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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 세계사 100장면 ‘독일 통일을 이룬 비스마르크’ 中 ―
19세기 후반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재상. 철의 재상(Eiserner Kanzler)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절묘한 외교술로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을 주도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와 일부 타협해 불만을 안정화 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독단성과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점차 인기를 잃어가다 빌헬름 2세와 갈등을 겪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쇤하우젠(Schönhausen) 출신 융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 가문은 15세기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봉해지기 전부터 거주하던 가문으로 프리드리히 대왕 치세에 비스마르크의 큰아버지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가 군공을 세워 장성으로 진급하는 등 일약 출세했다. 그러나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은 체면치레로 예비역 장교 지위만 획득한 흔한 지주였고, 전사한 에른스트와 자식이 없던 프리드리히의 토지가 가문의 상속법에 의해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친척에게 상속되는 등 오토가 장성한 시점에는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다.
반면 외가인 멩켄 가문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지식인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 외조부는 대사를 역임했으며 비스마르크의 어머니 빌헬미나 루이스 멩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와 소꿉친구로 지냈다. 원래 빌헬미나는 오토의 큰아버지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했으나,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외삼촌의 반대로 오토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렇게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였으나 우유부단(優柔不斷)해 아내에게 눌려 지냈고, 어머니는 화려하고 강단(剛斷)이 있으며 사교적인 성격이였지만 가정에는 무심했다. 그와 중에 태어난 베른하르트, 오토, 말츠위나 남매는 어린 나이에 기숙사 달린 학교로 보내져 명절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한 채 갇혀 지냈다. 이때 오토는 학업에 별다른 재능이나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언어와 고전에 심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장성한 오토는 하노버의 괴팅겐에 소재한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매일을 술, 총, 주먹과 함께 보내며 걸핏하면 결투하자고 난동을 부려 주변에 악명이 자자했다. 그리고 이때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라는 자유주의자 모임에 잠깐 가입했다 탈퇴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각종 도박과 사치에 눈이 돌아 빚이 쌓이자 자퇴하고 베를린 대학교로 편입해 들어갔다.
베를린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공부에 대한 열성을 잃어 성적은 중간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다닌 기숙사에서 배운 유럽 각국의 언어와 고전, 라틴어 덕에 어떻게든 졸업할만한 성적이 나와 간신히 졸업했다. 이렇듯 오토에게 대학 시절은 혼란 그 자체였으나, 후일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 유용했던 인맥을 쌓고, 조금이나마 자유주의 물을 먹어 사고의 융통성이 생겼다.
이후 오토는 법관이 되기 위해 시험을 쳐서 법원 서기가 되었으나, 1년 정도 다니고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 생각해 퇴사하였다. 그리고는 외조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보여 외교관 시험을 보고, 합격해 외교관이 되었으나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었기에 외국이 아닌 국내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 외교관으로 발령이 난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된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 기간은 아헨에서 하게 되는데 어떤 여성과 약혼까지 했지만 빚을 지고 몇 주 동안 결근했다가 면직 처벌되었다. 하지만 외교관 시험 동기의 도움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여기에다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스위스까지 무단결근하고 넉 달 동안 여행을 떠났고 당연히 짤렸다. 그럼에도 이번에도 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 후에도 도박 빚을 많이 지는 바람에 아헨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25세 무렵 나이에 도피성으로 육군에 입대해 버린다.
육군 장교 군복을 입고 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 대학 시절 결투 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 정도였다. 병역은 외교관서 짤린 시기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소집 기간 1년을 채워야 되는데 귀찮아서 몇 달 다니다가 대충 땡땡이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훗날 독일 통일 후에 땡땡이나 치던 이 예비역 육군 소위는 ‘육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는다.
군대 생활은 프로이센 왕실의 거처 포츠담 부근의 근위 연대였는데 당연히 높으신 분들 자제들이 몰려있는 땡보직이었다. 이마저도 1년을 못 채우고 땡땡이치는데 뒤늦게 농사를 배우려고 농업 학교에 다녀서였다. 농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포메른 농장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 농장 일에 몰두했다. 이때 농업에 빠진 건 코스프레가 아니고 진짜였는데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를 주고받을 정도로 농장 일에 깊이 빠졌고, 농업학교 당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든 비료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공장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경영하여 대학 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얻은 도박 빚을 다 갚았다.
성공한 지주가 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고향 근처에 수재가 나자 제방 감독관을 탄핵하고 스스로 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무렵 막 수립된 의회에서 마침 보궐 선거 자리가 나자 본격적으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공직 생활 초기에는 튀어 보이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1848년 혁명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기 영지의 농민 40명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가서 군중 폭동을 진압하려 했다. 이후 베를린으로 잠입해서 왕실 인사들 사이를 오고가면서 역쿠데타의 주역이 되려고 했는데 이 때 오해로 오히려 빌헬름 왕자의 부인이었던 작센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에게 역적 취급을 받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수십 년 간 비스마르크를 괴롭히게 된다.
어쨌든 혁명 진압 이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부르주아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 들여 납세액에 비례한 제한 선거를 허용해서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의회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자신들의 의회마저 없애달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때 국왕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시기 전후로 비스마르크를 매우 눈여겨보았는데 혁명 후 비스마르크가 결혼을 하고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하자, 마침 우연히 그곳에 체류 중이던 국왕이 직접 비스마르크를 불러 독대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무명에 비스마르크를 일약 독일 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런 벼락출세 덕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의 예전 행적을 들어 술고래 대학생, 타락한 융커, 포메른의 돼지치기는 안 된다는 여론의 반발이 있었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조차 “한낯 예비역 육군 소위 따위에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면 곤란하다.”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 이후 1851년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複數主導權)을 주장하게 된다.
연방 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고작 담배 한 개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심지어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담배를 피워도 될 것인가’를 묻기까지 했고, 결국 바이에른 대사 카를 폰 슈렌크(Karl von Schrenck)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 작센 대표 율리우스 고틀롭 폰 노스티츠(Julius Gottlob von Nostitz)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하노버 대사가 피우는 것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 본인 말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비흡연자들까지 ‘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을 하였고, 마지막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남은 것은 단 한 명 헤센-다름슈타트 대표뿐이었다.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담배 한 개피로 주장한 것이다.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임기가 끝나고 1858년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발령받았다. 이 때 알렉산드르 2세와 차르 가족까지 몰려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기본 방침 중 하나인 대러 친선은 이 시기부터 이어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고 빌헬름 왕세자가 즉위한 후, 군비 확대와 징병제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수상에 임명된다.
프로이센 왕국 재상으로 취임하자마자 맡은 난관은 징병제 기간 연장과 육군 조직 개편이었다. 명목은 세금 내는 부르주아들이 세금 내기 싫어서 비판에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 육군 편제는 1815년 해방 전쟁 시기 편제와 동일하게 15만 명에 불과했는데, 19세기는 인구가 폭증한데다가, 1848년 혁명 진압 시 드러났듯이 군부에서 인원 부족을 호소했고, 군인을 늘릴 필요성은 부르주아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부르주아들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예비군 지휘관을 현역 프로이센 장교가 지휘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 조직이라 권위주의(權威主義)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것인데다가, 현역 장교가 유사 시 예비군을 지휘하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악용할 소지가 높아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 프로이센군에서 융커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역 장교 직위는 접근하지 못했으나 예비역 장교 직위를 일정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보상으로 하사받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것으로 여겼다. 이런 국면에서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타협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마지못한 척 다른 요구를 일부 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상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예 의회라는 제도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면서 의회 예산권은 무시하고 국가는 항시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의회의 예산 승인이 없어도 준예산으로 운영한다는 식으로 밀어 붙여 버린다.
빌헬름 1세를 도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헌법을 무시하는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딱히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가 유지되고 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가 독재를 하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트리긴 했지만… 당시 정치적 반대파인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등 가혹한 처벌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반동복고 전제 군주제 주의였으나 오히려 강압적 수단에만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중산계급의 시민)들과 맞서기 위해서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군비 확장 이후 비스마르크의 초기 외교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았다.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육군 수뇌부인 헬무트 폰 몰트케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정치 우위를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이라는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 육군 사령부들과 계속하여 갈등이 생겼으나 프로이센 육해군최고사령관인 빌헬름 1세의 신임을 이용해서 끝내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년∼1870년대의 외교 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제시한 보상책에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 채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프랑스의 기대감을 이용했고,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사건(EMS電報事件, Ems Dispatch) 등을 이용하여 국내외 여론에 불을 붙여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普佛戰爭)을 발발(1870년)시키고, 독일내에서는 물론 국제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그 결과 프랑스의 제 2제정은 패망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독일 연방에 남부 독일 국가들이 결합하여 독일제국이 성립하여 중부유럽 강대국이 탄생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사의 중요 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주눅 들지 않고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온 것도 당시의 일이다. 백년전쟁 때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독일지역의 제후령이었다. 그 후 17세기에 30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재점령했는데, 이백 년이 조금 지나 비스마르크시대인 19세기에 들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이 다시 점령해 반세기 정도 통치하다가 1차 대전의 결과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경계에 있는 이 지역에 얽힌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경제통합, 나아가 유럽연합 구상의 기원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
•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
보불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한 시대의 프레임에 인명이 부여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단, 메테르니히 체제의 사례도 있으니 유일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고, 빈 체제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적인 반동 복고주의적 가치관과는 별개로 재상으로서 활동한 공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비스마르크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을 멀리하는 황제에게 간언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하는 등, 계속 업무를 유지했으면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뛰어난 외교관이 없어도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았다. 또 비스마르크가 평생 일관되게 관철한 외교 철칙은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고 전해지며,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라는 나라의 특징상 전쟁이 발발하면 필연적으로 양면전쟁의 양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러시아 혹은 프랑스 중 한 나라와는 친하게 있을 필요가 있다.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유럽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손을 잡는 동시에 친러시아 정책을 펴면서 프랑스의 우방국이 될 만한 강대국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다.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가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독일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 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팽창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15년 후 삼국 협상이 성립되고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양면전쟁에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실제로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난제를 잘 다룬 것이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2국 동맹은 빌헬름 2세의 재보장 조약 갱신 거부로 인해 깨지게 되었고, 이에 분개한 러시아는 1892년에 프랑스와의 러불동맹을 맺어서 독일 포위를 사실상 완성시켰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독일 입장에서도 더 낫겠지만, 식민지 쟁탈전에 막차를 탔던 그때의 독일(=빌헬름 2세(독일 제국)) 입장에서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팽창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는 중립을 지켰던 과거와 다르게 아프리카와 뉴기니 그리고 산동반도를 차지하게 되니 기존 식민지를 많이 확보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고, 또한 보어인(Boer)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원을 해준 보어전쟁과 직접적으로 프랑스와 외교로 싸운 모로코 위기로 영국과 프랑스와의 극심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자 당연히 물러설리가 없는 빌헬름 2세가 해군을 팍팍 밀어주면서 영국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며,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러시아와 함께 중요했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이 성사가 되는 결과가 일어났다.
반면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로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제국 재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에게서는 국내 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에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되었을 때도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비스마르크가 실제론 영국으로 일시 망명한 빌헬름 왕세제 대신 야심가인 국왕과 왕세제의 조카를 왕위에 앉힐 음모로 여겼기에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전통적 군주제와 반동적(反動的)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즉 현재 4대 사회보험 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4대 보험 중 하나인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 사회주의 견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871년 이후 “문화 투쟁(Kulturkampf)”이라고 불리는 반가톨릭 정책을 폈는데, 비스마르크는 1873년 유명한 ‘5월법’을 공포하고 성직자의 임면(任免)감독권을 국가에 이양할 것을 규정하였다. 또한 1875년 ‘5월법’은 프로이센 내의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며 수도자들은 추방한다는 조문을 명시하고, 예외적으로 병자 간호에 종사하는 수도회만이 내각이 정한 바에 따라 지속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예수회원 추방령인 ‘예수회원법’을 발표하였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바이에른과 라인란트 등의 서남부 그리고 프로이센령 포젠의 폴란드인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고, 결국에는 사회주의의 성장이 더 위험하다고 보고 교황청과는 타협했다. 1878년 이후에는 반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회, 조직, 출판물 등을 금지했지만 사회주의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반가톨릭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사망한 뒤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성향이라서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3개월 만에 세상을 뜨면서 자리를 이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후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사회 안정을 위해서 가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화해를 모색하여 충돌이 이어졌다. 루르 광산 파업에서 비스마르크가 강경 진압을 주장한 데 반해서 빌헬름 2세가 중재를 하자고 하면서 황제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이때는 황제가 작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 증진과 가톨릭계와의 화합을 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국은 비스마르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이 총선에서 親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親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고, 이로써 그 동안의 사회주의자-가톨릭 탄압 정책에 대한 명분을 잃은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두 인물에 관한 오늘날의 상반된 평가를 생각하면 언뜻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권좌에서 밀려나자,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파들을 기만하는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죄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와 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후대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 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실의 원로가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못하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정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였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말년 황제와의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석관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고, 국장도 제안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일부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그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파파라치 사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연히 병자였던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 지저분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이후 그의 사진은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보통 널리 알려져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쉽게 말해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보불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일화처럼 그는 전장에서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 유명한 연설도 “국가의 대문제” 즉 독일 통일을 두고 한 이야기이지 일반적으로 나 불도저요! 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독일주의를 주창하며 대를 이어 알프스 이북 독일연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오스트리아, 커다란 중부유럽 통일국가를 이웃하기 싫어 간섭해 온 프랑스를 어떻게 배제하느냐 이었는데, 이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전망은 없었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는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확보에 회의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제직 시절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졌다. 정작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린 빌헬름 2세의 성과는 시원찮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충언을 마지막에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안 듣고 세계 정책을 펴며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거나 군함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열강의 어그로를 끌 만한 짓만 골라서 일으키더니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져서 자신의 왕좌와 서프로이센 및 포젠을 잃었다. 이것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발호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서 패배하는 바람에 독일은 남아 있던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대부분, 브란덴부르크 중 노이마르크 지역인 오데르-나이세 선(Oder Neisse Line) 동쪽을 영구히 폴란드 및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고, 남은 영토마저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40년 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교육을 전혀 못 받은 국민들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 결과 정치 분야에서 국민들의 수준은 이미 20년 전에 도달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 1917년, 막스 베버
앞에서의 평가처럼 비스마르크는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고수했고, 그것을 대체로 달성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해당사자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순수한 국가이성(reine staatsräson)에 따라 움직였고 따라서 그는 수시로 적과 동지를 바꿨으며 절차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했다.
비스마르크의 이런 행태는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결집시켜 정적들을 양산했고 대중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실무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28년간이나 비스마르크의 비위를 맞춰야 하다 보니 그런 생활에 넌더리를 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외무성의 정치부장인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Friedrich von Holstein)이다. 홀슈타인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전략에서 결정적인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이 연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비밀조약이 러시아에게는 많은 이득을 주지만 독일이 얻는 것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고, 또 비스마르크의 작품인 이 밀약이 갱신되면 다시 비스마르크가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다른 외무성의 관료들과 함께 빌헬름 2세를 설득했고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관용과 소통이 부족한 정치지도자가 오랫동안 독일의 정치무대를 독점하는 바람에 신흥강국 독일의 정치문화 낙후라는 결과가 만들어진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조국이 파멸한 원인에 대해 분석했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은 곱씹어 볼 만하다.
비스마르크의 업적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정신보다는 힘을 강조한 독일제국의 문화는 독일국민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으며, 정치적인 성장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독일 국민은 빌헬름 2세의 무책임한 행동과 나치즘의 범죄를 용인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철혈 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망원인도 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려 하자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린 적도 있으며 보오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가 ‘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니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설득하면 마뜩찮아 해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이후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무시하자 열 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고 하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찌라시의 보도였고, 실제로는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히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아들 뻘 나이의 빌헬름 2세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두 전쟁 모두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다음 고삐를 쥐고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실각할 때까지 그의 정책 목적은 철저히 전쟁을 막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데 있었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자신도 정치를 싫어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 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대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 젊은 시절 늪에 친구가 빠졌는데 구해줄 자신이 없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 총을 친구에게 겨누고 “너를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 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하고 말을 해서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평소에 너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내색은 못 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여기서 뒈져라!”라며 도발했다는 판본도 있다. 결국 이 말을 듣고 잔뜩 빡친 친구는 겨우 빠져나오고 나서 “구해주지는 못할망정 나더러 죽으란 거냐!”라며 비스마르크를 두들겨 팼더니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사죄하면서 말하길, “날 용서하게, 내가 겨눈 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이네”라고 하자 친구가 그제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워낙 황당한 일화라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훈육용으로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이 일화는 비스마르크 생전인 1882년에 나온 신문기사에도 이미 언급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다. 물론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조조와 원소 버전으로 동일한 이야기가 실린 것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으로 널리 퍼져있던 교훈적인 민담 내용이 비스마르크의 일화로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
•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를 친 일화 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33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시절 47세의 나이에도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 아팠을 것이다.
• 개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애견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스마르크에게 보이기 싫어 자취를 감추어버린 적이 있다.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개를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자기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을 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 자주 인용되는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가 있다. 그러나 위에 쓰여 있듯이 정작 본인의 청년시절 생활은 성실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 훈장에 관련된 일화도 유명하다.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사병이 있었다. 원수인 비스마르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때 철혈재상이네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비스마르크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우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 밖에 안 될 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그럼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 있다가 크게 껄껄 웃으면서 사병이 원하던 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탈무드에서 유머로 언급한다. 그런데 공산주의 유머에도 똑같은 일화가 있다.
• 사랑의 학교에 따르면 은퇴한 후 비스마르크가 몰트케를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가다 한 소년을 보고 태워줬다. 그 소년은 가난한 연극배우로 홀로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주머니의 돈을 드린 다음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그가 극장에 좀 늦게 가면 어떠냐고 말하자 소년이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그 소년의 모습에 감동 받은 그는 극장으로 찾아가 화환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군비(軍備)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몸에 지니는 정열을 지녀야 야 할 것이며, 또한 감히 그와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지금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군인과 정치가들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음악이란 사랑처럼 무상으로 주어져야 한다.”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할 뿐,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국회에서의 연설 중. 매우 호전적인 발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평화를 촉구하며 한 발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를 사랑하고 가꾸는 것, 그것이 정말 신을 경외하는 것이다.” - 위의 연설에 이어서. 연설의 핵심이지만 앞의 자극적인 발언에 묻혔다.
“겸손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정치가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황제께서는 매일같이 생일상을 받으려 하신다.” - 빌헬름 2세에 대해 탄식하며
“미국이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일을 할 때는 절제와 도덕성이 중요하며 특히 먹는 것과 술을 멀리해야 합니다.” - 1889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