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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협박
오후 2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늦은 점심을 먹고 사무실
로 돌아온 강형준은 여직원에게 끓여온 커피를 창 곁
에 놔두도록 부탁했다.
창 밖으로 철에 맞지않게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오 의원의 출국은 오는 15일 오후 1시로 결정됐다. 비
해기 표를 예약하고 숙박할 호텔을 확인하는 등 이곳
저곳으로 연락을 하고 스케줄표에 빈틈없이 체크를 하
고 하다보니 오전이 어느샌지 지나가 버렷던 것이다.
강형준은 어디를 둘러봐도 비에 젖어 한층 우중충해
보이는 담채색의 우뚝우뚝 늘어선 빌딩들을 내다 보았
다.
석철이 갑자기 왜 올라 올 것일까? 그리고 두달 정도
는 걸릴거라던 문영도 사장은 무슨 일 때문에 불과 2
주만에 다시 한국으로 나온 것일까?
오전 내내 일을 하면서도 복닥거리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내내 가슴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던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머리 속 가득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미처 파악도 하기 전에 시간
시간 내려지는 수십 가지의 명령을 그저 단순하게 실
행하는 것으로 십여일을 보낸 형준은 이제야 겨우 자
신이 해야할 일과 견지해야 할 자세에 대해 어렴풋이
나마 윤곽을 잡을 수가 있었다.
오 의원 비서관으로 정식 발령을 받은 지 이제 겨우
10일째,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조차 자신의 변동
사항을 알릴 만한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돌아간 10일
간 이었다.
1월 말경 스페인에서 개최되는 도시건축 관계의 국제
세미나에 오 의원의 참석이 결정되면서 지난 한주간은
그 스케줄까지 겹쳐 더한층 분주했던 나날이었다.
세미나 참석 열흘가량을 앞두고 출국, 일본과 이태리,
프랑스, 서독 등을 거쳐오게 될 오 의원의 여행 일정
이 어느 정도 확정되면서 형준도 숨을 좀 내쉬게 되었
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석철에게서 서울에 올라와 있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문 사장님 일본서 나오셨어요. 형님과 만나 상의할
일이 있어 서울에 계시다면서 절더러도 올라오라고 하
시잖아요. 나 역시 소식 한자 없는 형님 일이 궁금하
기도 하고 해서."
오전 9시 정각, 형준의 출근을 기다렸다는 듯이 걸려
온 전화 속에서 석철은 상경한 지 보름이 다 돼가도록
연락 한마디 없었던데 대해 은근히 질책하거 있었다.
"문 사장과 함께 있어?"
형준은 모처럼 마음 가볍게 출근을 한 기분이 한꺼번
에 우그러드는 듯한 불편함으로 딱딱하게 물었다.
"문 사장님은 강변호텔에 계세요. 나는 영동장에 을
작정이구요."
석철이 있다는 영동장은 지난 5년 동안 형준과 석철이
서울에 출장을 올 때면 가끔 이용하던 강남에 있는 크
지않은 여관이었다.
"몇 시 퇴근이슈? 춰서 강변호텔로 갈게요."
석철이 대답을 재촉했다.
"퇴근은 6시지만 약속을 할 수는 없어. 갑자기 일이
생길 수가 있으니까. 내 연락하지."
"바쁘다는 거 너무 과시하지 마슈. 1년 3백 65일 허구
헌날 일없이 빈둥거리고 돌아 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
기죽일 셈같이 들리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으나 석철의 말 속에는
은근히 압력이 들어 있었다.
"내 연락하지."
형준은 뒤틀려오는 비위를 꾹꾹 내리누르며 전화를 끊
어버렸다.
형준은 곧바로 강변호텔에 묵고 있다는 문영도에게 전
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 출타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곧 형준은 처리해야 할 일들에
묻혀 그에 대한 연락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점심을 먹고 나 이제야 비로소 그 생각이 떠 올랐다.
형준은 지체없이 강변호텔로 전화르 걸었다.
"아, 강 국장. 안녕하셨습니까. 그렇잖아도 연락을 하
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전화 잘 하셨습니다. 우선 영전
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전화선 저쪽에서 문영도가 깍듯하게 인사를 차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달쯤 걸릴 것 같다고 하시더니
무슨 일로 이렇게 빨리."
형준은 궁금했던 점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D시에 있는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가 강 국장 소식을
들었지요. 그래 아무래도 추진하고 있는 사업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강 국장 아니 이
제 강 비서관 이시지. 강 비서관을 만나 사업계획에
대해 다시 신중히 검토하고 그 결과에 따라 추진을
하든 변경을 하든 해야할 것 아니겠습니까?"
"행정적인 것이야 제가 서을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유
리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뭐 크게 차질이
생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형준이 설명했다. 그는 사실 비서관으로서의 발탁도
중요했지만 앞으로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에 틀
림없는 문영도와의 사업추진 또한 포기할 수가 없었
다.
오 의원 비서관으로서의 출발이 자신의 목표로 한 걸음
나아간 자리 다짐이라면, 문영도와의 사업은 그 자리
다짐을 발판으로 목표물을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단점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당분간일망정 강 국장
의 역할을 정 부장에게 맡기셨다는 얘길 듣고 당장을
위한 미봉책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계획 수정이 필요
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문영도의 전혀 뜻밖의 말에 형준은 순간 숨이 컥 막히
는 듯 했다.
"사실 강 국장의 이번 일 처리를 듣고 저 조금 섭섭했
습니다. 제 연락처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한마디 의
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했다는건 결과적으로 강 국
장께서 이번 사업계획을 나처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
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문영도가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형준은 귓속까지 '윙' 해질 만큼 격심하게 혈압이 오름
을 느꼈다.
"물론 이번 일에 조금치의 차질이 없게 하려는 강 국
장의 배려인지는 알아요. 그렇지만 그런 중요한 사안
처리에 있어서만큼은 저와 일단 의논을 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차분하고 젊잖은 말투이긴 했으나 문영도는 형준의 태
도 하나하나를 빈틈없이 지적하고 신랄하게 질책하는
것이었다.
형준은 등 뒤로 식은땀이 축축히 흘러내림을 느꼈다.
석철이 자식 기어히 일을 망치려 드는구나 하는 절박
감이 형준의 전신을 무겁게 옥죄어 왔다.
"하여튼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합시다. 언제 오시겠
소?"
문영도가 물었다.
"정확한 시간 약속은 어렵습니다. 하여튼 7시 넘어 그
쪽으로 전화를 드리고 가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때."
수화기를 내려놓는 형준의 이마에 진땀이 흥건히 배어
나고 있었다.
'석철이 이 자식!'
천방지축 제멋대로 일을 만들어 놓은 석철에 대한 분
노와, 그 한편으로 그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
든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 때문이라는 회한이 쓴물처럼
고여 올랐다.
자신이 그에게 부탁한 일은 물론, 만에 하나라도 문
사장과의 사업계획에 있어 자신의 역할을 그에게 맡겨
야 겠다는 생각 따윈 해본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석철이 문 사장과의 관계에 있어
자신을 등에 업는 열악한 조건으로라도 실제적인 역할
은 원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쁜 자식 ! 제 따위가 감히.'
차오르는 분노와 가소로움으로 형준은 으스러질 만큼
꽈악 두 주먹을 잡았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벌사인 유일그룹의 총수이
자 경제인연합회 수석 부회장인 유 회장이 오 의원과
저녁을 함께 하자는 전화를 해온 건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유 회장은 오 의원과 같은 학교 동기로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더욱이 2대(代)에 걸쳐 국회 건설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 의원과 건설회사가 모기업인 유일그룹 유 회
장과의 친교는 단순히 동창사이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유착관계라는 것쯤 쉽게 짐작할 수 있었
다.
모 단체장을 예방하고 있는 오 의원에게 연락했다. 오
의원은 유회장 시간에 맞춰 오후 8시에 L호텔 화식부
에서 만날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건 형준을 데리고 가겠다는 뜻이었
다. 물론 갓 발탁된 형준으로선 그만한 인물이라면 오
의원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따라가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오늘 형준의 입장으로선 난감
했다. 심한 초조감으로 그는 입술까지 말랐다.
오 의원에게 마침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 6시경
퇴근해 정석철을 잠깐 만나고 강변호텔로가 문영도를
만나려고 계획하고 있던 형준으로선 사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8시 정각 L호텔에 도착해 유 회장께 인사를 드린다.
그 시간은 불과 5분에서 10분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L호텔 출발은 8시 10분경 거기서 영동장까지
가자면 40분 가까이 걸릴 것이다.
정석철과 만나 30분 정도 얘길 나누고 그곳에서 10분
거리인 강변호텔까지 오자면 아무리 타이트하게 움직
여도 9시 30분이 될 것이다. 더욱이 지금 밖에는 철에
맞지 않게 비가 종일 추적대고 있다.
십중팔구 차가 막힐 터였다. 온갖 재주 다 부린대도
10시가 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됐을 때 문영도는 어
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번 사업계획을 추진함에 있어 차질이 생길 그 어떤
요인도 없음을 설명하려던 그의 계획따윈 간단히 무너
져 내림은 물론 문영도에게 계획따윈 간단히 무너져
내림은 물론 문영도에게 계획 수정의 불가피성을 행동
으로 실증해 보여주는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랴!
형준은 고이고 있던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들
기며 초조해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오후 7시가 넘어서야 형준은 석철을 만나는 것을 일단
다음으로 미루기로 작정했다.
석철을 미리 만나 뚝심 사나운 그의 야심을 간파하고
어느 정도 타협을 한 뒤 문영도를 만나 구체적인 의논
을 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 했다.
두 사람을 만나는 일을 비중으로 따져볼 때 그래도 문
영도 쪽이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석철에게 내일 만
나자 연락을 하면 투덜대긴 하겠지만 그래도 문영도를
만나지 못함으로써 감수하게 될 대가보다는 가벼울 것
같았다.
형준은 문영도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8시 40분쯤 가뵙
겠노라고 말했다.
"기다리겠소. 시간을 지키시오."
강조하는 문영도의 음성을 들으며 형준은 어쩐지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차가 밀릴 것을 예상해 7시 20분쯤 오 의원이 L호텔
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전사 김씨에게 문제가
생겼다. 차를 미리 준비해 놓기 위해 출발 10분 전쯤
사무실을 나가 주차장으로 가던 김씨가 빗물이 고인 1
층 계단을 잘못 밟아 넘어진 것이다. 넘어지면서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뒤로 버틴 오른손의 손목이 꺽인 것
같았다.
오 의원 운전사 경력만 25년째가 된다는 52세의 성실
하고 무던한 성품의 김씨는 처음 별 것 아니라는 듯
손목을 좌우로 몇 번 움직여 보고는 내색없이 차를 준
비했으나 손목 주변이 금방 시퍼렇게 변색되면서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오 의원을 모시고 대기시켜 놓은 차로 간 형준에게 김
씨는 경위설명과 함께 식빵 껍질처럼 부풀어 오른 오
른쪽 손목을 내보였다.
"아무래도 운전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더욱이 비가
이렇게 쏟아질 때는 갑작스런 사태가 생길 수도 있고
헌데 잘못 운전을 했다가는 어떻게 하지요?"
가뜩이나 초조하게 시간을 재고 있던 형준은 김씨의
설명에 기가 딱 막혔다.
'지금 이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도록 화가 솟았다.
"무슨 일이야?"
뒷자리에 탄 오 의원이 수군대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김 기사가 팔목을 삔 것 같습니다."
'팔목을? 갑자기 왜?"
"내려오다 계단을 잘못 딛고 넘어졌다는데요."
"원 사람도 시원찮기는 심한가?"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답하는 형준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무거워졌다.
"그럼 빨리 병원엘 가잖고."
"우, 운전 때문에."
김씨가 송구스러운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운전은 내가 할테니 걱정마세요."
"회합이 끝나 모시고 가자면 시간이 꽤 늦을텐데."
김씨는 손목의 아픔보다 자기 대신 땀을 뺄 형준에 대
한 미안함으로 안절부절이었다.
"그런 걱정 말고 타기나 하세요. 가다가 병원 앞에 내
려 드릴테니."
형준은 애써 태연하게 운전석에 오른 뒤 극구 사양하
는 김씨를 옆좌석에 앉혔다.
"운전 잘하나?"
타들고 있는 형준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오 의원이 한
가하게 물었다.
"5년 정도 됐습니다."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며 형준이 대답했다.
"다행이군!"
뭘 두고 다행이라는 건지 알 수는 없겠지만 형준은 잠
자코 운전에만 몰두했다.
운전경력은 비록 5년째 되긴 했지만 교통량이 비교적
한가한 지방에서만 줄곧 살아왔던 그에게 4차선이건 6
차선이건 도로라고 생긴데는 버규위반쯤 다반사로 그
저 하나같이 앞으로만 내달리려 기를 쓰는 차들로 그
득그득 채워진 서울에서의 운전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
다.
더욱이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퇴근길에 오 의원
을 태운 차의 운전이라니, 뒷목줄까지 빳빳하게 긴장
돼 왔다.
10분도 넘게 거북이 걸음으로 마포대교를 건너 온 형
준은 공덕동 네거리에 있는 내과병원 앞에 김씨를 내
려주고 아현동 쪽으로 곧장 달렸다. 차는 예상만큼 크
게 밀리지 않았다.
"유 회장은 사람을 볼 줄도 알고 키울 줄도 아는 사람
이야!"
차가 서소문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데 뒷자리에 앉아
있던 오 의원이 문득 말을 했다.
"좋은 사람을 많이 알아두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 될
게야."
호텔 출입구 앞에 세운 차에서 내리며 오 의원이 선심
이라도 쓰듯 말했다.
시계침은 이때 8시 5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를 넣어 두고 지하에 있는 송화(松花)로 오너라."
오 의원은 자신을 알아보고 허리를 깊숙히 숙이는 호
텔 보이의 환대에 만족한 듯 비대한 몸짓을 뒤로 한껏
뻗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낮고 어둑한 나선형의 지하 차도를 몇 바퀴나 빙글빙
글 돌아 지하 2층 주차장에 차를 세운 형준은 비상계
단을 통해 지하 1층으로 올라갔다. 지하 1층은 호화롭
고 안락한 분위기의 고급식당들로 꾸며져 있었다.
오 의원과 유 회장은 화식집 송화의 넓직한 특실에 앉
았다.
"유 회장님이시다."
오 의원이 들어서는 형준에게 말했다.
"강형준 입니다. 위원장님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
니다."
형준은 매끈한 은발과 맑은 피부가 품위있어 보이는
풍채좋은 노 신사를 향해 깊숙히 머리를 었다.
"새 비서관일세."
"아, 자네 조카 된다는?"
인상처럼 무게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유회장이 형준을
가볍게 훑어 보았다.
"지구당 살림을 5년 동안 맡아왔었지."
오 의원이 날라져 온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
다.
"영감 잘 보좌하시게. 위원장님이야 말로 이 나라 정
치발전을 위해서라도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어른 아니
신가."
유 회장의 말이 이례적인 인사치례라는 걸 알텐데도
그 말을 듣는 오 의원의 표정은 흐뭇해 보였다.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만 나가 있겠습니
다."
형준은 이때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야 할 때라고 판
단,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래, 식사부터 해두도록 해. 우린 11시경이나 돼야
끝날테니깐 그리 알고."
오 의원이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을 들여 보였다. 이
건 숫제 운전기사 취급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침 대나무 그릇에 담긴 호사스런 전채(前菜)를 들고
들어서는 인형처럼 예쁜 종업원과 엇바꿔 방 밖으로
나온 형준의 기분은 묘했다.
순식간에 격이 다른 인간으로 격하된 듯한 그 기분은
더없이 씁씁하고 싫었다. 문득 죽은 한기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 의원 태도로 봐 사위라고 별다른 대접을
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따위 기분 나쁜 대접 속에서 5년을 넘게 살다가 훌
쩍 떠나가 버린 한기훈에 대한 연민으로 새삼스레 가
슴이 찡해 왔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잠깐 이었다. 감
상따위에 빠지기엔 그의 현재 처지가 참으로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뒤틀리는 기분일망정 밖으로 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
라 자위하며 홀로 나온 형준은 시계부터 봤다. 8시 17
분이었다.
형준은 식사를 하시라며 자리를 권하는 여자 종업원에
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달려
내려갔다.
오 의원의 회합이 11시경 끝난다고 했으니 앞으로 약
2시간 40분가량 시간이 있다. L호텔에서 강변까지는
차로 30분정도의 거리니까 왕복해서 1시간, 문영도를
만나 1시간 정도의 얘기를 할 여유가 있다.
지금부터의 시간배치를 착착 계산해 내는 형준의 머리
는 마치 작동되기 시작한 컴퓨터처럼 출발과 도착 상
황이 정확하게 표시되며 깜빡거렸다. 형준은 지체없이
지하 2층 주차장에서 조금 전에 세웠던 오 의원의 검
정색 6기통 그라다나를 빼냈다.
비는 그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은 채 추적거리
며 계속 내리고 있었으나 러시아워가 지난 때문인지
도로는 별로 막히지 않았다.
L호텔에서 강남을 향해 거의 직선서리로 뻗어있는 남
산 3호터널을 통과해 반포대교를 지나 올라 선 강변호
텔에 도착한 것은 L호텔을 출발한 때로부터 겨우 25
분이 걸린 8시 50분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형준은 달리듯 후론트로 다가갔
다. 지금 막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고 방으로 올라 가
려고 전화를 돌렸으나 받지 않았다. 번호를 잘못 돌렸
나하는 생각에 후론트 담당직원에게 룸넘버를 새삼 확
인한 다음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역시 전화는
빈 신호만 울릴 뿐이었다.
시간을 지키라던 문영도의 묵직한 음성이 상기되었다.
8시 40분까지 가겠노라고 했기 때문에 10분 정도야 어
떠랴 싶었던 자신의 시간 관념이 틀린 것인가 생각하
며 형준은 잠시 갈팡질팡했다.
한참 후에 야 혹시 화장실에라도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3분쯤 지나 다시 전화를 걸
었다. 그러나 전화벨 신호는 여전히 공허하게 되돌아
올 뿐이었다. 시간은 이제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리 저리 생각을 굴리던 형
준은 마침내 문영도가 고의적으로 자리를 피한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기다리고 있는걸 뻔히 알면서 밤 8시 40분에야
오겠다고 한 형준의 처사와 그나마 시간을 넘겨버린데
대한 불만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난감함에 전신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도리없이 돌아서 호텔을 나서려던 형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석철이라도 잠깐 만나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변호텔에서 영
동장까지는 불과 10분거리였다. 그 즉석에서 석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같은 촌놈쯤 완전히 개떡으로 무시하는 줄 알았는
데, 어쨌든 고맙시다."
전화를 받는 석철에게 술기가 누껴졌다.
"미안하다. 영감님께 갑자기 일이 생겨 전화를 할 여
유가 없었어. 지금 강남에 와 있는데 나오지."
"강변호텔이우?"
"아, 아니. 그렇잖아도 문 사장을 좀 뵐려고 했는데,
지금 안계셔시네."
"그럼 어디로?"
"10분쯤 후 여관 진입로 쪽에 나와 서 있어. 데릴러
갈게."
혹시나 문 사장에게 띄일 수도 있는 강변호텔에서 석
철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에 뭐가 있는
지 전혀 모르는 형준이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어둑하고 한적한 강변도로를 10분쯤 달려가자 영동장
이었다. 그집은 강변로에서 좌측으로 난 골목 안쪽에
자못 은밀한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가슴팍에 붉은색과 청색의 띠가 가로걸린 흰색 파카를
머리까지 뒤집어 올려 쓴 석철은 진입로가 아닌 멀찍
이 현관 앞에서 있었다.
형준은 그러나 현관 앞으로 가지않고 지정했던 진입로
쪽 도로에 차를 세웠다. 형준인 줄 알아챈 석철이 온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차를 향해 뛰어왔다.
"이왕 인심쓰는 거, 현관 앞까지 좀 갖다 대면 어디가
덧나요?"
옆좌석에 올라 머리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석철이
투덜거렸다.
석철은 예상대로 술을 마신 듯 엷게 냄새를 풍겼다.
"비는 청승맞게 내리지, 하늘같이 믿고 올라온 형님은
밤이 깊어도 전화 한 통화 해주지 않지, 마음이 지랄
같아져 쇠주 몇 병 깠시다."
석철은 자신이 어깨출신임을 새삼 강조하듯 그 말씨부
터가 불과 얼마 전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형준은 잠실 쪽을 향해 차를 달리면서 멀지않은 거리
에 한강 둑아래로 통하는 길이 있음을 생각해 냈다.
그 길목은 어둠 속에서도 쉽게 을 수 있었다. 형준
은 비스듬히 경사진 강둑으로 들어가 흐릿하게 불이
밝혀진 강가에 차를 세웠다.
엔진을 꺼버리자 차 속은 완전히 정적 속에 밀폐됐다.
차 지붕을 두들기는 빗줄기 소리가 한층 굵고 음산하
게 부딪쳐 왔다.
"선거 때 빼놓고 가장 바쁜게 매 연말서부터 구정 때
까지잖아. 이 바닥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왜 이러나?"
형준은 지그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온건하게 말을 꺼냈
다.
"어이구 형님도. 아, 장사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그
만 것쯤 모를 라구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님
사정이구 나는 좀 다른 것 아닙니까?"
석철이 벌겋게 충혈되긴 했으나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형준을 지그시 주시했다.
"다르다니?"
"머리통 들이밀고 얌전히 줄 서 기다린다고 누가 내
머리 깎아 줄 인심도 아니고 그래서 나라도 직접 깍아
야 겠다는 것 아니니까?"
"영감님 지금 회합 중이셔. 모시러 가야 하니까 시간
이 별로 없어.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
"머리 나쁜 사람도 아니면서 입장 곤란하게 내 입으로
실토하라 이 말이요, 지금?"
불끈 화를 내는 듯한 석철이 기색쯤 상관없다는 듯이
형준이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형님은 당분간 비서관 일에만 전념하셔야 겠다 이 말
입니다."
성질 급한 석철이 드디어 본심을 가뒤집어 내 놨다.
"내가 비서관 일에만 전념하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내리 누르며 형준은 여전
히 침착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반문했다.
"문 사장님과의 사업 추진은 내게 맡겨야 겠지요."
대답하는 석철의 얼굴에 빙긋이 웃음이 떠올랐다.
"그건 나 혼자서 결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
알텐데."
형준은 마음과는 달리 달래듯 그러나 결코 호락호락
하지않게 말했다.
"천만에, 형님만 결정하면 됩니다."
석철이 맞받아치듯 여유잇게 말했다.
"무슨 뜻이야?"
태연을 뒤집어 쓰고 있던 형준의 얼굴이 비로소 찌푸
려졌다.
"형님이 전처럼 문 사장과의 사업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게 됐다는 건 문 사장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렇다고 진행중인 그런 큰 일을 섣불리 중단할 수가 있
겟습니까? 그러니 형님의 충실한 아우역(役)인 내게
형님 역할을 맡기고 뒤는 형님이 계속 봐주겠다는 조
건을 내걸면 문 사장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거 아닙니
까."
머리가 별로 좋지않은 석철이 제 딴에는 기발한 계획
이라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건 심부름 역이야. 결코 대역이 될 수는 없는."
i
"문 사장이 그렇게 결정하도록 설득하는 거야 형님 몫
아닙니까?"
조금치의 주저도 없이 들이대는 석철의 얼굴에는 여전
히 엷은 웃음기가 내배고 있었다. 형준은 대답 대신
이빨을 지그시 물었다.
"죽은 한 비서에게서 그렇게도 뺏고 싶어했던 자리 아
닙니까. 이 마당에 다른 것까지 놓지 않겠다고 버티다
간 체합니다. 암 체하고 말고요."
석철은 이제 싱글벙글 내놓고 웃는 것 같았다.
"많이 변햇구나!"
형준은 그 말 외에 다른 말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
다.
"지난 5년여 동안 공(公)과 사(私)가 분명하고 머리 좋
은 형님 따라 다니면서 많이 배웠지요. 특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회와 몫은 어떤 경우라도 결코 놓치지 않
는 그 냉혹함과 철저함 만큼은 눈을 까뒤집고 배운 것
이지요."
형준은 더 이상 대꾸 할 수가 없었다. 차의 지붕을 두
들기고 지나가는 빗줄기는 조금 전보다 더욱 굴고 게
세진 것 같았다.
칠흑같은 밤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찬란한 보석의 띠
처럼 걸려있는 한강의 다리 사이로 전철이 한 대 달리
고 있었다. 늘어 선 다리의 수은등과 함께 그것은 밤
의 한복판에 걸린 네온사인의 흐름처럼 영롱한 빛의
달림이었다.
형준은 생각난 듯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간은 어느
샌가 10시 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석철과 더 이상 얘
기를 주고 받을 시간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출발해 석철을 영동장까지 데려다 주고 L호
텔까지 가려면 아무래도 빨리 달린대도 4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자칫 길이라도 막히는 날이면 오 의원의 회합이 끝나
는 11시까지 L호텔로 대어 가기도 힘들지 모른다.
꺼두었던 엔진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 형준은 서서히
강둑을 빠져나와 강변도로를 달렸다.
푸르고 붉게 빛나는 영동장의 간판이 저만치 보이는
도로에서 형준은 차를 세웠다.
"시간이 없어서."
짧게 말하는 형준은 조수석 앞에 챙겨뒀던 우산을 내
밀었다.
"형님도 결코 해롭지 않은 거래가 될 겁니다."
차에서 한발 내려서려던 석철이 문득 상체를 돌리며
말했다.
"내 입은 아주 무거울 겁니다. 특히 형님 일에 있어서
만큼은."
그 말과 함께 차 밖으로 나간 석철은 쳐다보는 형준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를 보냈다. 형준은 순간 치라도
떨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
을 주었다.
기우뚱하는 충격과 함께 차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격심한 증오감이 파충류처럼 전신으로 기어 올랐다.
기분나쁜 감정을 떨쳐 내려는 듯 형준은 거칠게 브레
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벌벌 떨고 있는 걸 내려다 보며 형준은 다시금
이빨을 갈아 물었다.
살기 섞인 그의 눈길이 백 미러를 쏘아보았다. 미러
속 멀리 건널목을 건널 자세로 서 있는 우산을 받쳐
쓴 석철의 흰 파카 모습이 비쳐 들었다.
형준은 문득 손끝서부터 전달돼 오는 육중한 차체로
뻔뻔스럽고 넉살좋은 석철을 깔아 뭉개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맹렬하게 달라붙어 옴을 느꼈다.
달리는 차도 별로 없고 인적조차 없는 도로는 적당하
게 어두웠다. 빗줄기마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저
따위 벌레같은 인간쯤 깔아뭉게고 그대로 뺑소니 쳐
버린대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형준의 두손이 차를 멈췄을 때보
다 훨씬 강한 증오감으로 불끈불끈 요동치고 있었다.
파란 신호등이 들어왔는지 우산을 받쳐 쓴 석철이 천
천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형준은 머리를 통채로 뻐갤 듯이 무섭게 밀려드는 살
의와 갈등을 떨쳐내 버리듯 와락 차를 출발시켰다. 바
퀴 밑에 물이 고여 있었던 듯 순간 물벼락이 넓은 자
락으로 덮치듯 앞 유리창 가득 강하게 부딪혀 왔다.
반사작용처럼 놀란 눈이 감겨지는 채로 형준은 마구
차를 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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