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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은 2016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출처는
http://www.NBA.com/spurs/rasual
이곳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라슈엘 버틀러 선수는 16시즌 제가 NBA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한명이었습니다. 저도 나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와중에 버틀러 선수의 믿고 싶지 않은 부고를 접하게 되었네요. 음..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 라슈엘 버틀러 선수에게 조금이나마 감사함을 전하고자 그의 삶에 대한 기사를 번역해봤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 라슈엘 버틀러 선수를 추모하며..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서다 : 라슈엘 버틀러의 여정
라슈엘 버틀러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은 전화를 기다리며 LA의 한 체육관에서 11개월 동안 묵묵히 땀을 흘렸다.
그는 2012년 3월 토론토에서 웨이브 되었다. 친구들과 코치들은 버틀러에게 그의 커리어를 유럽에서 마무리 지으라고 얘기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NBA에서 또 다른 기회는 오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Joe Abunassar 트레이너와 묵묵히 훈련을 하며 그 전화를 기다렸다.
어느새 봄바람은 뜨거워졌고, 또 선선해졌다. 그리고 버틀러는 여전히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NBA에서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고, 그 체육관에서 함께 땀을 흘렸던 동료들은 NBA캠프 혹은 해외로 떠났다. 버틀러만이 홀로 남겨졌다.
Abunassar 트레이너는 이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린 그 광경을 보고 마치 라슈엘 버틀러 아카데미 같다며 농담을 던지곤 했어요. 대부분의 선수들이 NBA를 포기했을 때까지도 버틀러는 그 기로에서 홀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버틀러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버틀러는 그 열한 달을 ‘March to February’라고 부른다. 버틀러는 하루에 4시간(2시간은 코트에서, 남은 2시간은 코트 밖에서), 일주일에 6일을 고된 훈련을 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버틀러는 회상한다. 정말 힘들었던 시간은 밤이었다. NBA게임을 보며, 그의 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그 시간.
하지만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Abunassar 트레이너 - “전 초조해지기 시작했어요. 버틀러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됐고요. 우린 매일 아침 체육관에 갔고, 그 아침마다 이게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하며 힘들어했죠. 하지만 버틀러는 항상 그곳에 있었어요.”
버틀러는 NBA로부터 전화를 기다리는 대신, 그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NBA D리그부터 다시 시작했고, 그의 동료들은 버틀러를 ‘Grandpop’이라고 불렀다. 섬머리그에서 버틀러는 다른 섬머리그 선수들보다 10살이 많은 그런 선수였다. 인디애나와 워싱턴에서의 짧은 NBA 생활을 마친 그는 또 다시 소속팀이 없는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선택이었다.
그는 스퍼스의 연습 구장에 모습을 보였다. 아무 계약도 없었고, 당연히 보장계약도 없었다. 버틀러는 로스터의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스퍼스의 체육관으로 갔다. NBA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몸부림쳤던 그 열세번의 시즌을 보내고, 버틀러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것이다.
버틀러 - “제 안에서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게 제 목표입니다. 한 번의 그 경기가 저에게 너무 만족스러워서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제 영혼도 감정도 모두 없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느끼는게 제 목표에요.”
버틀러는 36살(2016년 당시)이고, 현역에서 14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이다. NBA에서 뛰었던 4,050명의 선수 중에서 단 375명의 선수들만이 버틀러보다 더 많이 경기에 나섰을 뿐이다. 버틀러는 793경기에서 뛰었다.
조나단 시먼스와 슛팅드릴을 진행하는 동안 버틀러는 트레이닝캠프에서 자신과 시먼스가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두 선수는 비슷한 위상의 선수였고, 스퍼스가 그들에게 준 기회에 감사했다. 물론 그 당시 버틀러는 NBA에서 17,000분을 뛰었던 선수였고, 시먼스는 한 번도 NBA 무대를 밟은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 농구는 버틀러를 7개의 주, 8개의 팀으로 옮겨다니게 했다. South Philadelphia에서 태어난 소년에게 농구는 그의 삶의 이유였다.
버틀러 - “전 정말 농구가 좋아서 이곳에 있는거에요. 농구로 인해 전 더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제 가족과 저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됐죠. 농구 경기는 제 마음의 안식처였고, 천국 같은 그런 곳입니다.”
Bob’s Grocery
Bob슈퍼는 South Philadelphia에 있었다.
그 슈퍼는 사람들이 달걀이나 빵 등을 사기 위해 들렀던 곳이었다. 그 곳의 주인인 Bobby Toomer는 그의 많은 고객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웃들이 그 물건에 지불할 여유가 없을 때는 외상으로 물건을 주었다.
1987년 버틀러의 아버지였던 Felix Cheeseborough는 길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버틀러의 할아버지인 Bobby Tommer는 버틀러가 8살 때부터 그를 키워왔다.
버틀러 - “아버지의 죽음은 아직도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어요. 전 그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제 마음 속에 있던 분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었죠.”
버틀러가 살았던 Point Breeze는 필라델피아에서 살기 힘든 곳 중 하나였다. 1987년의 그곳에는 갱들과 마약이 판쳤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Bob슈퍼에서 6블록 정도 떨어진 그곳에서 버틀러의 아버지는 명을 달리했다.
Tariq Trotter(Black Thought, 가수) - “Point Breeze는 여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에요.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그런 동네죠. 30살을 넘긴 남자들을 보는 게 어려운 그런 동네였어요.”
Black Thought로 알려진 Trotter의 부모님들 역시 모두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2살일 때, 그의 어머니는 그가 17살이었을 때 죽었다. 버틀러보다 6살 위였던 Trotter 역시 버틀러와 같이 Point Breeze에 살았다.
Trotter와 버틀러는 모두 그 동네를 빠져나와서 다행이라고 얘기한다. 버틀러의 왼쪽 어깨에는 ‘Against All Odds’(모든 역경을 딛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Trotter - “그 동네에서는 그런 폭력들에 점점 무감각해지죠. 어떤 사람이 총을 쏠 때 어떤 사람은 파티를 즐기고 있고, 당신이 농구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는 총성을 듣죠. 아주 슬픈 현실이지만, 그게 우리 현실이거든요.”
Bob슈퍼는 그런 카오스의 중심에 있었다.
버틀러의 할아버지인 Toomer는 St. Paul Chapel Baptist 교회의 부제였다. 그는 갱들에 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그 슈퍼로 불러서 직장을 얻어줬다. 또한 음식과 음료들을 소방서와 경찰서에 기부했으며, 그의 고객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버틀러 - “제 할아버지는 저에게 존경, 사랑, 충성심 그리고 근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어요. 전 일하러 가기 위해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셨던 할아버지를 항상 지켜봤죠. 그런 것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것이 그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전 모르겠네요.”
버틀러는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일을 나섰다. 왜냐하면 그의 할아버지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계단을 닦거나 인도를 치우거나 계산을 했고, 아이스크림으로 일당을 받았다. 버틀러가 게을렀다면, Toomer는 그의 손자를 더욱 강하게 키웠을 것이다.
Bob슈퍼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Donnies Carr이라는 그 지역 최고의 유소년 농구선수가 있었다. 그는 버틀러보다 2살이 위였지만, 덩치는 훨씬 컸었다고 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그에게 도전했다.
어느 날 아침 버틀러는 Carr에게 1대1을 하자고 신청했다. Carr는 첫 게임에서 32-4로 승리했다고 말한다.
Carr(현 대학 농구 코디네이터) - “전 버틀러는 제 상대도 안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버틀러는 한 번 더 도전해오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판도 첫 게임과 비슷하게 발라줬죠. 근데 버틀러가 이렇게 말했어요. ‘again’ 다섯 게임을 더 한 후에, 전 버틀러가 절대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고 도전하리라는 걸 깨달았죠.”
버틀러는 그 동네 농구장에서 가장 작고 왜소한 아이였다. 그의 고등학교 코치는 버틀러는 팔다리가 모두 짧았다고 얘기한다. 그 왜소한 소년은 픽업게임에서 종종 선택받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버틀러는 그 코트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버틀러는 그의 가치를 올려줄 하나의 스킬을 마스터하기로 결심했고, 그 스킬을 코너 점프샷으로 정했다. 게임이 한쪽 코트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버틀러는 그 반대쪽 코트에서 홀로 선택받지 못해 씩씩대며 코너샷을 던져댔다. 눈이 올 때도 버틀러는 삽을 들고 코트로 나가서 베이스라인을 따라 길을 내고, 코너에서 연습을 이어갔다.
그의 NBA 커리어 중 많은 시간동안 버틀러는 자신이 어린 시절 연습했던 그 코트로 돌아가 자선 농구 경기를 열곤 했다.
Carr - “벌써 25년 전이에요. 우린 그 코너샷을 보면서 막 웃어대곤 했죠. 매일 코너샷만 던지는 그 놈 때문에 성가시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 그 코너샷은 버틀러의 주무기입니다. 그 NBA에서도 말이죠.”
버틀러는 1964년 이래로 South Philadelphia에서 유소년 농구 리그 코치를 맡고 있던 Claude Gross의 코칭을 받으며 농구를 했다. Gross는 버틀러의 워크에틱을 보며 항상 감명 받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버틀러의 옆에 항상 서있었다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Gross - “버틀러의 할아버지는 제가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 중 가장 다이나믹한 남자였어요. 그는 항상 버틀러 곁에 있어줬죠. 그런 걸 옆에서 봐왔던 저는 더욱 버틀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요.”
버틀러는 6-7까지 자랐고, 필라델피아 Roman Catholic 고등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버틀러는 평균 26.7점 8리바운드 5어시스트 4블락을 기록했고, 필라델피아 고등학교 올해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버틀러는 Connecticut, Kentucky 그리고 Massachusetts로부터 입학제의를 받았지만 필라델피아에 남기로 결정했고, LaSalle 대학에 진학했다.
버틀러가 집 근처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플레이를 볼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Toomer는 그 고등학교의 purple-gold 티셔츠를 입은 채 버틀러의 모든 고등학교 게임들을 봤다고 한다. 버틀러는 게임 전에 꼭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고, Toomer는 게임을 마친 그의 손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Toomer는 버틀러에게 잔잔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라슈엘에게 코트에서 어떻게 경쟁해야 하는지 알려준 사람이었으며, 버틀러의 마지막 고등학교 경기가 끝나고 그의 옆에서 조용히 있어줬던 사람이었다.
Everything Will Be All Right
버틀러와 그의 할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그 pre-game 의식을 계속했다. LaSalle가 원정 경기를 했을 때도, 버틀러는 게임 전에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 간의 대화는 길지는 않았다. 버틀러가 있는 도시의 날씨는 어떤지, 버틀러가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와 같은 대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화는 버틀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이젠 집중할 때이며, 자신은 가족을 위해 뛴다는 그 사실을.
버틀러는 폰 너머로 그의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지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네 시즌 동안 LaSalle의 스타 플레이어였다. 모든 시즌동안 버틀러는 팀의 리딩 스코어러였다.
그리고 버틀러는 2002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53픽으로 마이애미에 지명됐다.
버틀러는 1라운드에 뽑히지 못해서 실망했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Toomer는 은퇴했고, Florida로 이사했다.
버틀러는 NBA에서 믿음직한 3점 슛터로 그리고 준수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의 커리어는 항상 한 끗이 부족했다. 버틀러는 마이애미에서 세 시즌을 보냈고, 그가 트레이드 되었던 그 다음시즌에 마이애미는 챔피언십을 들어올린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뉴올리언스였고, 그곳에서 크리스폴·데이빗웨스트와 함께 농구를 했다. 호넷츠는 2008시즌 프랜차이즈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승수(56승 26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스퍼스에게 패배했다. 물론 버틀러는 플레이오프에서는 inactive list에 이름을 올렸다.
버틀러는 2009년에 다시 역경을 딛고 서서, 호넷츠의 스타팅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평균 11.2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 버틀러는 LA 클리퍼스로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2010시즌 그의 평득 커리어하이인 11.9점을 기록한다. 하지만 2011시즌 클리퍼스는 크리스폴을 얻기 위해 버틀러를 웨이브 시킨다. 버틀러의 그 다음 팀은 시카고와 토론토였다. 그리고 2012년 3월 토론토는 버틀러를 웨이브한다.
“다 잘될거야.”라고 말하며 그의 할아버지는 버틀러를 위로해줬다.
버틀러는 확신이 없었다. 버틀러는 시카고와 토론토에서 자신이 세운 기록들을 보며 자책하기도 했다.
버틀러 - “웨이브된 걸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물론 당연히 저 스스로는 정말 실망을 많이 했어요. 전 드웨인 케이시와 토론토 프랜차이즈의 기대를 저버렸거든요. 이게 끝인건가 하며 힘들어했죠. 대부분의 선수들은 NBA에서 10년 이상 살아남지는 못하니까요.”
플레이오프를 목전에 두고 계속 미끄러진 버틀러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Starting From The Bottom
2012시즌의 끝에 그가 웨이브 됐을 때, 버틀러는 어떤 팀에서든 2013시즌 트레이닝캠프에 초청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어떤 팀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버틀러는 유럽에서의 오퍼들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가 대서양을 건너가는 순간 그의 NBA 커리어가 거의 끝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뭔가가 곧 일어날거라는 일말의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표류했다. 그렇게 근 1년 동안(11개월) 그는 불확실한 상태로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버틀러 - “전 드래프트 날 1라운드에 뽑히지 못한 것에 불평하곤 했어요. 하지만 리그에서 내쫓기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동안 전 좀 더 단단해졌어요.”
한 팀이 마침내 버틀러에게 연락해왔지만, 버틀러가 희망했던 오퍼는 아니었다. 심지어 버틀러가 전에 본적도 없던 그런 팀이었다. Tulsa 66ers라는 NBA D리그 팀이었고, 버틀러 자신을 다시 한 번 증명할 기회였다. 버틀러는 2002년부터 NBA에 있었고, Tulsa는 2005년에 프랜차이즈 첫 경기를 치룬 팀이었다. 버틀러는 오퍼를 받기 위해 그의 자존심을 내던져야 했다. 11개월을 Abunassar 트레이너와만 훈련을 했던 그 시절 덕분에 버틀러는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Abunassar 트레이너 - “전 100여명의 NBA 선수와 함께 훈련해왔어요. 그 중에서도 버틀러는 정말로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던 선수였어요. NBA에는 한번이라도 NBA에서 아웃되는 순간, NBA와는 영영 이별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버틀러는 그게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고요.”
버틀러는 Tulsa의 오퍼를 받아들였고, 2010시즌에 자신이 받던 샐러리의 1퍼센트의 돈도 채 받지 못했다. 10시즌 동안 전세기를 타고 다녔던 버틀러는 이제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됐다.
버틀러는 Tulsa에서 그 누구보다 돋보였으며, 66ers를 D리그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버틀러는 D리그에서 Impact Player of the Year를 수상했다. 그럼에도 버틀러에게 걸려온 유일한 전화는 게임 날마다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뿐이었다. 그렇게 버틀러는 NBA에 발도 내딛지 못한 채 2013시즌이 끝났다. 이 시점에 대해 버틀러는 자신이 아직도 NBA에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유이한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할아버지뿐이었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Tulsa에서 NBA의 이목을 충분히 끌었다고 느꼈지만, 버틀러는 여름을 또다시 불확실한 상태에서 보내게 된다. 버틀러의 다음 행선지는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버틀러는 인디애나의 섬머리그 팀과 계약을 했다. 그곳에서 버틀러는 루키들, 드래프트에 막 뽑힌 선수들 그리고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FA들과 경기를 해야 했다. 버틀러에게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만약 버틀러가 섬머리그에서 잘한다면, 버틀러가 팀의 루키들에게 그의 경험들을 잘 전수해줄 수 있다는 얘기들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섬머리그에서 존재감을 부각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그의 커리어의 마지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버틀러의 이 무브는 위험이 큰 시나리오였다.
버틀러 - “전 제 자신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저 스스로 무서웠을 때도 있었고,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죠. ‘너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그리고 혼잣말로 이제 벨은 울리지 않을거라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전 오히려 더욱 기운을 냈고, 저 자신에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되뇌였어요.”
버틀러는 2013 섬머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페이서스로부터 비보장 계약을 얻을 수 있었다. 트레이닝캠프 초청이었지만, 버틀러는 그곳에서부터 NBA로 돌아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2014시즌 버틀러의 3점 성공률은 .419(26/62)였고, 이는 10년 전인 2004시즌 이후로 커리어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버틀러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 다음 시즌 버틀러는 이 단계들을 또 다시 반복했다. 트레이닝캠프의 로스터를 받기 위해 워싱턴의 비보장 계약을 받아들였고, 2015시즌 버틀러는 75게임 동안 평균 7.7점을 득점해냈다. 이는 2010시즌 이후 그의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존월 - “버틀러는 매일매일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연습 전에도 연습이 끝나고도 버틀러는 계속 연습했고, 작은 것부터 집중했죠. 버틀러의 이런 엄청난 워크에틱은 팀의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죠. 모든 동료들은 버틀러가 잘해내길 항상 바라기도 했고요.”
버틀러는 이처럼 엄청나게 고된 과정을 두 번이나 거쳤고, 로스터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 경험들은 버틀러가 세 번째 도전을 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성장했다.
버틀러는 그의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얼마나 스퍼스에서 뛰고 싶은지에 대해 항상 말해왔다고 한다. 버틀러는 스퍼스를 NBA 최고의 조직이라고 생각했고, 자신 역시 스퍼스에 좋은 케미스트리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2015년 여름,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Becoming a Spur
버틀러는 9월 스퍼스의 open gym session에 참석하기 위해 샌안토니오로 갔다. 그리고 그 세션에서 워크아웃을 하자는 제안을 받아냈다. 세 번째 날, 스퍼스의 포포비치 코치가 그곳에 왔다.
버틀러의 커리어에서 그런 시험들이 없었다면, 팀들에게서 버려지지 않았다면, ‘March to February’ 기간에 홀로 체육관에 있지 않았다면, D리그에 가지 않았었다면, 섬머리그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NBA로 다시 가기 위한 그 힘든 여정이 없었다면, 버틀러는 로스터의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그 기회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퍼스는 버틀러와 비보장 계약을 맺고 트레이닝캠프에 초청했다. 버틀러는 2년 전에도 그리고 1년 전에도 그랬듯이 끝끝내 팀에 남을 수 있었다.
버틀러가 마침내 Spur가 됐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당연히 Bobby Toomer였다.
버틀러 - “전 수화기 너머로 그의 감정들을 기분들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절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주셨지만, 그 순간이 할아버지가 저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주셨던 시간이었습니다.”
시즌의 30게임 동안 버틀러는 평균 2.8점 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스탯들은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증명해냈던 그 선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버틀러는 그가 조나단 시먼스와 연습했을 때 옳은 선택을 했고, 그의 새로운 동료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줄 찬스를 잡은거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포포비치 - “난 올 시즌 라슈엘 버틀러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을 정말 좋아해. 걔는 몇몇 게임에서 스퍼스의 승리에 크게 일조했어. 또 버틀러는 시먼스나 앤더슨 같은 선수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고. 그러니 버틀러는 언제든 팀에 도움을 주는 그런 선수야.”
버틀러는 이런 폽의 말에 이렇게 반응했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버틀러 - “아무나 Spur가 될 수는 없어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죠. 올바른 행동들을 해야 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또 농구를 똑똑하게 그리고 이타적으로 해야 합니다. 전 항상 저지의 뒤에 있는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팀에서 뛰길 원해왔어요. 그저 팀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런거요. 전 항상 그런 환경에서 제 자신이 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왔거든요.”
버틀러가 Spur가 됨으로서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스퍼스가 코트 밖에서의 삶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버틀러는 포포비치의 퀴즈와 같은 놀이들을 즐겼고, 브루클린과의 경기에 앞서 팀과 함께 관광을 다녔던 그런 것들을 사랑했다.
Spur로서 버틀러는 샌안토니오 지역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왔다. Brooke Army Medical Center에 팀 차원에서 방문하기도 했으며, 밀스와 함께 산타클로스로 변신해서 선물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산타 버틀러는 동네 농구장에서 덩크를 뽐내기도 했다.
버틀러는 Spurs Youth 농구캠프에 참가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Sam Houston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InspireU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버틀러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했고, 그래서 Toomer나 Gross와 같은 멘토들로부터 도움이 필요했고 또 받아왔음을 얘기해주었다.
‘March to February’의 기간 동안 기회를 기다렸던 버틀러는 5월과 6월에도 농구를 할 수 있기를 바라왔다. 버틀러는 루키였던 2003시즌부터 43번의 플레이오프 게임에서 뛰었다.
버틀러 - “농구는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은 슛이 들어가지만, 그 다음날은 슛이 안들어가죠. 하지만 스퍼스에서는 이런 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얘기하죠. 노력이나 수비적인 부분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같은 그런 부분이요. 전 가족을 위해 그곳에 속하길 원했고, 이곳의 모두는 가족 같아요.”
A Mountain Of Love
추수감사절 하루 전날 새벽 5시30분. 버틀러의 폰이 울렸다. 그건 버틀러가 몇 달간 몹시 두려워했던 바로 그 전화였다.
Bobby Toomer가 여든의 나이로 명을 달리했다.
Toomer는 몇 달간 병으로 쇠약해져갔다. 버틀러가 Spur가 됐다고 그의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Toomer는 병원에 있었다.
Toomer가 명을 다할 때까지, Toomer는 매게임이 시작되기 전 잠시 동안 그의 손자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통화의 막바지에 Toomer는 버틀러에게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얘기해줬다.
버틀러 - “할아버지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시는 삶을 사셨어요.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정말 열심히 살아오셨어요.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저희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Toomer의 사망 이후 두 달 동안 경기가 있는 날은 버틀러에게 가장 힘든 날이기도 했다. 게임 전에 항상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눴던 그 행위는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D리그에서도, 섬머리그에서도 그리고 NBA에서도 꾸준히 해왔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버틀러는 Toomer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두게임을 빠졌다. 장례식은 Toomer가 생전에 부제로 지냈던 그리고 Bop슈퍼 근처에 있었던 St. Paul Chapel Baptist 교회에서 열렸다. 장례식에서 어떤 사람은 Bob슈퍼를 ‘a mountain of love’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쓰나미가 와도, 산이 무너져도 Bob슈퍼로 인해 이웃 모두가 산꼭대기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장례식 후에, 버틀러의 Spur로서 컴백 게임은 드라마틱하게도 필라델피아 76ers전이었다.
South Philadelphia에서의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난 후에, 라슈엘 버틀러 선수는 스퍼스 저지를 입고 있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라슈엘 버틀러 선수가 하늘에서는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렇게 사랑하던 농구를 한곳에서 오래할 수 있기를, 플레이오프에서도 팀의 주역으로 활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슈엘 버틀러 선수 정말 감사했습니다. 감히 주제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라슈엘 버틀러 선수가 조금은 더 순탄한 길을 걸으셨으면, 좀만 더 편한 길을 걸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Rest in peace, Rasual Butler.
첫댓글 정독했습니다. 더욱 가슴아프네요. RIP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코비님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글쓴님 말씀처럼 편안한 쉼이 되길.. r.i.p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RIP
감사합니다.
정말 가슴 벅차오르는 글이에요. 최선을 다한 삶이었네요..
포포비치님 말씀 그대로의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