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33
5월22일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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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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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0e1op7Knfg (류성태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490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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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네 인생사 그 한 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시는 성령>
예수님의 유언(遺言)에 따르면, 지금 우리 시대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떠나가신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가득 찬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협력자이자 우리들의 보호자, 당신과 일심동체이자 분신(分身), 당신의 대체자이자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성령을 선물로 남겨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을 파고드십니다. 때로 구차스럽고, 때로 옹색한 우리네 인생사, 그 한 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때로 자연 안에, 때로 한 인간 존재 안에, 때로 매일 발생하는 사건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고맙게도 너무도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수분을 섭취한 초목들의 얼굴이 어제와는 달리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만난 꽃과 나무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제게 인사를 건넵니다.
천천히 바라보니 성령께서는 자연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셨습니다. 성령의 흔적과 그분의 손길, 성령의 움직임과 역사하심을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좀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좀 더 마음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육으로만, 세상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영으로, 불변의 진리로 되돌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성령은 조금은 알쏭달쏭한 분이십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분, 아니 계시는 듯, 그러나 분명코 계시는 분, 안개 속에 계시는 분, 마치도 구름 같고 바람 같으신 분입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쌩’, ‘쓱’ 하고 신속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감지하고, 그분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온몸으로 느끼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 한 송이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안에 하느님 아버지 사랑의 손길이 담겨있으니, 성령께서 그 안에 현존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이웃들의 작은 음성이나 작은 몸짓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 속에,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자극과 예언자적 목소리 속에 성령께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계십니다. 우리 내면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 측은지심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픈 마음, 다시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 이웃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 불의 앞에 정의로움이 용솟음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언젠가 형제들과 함께 큰 축제를 성공리에 마치고 회식을 할 때였습니다. 삼겹살을 원 없이 구워 먹었습니다. 어디 삼겹살만 먹었겠습니까? 기분도 좋겠다, 소맥을 제조해서 셀 수도 없는 잔을 비웠습니다.
거기다 철판 비빔밥까지 비벼서, 몇 공기나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술기운에 정신도 몽롱하고, 그저 드러누울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기도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움직임도 뒷전이었습니다. 영적인 생각들도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분의 인도 아래 살고 싶다면 어느 정도의 결핍이 필요합니다. 춥고 배고픔, 긴장과 자극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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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9CFJj868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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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믿는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동의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그 지킬 힘이 되실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보다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고 남편에게 가서 돈을 받아서 자녀를 위해 먹고 살 걱정 없이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은 이 평화 속에서 어머니의 뜻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라는 큰 그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가 말씀과 성령을 주어야 할 자녀들을 위해 그것을 주실 분을 만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줄 모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더 위대해서 하느님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평소에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내가 그분께 좌지우지하시게 했다면 언제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아직 기도할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가 된 것이 하느님 탓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도 하지 않는 신앙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키웠다면 나는 그분께 무언가를 청해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 사랑도 믿지 않고 하느님 능력도 믿지 않고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음도 믿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믿으며 그분께 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이 시대는 모험의 시대로 수많은 이들이 바다와 북극과 남극, 혹은 높은 산을 정복하려던 영웅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인듀어런스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서로를 위해 주고 각자의 일을 착실히 수행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해역에 서식하는 바다코끼리에서 따온 지명)에 도착한 처지에 그것은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우스조지아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 중 선원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섀클턴은 한 달 후에도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섬을 탈출하라고 명령합니다. 비틀거리는 배에 부딪힌 파도는 곧바로 얼어버렸고, 9일째가 되면서 커드 호의 움직임이 점점 위험스러워졌습니다. 나무와 돛, 줄이 꽁꽁 얼어붙은 채 간신히 물에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섀클턴은 고통스러웠던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원들 모두가 뼛속까지 젖고 얼었다. 7개월 동안 벗지 않은 젖은 옷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젖은 발과 다리는 하얗게 변한 채 심하게 부풀었고, 손은 때와 고래 기름, 동상, 스토브의 연기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손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전신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1916년 5월 (천신만고 끝에 조지아 섬에 도착한 직후) 섀클턴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와 다른 두 사람이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스트롬니스 포경기지까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천m, 험한 바위와 위험한 크레바스가 곳곳에 있고 대부분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몹시 위험했습니다. 아무도 넘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산이었고 당연히 지도도 없었습니다.
“섬의 지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우스조지아의 해안에서 안쪽으로 단 1km라도 들어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섀클턴)
장장 36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산을 넘습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구조선을 얻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편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탐험의 성공보다도 더 큰 성공이었습니다. 인간성의 위대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섀클턴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분명 더 위대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섀클턴처럼 십자가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께서 주신 희망입니다.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믿음도 주님께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국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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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령은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여줄 것이다>
오늘도 지난 주일의 천상 예루살렘의 이야기(묵시 21,1-5)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원은 구약과 신약 전체의 백성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세속도시’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성스러움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깊이 들어와 계시어 그들과 하나를 이루고 계심을 뜻한다.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 정화에서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 그러므로 ‘하느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며 또한 만물이 하느님께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공통 사제직이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가 모두 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천상 예루살렘은 성전이 필요 없듯이 빛이 필요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이다(묵시 21,23).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예수께서는 당신 빛으로 선택된 이들을 감싸시며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2코린 3,18). 그렇게 되면 구원된 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드러나 보이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 요한 14,23-29: 성령은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여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오늘의 교회 역시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가 모두 ‘종말론적 교회’를 예견할 수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다.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은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일어나도록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 거처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3-24절)
하느님의 거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예루살렘으로 기어오르지 않으면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갈라지고, 그리하여 참된 목적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대신하지 못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탓이다. 이제 또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23절), 즉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16 참조).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과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모든 사람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1코린 2,12 참조)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수께서 약속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5-26절) 즉 성령은 모든 선물의 ‘완성’과 같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욱 철저하게 들어가게 하신다. 반복적인 되새김만이 아니라 깊이 있게 함으로써 구원적 체험을 항상 새롭게 하는 창조적 역할을 한다. 시대는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기에 충실해야 한다. 계속된 새로움 속에서의 충실성,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주시는 기적이다. 이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이러한 모습이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교회에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성령께서 주인공으로 개입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사랑의 충실성과 새로움의 지침이 제시된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선교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하신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사도 15,28-29).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지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에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께서 비추어주시고 굳게 일치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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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3ㄴ-24)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이 질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부활 후의 상황에 대한 사도들과 신자들의 의문이 반영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증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사도들을 포함해서 오백 명이 넘는데(1코린 15,5-8), 그들은 모두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인이 아니었는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아마도 바오로 사도가 유일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 나를 알아보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인데,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없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신앙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거나 부정합니다.> “나를 사랑하면”은 “나를 믿고 사랑하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입니다.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만 차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에게만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현존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에게 가서”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다가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신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딘가에 계시다가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지킬 것이다.’는 ‘지켜라.’로, ‘살 것이다.’는 ‘살아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는 “내가 부활해서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어서 예수님의 현존을 모르거나 부정하는데,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어떤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의 현존 체험’을 하기는커녕 ‘예수님의 부재’만 느낄 때도 있고,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또 간절히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 신앙에서 힘을 얻지 못하고 점점 지치게 될 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몹시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그래도 믿어라.”, 또는 “그래도 기도하여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성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바오로 사도의 말도 결국 믿음 갖고 기도하라는 말인데, 믿음과 기도만 강조하는 것이 너무 상투적인 것 같고 식상하더라도, 사실 ‘믿음’과 ‘기도’만이 유일한 정답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앞에서 인용한 바오로 사도의 말에 있는,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에 연결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 평화를 얻게 됩니다. (‘기도하고 나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동안’입니다.) 눈앞에 있는 어려움들이 금방 사라지지 않더라도, 기도하면서 얻는 평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 어려움들에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고, 그 어려움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일시적인 진통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그 평화의 힘을 받아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두려움과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말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체험’입니다.> 그 체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같은 상황에 처합니다. 실망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바로 옆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걷고 계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두 제자는 어떻게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실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시긴 했지만, 성경 말씀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낯선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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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금은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주로 ‘지도’를 보았습니다. 자동차에는 전국지도가 책으로 한 권씩 있었습니다. 차량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길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공위성에서 위치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길을 찾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지도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줍니다. 실시간으로 도착시간을 알려줍니다. 교통경찰이 있는 것도, 속도위반을 측정하는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알려줍니다. 지금보다 더 빠른 길을 찾아서 알려줍니다. 지금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10년 이내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원하는 목적지만 입력하면 자동차가 알아서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가는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교의 전통과 계명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셨고,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을 준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초대교회는 몇 가지 문제를 만났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전통과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은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 때문에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생소하면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 나라, 복음의 기쁨은 할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례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 지도에서 내비게이션으로 발전하였듯이 초대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에서 자유로워진 초대교회는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공무원으로 있다가, 시골로 가서 ‘洗心院’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서 지내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열쇠를 100개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원하면 하루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집입니다. 물론 비용은 받지 않았습니다. 세심원을 이용하는 비용이 한 달이면 300,000원 정도 든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비용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집주인이 매일 하려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나무를 보면서 본인도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보리를 심는다고 합니다. 보리는 추운 겨울에도 파란 싹이 돋아난다고 합니다. 4보리를 보면서 삶의 시련이 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틈이 나면 집 주위에 ‘차’를 심는다고 합니다. 차의 향은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차가 자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 차를 마시면서 정신을 맑게 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사랑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재생의 삶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교리와 교훈으로 젖을 먹고 생명의 빵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는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되며 지혜와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물은 하느님 나라의 복된 생활입니다. 우리가 거처할 곳은 하느님 나라이며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끝 날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 날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뽑히는 이들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당당하게 거슬러 가는 사람, 그 세상의 흐름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맞서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협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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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지현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집>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그리고 그곳에서 다양한 생물과 인간이 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집을 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원죄 이후, 자연은 야생으로 변했습니다. 사람은 똑똑해졌지만, 알몸의 나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과 환경에 손을 대어 집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아갑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집을 지어주셨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도 역시 집을 짓습니다.
살기 위한 집, 일하기 위한 집, 물건을 모아둘 집, 놀기 위한 집,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집도 있습니다. 절, 사원, 예배당과 성당. 이 집은 하느님이 사시도록 사람이 지어드린 집이 아닙니다. 그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집일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당신이 직접 이 땅 위에 집을 지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이 성전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으며 점점 더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갑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우리를 성전으로 지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는 것만으로는, 우리 힘만으로는 성전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집,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라는 성전.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예쁜 집으로 완성되길 희망하지만, 지금 우리는 큰 위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험과 기후 위기. 1년 전 교황님은 지속 가능한 세계로 나아가는 7년 여정을 시작하자고 요청하셨고, 이에 모든 교회는 응답하며 함께 동참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어디까지 와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예쁜 집이 완성되기를 희망하며, 여러분도 함께 이 여정에 참여해 주시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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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종민 야누아리오 신부님]
“저희를 버려두지 마소서.”
지난 2020년 3월 27일 저녁,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텅 빈 베드로 광장에서 홀로 기도하셨다.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는 인류와 이에 맞서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였다. 이어서 교황님은 모든 성사가 멈춘 세계 교회를 향해서 성체강복을 거행하시고, 전대사를 베푸셨다.
+희망의 노래.
같은 해 4월, 한 테너가 노쇠한 몸을 이끌고 아무도 없는 밀라노 대성당, 제대 뒤편에 섰다. 그의 전성기 노래를 부르며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안드레아 보첼리다. 그는 이어서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며 “아베마리아”를 봉헌한다. 그는 앞을 볼수 없다. 그러나 천천히 그 몸을 이끌고 성당 광장에 섰다. 역시 아무도 없는 텅 빈 광장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노래한다. 화면은 모든 것이 멈춘 유럽의 텅 빈 거리를 비춘다.
+보호자 성령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 하느님을 알려 주신다. 제자들을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알고 계신다. 당신의 빈자리를 채워주실 분이다. 주님은 “평화”를 약속하신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경험하지 못한 평화다. 우리도 그 평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신앙의 길에서 느낄 뿐이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신앙, 우리 삶 모두가 불확실하다. 성사가 멈추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지냈고, 종식될 기미가 없어 보인 감염병은 이제 우리 일상이 되었다. 확실한 그 무엇이 없는 코로나 이후의 시간 앞에 주님은 보호자 성령 하느님을 깨닫게 하신다. 늘 계신 그분을 일깨워주신다. 불확실한 현실에 두려워하지 않도록 보호자 성령 하느님의 현존을 전해주신다. 그 깨달음은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한다. 불안하지만 희망을 향해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버려두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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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님(가돌리평화방송 평화신문 보도주간)]
<그때 그 순간 예수님 마음>
인간이 느끼는 스트레스에서 가장 강한 것은 무엇일까요? 학생들에게는 시험이나 리포트, 일을 하는 분에게는 업무에서 종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주부님들에게는 자녀들을 잘 길러야 한다는 것이 늘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린데 인간이 느끼는 가장큰 강도의 스트레스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고 합니다. 아쉽고 그리운 감정, . 보고 싶고 한께하고 싶은 마음에 들이닥친 이별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이 임박한 때. 사도들과 이별 인사를 나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참으로 특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양성 받는 제자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느님 말씀을 함께 전했던 전도 여행의 동반자였습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예수님 곁에 머물렀고 함께 고생하고 기뻐했습니다. 사실, 이런 제자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적인 아쉬움 말고도 '과연 이 제자들이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며 불안하고 걱정도 되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들의 마음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직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기에, 헤어질 것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홀로 이별을 준비하는 예수님 마음은 더욱 쓸쓸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속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하늘나라에 대해 더욱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주시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누구는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겠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머무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이들을 도와줄 보호자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회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회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부활 제6주일 수난 전에 남기신 예수님 말씀을 다시 묵상하니 이별 이후를 위해 마련해두신 주님 마음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성자의 가르침을 지킬 수 있도록, 그래서 성부께서 내 마음에 머무시도록, 이제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다가오는 한 주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고단한 내 삶에 희망을 비춰주시고 평화가 되어주시길 바라며 사도들을 향했던 주님의 마음을 되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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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다음 앞에 나>
요한 14,23ㄴ-29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 다음 앞에 나>
내가 가고 난 후에
내가 남겨놓을 무언가
나보다 더 함께하고픈 것이기를
나보다 더 기억하고픈 것이기를
나보다 더 남겨놓고픈 것이기를
그리 바랄 수 있도록
그럴 수 있도록
지금 나는 함께하고픈 사람인가
지금 나는 기억하고픈 사람인가
지금 나는 남겨놓고픈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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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산다면,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와서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상의 존재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께서 이 지상에 현존하시는 하나의 장소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그런데 오늘 제2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로운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어린양께서 친히 그 도성의 성전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복음과 연결시켜 본다면, 참된 성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온 존재를 또 하나의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시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지만 무한한 영광을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되는 유일한 전제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유일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그러므로 사랑하고 또 사랑합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성전이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손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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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사랑의 척도!>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많이 듣고 쓰는 언어는 아마도 사랑의 언어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제일 지켜지지 않는 언어, 삶으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언어 역시 사랑의 언어일 것입니다.
이 어려운 사랑의 핵심인 황금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나는 정말로 사랑하는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너를 정말로 사랑하는가?
내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을 지킬 것이고, 내가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면 너의 말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과 너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 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님과 너의 말을 듣고 지키는 것이
바로 '사랑의 척도'입니다.
성령강림대축일(6.5)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령강림대축일에 뽑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내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내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보호자이신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을 지키지 않고, 너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성령'이 내 마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합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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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평화를 갈망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기를 희망하고 그날을 새로운 생일로 기억하며 그로 인하여 내적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 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모두를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됩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하느님과 아들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왜 들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안에 온갖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안내되어 있고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거기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여정에서 주님의 말씀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생각해 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을 빌미로 상대의 얘기를 듣기보다 오히려 내 뜻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술에는 주세, 물에는 물세가 부과된답니다. 그런데 말을 함부로 하면 말세랍니다.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하고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집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나와 다른 그들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참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게 되면 육으로는 고달프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행하였기에 내면의 기쁨은 크고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평화를 갈망하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밖’을 지키는 데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쟁준비를 잘해야 평화가 오는 줄 압니다. 담장을 치고 감추면 평화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매스컴에 내보내지 않으면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감추고 속이는 이들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은 없습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감당하며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오히려 평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평화는‘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솟구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평화를 걷게 됩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먼저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2,14-17)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은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G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죄악으로부터 자비를 입어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피로써 이룩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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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기도'(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St. Francis of Assisi>
Prayer For Peace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어느 날 저녁 프란치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치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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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5년 전 자기 모습을 떠올린 뒤 그때 이후 생긴 변화를 종이에 써 보십시오. 다 적었으면 이제 앞으로 5년간 변하고 싶은 부분도 적어보세요.”
다 적었으면 이제 두 목록을 비교해 보십시오. 분명 5년 전의 모습에서부터 이루어진 변화가 앞으로 5년간 변하고 싶은 변화보다 훨씬 더 길고 놀라운 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행동과학자 그레이스 로던이 했던 것으로 이를 통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돌아보며 큰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다가올 5년 동안은 그리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과거 5년 동안의 변화가 있었듯이, 다가올 5년 역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단순하게 시간이 지나면 다가오고 마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이 미래 역시 나의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시간입니다. 다가올 5년의 미래, 아니 그 이상 넘어가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지금, 자기의 장애물을 하나하나 줄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림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환하게 웃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해 성령을 약속하시지요.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해 주십니다.(요한 14,26 참조)
성령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살며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삶의 기쁨이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도, 겁을 내는 것도 아닌 진짜 평화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멀리하면서,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희망을 품고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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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 축제의 삶>
-꿈, 사랑, 지혜, 평화-
요즘 아침 산책 때마다 부르는 가요와 동요를 소개합니다.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노래 부르기입니다. 요즘 자주 부르는 노래는 70년대 풍미했던 ‘아침이슬’에, 60년전 중학교 시절 참 좋아했던 ‘산너머 남촌에는’(박재란)이며 ‘바다’라는 동요입니다.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4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익는 5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것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대나”
1절도 좋지만 2절 앞부분,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 저 하늘 저 빛깔이 그리 고울까’로 시작되는 내용도 참 좋습니다. 오늘 46년전 신림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이 방문하면 작년처럼 동요를 불러준다 했습니다. 얼마전 별내본당에서 '희망의 여정' 특강시 함께 불렀던 바다라는 동요입니다. 교우들이 너무 힘차게 잘 불러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이, 꿈이 있어야 삽니다. 희망이, 꿈이 있을 때 사랑도 지질출 모르는 노력과 인내도 가능합니다. 말한마디 천량빛을 갚는다 했습니다. 어제 덕담德談후 행복했던 하루를 잊지 못합니다. 아침 식사후 동요 부르며 걷던중 배밭에 농약을 치기 위해 밥먹자 마자 나온 마르코, 아브라함 수사였습니다.
“삶자체가 강론이네요!”
얼마나 좋아하던지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정도로 환하게 웃는 마르코 수사였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순대를 만들고 오늘 아침 일찍 배밭에서 아브라함 수사와 함께 농약을 치려던 마르코 수사의 등을 살며시 두드리며 던진 덕담입니다. ‘신神의 한 수手’와 같는 여기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삶자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강론이요, 저는 다만 미사시 이들을 정리해 강론할 뿐입니다. 수사님들 삶자체의 강론이 저에게는 샘솟는 영감의 원천도 되곤 합니다. 날마다 파스카 축제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참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입니다. 신록의 아름다움에 꽃도 많고 새들도 많고 또 요즘은 빨갛게 익어가는 앵두열매들입니다. 말그대로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환경입니다. 고해苦海인생이 아니라 축제祝祭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삶은 선택選擇이요 훈련訓鍊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 축제인생을 선택하여 기쁘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절로 따라오는 치유에 건강한 삶입니다. 어떻게 파스카 축제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지 가르침을 나눕니다.
첫째, “꿈꾸십시오”
하느님의 꿈, 하늘 나라의 꿈, 파스카 축제의 꿈입니다. 이런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저절로 샘솟는 기쁨이요 알렐루야 찬미의 삶입니다.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시기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의 시기입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께 감사로 인생을 마무리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이래서 성무일도 끝무렵에 주고 받는 환호입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인 찬미와 감사의 파스카 축제의 삶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앞당겨 살아가는 이들이 정말 살 줄 아는 이들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하늘 나라의 꿈을 앞당겨 살았던 요한 사도임이 분명합니다.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하늘나라 꿈이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답습니까!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 공유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살라 주신 참 좋은 선물,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세상의 허망하게 사라질 일시적 잠정적 꿈이나 희망이 아닌 이런 궁극의 하느님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아무리 짙은 구름이 가리고 있어도 배후에 빛나는 태양과 같은 하느님 꿈을, 희망을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생생한 하느님 나라 꿈을 앞당겨 사는 이들의 삶을 정의하면 한마디로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저 역시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주님 사랑은 막연하거나 애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주님 말씀을 열렬히 좋아하고 사랑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은 주님 사랑과 직결되고 이어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된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영혼 역시 말씀을 만나야 생명과 빛으로 살아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구원의 문, 생명의 문, 행복의 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합니까?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십시오. 2년여동안 투병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약을 복용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는 분에게 어제 준 카톡 처방이 생각납니다.
“영육의 치유와 평화를 위해 두가지 처방을 추천합니다.
‘1.성사 구약부터 매일 필사하기,
2.매일 일기日記 쓰기’입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꾸준히 한결같이 기도하면서 최고最高의 명의名醫이신 주님께 모두를 의탁하시고!”
주문에 환우는 기꺼이 응답했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또한 성서 필사하듯, 일기 쓰듯, 하루하루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최고의 명의이시자 ‘힐링healing;치유’의 하느님께서 이분을 꼭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지혜로우십시오!”
지혜 역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분별의 지혜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의 지혜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지혜의 빛입니다. 무지라는 마음의 고질병에 유일한 처방이 주님 선물하시는 지혜의 명약입니다.
율법 준수의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의 처방이 정말 지혜롭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분별의 지혜라는 선물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얼마나 멋지고 절제있고 품위있는 결정적 처방인지요! 분별의 지혜의 절정입니다. 혼란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한 분별의 지혜에 안티오키아 교회 교우들은 참으로 기뻐했다 합니다.
넷째, “평화로우십시오!”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평화요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에수님은 세상을 잠시 떠나기 앞서 참 좋은 선물인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바로 이 주님의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에 오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참으로 평화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추구하지만 세상은 온통 갖가지 전쟁으로 가득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평화의 전사戰士’가 되어 하늘나라의 꿈이 실현된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진력盡力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친히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사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의 최고 명약 처방 넷의 선물이 희망, 사랑, 지혜, 평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파스카 축제의 삶을 위한 참 좋은 처방을 주시며 이대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1.꿈꾸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지혜로우십시오.
4.평화로우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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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oUt56THW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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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 28)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은총의
시간이다.
평화가
시작되는 곳에
삶의 참된
방향도 있다.
삶의 방향과
삶의 참된
목적지를
가르쳐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사랑의 삶을
기쁘게 살아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삶이다.
우리를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기쁨의
귀결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품고 품어서
사랑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날마다 구원의
이 여정을
걸어가게
하시는 참된
보호자이시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밀어 주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쏟아지는
은총의 길을
걸어 가신다.
끝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가시는
하느님이시다.
기쁨과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랑으로
끝내 승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다.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모성월의
기쁨이다.
기쁨으로
활짝 열리는
사랑의 놀라운
찬미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기쁘게 만나고
기쁘게
기도드리는
기쁨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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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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