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국산김치 16개 제품에서 기생충알 검출
중국산 김치에 이어 국산 김치에서도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 또 시중에서 유통되는 국내산 배추에서도 기생충 알이 나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10월 현재 배추 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확인된 502개 업체의 제품을 수거, 검사한 결과 16개 제품(3.2%)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고 3일 밝혔다. 중국 김치의 경우 기생충 알 검출률이 24.7%였다.
이에 따라 국민의 먹거리 안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중국과의 김치 분쟁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검출된 기생충알은 초기의 미성숙란으로 섭취하더라도 인체 감염을 일으키는 유충으로 자라지 않고 배설되기 때문에 인체에는 해가 없다. 설령 만의 하나 인체에 감염되더라도 구충제를 먹으면 제거할 수 있다.
이번에 검출된 기생충알은 회충란 4건, 개. 고양이 회충란 9건, 기타 3건으로, 개. 고양이 회충란이 상당수 검출된 것은 풀어놓고 기르는 개.고양이의 배설물이 김치 재료에 묻은 데 따른 것으로 식약청은 분석했다.
기생충알이 검출된 김치의 원재료 54건을 추적 조사한 결과로는 국내산 절임배추 1건에서 기생충알이 나왔다. 하지만 중국산 고춧가루 2건, 양념류 1건, 태국산젓갈 등 수입 원재료 및 수입 배추를 사용하는 업체의 배추에선 기생충알이 검출되지 않았다.
이와 별도로 식약청이 시중에서 유통되는 국내산 배추 165건을 수거해 기생충검사를 한 결과 8건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
[1995년] 작곡가 윤이상 독일에서 사망 ← 베를린에서 타계한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씨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씨가 1995년 11월 3일 폐렴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 이미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였지만, 정작 고국인 한국에서는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아래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통영에도 끝내 가보지 못한 비극적 운명의 사나이였다.
1931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이웃 청년으로부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접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아버지의 뜻도 거역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그였다. 1935년 도일해 일본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다. 1946년~56년까지 고향 통영과 부산, 서울 등에서 교사와 강사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 때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6ㆍ25때 부산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등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동포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긴 애국자였다. 그러나 1956년 프랑스대를 거쳐 독일에 유학한 후 11년째 되던 1967년, 베를린 거주 유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대거 북한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강제 귀국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71년 독일로 귀하했다.
오늘날 그는 한국과 동양정신을 서양음악에 접목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오페라 ‘심청(1972년)’을 비롯,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나비의 꿈’ 등 1백50여 편이 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지금까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알려져 있다./조선
[1985년] 한국 축구팀,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일본 누르고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1985년 10월26일 도쿄국립경기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최종예선에서 맞붙은 한국과 일본은 “너희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는 일념에 경쟁심으로 들끓었다. 특히 현역시절부터 라이벌이던 한국의 김정남 감독과 일본 모리 감독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모았던 도쿄 원정경기에서 한국은 2-1로 승리했다.
일주일 뒤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홈2차전에서 허정무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를 거둔 한국은 32년만에 감격적인 본선진출을 이뤄냈다.
이듬해 6월 본선이 벌어지는 멕시코 땅을 밟은 한국대표팀은 차범근, 허정무, 이태호, 김주성, 김종부, 조영증, 조광래, 박창선 등 등 역대 최강을 자랑했다. 산전수전 다겪은 베테랑들인데다 각기 개성이 뚜렷해 이후 어느 대표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막강 전력이었던 것.
다만 큰 국제경기 경험이 부족한 것이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됐고, 게다가 전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와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 등 당시 ‘죽음의 조’로 불렸던 A조에 포함된 것은 불운이었다.
6월2일 아르헨티나와의 첫경기에서 비록 1-3으로 패했지만 박창선이 한국의 월드컵 사상 첫 골을 작렬시켰다. 반드시 승리를 거두겠다고 나선 불가리아와의 2차전은 장대같은 빗속에서 정상적인 경기를 펼치지 못하고 1-1로 비겼지만 사상 최초로 월드컵 승점을 얻는 순간이었다.
6월11일 푸에블라에서 벌어진 이탈리아전. 당시 ‘빗장수비’로 유명했던 이탈리아는 한국의 최순호 허정무에게 골을 내주며 간신히 3-2로 승리했다. 당시 외신은 “한국이 비록 귀국을 위해 짐을 싸야했지만 이들이 보여준 저력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Google
[1980년] 군사재판, 김대중에 사형선고 ←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정
'5.17계엄확대조치'와 함께 '사회불안조성 및 학생-노조소요의 배후조정'혐의로 연행된 김대중(金大中, 1926~ )은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돼 1980년 8월 14일 첫 공판에 이어 9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1980년 11월 3일 항소심공판에서도 원심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함께 연행된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태(고은), 김상현, 이신범, 이해찬 등도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당시 민주세력의 지지를 받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거짓임이 나중에 밝혀졌으며 후에 모두 사면 복권됐다. /조선
[1979년] 박정희 대통령 국장
국민장과 함께 정부가 법령에 따라 공식 주관하는 또 하나의 장례가 국장입니다.
정부수립 이후 국장(國葬)은 1979년 10월 26일 서거한 뒤 9일장으로 치러진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전 대통령(5∼9대)의 장례가 유일합니다.(국장이 거행된 최초의 사례는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제 두 번째 선례가 되는 것이고요. 또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최초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었다가 불의의 피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박 전 대통령 영결식은 11월 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세종로∼서울역∼동작동 국립묘지구간에서 진행된 운구의식을 거쳐 박 전 대통령의 유해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이 밖에 법률적 근거는 없지만 관행상 사회단체 등에서 주관해 치르는 장례의식도 있습니다. 우선 고인의 사회적 명망이 높았거나 국가·사회적 공훈이 클 때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사회장이 있고, 특정기관이나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조직을 위해 순직할 경우에는 기관장, 단체장, 민간 회사장 등이 거행되기도 합니다. /Google
[1978년] 도미니카 연방, 영국으로부터 독립
도미니카연방(Commonwealth of Dominica)은 1493년 콜럼버스의 제3차 항해 때에 발견되었는데, 발견일이 마침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라틴어로 일요일을 뜻하는 '도미니카'에서 도미니카라는 국명이 유래하였다. 그후 영국과 프랑스가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항쟁을 되풀이하다가 1805년 드디어 영국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그후 거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원주민인 카리브인(人)은 거의 전멸하였다.
1958년에는 영국으로부터 외교와 국방의 일부를 제외한 내정자치권을 획득하고 주변 여러 섬과 함께 서인도연합주(西印度聯合州)를 결성하였다. 이 연합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것이어서 본국(영국)과 연합주의 어느 쪽에서든지 일방적으로 그 관계를 해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967년 영국 자치령이 되었다. 1977년에 제헌회의(制憲會議)가 소집되고 다음해 7월 영국이 독립을 승인한 결과, 1978년 11월 3일 정식으로 독립함과 동시에 헌법을 공포하였다. /naver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 취임 ← 서민 정치를 지향했던 아옌데 대통령
1970년 11월 3일, 칠레 대통령에 취임한 살바도르 아옌데는 자유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세 차례 낙선 끝에 다시 출마한 그해 선거도 사회당·공산당 등 6개 정당이 연합한 ‘인민연합’의 통일후보로 나서지 않았다면 당선과는 무관했을 상황이었다. 단일후보를 내지 못한 우익의 분열도 그를 도왔다.
그러나 과반수에 미달하는 33.6%를 득표,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헌법규정을 따라야 했다. 국회의 동의를 얻은 아옌데는 곧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소득 재분배를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하층민이야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자본가와 지주들은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미국 소유의 세계 최대 구리광산을 몰수한 것은 그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미국이 CIA를 동원, 경제위기를 조장하고 군부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도 노선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1973년의 총선에서 과반수 지지를 확인한 아옌데는 돌파구를 신임투표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투표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던 1973년 9월 11일 새벽. 피노체트의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계획을 무산시켰다. 아옌데는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를 외치며 대통령 관저에서 죽음을 맞았다./조선
[1938년] 일제, 동아신질서건설성명 발표
1938년 11월 3일 일제는 중일전쟁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일만지(日滿支) 3국의 선린우호·공동방공·경제제휴를 표방한 '동아신질서건설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의 실체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 블록 결성이었다. 미국·영국·네덜란드 등이 일본에 대해 수출금지를 단행하자 1940년 7월 '기본국책강요'를 발표하고, 일만지 경제 블록을 '동아신질서는 일만지를 근간으로 하고 그것에 남양(南洋)을 추가해 황국의 자급자족경제를 확립한다'는 대동아공영권으로 확대시켰다. 일만지를 중·경공업지역으로 하고, 여기에 원료공급지·공업제품의 시장으로서 동남아시아를 결합하는 광역경제권을 구상했던 것이다. 일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구미의 식민지 지배를 타파하고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는 것이며, 이것이 태평양전쟁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선전했다. 또한 대동아공영권의 구현이야말로 구미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동아 각 민족의 생존권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지 혹은 점령지의 민족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노동력을 철저히 착취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점령지와 식민지 민중의 저항운동, 연합군의 총반격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브리태니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발생 ← 조선일보의 광주학생운동 사건 발생 호외
광주학생운동은 4일전의 ‘나주역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나주역 사건은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통학을 하는 광주중학생(일본인)과 광주고보생(조선인) 사이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일본인 중학생이 광주여자고보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을 광주고보생인 이 여학생의 사촌 남동생이 목격하면서 시비가 일어, 결국 학생들간의 편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두 여학생의 모습, 왼쪽부터 이광춘, 박기옥 →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인 순경과 언론들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편들자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은 일방적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광주일보사를 습격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집단 충돌이 일어났다. 투쟁방법을 모색하던 광주고보생들은 가두투쟁에 나섰고, 여기에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광주지역 학생들이 가세했다. 광주에서 타오른 항거의 불길은 인근 전남지역에 이어 그해 12월 초에는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번져 갔으며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공주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 동맹휴학 격문살포 가두시위 등 다양하게 전개됐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모두 1백94개 학교(전문학교 4곳, 중등학교 1백36곳, 보통학교 54곳)에서 학생 5만4천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다.
1953년부터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날을 기념해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1년] 소설가 안수길(安壽吉) 출생
1911. 11. 3 함남 함흥~1977. 4. 18 서울.
아호는 남석(南石). 주로 만주와 함경도를 무대로 민족의 수난사를 다룬 소설을 썼다.
간도 용정 광명고등여학교의 교감을 지낸 아버지 용호(鎔浩)와 어머니 김숙경(金淑卿) 사이의 2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흥남으로 이사해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2년 만주 간도로 이주했다. 1926년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동맹휴교사건과 관련해 자퇴했다. 1928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광주학생사건으로 15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과 학비문제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32년 박영준·이주복·김국진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북향 北鄕〉을 펴냈고, 1936년 간도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다 1937년 만선일보사로 옮겨 염상섭·송지영·이석훈 등과 함께 일했다. 1945년 6월 건강이 악화되어 만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8·15해방을 맞았으며 3년간 과수원에서 요양했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 차장, 조사부 부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복무했고, 1952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용산고등학교 교사,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교수,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강사, 1960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문학세계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의 문학세계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8·15해방 이전까지로 만주에서의 직접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만주에 사는 한국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민족 수난사의 의미와 결부시켜 폭넓게 제시했는데, 창작집 〈북원 北原〉(1943)과 장편 〈북향보 北鄕譜〉(1944)가 그것이다. 이 시기 그의 작품경향은 개척 이민의 전사(前史)에 해당되는 〈새벽〉·〈벼〉·〈원각촌 圓覺村〉 등과 1932년 이후 만주 개척 이민의 현단계를 다룬 〈새마을〉·〈목축기〉 등의 두 갈래로 나뉜다. 이들 초기 소설들은 '어떻게 사느냐' 라는 문제를 민족적 단위에서 파악하려는 작가정신이 밑받침되고 있다. 둘째, 월남한 이후 1950년대까지로 〈여수 旅愁〉(백민, 1949. 5)·〈밀회〉(문예, 1949. 10)·〈제3인간형〉(자유세계, 1953. 6)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작품들의 창작배경은 8·15해방과 월남, 6·25전쟁이다. 앞의 두 작품이 만주에서의 체험과 관련된 것이라면, 뒤의 것은 6·25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제3인간형이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변질된 세 사람의 지식인상을 뜻하며, 이것 역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에 대한 작가적 탐색이다. 셋째, 1950년대 말기 이후로 기념비적인 장편 〈북간도〉가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만주로 이민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4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순응주의자들의 자기기만을 폭로하고 비순응주의자의 생활태도를 옹호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적 성과를 얻고 있으며 그의 민족적 리얼리즘의 가치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외 소설집으로 〈초연필담〉(1953)·〈제2의 청춘〉(1958)·〈이화에 월백하고〉(1978) 등이 있다. 1954년에 아시아자유문학상, 1967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01년] 말로 André(-Georges) Malraux 출생
1901년 11월 3일 태어남 / 1976년 11월 23일 죽음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행동할 수 있다."
- 앙드레 말로, <인간조건>에서
말로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참여하며 극적인 삶을 살았고, 정치적 이상주의와 혁명투쟁의 비극적인 모호함을 다룬 소설을 남긴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정치가이다. 21세 때 프랑스를 떠나 캄보디아의 사원을 여행하던 중 조각품을 손상시킨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감 중 프랑스 식민당국의 학대를 받은 말로는 열렬한 반식민주의자이자 사회변혁의 옹호자가 되었다. 중국혁명운동의 여러 사건에 참여한 것이 분명하며,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공화군에 가담해 국제비행대대의 대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전차부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탈출해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샤를 드골 장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1958년 드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에는 10년 동안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 일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인간조건 La Condition humaine>(1933), 전세계 예술의 역사 및 철학서인 <침묵의 소리 Les Voix du silence>(1951), <전세계 조각의 상상적 박물관 Le Musee imaginaire de la sculpture mondiale>(1952~54)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98년] 독립운동가 조원세(趙元世) 출생
1898. 11. 3 평북 용천~1986. 9. 19.
호는 정관(靜觀). 아버지는 봉주(奉周)이다. 1920년 8월 김중량(金仲亮)·박초식(朴楚植) 등이 평안북도 의주군 동암산(東巖山)을 근거로 조직한 무장 항일단체 보합단(普合團)에 가입했다. 같은 해 9월 이광세(李光世)와 같이 용천군 동하면(東下面) 한영희(韓永禧)로부터 100원의 어음, 읍동면(邑東面) 안웅성(安雄聖)으로부터 500원의 어음을 군자금으로 받았다. 11월 박초식의 집에서 폭탄을 제조했으며, 용천군 읍동면 이일영(李日英)으로부터 현금 100원, 전자범(全子範)으로부터 4,500원의 어음을 받는 등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여 모금된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냈다. 1920년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도원(金道源)의 종로경찰서 순사 이정선(李廷善) 사살사건을 계기로 명단이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2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어 만기출옥했다.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농사를 짓는 한편, 이동판(李東坂)·심래성(沈來成)·이기성(李基成) 등과 함께 지하공작을 벌였다. 1944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이광세와 같이 동지를 규합하고 비밀공작을 하던 중 이 사실이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될 때 피신해 있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대동신문사(大東新聞社) 비서 겸 경호부장,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간부 등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72년] 한국에서 활동한 영국의 언론인 베셀(Bethell, Ernest Thomas) 출생
1872. 11. 3 잉글랜드 브리스틀~1909. 5. 1 서울.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1888년 일본으로 건너와 고베[神戶]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Daily Chronicle〉 특별통신원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의 은밀한 접촉 끝에 자금을 지원받고 1904년 7월 18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Korea Daily News〉를 창간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때부터 한국의 언론을 직접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인 베셀이 사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언론탄압이 미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히 〈대한매일신보〉가 항일언론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외교적 방법을 동원해 베셀과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을 시도했다. 일본은 1907년 10월 통감부를 통해 일본 정부와 황태자에 대한 결례, 허위보도와 선동 등을 이유로 주한 영국총영사 콕번에게 제소해 6개월의 근신 판결이 내려졌으나, 그는 이 판결에 불복, 본국 정부에 공소를 제기하고 전과 같은 항일논조를 계속했다. 1908년 6월에 다시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제도를 전복하려 함으로써 교사선동의 죄를 범했다고 해,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三浦] 명의로 주한 영국총영사관에 공소되어 영국한청고등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상하이[上海]에서 3주일 동안 금고생활을 했다. 이 2번째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 5월 27일부터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직을 영국인 A. W. 만함에게 넘겼다. 상하이에서의 금고생활 후 귀국해 활약을 계속하다가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병사했으며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브리태니커
[1852년] 일본 왕 무쓰히토[睦仁/메이지(明治), 1852~1912] 출생
1867년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이듬해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1세 1원제(一世一元制)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기간을 메이지시대라고 부른다. 1869년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아성이던 에도성[江戶城]을 왕궁으로 정하였다. 최고통치권자로서 천황친정(天皇親政)의 대의명분 아래 왕정복고를 실현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는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였다. 《군인칙유(軍人勅諭)》(1881) 《일본제국헌법》(1889) 《황실전범(皇室典範)》(1889)의 제정과 《교육칙어(敎育勅語)》(1890)의 발표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메이지를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적 천황제국가를 완성시켜 나갔다. 특히, 제국헌법에서도 왕의 국가통치 대권 ·육해군 통수권을 명기하였고, 교육칙어에서는 왕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청일 ·러일 전쟁의 승리는 왕에 대한 국민의 숭앙(崇仰)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하였다. /naver
[1794년] 미국 시인·편집자 브라이언트(Bryant, William Cullen) 출생 ← 브라이언트, Daniel Huntignton이 1866년에 그린 유화(부분)
1794. 11. 3 미국 매사추세츠 커밍턴~1878. 6. 12 뉴욕 시.
시 〈죽음에 대한 고찰 Thanatopsis〉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50년 동안이나 뉴욕 〈이브닝 포스트 Evening Post〉지의 편집자로 일했다.
초기 청교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16세에 윌리엄스대학 2학년에 입학했다. 경제적인 사정이 어렵고 예일대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 때문에 윌리엄스대학을 중퇴했다. 그러나 예일대학교의 입학이 이루어지지 않자 위딩턴과 브리지워터에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법률을 공부해 21세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뒤 플레인필드와 그레이트배링턴에서 10년 가까이 변호사로 일했으나, 이 직업을 평생 동안 혐오했다. 26세에 프랜시스 페어차일드와 결혼, 그녀가 죽기까지 약 50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1825년 뉴욕 시로 이주해 〈뉴욕 리뷰 New York Review〉지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1827년에는 〈이브닝 포스트〉지의 편집자가 되었고, 1829년 편집장 겸 공동소유주가 되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버는 돈을 신중히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으며,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어린시절 그에게 주입된 종교적 보수주의는 종교적 광시(狂詩)로 표현되었다. 13세 때에는 아버지의 정치적 보수주의에 자극받아 제퍼슨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 〈금지령 The Embargo〉(1808)을 썼다. 그러나 1817년 〈노스아메리칸 리뷰 North American Review〉지에 발표되어 그를 유명하게 만든 17세 때의 작품 〈죽음에 대한 고찰〉에서는 청교도의 교리를 버리고 이신론(理神論)을 받아들였으며 그뒤로는 유니테리언파교도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입장을 바꿔 연방주의를 버리고 민주당에 입당, 〈포스트 Post〉지를 자유무역과 노동자의 권리, 언론의 자유, 노예제도의 폐지를 옹호하는 기관지로 만들었다. 한동안 자유토지당원(Free-Soiler)이었으며 그뒤에는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27세 때 〈시집 Poems〉(1821)으로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말년에는 번역에 상당한 시간을 바쳤다. 브라이언트는 〈죽음에 대한 고찰〉·〈물새에게 To a Waterfowl〉 등의 시에서 고향 버크셔의 언덕과 시내를 노래했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4년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자 전락원 회장 별세
2004년 조지 W 부시, 존 케리 누르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재선
2002년 터키 이슬람계 정당 80년만에 단독 집권
2002년 세계최대게임대회 `월드사이버게임즈` 한국종합 1위
2000년 채권은행단, 삼성쌍용차 등 29개 부실기업의 청산-법정관리 발표
1998년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한국인 신호범(미국명 폴 신) 당선
1997년 시인 김요섭씨 별세
1989년 대불산업기지 착공
1989년 공업용 우지로 라면-마가린 등을 제조한 5개업체 대표 10명 구속(공업용 우지 파동)
1984년 11년 만에 학생의 날 부활
1983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발견(도산 안창호선생 장녀집서)
1982년 미해군, 5번째 원자력 항공모함 건조착수
1982년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 사망
1982년 삼성그룹, 조선호텔 및 주변부지 매입
1980년 입법회의,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의결
1978년 소련-베트남 우호조약조인
1976년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 당선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1970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사망
1969년 미국, 아폴로11호 우주인 방한(암스트롱, 콜린즈, 올드린 부부)
1966년 세계반공연맹 가입
1966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도착
1964년 존슨, 제35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1961년 유엔사무총장 대리에 우 탄트 임명
1958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 대관식
1957년 소련,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발사
1956년 시리아-이란군부대 요르단에 진주
1955년 바그다드조약기구 성립(터키 이라크 영국 파키스탄 이란)
1954년 프랑스화가 앙리 마티스 사망
1953년 제1회 학생의날
1948년 김구, 미소양군 철수후 통일정부수립 요지의 담화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신문 ‘고대신문’ 창간
1946년 일본, 신헌법 공포
1945년 고당 조만식 평양서 조선민주당 결성, 당수에 피임
1945년 미국, 전시생산국 폐지
1937년 브뤼셀에서 중일전쟁에 관한 9개국회의. 일본비난선언 채택
1936년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재선
1935년 필리핀공화국 수립
1908년 미국 대통령에 태프트 당선
1898년 만국우편협약 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