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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火車) 또는 화거는 이름 그대로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를 말한다
. 송나라 대 처음으로 화약이 개발되어 군사적 용도로 이용되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 문종 시기 제작된, 신기전을 다연장로켓 형태로 배치한 문종화차(文宗火車)가 제일 유명하며,
이 버전이 외국에서도 'Hwacha'라는 고유명사로 잘 알려져 있다.
로켓 화살인 신기전 그 자체를 '화차'라는 이름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향(문종)화차와 같이 신기전을 대량으로 발사하는 화차는 조선시대 중기부터 이미 쇠퇴했으며,
후기에 등장하는 화차들은 이동식 오르간 건을 수십여기 탑재하여 일종의 장갑차처럼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총이 등장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승자총통류를 40여발 장착한 변이중화차다.
즉, 조총이 등장한 이후로는 일종의 전차로서 선회했다가 후대로 가면 훨씬 발달한 유럽식 화포(홍이포)가 일반화되면서 사라진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운반시에는 말도 끌 수 있도록 손잡이가 길고 넓었다.
하지만 전투 중에는 무조건 인력으로 밀도록 되어 있었다. 지향성 화약무기를 동물에게 싣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다발화전과 함께 전투수레를 사용하는 무기 체계를 만들었다.
중국제 화약전차들은 전투 마차를 이용하여 방벽을 쌓아둔 다음 그 위에 다발화전을 쌓는 방식으로 전면전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본래부터 가벼웠던 전투수레에서 방어를 담당하는 방패판을 더욱 축소해버리고, 화약무기와 전투수레를 일체화시켜서, 보다 규격화 되고 근대적인 사격제어를 위한 포탑으로서의 기능에 많은 신경을 쏟는 화차라고 부르는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양쪽 국가에서 거의 비슷한 다발화전 무기라는 원형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발전 양식이 점차 미묘한 차이가 생겨난 이유는 지형에 따른 차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는 기병들의 기동력이 중시되었는데, 한국식의 화차는 전술적으로는 민첩하지만 장거리 이동용 수레로는 불편하고 근접전에 대한 방어력도 허약하므로 전투수레의 기본적인 사용 장소였던 평지에서는 약간 비효율적인 발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다발화전을 원조로서 운용한 중국에서는 운반성이 높은 다발화전과 수레를 따로 만들어서, 대규모 야전에서 '효율적인 저지력을 갖춘 방어선 건설' 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충족하는 수레의 효율성이 장착되는 화포의 신뢰성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극단적인 화포 중심으로 전투수레는 화포를 보조하기 위하여 기계적인 설계를 중시한 형태가 나타난 것은 양 국가의 방어 철학에서 그 원인이 있었다.
한반도의 국가들은 적과 아예 근접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겠다는 전투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군대가 산성 바깥에서는 잘 싸우지 않는 수비적인 군대였기에, 저격수와 곡사포 같은 초장거리 무기를 더욱 발전시켜서 적들과는 아예 얼굴을 보지도 않는 '비대면 원거리 살상무기'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에서는 평지에서의 바리케이드 건설이라는 전투수레의 본래의 목적은 '수비적인 한반도 지형'에 맡겨버리고 화약수레는 철저한 화포 관리용 포탑으로서의 기능만을 더욱 발전시키는 방향성이 나타나면서 한반도의 화차라는 개념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화차라는 명칭의 원조 논쟁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아있는 가화전차를 근거로, 한국이 이를 베껴다 만든 것이 화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화전차는 다발화전과 백자총통을 수레에 싣고 정면에서 싸우는 야전용 전차였다.
따라서 다연장 폭발 로켓의 대규모 발사를 제어하는 곡사포 시스템으로서 발전한 조선의 화거류 병기와는 기초개념이 살짝 다르다.
사료에서 가화전차의 등장은 1403년 발간된 《화룡경》이라는 책에 나오지만, 문제는 이게 위서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가정제 말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본문 내용에서도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이 나와 신용할 수 없다
더욱이 화룡경에는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는 중국 문헌은 <무비지>인데, 무비지는 1621년 만들어진 책이고, 여기 나오는 가화전차와 화룡경에 나오는 가화전차가 같다는 증거는 없다.
이향 화차와의 연관성은 더욱 더 입증할 수가 없다.
무비지에 실린 신화전병(위)와 화궤공적차(아래). 둘다 화차보다 문헌에 등장시기가 늦으며,
인지도도 낮아 한때 구글에서조차 자료를 찾기 힘들었지만 한국 영화 신기전으로 한국, 중국 간 논란이 붙으면서부터는 검색이 좀 낫다.
더욱이 단순히 문헌에 나오는 화기로서의 추측이 가능한 언급만을 따져도 이것도 한국의 화차가 앞선다.
왜냐하면 고려 말 권근이 쓴 최무선을 찬양하는 시에 화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찬양하는 진포대첩은 1380년 벌어진 전투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다만 위의 사료에서도 조선식 화차가 발사화기로서 확실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후 최무선의 아들이 개발한 조선 태종 시대의 화차는 문종화차와 흡사한 사격과 기동성을 중시한 성향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설계도와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동식 + 다연장 + 곡사포 형식의 로켓은 이향(문종)화차가 최초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 영락제의 화차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성종실록에만 한 번 나오며 그 이전이나 이후의 실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종 54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4월 18일(병신) 1번째기사 신숙주가 양계의 여러 진의 방비책 등에 관해서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領事) 홍윤성(洪允成)이 아뢰기를,“건주위(建州衛)의 적이 두 번씩 침입하였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또 침입해 올 형세이며, 따라서 금년의 방비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진년5120) 에 신숙주(申叔舟)를 원수(元帥)로 삼아 야인(野人)을 토벌하였는데, 오랑캐들이 이에 보복하고자 근년에 노략질이 잦고, 기어이 이득을 얻으려고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영사(領事)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세종께서 명나라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야인(野人)을 정벌하다가 포위되었으나 화차(火車)로써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 마침내 화차를 만들어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었는데, 지금은 폐기되고 정비되지 않아 유사시(有事時)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기시(軍器寺)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여 양계(兩界)의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고 항상 훈련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대 병가(兵家)들의 공격용 무기와 수비용 무기에 각각 그 방략이 있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의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전(史傳)을 널리 고증하여 아뢰게 하고, 무사(武士)로 하여금 각 진(陣)의 공격하고 수비하고 전투하고 행군하는 방책을 채택하여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세종실록에는 영락제의 화차에 관한 기록이 없고, 위의 기사는 중국의 화차를 들여왔다는 기록이 아니라 화차의 유용함이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즉, 중국제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화차라는 대륙의 개념에 관한 논설에 가깝다.
가장 먼저 등장한 화차(火車)의 기록은 중국에 있다. 송나라 때 기록에도 화차는 나온다.
근데 아래와 같이 화롯불 화차다.
보다시피 우리나라처럼 포탑의 기능을 강조한 전차가 아니라, 기름 가마와 간이 부뚜막을 수레에 장착해 적 성문을 파괴하는 데 쓰는 무기다. 이 화차는 수호지의 108 호걸 중에서 한명이자 지살성의 신화장군 위정국이 자주 쓰는 무기다.
중국화차와 이향화차의 차이
조선의 화차는 대규모 발사제어에 중점을 둔 병기이다. 대체로 조선식 화차의 특징이나 상징성이라면 대규모 발사제어 장치를 다연장 로켓에 처음으로 도입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중국식 전차 형태의 화차를 자주 만들었는데, 조선중기 이후 전차운용을 보여주는 마병배차도를 보면, 일종의 이동식 벙커 역할을 하여 불랑기포와 조총 등을 구멍으로 쏠 수 있다. 하지만 화포를 대동할 수 있는 이동식 '파이어베이스'에 가까운 물건으로서, 발사제어를 위한 병기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화차는 각국에서 전투용 수레의 운용법 만큼 유효한 차이가 있다. 중국식 화차는 화약 시대 이전부터 사용한 전투수레에 가깝다. 또, 야전에서 사용하는 돌격형 전차로서의 특징이 강하다. 전투 마차에 다발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들을 싣어서, 되도록이면 야전에서 사용하는 전투마차와 큰 차이가 없이 사용했던 것이 중국의 화차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화차는 처음부터 화약무기와 수레를 일체화시키고 조금 더 근대적인 운용이념을 가진 병기로서 발달했다. 덕분에 문종화차처럼 각도제어와 화력을 중시하는 순수한 발사제어 도구, 혹은 사방을 막는 튼튼한 벽을 세워서 군인들이 들락거리며 거점에서 성채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동식 벙커 로서 조금 더 좁은 지형에 알맞게 형태가 세분화 되는 화차들이 발달했던 것이다.
화차는 화약무기를 싣은 수레를 뜻하는 단어로서, 이러한 개념 자체가 중국에서 먼저 탄생했다는 주장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에 가깝다. 하지만 조선시기의 화차는 독자적인 규격을 지녔으며, 중국식 돌격 전차보다는 2가지 계통으로 발달했다. 즉, 문종화차와 그 설계를 이어받은 한국식 화차들이 지니는 특성까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말은 비약이 강하다.
한국과 중국의 화차는 각국의 지형에서 차이가 생겨난 아이디어와 유래는 같지만 각국의 구체적인 사용법에 따라서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었던 전차+화포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류화차의 종류
한반도의 화차, 화거는 다양한 화약무기를 전차에 싣은 형태의 무기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또한, 현대의 무기체계들과 비교하자면, 중세시대에 사용되었던 기계식 장갑차와 야전포의 중간적인 무기라고 볼수있었다.
화포를 싣는 전차의 차체는 크게 나누면 경량수레 형태, 장갑판을 장착하여 튼튼한 탱크처럼 사용하는 형태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산악 지형이 많았으므로 무거운 장갑판은 필요에 따라서 분리하고 장착하는 모듈 형식이 많았으며, 처음부터 중세시대의 탱크를 목적으로 설계한 특수한 화차가 아니라면 같은 화차라도 실전에서는 방패판을 제거해야 조선의 산악지형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화약 전차를 평야 지형에서 바리케이드로서 사용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었던 중국과는 달리, 산악지형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조선에서는 화약 전차들을 순수한 기계식 야전포로서 주로 발전시켜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싣는 무기에 따라서는 신기전을 사용하는 전술 미사일 발사대 형대, 두번째로는 다연발 총통을 부착하는 일종의 기관총 형태가 있었다. 중세 시대의 다연장 전술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차라는 개성 때문인지 대중매체에는 신기전 화차가 주로 등장하지만, 신기전이라는 무기는 오늘날의 전술 미사일에 해당하는 비싼 중장거리 무기였으므로 화약 사용량이 극심하여, 미사일 전력이 많이 필요했던 조선 초기 이후에는 사용량이 적었다. 자세한 것은 신기전 항목을 참조하자.[13] 실전에서는, 중세시대의 기관총이라고 볼 수 있는 다연발 총통을 사용하는 오르간 건을 장착하여 적의 보병들을 격파할 수 있는 화차들이 더 많이 쓰였다.[14]
최무선 화차
위 권근의 시에 등장하는 화차이다. 최무선이 화통도감 설립 후 만들었다. 화기 목록에는 없고 권근의 시에 그 존재만 등장하기 때문에 상세한 정보는 아직 불명이다. 하지만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는 중국식 다발화전도 널리 사용되었던 기록이 있으므로 한국식 화차의 특징이 나타난 증거사료는 이후부터 라고 보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조선 태종화차
이향(문종)화차
군기감(軍器監)에 명하여 화포(火砲)를 쏘게 하고 추인(芻人)[15] 을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방패를 가지게 하여 그것을 7, 80보(步) 밖에 세워 두고, 화차(火車)의 화살을 쏘아서 추인과 방패를 모두 관통하였다. 임금이 내금위(內禁衛)의 활을 잘 쏘는 자 5인에게도 또한 편전(片箭)을 가지고 이를 쏘게 하여 그 우열(優劣)을 비교하니, 화차(火車) 때와 같지 아니하였다. -문종실록 5권, 문종 1년 1월 16일 병진 1번째기사
국조오례의서례의 화차, 위가 수레이고 왼쪽 아래가 신기전화차용 신기전기, 오른쪽 아래가 총통화차용 총통기의 모습이다. 기록상 전해지는 화차 중 세번째의 화차로 1474년(성종 5년)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서례 병기도설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식 화차의 대표격이다. 외국에서도 화차를 알면 보통 이걸 안다고 생각해도 된다. 문종이 직접 설계해서 어명을 내려 동생인 임영대군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사전총통(한번에 4발의 화살(四箭)을 쏘는 총통) 50개틀, 중신기전 100개틀과 수레로 구성되어 있고, 탈착식으로 용도를 바꿀 수 있다.[16] 한 마디로 시대를 초월한 모듈화에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전 세계에서 제작 설계도가 남아있는 다연장 로켓병기[17]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 화차의 운용법은 문종이 직접 고안했다. 평지에서는 2명, 오르막 길에서는 4명이 운영하고, 장전에서 발사 과정 그리고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무섭게도 개발이 끝나서 양산 및 전국 실전배치 하는데까지 1년도 안 걸렸다.
문종화차는 후기 성종임금 시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만큼 큰 활약을 하는데,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면,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격을 해서 타격을 줄 경우 당시로써는 다연장 로켓급이었고, 설령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그 소리와 화력 때문에 맞은 적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급급했다. 특히 대신기전의 경우에는 직접 타격하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었으나, 직접 타격 용도로도 사용한 기록이 꽤 보인다!
본래 문헌과 설계도만 남아있던 것을 채연석 박사가 사료를 연구하여 다시 제작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것이다.[18] 특이점으론 직사모드와 장거리 사격을 위한 고각모드 두가지로 발사각을 고정해서 탄도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운용편의를 봐준 점이다.(고각으로 설치하면 최적의 사거리가 나온다는 40~45도를 정확하게 맞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때 아래의 융원필비 화차나 위 영화 신기전의 화차처럼 좌우에 방패판을 달아 방호력을 높이고 신기전 발사구멍에 철을 씌워 내화성을 높이자는 건의가 올라와 실행되었으나, 조작의 불편함을 이유로 방패는 제거되었다.
문종화차의 총통기에 4전총통 50개틀 대신 주자총통(宙字銃筒) 50개틀을 설치한 것이다. 성종 21년인 1490년에 개발되었으며 주자총통은 세종대왕 때 개발된 삼총통(三銃筒)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아래에 나오는 문종화차들은 성종대에 새로 개발된 주자총통부착화차를 의미한다.
성종 9년 8월 10일(기해) 3번째기사에서는 홍귀달에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물어보는데서 화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시애의 반군이 화차를 보자마자 도망쳤다고 하고 있으며, 성종 23년 5월 25일(갑오) 2번째기사에서도 이극균이 “본도(本道)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화차(火車)가 겨우 4백여 대뿐입니다.
만약 제진(諸鎭)에다가 각각 1백 대씩 설치한다면 어찌 유익(有益)함이 없겠습니까? 화차가 한 번 출동하면 적(賊)이 모두 피해서 도망하니, 그것을 믿고서 적을 방어하고자 할 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해 화차의 위력을 실감할 수가 있다.
문종화차의 개발 덕분에 4군6진에서 힘들게 보초생활하던 병사들의 수도 줄일 수 있었고임진왜란에서도 중요하게 쓰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엔 중신기전을 주로 쓰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엔 승자총통, 조총을 주로 사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