신앙 체험담을 피정 시간에 하라고 했다, 부산에서 한 울트라마라톤에서 밤새 달리면서 고통과 시련을 성령과 함께한 체험을 얘기하고 마지막에 ‘주여 임하소서’를 울먹이며 함께 불렀다. 피정 시간이 끝나고 한 여선생님이 나에게 와서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냉담을 풀겠다고 했다. 그 순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마라톤은 우리의 인생역정과 같다. ‘42.195’를 통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보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고통의 과정을 통해 인내와 의지력을 길렀다. ‘하면 된다’와 ‘할 수 있다’라는 적극적인 자세와 긍정적인 사고를 하도록 길들어진다. 그렇게 달린 완주 횟수가 27회였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마라톤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무릎부상을 주어 그만 뛰게 하셨다. 나는 군 생활 소대장을 하면서 소대원과 함께 자주 구보를 했다. 소대장인 내가 낙오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뛰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그런 내가 사회에서 마라톤을 한 것은 기적으로 고통을 통하여 합당한 도구로 쓰기 위한 성령의 이끄심이었다.
제6부
◆ 문학의 길
마라톤에 벗어나긴 했지만, 달릴 수 없어 우울하고 하고픈 의욕이 사라졌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과학을 전공하고 문학에는 문외한 나에게 어찌하여 펜을 들게 하셨다. 달리는 시간의 공백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울증도 사라지고 글 쓰는 재미가 있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일에 매달렸다. 수필 창작반에 들어가 학습하여 습작하는 일에 매달렸다. 끈기와 노력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얻었다. 그 힘은 마라톤에서 얻은 것이며 성령의 이끄심이었다.
생활 수필집을 두 권(질주, 어레미논) 출간한 뒤에 신앙의 글을 쓰고 싶었다. 기도 중에 지향을 두었더니 신앙의 글을 담을 그릇이 못 됨을 알았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공부하도록 이끄셨다. 성경학교에 입문하여 공부했다. 4년을 배워도 빙산의 일각으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심화반에서 2년을 더 공부했다. 겨우 눈이 뜨일 정도였다. 내 신앙의 주체인 하느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충만했다.
교구청에서 운영하는 신학원에 등록하여 2년 동안 배웠다. 교수 신부님의 강의에 빠져들었으며 배움의 갈증에 목말랐다. 어느 날 교수님이 신학대학원을 소개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신부가 되려는 신학생이 가는 곳이라고 여겼다. 목마른 갈증에 물을 만난 듯 정신이 번쩍하고 그런 길도 있구나 싶었다.
다음 학기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야간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성경 전반에 걸쳐 흐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교회사, 교회법, 그리스도론, 교수법, 영성 신학, 윤리신학, 전례학 등을 공부했다. 2년 동안 과제 발표, 레포트 제출, 시험 등 어려움을 겪으며 매진하여 학위를 받았으며 ‘선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하여 예비 신자 교리에 봉사할 수 있었다.
또 성령께서는 순례의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 이스라엘을 순례했다. 성경의 말씀과 궁금했던 의문점이 풀렸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길인 터키와 그리스를 다녀왔다. 성모님의 최초 발현지인 과달루페를 순례하면서 신앙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말씀과 순례를 통해 신앙의 펜을 허락하셨다. 맏배, 사랑의 중력. 신앙의 나이테, 다림줄 등을 출간하는 영광을 입었으며 책을 통해 하느님을 알리고 전하는 ‘문서 선교’를 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수련과 시련을 통해 합당한 일을 감당하도록 하심을 깨닫게 되었다.
2011년 또 시련이 찾아왔다. 어느 날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역시 암이라고 했다. 수술 일자를 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고민과 번뇌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건강을 자신했는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인들이 내가 암에 걸린 소식을 알면 얼마나 조롱하고 비웃을까 하는 걱정이 더 견딜 수 없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받았다. 얼마가 흘렀던가 마취에서 어렴풋이 깨어났다. 개복수술을 했으니 살을 에는 듯한 진통이 왔다. 무통제를 달고 있었으나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3일이 지나니까 고통이 수그러들었고 견디어 낼만 했다. 일주일이 지나 주치의가 와서 다른 곳으로 전혀 전이되지 않았으니 퇴원하라고 했다.
집에 와서 식사가 문제였다. 많이 먹지도 못할 뿐 아니라 기름진 음식은 금물이었다. 낮에는 걷기를 조금씩 늘려가면서 했더니 한 달이 지나서는 꽤 멀리 걸을 수 있었다. 가끔 바깥 음식을 먹으면 소화하지 못하고 바로 밑으로 내려보냈다.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 또한 고통과 시련을 통해 성령께서 어떤 일을 시키지 않을까 싶었다.
제7부
◆ 봉사의 길
2016년 어느 날 고인이 되신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께서 부르셨다. 왜 부르신지 영문도 모르고 갔다. 당신께서 세우신 한국여기회의 회지인 ‘여기애인’(如己愛人)의 편집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모자라는 것은 성령께서 채워주시리라 믿고 ‘예’하고 응답했다. 한국여기회는 일본의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박애 정신과 반핵 반전의 평화를 부르짖으며 이웃사랑을 실천한 분이다. 그분의 정신을 우리도 실천해보자고 세우신 봉사단체이다.
회지에 담을 내용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찾아 대담하여 회원에게 알리는 일과 특별기고를 담기도 했다. 또 신앙 체험 수기를 실었다. 원고를 모집하는데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열 명에게 원고 청탁을 해도 한두 편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교구 주보에도 원고모집 홍보를 내었지만 겨우 한두 편에 그쳤다. 더군다나 코로나로 중고교생의 독후감 모집이 없으니까 회지의 면수를 채우는데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결간(缺刊)하지 않고 제때 나왔으니 성령의 도우심이었다.
또 성령께서 은총을 주셨다. 본당의 예비 신자 교리를 담당하게 하셨다. 예비 신자들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리 반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모자간에 함께 온 이도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스스로 성당의 문턱을 넘고 배우러 왔다. 남편이 얼마 전에 대세를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본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는데 정말 엄숙하고 거룩해 보였으며 성당에 다닐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예비 신자들도 열성적으로 교리에 임하고 있으며 나도 신이 나고 기쁘게 봉사하고 있다.
선교는 거리에 나가 외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말씀으로 복음화되어야 한다. 복음화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갖추어 선교의 대상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들은 신앙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성령의 감화를 받아 우리 안의 교회로 이끌리어 오게 된다. 이웃에게 신앙으로 살아가는 참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의 발길이 교회를 찾아오도록 말이다.
나는 레지오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레지오는 사회복지법인 성모 자애원 소속 용평마을에서 단원들이 일손 돕기를 하며 봉사하고 있다. 주변 환경 정리로 제초작업을 비롯하여 과실나무 전정, 울타리 가지치기, 주방 대청소 등을 하고 있다. 단원들은 힘은 들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봉사를 받을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풋풋하고 기분이 좋아 봉사를 한 것보다 몇 배 이상의 보람과 기쁨의 열매를 얻는다.
나는 레지오 단장의 임기를 마치고 다른 레지오로 옮겼다. 그 레지오는 연세가 많으셔서 하나, 둘 빠지면서 세 사람이 활동하며 폐단 위기에 있었다. 꾸리아 단장과 의논하여 그 레지오에 입단하여 단장의 임무를 맡았다. 지금은 단원이 5명으로 단원 확보에 우선하기로 했다. 곧 세 명이 입단 후보에 올라 있으며 곧 입단하리라 본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성령께서 이끄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8부
성령꼐 청원
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 대학을 서울에서 이공 계열을 전공했다.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은 하지 않고 영국 추리 소설 번역일에 뛰어들었다. 요사이 누가 소설책을 사서 읽나. 그 일에 매달려 8여 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새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을 넘어 기업체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늘 기도에 지향을 두었다.
마침 내가 소속되어 있는 어떤 신앙공동체의 회장을 통해서 나의 청원을 들어주셨다. 회장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분은 건실한 중소기업체를 경영하는 분으로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기업을 잘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다. 아들과 동반하여 회사를 방문하라고 했다. 서울의 아들에게 연락했더니 회사에 취직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왔다.
아들과 함께 구비 서류를 갖추어 회사를 방문했다. 회장과 아들 셋이서 면접을 보고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사원 주택에 입주하는 배려까지 챙겨주었다. 벌써 5년 가까이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이제 적응도 되고 회사 일에 열중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어려운 시기에 아들의 취업을 이루게 해주셨다. 하느님은 필요한 때에 성령을 통해서 들어주심을 깨닫게 되었다.
◆ 나오며
내 삶을 돌아보니 지천명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뒤에 내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그분께 내어 맡기는 의탁으로 수동의 삶으로 변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마라톤 수련을 통해 인내와 의지력을 길렀으며 성경 공부와 성지 순례를 통해 하느님의 도구로써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주셨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 삶은 성령의 이끄심이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내 안의 성령께서 지배하심을 알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성전이라 하셨다. 그 성전에 계시는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시다.”(필리 2, 13)라는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겼다. 저녁 서산 하늘에 넘어가는 해가 곧 어둠을 몰고 오듯 내 인생도 이울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황혼의 노을도 아름답듯이 아름답게 익어가는 삶이어야 하리라. 그 삶은 비우고 비워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사랑으로 성화(聖化)하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