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도전과 도박 같은 믿음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쉼은 완성이고 쉬는 날은 거룩한 날이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지어내셨을 때마다 참 좋다고 하셨다. 우리는 하느님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계획했던 일을 완성하고 잘 마무리했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성취감 그리고 이어지는 쉼과 함께 일한 친구들과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눔이 주는 달콤한 맛을 알기 때문이다. 일을 끝내지 못한 날 밤은 다음 날에 대한 이런저런 계획과 상상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지만 그날은 잘 잔다.
하늘나라가 그런 곳이다. 내가 시작한 긴 영적 순례의 최종 목적지이고, 거기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하게 쉬고 또 같은 길을 걸어온 도반들과 그간 수고하고 어려웠던 시간을 끝없이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른다는 건 이런 것이다. 놀고 먹는 게 아니라 근심 걱정 후회 계획 등 모든 걸 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주어진 이 인생의 목적은 단 하나, 하느님 안에서 쉼이다.
오늘 복음인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를 낳게 하신 예수님 이야기에서 숨은 주인공은 그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기까지 예수님을 신뢰했고 그 친구 중풍 병자를 사랑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지붕은 나뭇가지와 잎과 진흙을 발라 굳혀 만들어서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남의 집인 데다가 예수님이 그들이 바랐던 대로 그를 고쳐주지 못했다면 정말 큰 낭패였을 거다. 신앙은 도전이고 도박인가 보다.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는 무리하고 무도한 일을 하는 건 그들 계획에 없었을 거 같고, 예수님이 그 일을 안 하시거나 못하실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가는 그 중풍 병자를 보며 사람들은 놀랐지만, 그 소동을 피운 친구들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됐을 거다. 그 도전을 받아들인 보상이다.
내 믿음에는 늘 의심이 따라붙고,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도 바로 따라온다. 그래서 사람들이 윤회라는 걸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 다시 한번 더 하는 거 말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사람들의 순진한 바람일 거다. 다시 산다고 지금보다 더 나을 거 같지 않다. 그런 바람보다는 내 믿음, 도전과 도박과 같은 이 믿음을 키워나가는 게 훨씬 더 낫고 현실적이다. 신앙이 내게 내놓는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예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중풍 병자를 회복시켜 주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나를 모르지만 주님은 나를 속속들이 다 아신다. 내 과거, 내 죄들을 다 보고 기록해 두셨다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 됨됨이를 아신다는 뜻이다. 이거밖에 안 되는 나를 아신다. 그러니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잃어버린 건 되찾아 회복시켜 완성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하느님은 보시고 참 좋다고 하시며 쉬신다. 나도 그 안에서 쉰다.
예수님, 주님이 저의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희망 고문이라고도 말하는데, 주님께 대한 희망은 고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제 믿음이 어긋나지 않을 것임을 더 깊게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그 큰 손으로 저를 보호하고 아드님께로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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