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 참조
1369년 명 일본에 조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냄.
1370년 명.고려인도 중국의 과거시험에 응하도록 함.
1371년 12월 명 해금정책이 정식으로 취해짐.
1372년 명 고려 고관자제의 국자감 입학 청을 허락함. 명이 유구에 사절을 보내자 중산왕은 조공을 바침.
1374년 고려 사신 사행로를 육로로 해달라로 청함. 그러나 명은 사행로를 해로로 한정함.
1381년 명조 민간인들이 몰래 외국 상인과 접하는 것을 금함.
1383년 감합제를 채택하여 외국과의 통교를 엄히함.
1392년 일본 남북조가 통일됨. 이에 영락제는 적극적으로 조공을 권유함.
1404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과 조공관계를 맺고.중국에 견명선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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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합무역 [勘合貿易]
요약
중국 명(明)나라와 조선이 일본 ·여진 등과 행한 무역형태.
본문
원래는 14세기 말 이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 이루어진 조공무역을 지칭한다. 여기서 ‘감합’이란 입국을 확인하는 일을 뜻하며 그 문서를 감합부(勘合符)라 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주변국으로부터 공물을 받고 회사품(回賜品)을 주는 교역과정에서 주변국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체제로 끌어들였다. 반면에 주변국가는 이 과정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무역형태는 1404년부터 150여 년간 지속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중국황실은 일련번호가 붙은 감합부를 준비해서 그것을 장부에서 떼어 장부는 보관해 두고 일본의 막부(幕府)에 보냈다. 사절단이 공물을 가지고, 또는 교역을 하려고 지정된 중국항구에 들어올 때에는 그 선박의 수와 화물과 인원이 법에 의해 한정되었다. 그들은 장부와 대조해서 증명할 수 있는 일련번호로 된 감합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반대로 해외로 파견된 중국사신들에게도 동일한 제도가 적용되었다.
이 무역의 원칙은 조선과 일본 ·여진 사이에서 이루어진 무역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다만 조선의 경우는 도서(圖書) ·서계(書啓) ·문인(文引) 등의 문서를 공식사신의 확인서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무역형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기본적으로 제도무역을 통해 왜나 여진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더 나아가 집권적 봉건국가 자체의 대내안정과 동아시아의 질서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의 증대와 함께 일본인의 거류가 많아지고 폐단 역시 뒤따랐다. 이에 조선정부는 거류자의 수를 제한하고 폐단을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관계는 조공적 ·의례적 성격이 점차 약화되고 대신에 경제적 성격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마찰이 자주 일어나면서 삼포왜란과 을묘왜란이 터지고 말았다. -NEVER 백과사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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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년 거듭"해안가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시로이 외해 제국과 통하는 것을 금한다"라고 하여 민간인들이 몰래 외국 상인과 접하는 것을 금하는데 당시에 호유용이 일본과 제휴하여 반기를 들려고 했다는 소문이 있었던 때였다.
과거의 견수사,견당사 시절은 조공만 바치고 책봉을 받지 않았으나 이때는 일본 왕으로 책봉도 받았다.
14세기 말부터 유구는 명의 국자감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 교육과 문화를 받아들였다.
고려는 1372년 한해에만 명에 무려 6번의 사신을 보냄.
명의 사신 환관 손내시는 1372년 5월에 진우량의 아들 진리, 명옥진의 아들 명승 및 그 가족 등 17명을 데리고 연달마실리와 함께 개경에 온 사람이다. 그런데 도착 후 8일 만에 불은사의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명은 임금이 된 이성계 측에 국호의 개정까지 서둘러 요구하였다.
1395년 명은 조선에 대해 "근래에 조선이 수변 장수를 보내어 여진인 오백여인을 초유하여 몰래 압록강을 건넜으며 장차 요동을 침략하려고 한다"고 크게 비난함.
-저자는 전순동
서긍의『고려도경』은 조선에 파견되는 명의 사신들에게 좋은 참고서 역할을 하였던 책이다. -저자 조영록
명황제의 정식 책봉을 받기 전에는 명조와 문서를 주고받을 때 새로 등극한 조선의 왕을 '조선왕' 이라 칭하지 않고 단지 '조선권지국사' 라고 칭하였다.
조선국왕은 명 황제의 조서를 받들 때 반드시 어전의 가운데에서 북쪽을 향해서 일어났고, 명조의 사신은 황제의 사신은 황제의 조서를 낭독할 때 반드시 어전의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읽어야하는 것스로 남북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했다. -저자 진상승
1411년 조선은 사행로로 육로를 요청함.
1421년 이때부터 육로가 조선의 사행로로 자리잡게 된다.
1430년 4월 이만주가 조선과 교역을 하고 싶은데 조선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조에 상주함.
1433년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일대에 거주하는 거주위의 도지휘 이만주를 토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요동총병관 무개는 조선이 멋대로 건주위를 공격하였다고 힐문할것을 선덕제에게 상주하였다. 또 경태 원년 5월에도 이만주가 병사를 이끌고 무순천호소를 침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459년 요동 변장들은 건주 3위의 도독들이 조선과 사사로이 결탁하고 있어 중국의 우환이 될까 두렵다고 보고함.
명조가 동팔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진보를 신설함.
요동도사 관할하의 25개의 위중에서 조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위가 바로 동녕위다. 연회를 담당한 실무자는 동녕위 출신이었다.
요동도사의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은 동녕위의 천호 백호등 위소관이었다. -저자 서인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