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고픈 수컷 코끼리는 '괴수'가 된다
수컷코끼리의 공포의 발정기 '머스트'
호르몬 수치 폭증하면서 난폭한 괴수로 돌변
급격한 신체 변화에 '병 걸린 것 아닌가' 오해도
암컷에겐 '지금 당장 준비 돼있다'는 강렬한 메시지
요즘 지구촌 소식 중에 동물 관련 뉴스로 가장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은 단연 중국 남부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는 코끼리떼 이야기입니다. 동남아와 가까운 중국 윈난성 코끼리 보호구역에 살고 있던 아시아코끼리 열 다섯 마리가 지난 4월부터 서식지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죠. 아기 코끼리를 포함한 일가족이 하루 행진을 마치고 드러누워서 숲에 쉬는 모습 등이 드론 촬영을 통해 포착하면서 벼락 월드스타가 됐지요. 하지만, 코끼리라는 동물이 덩치와 힘면에서 지구상에 적수가 없는 동물이다보니 이들이 지나고 다니는 자리마다 쑥대밭이 되고 혹여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까 중국 당국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하네요.
중국 윈난성 일대를 다니고 있는 아시아코끼리 무리가 이동 중 바닥에 누워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 4월 보호구역 내 서식지를 떠난 이들의 행보는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 와중에 수컷 코끼리 한마리가 무리를 이탈해서 나홀로 행진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모계 중심으로 꾸려지는 코끼리 사회에서 사실 수컷은 꽤나 골치 아픈 존재랍니다. 그것도 사랑할 준비가 돼있는 혈기왕성한 수컷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킬박사의 또 다른 자아 하이드, 멀쩡한 사내에서 초록괴물로 변하는 헐크,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호그와트 마법학교 교사 리무스 루핀의 공통점은 뭘까요?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돌변하면 아무도 못말리는 괴수가 된다는 것이죠. 이들을 모두 씹어먹고도 남을 만한 돌변의 괴수가 바로 ‘사랑이 고픈 코끼리’입니다. 암수가 짝을 지어 번식하는 거의 모든 동물들은 발정주기가 되면 종의 특성에 맞춰 어느정도 변화합니다. 외모가 변하기도 하고 성격이 바뀌기도 하며 외모·성격이 모두 확 달라지기도 하죠.
수컷코끼리는 덩치나 파워 등으로 봤을 때 지상 최대의 맹수다. 공격성이 강한 수코끼리는 야생에서든 동물원에서든 접근금지 1순위로 꼽힌다. 사진은 흙먼지를 날리며 포효하고 있는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수컷 코끼리. /alamy
이런 모습을 통해 이성에게 다가가고 또 이성에게 끌리게 됩니다. 그 변화의 폭이 가장 극적이면서 공포스럽게 바뀌는게 바로 코끼리 수컷입니다. 오죽하면 수컷코끼리의 발정을 뜻하는 고유명사까지 등장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머스트(musth)입니다. 서남아시아 언어인 우르두어로 취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코끼리는 크게 세 종류입니다. 큰 귀를 펄럭이며 아프리카 사바나를 휘젓는 아프리카코끼리, 덩치도 귀도 상대적으로 작은 아시아코끼리, 그리고 아프리카 고산지대에 살면서 둥글넓적한 귀를 가진 왜소한 몸집의 둥근귀코끼리죠. 이 중 인도·태국·스리랑카 등에 사는 아시아코끼리는 아무래도 아프리카코끼리보다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니 짝짓기를 앞둔 수컷 코끼리가 괴물처럼 변하는 현상도 낯설지는 않았겠지요.
처음에는 아시아코끼리만의 특성인줄 알았던 머스트는 이후 연구자들의 현장 연구를 통해 아프리카에 사는 다른 두 코끼리에게도 발현된다는 사실이 확인됐어요. 헐크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지킬과 하이드의 장면이 기억나십니까? 내 안의 폭력적 자아가 발현될 때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히고, 거품을 물고, 눈은 분노로 불타오릅니다. 코끼리의 변화 이에 못지 않습니다. 우선 눈 뒤의 관자놀이가 부풀어오르고, 거친 피부 사이로 끈적한 액이 송진처럼 흐릅니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평소보다 최대 60배까지 커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머스트에 접어든 수컷 아프리카코끼리의 모습.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평소보다 최대 60배나 치솟으면서 눈 밑의 분비선에서 송진처럼 끈적한 액이 흘러나온다. /크왐블리사파리로지·위키피디아
급격한 신체 일부의 변화에다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정체 불명의 체액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한 번 맡으면 도저히 기억에서 떨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네요. 이런 모습 때문에 한 때는 머스트로 돌입한 코끼리가 치명적인 성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걱정까지 나왔습니다. 성질도 걷잡을 수 없이 흉포해집니다. 머스트 상태의 코끼리는 절대 접근하지 않는게 사파리 공원의 불문율입니다. 민가를 습격해서 집을 부수고, 밭을 짓밟는 등 난동을 피우는 것도 대개 머스트에 걸린 수코끼리들이 감정 조절에 실패하며 벌어지는 일로 알려져있습니다. 코뿔소, 기린, 물소, 사자, 그리고 인간까지 눈에 보이는대로 들이받고 달려듭니다.
인간들이 돌보는 동물원 코끼리라고 해서 이 수컷의 본능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국내 동물원 코끼리 사육사들 사이에서도 ‘머스트’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오랫동안 가족처럼 돌봐온 사육사들은 코끼리들의 첫 머스크 징후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경계 모드로 돌입합니다. 아주 필요한 일이 아닐 경우 최대한 접근을 삼가죠. 한 유명 동물원 고위 관계자는 머스트에 들어간 코끼리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눈에 뵈는게 없게 되는 상황”이라면서 “모든 동물원 스태프들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시기”라고 했습니다.
수컷 아프리카코끼리 한마리가 발정기 특유의 으스대는 듯한 걸음걸이로 사바나를 활보하고 있다. /패시네이팅아프리카닷컴·위키피디아
동물원이든 야생의 사바나 또는 밀림이든 공포의 발정 모드가 짧게는 몇주에서 길게는 몇 달까지 갑니다. 코끼리의 생애 주기는 사람과 거의 비슷합니다. 10대 중반에 이르러서 조금씩 수컷으로서의 성징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스물다섯살 정도가 되면 본격적으로 머스트를 시작합니다. 개체마다 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1년에 한번씩 머스트를 겪는다고 하네요. 머스트에 접어든 코끼리는 발걸음도 으스대듯 걸고, 머리는 쳐들어올리고, 귀는 바깥을 향해 팔랑거립니다. 나름대로 스웩이 넘치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발정난 수코끼리들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머스트 스웩’이라고 부른답니다. 눈주위가 부풀어오르고, 독성물질 같은 체액을 뿌리며, 지독한 냄새까지 풍기는 코끼리가 으스대듯 걸어갑니다. 인간 눈에는 생각만해도 섬뜩하고 징그럽지요.
지난 4일 프랑스에서 헝가리의 산투스 자노스 동물원에 새로 이사온 15세 수컷코끼리 '부부'가 새집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수컷 코끼리는 앞으로 10년정도 지나면 주기적으로 '머스트'에 돌입하게 된다. /AFP 연합뉴스
이 모습은 암컷에게는 “난 당신의 파트너로서 모든 준비가 돼있어. 우리 이참에 화끈하게 사랑하고 건강한 2세 가져보자”는 모종의 유혹입니다. 반면 경쟁 상대인 수컷에게는 “나 건들지마. 화나면 무섭다”는 경고와 협박입니다. 그렇게 뜨겁고도 무서운 계절동안 코끼리들은 조물주가 만들어진 번식의 본능을 최대한 발산합니다. 코끼리의 서식지와 인간이 사는 지역의 경계가 빠르게 줄어들면서 둘 사이의 충돌도 격화하는 양상입니다. 부디 전문가와 각국이 체계적인 서식지 보호정책을 세워서 코끼리도 사람도 서로 안심하며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할텐데요. 우선 중국 윈난성의 코끼리들이 무사히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