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 이야기를 이해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줄 안다.
내가 열 살 남짓 했을 때의 일이다. 겨울 쯤으로 기억이 된다.
그 때까지 어머니의 머리는 늘 쪽 진 머리였다. 어른 주먹 보다 더 큰 머리 둥치에
은비녀를 가로질러 꽂아 정갈하게 빗어 쓸어 올렸다. 가끔씩 보는 일이지만, 머리를
감을 때면 어머니는 대야에 더운 물을 몇 번씩 갈아가며 참빗으로 쓸어가며 감으셨다.
머리카락이 아주 길었다. 거기다가 동백기름까지 바르고 나면 새까만 머리가 반질반질
윤이나서 그야말로 어린 내가 보아도 그리 깨끗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안 보인 것은 그 해 겨울 쯤......
그 무렵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좀 떨어진 소재지에 가발 공장이 들어왔다. 공장이라고 해야
커다란 건물 하나만 덩그라니 지어 놓고 스므살 남짓한 여자들이 모여 손으로 가발을 만드는
일이다. 하긴 그 땐 국민학교만 다니고 집안 일을 돕는 사람들이 많던 때라 그 가발 공장엔
언제나 말 만한 여자들이 득실 거렸고 또 당연히 총각들도 덩달아 그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가발의 재료는 인조머리가 아니라 진짜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는 가발 만드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교를 오가며 몰래 훔쳐다 본 광경......
사람의 머리통만한 둥근 나무 통에 망사를 씌워서는 손으로 일일이 떠가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리고 둥글게 둘러 앉아 남진과 나훈아 이미자 정훈희 이런 가수들의 콧노래......
문제가 생긴 것은 그 후에 일이었다.
시골 집집마다 다니며 여자의 머리카락을 산다는 바람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몇 년씩 길러 온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사실 돈이라고는 좀체 만져 볼 수 없는터라 이렇게라도 해서
기성회비를 내야했고 쌀을 팔아야만 했다.그런 비극이 우리 집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갈 리가
없다. 어머니도 머리카락 장수에게 머리를 잘라 팔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성화를 예감한
어머니는 송두리 째 자르지 않고 머리 카락을 군데 군데 솎은 것이다. 하지만 어버지가 그것을
모를리가 없다. 왜냐하면 쪽진 머리 둥치가 턱없이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집에선 난리가 났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방에서 끌어 마당으로 내동댕이
쳤다. 누나와 나는 아버지의 바짓 가랭이에 매달려 아우성을 질러 댔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결국
우리에게까지 미쳤다.
집에서 쫓겨난 누나와 나는 조금 떨어진 이웃집 헛간 짚더미 속에 웅크린 채 졸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나는 무서움이 몸을 감았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못했다. 불빛 하나 없는 밤이 무섭기 그지 업었지만 그래도 술 취한 아버지 보다 무섭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두부장수도 못 나가고 몇 날을 앓아 누우셨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누워 있을 수없었던 어머니는 며칠 후에 다시 일어나 다시 두부를 팔러 다녔다.
이따끔씩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하늘을 쳐다보며 아픔을 참아내는 것 같았다.
누나는 그 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집을 떠났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해방되 된 것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좋았다고......
자존심이었을까? 아니면 정조를 판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 마음대로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이 그렇게 분했을까?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끝내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아예 머리를 싹둑 잘라 퍼머를 하셨다.
그리고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정월 열 아흐레, 내일 모레면 아버지 기일이다.
아버지의 술......그러나 70평생을 소작농과 남의 집 머슴으로 우리 육 남매를 길러내신 분이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 속으로 어쩌다 문득 문득 파고드는 것이라고는 술에 대한 기억 밖에 없다.
술을 마시고 들어 온 날은 집안에 초비상이 걸린다. 나는 아예 밖으로 도망쳐 버린다.
내 나이도 어느덧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렇게도 내동댕이 쳐 대던 그 나이를 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다.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는 것이 그리 큰 죄였나?
꿈에서라도 만난다면 반드시 여쭤봐야겠다!
첫댓글 그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 오늘 글로 다 보이네요
우리엄마도 그랬어요
아버지께 혼나지는 않았지만 어버지의 기일이 우리집이랑 같은날이네요.
아, 그래요?
동네 대동계에서 윷놀이를 하시고 돌아오신 후 그대로 누워 돌아가셨답니다. 저는 임종도 못봤지만....
어머니의 참빗, 쪽진머리..머리카락을 솎아 팔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에서 강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런 시절을 살았음에도 그때가 자꾸 그리운 건 어인 까닭인지
에휴~..
그러게요, 낡은 신발처럼 속절없이 내버려도 괜찮을 것을
왜 이리도 사무치게 끌어안고 살아야만 하는지요.....
그래도 좋잖아요.
추억인란 늘 내 곁에 있어 언제 어디서든 꺼내 볼 수 있는 보물......
어느 지역인가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1949. 1. 생. 충남 서해안 갯바다 근처에서 삽니다만...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제 기억에는 분명히 여자들의 긴 댕기를 잘라서 팔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법 돈이 되었고요.
1960년대에는 돈벌이 될 것이 별로 없어서... 산골마을에서는 떡갈잎을 뜯어서 일본에 수출했고/ 도시락을 싼다고...
청홀치( 칡 줄기로 피륙을 짠다)를 삼았고...
어느 지역의 일인가요?
엄지 척!
저보다 한참 연배이신데......
가끔 타인의 일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요.
저도 머리를 길러 동네에 머리카락을 사가는 아저씨에게 팔았던 기억이 있어요.
숯이 많고 굵어 머리카락 시가는 사람에게서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이야길 들었던 기억이 새롭네요.
여자들이 머리를 빗으면서 머리카락이 빠지면 버리지 않았어요.
그것을 똘똘 말아 모았다가 주먹만한 뭉치가 되면 머리카락 장수에게 팔아 용돈을 썼던 기억도 있어요.
ㅋㅋㅋ
그래도 이런 이야기들이 공감되는 분들이 많아 재밌고 즐겁네요.
@류정 맞아요. 우리 할머니도 돌아가실때 까지 머리카락을 뫃으셨어요
돌아가실때만해도 머리카락이 소용도 없는데도 그러셨어요
어머님은 이유를 알고
계시지않으셨을까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릿.. 해집니다
그런거 같았어요.
그래서 머리를 솎아 잘랐던 게지요.
류정님~~ 아무런자원과 기술과 자본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수출할수있는공산품(?)인 가발산업에 대하여 언급하시니 새롭슴니다.
옛날의 아버지들은 너집,내집할것없이 무서운존재들이 었지요.
아내와 자식들에게 왜그렇게 무섭게대했는지?
지금생각해보면.....본인의 좌절에대한 분풀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을해봅니다.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저도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어쩌면 좌절감에 대한 저항과 분풀이를
힘없는 여인들에게 쏟아 부은 것은 아닐까 하는......
감사합니다.
아버님 진실 그대로 모습이 그려집니다.
부디 님은 행복한 나날이 되셔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하루하루 더없는 행복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시대적 추억을 너무 잘그리셨네요ᆞᆢ
어머니들의 수난시대 가부장의 오류
참 여자들의 아픈 시절이 였지요 ᆢ
옛날 모습이 그대로 살아 움직입니다
기성회비 200원
극닛도 못내는 아이들 있었죠
참을느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 마음도 이해가 되고
어머니 상황도 이해가 됩니다
슬픈 시절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