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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01
1. 레스토랑 / 밤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보이는 럭셔리 레스토랑. (야외 레스토랑이어도 좋고).
고급스런 반지 케이스를 여는 남자의 손.
화려한 광채, 세련된 커팅 2캐럿 크기의 다이아반지 반짝거린다.
신영 : (놀람과 기쁨으로 눈 반짝!.... 남자를 본다)
청혼남 : (수줍게 미소로)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데.... 생각보다 긴장 되고 떨리네요.
남자, 긴장한 듯 순진한 얼굴로 조심스레 케이스에서 반지를 빼 신영의 손에 끼워준다.
넷째 손가락에 찰싹 들어맞는다.
신영 : (미소) 어머...!
청혼남 :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신영 : .......너무 이뻐요.
청혼남 : 남자가 여자한테 반지를 선물로 줄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 알죠?
신영 : ......(수줍게 바라보는)
청혼남 : ....우리 만난 지 3개월 밖에 안됐지만..... 신영씨랑 처음 만난 날 부터,
내 인생에서 꼭 만나야할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고... 신영씨를 내 인생의 좋은 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영 : (행복과 감동으로 벅찬 미소)
2. 도로 / 밤
달리는 차 안.
차 안에 흐르는 음악. 센티멘탈한 팝.
남자 : 이 노래 어때요? 예전부터 정해놨던 곡이예요. 청혼한 날 집에 데려다주면서 듣고 싶은 노래로.
신영 : 집이 아니라 회사라서 미안해요.
남자 : 미안하긴요! 난 신영씨처럼 자기 일에 욕심 많은 여자가 매력 있어요.
신영 : 저 오늘 너무 행복해요.
남자 : 다음 주말쯤 어머님한테 인사가게 해주세요.
신영 : 엄마도 기뻐하실 거예요. (남자보며 푸근한 미소)
3. 방송국 앞 / 밤
차 와서 선다.
남자 : 수고해요. 배고프거나 심심하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신영 : 응, 잘 가요. (내리려는데)
남자 : (신영의 손을 잡아끌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다)
신영 : .........
남자 : (신영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가서 일해야 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신영 : ...(너무 포근하다.... 미소)
남자, 얼른 내려서 조수석의 문을 열어준다.
신영 : 전화할께요!
신영, 기쁨이 가득해 뛰어 들어간다.
가다 돌아보고 손 크게 흔들고, 온몸에서 행복이 흘러나온다.
남자, 미소로 손을 흔든다.
4. 보도국 사무실 / 밤
UBN(Universal Broadcasting Network)보도국.
반지 낀 신영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자기 눈앞에 끌어다 보는 여기자 후배와 AD와 스탭들.
후배들 웅성웅성. ‘와.. 2캐럿 넘겠는데’ ‘커팅이 예술’ ‘이거 2천 이상이야’ ‘돈 진짜 잘 버나봐’
신영, 으쓱해서 앉아있다. 행복 충만. 추운데서 떨다 따뜻한 집에 들어온 기분.
신영 : 그러니까 니들두 희망을 가져. 세상엔 아직 훌륭한 남자들이 남아 있단다.
후배1 : 난 선배 다신 연애 못할 줄 알았어.
후배2 : 옛날 남친한테 차이고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신영 : 그래서 인생은 모르는 거야.
후배1 : 옛 남친 잊으려고 아무나 골라잡은 거 아녜요?
신영 : 모든 면에서 걔보다 훨씬 나아. 걔랑 깨지길 잘했어.
후배2 : 능력있고 인물되고 돈도 많은 남자가 왜 선배를 좋아한대요?
신영 : 내 진가를 알아본 거지. 이젠 남자들도 진화하고 있어.
어리고 이쁘고 가슴 큰 여자만 찾는 건 아니더라구.
후배1 : 청혼 받은 날 야근이 웬말이냐. 그 남자가 회사로 다시 보내 줘요?
신영 : 그래서 훌륭하다는 거 아니니. 내 일까지 인정해 주니까.
난 정말 완벽한 내 짝을 이제서야 만났어!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울려댄다.
후배1 : (달려가 전화받는) 네, 사회붑니다. 네 네 말씀 하십쇼.
후배2 : 그 남자 선배랑 동갑이랬죠, 서른여섯.
신영 : (잘난 척) 뭐.... 연하가 아닌 게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후배2 : 서른여섯에 어떤 남자가 동갑을 만나요. 그 남자 진짜 훌륭하고도 남는다.
신영 : (잘난 척) 그만큼 나도 괜찮다는 증거 아니겠니. 하하하.
후배1 : 선배! 불났어요.
신영 : 어딘데? 그 쪽 2진 불러.
후배1 : 걔들 아까 공항갔어요. 새벽에 장회장 입국하잖아요.
신영 : 니가 가, 그럼.
후배1 : 저는 중부라인 돌아야하는데요.
신영, 후배2를 본다. 후배2, 한 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다.
후배2 : 주말에나 푸는데....
신영 : ..............
5. 모텔 앞 / 밤
소방차 소리 요란하다.
5층 정도의 모텔, 연기가 피어오르고 창문에서 불길도 인다.
소방관들 부산하게 뛰어다니며 물을 쏘고 있다.
보도국 차, 급하게 와서 서고 신영과 카메라 기자 내린다.
모텔 쪽으로 뛰어가는 신영, 가다가 연기에 멈춰서 기침을 한다.
소방관 ‘위험해요, 물러서요’ 신영을 밀쳐낸다.
카메라 기자, 촬영하기 시작하고.
신영, 주변에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치며 돌아다닌다.
신영 : 여기 누구 목격자 안계십니까? 신고하신 분 안계세요?
아저씨 : (구경꾼 헤치고 적극적으로 나서며) 제가 신고했는디유.
신영 : 제일 처음 목격하신거죠?
아저씨 : 에..... 술 한잔 걸치다 화장실 갈라고 나왔는데 갑자기 저 위에서 펑 소리가 나드니....
(E) : 반야심경 핸드폰 벨소리
아저씨 : (주머니에서 얼른 전화꺼내) 어, 나 지금 테레비 찍는 중이야. 바뻐. (끊고)
신영 : 선생님, 지금 한 얘기 카메라 앞에서 그대로 한번만 더 해주 실 수 있죠? 부탁드릴게요.
여자(E) : 살려주세요.
신영, 돌아본다.
3층 창문에서 손을 흔드는 20대 여자. 슬립 차림이다.
신영 : (달려가 소리친다) 저기! 저 위에 사람 있어!
카메라기자, 얼른 신영이 가리키는 쪽을 잡는데
이때 여자를 제끼고 수건을 흔드는 남자, 연기 속으로 보이는 청혼남이다.
신영 : ........ !!!!??
신영, 연기 때문에 긴가민가하다. 기침하며 손부채질로 연기를 쫓는데
소방관이 쏜 물을 맞아 젖는 남자, 큰소리로 소리친다.
청혼남 :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있어요! 여기요! 여기 사람 안보여!
소방관 : (소리치는) 여기 안전합니다. 이리 뛰어내리세요.
소방관들 펼친 안전매트로 20대 긴 머리 여자 뛰어내린다. 풀썩하고 떨어진다.
여자 : (남자에 소리치는) 오빠 뭐해, 빨리 뛰어.
신영 : (매트에 떨어진 여자와 창가의 남자를 번갈아 보는)
남자, 망설이는데 위층에서 유리창이 깨져 내린다.
청혼남 : (놀라) 으악!
남자, 뛰어내린다. 매트리스에 풀썩 떨어지는 남자.
물줄기 세례를 한차례 더 받아 머리카락이 홍해처럼 갈린다.
카메라 : 선배 뭐해! 얼른 인터뷰 따.
신영 : (남자에게 마이크 들이대며) 상황을 좀.....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남자 : (경직된 채)..........
구급대원들이 청혼남을 담요에 싸 데려 간다.
신영, 잡아볼까 하는 헛된 손짓.
멍한 신영의 얼굴 위로 소방차 호스에서 뿌려대는 물이 안개처럼 날린다.
손가락의 반지 허망하게 반짝거린다.
신영 : ..........
6. 보석상 / 낮
반짝거리는 다이아 반지를 들여다보는 감정사.
푸석하고 까칠한 얼굴로 멍하니 서있는 신영.
감정사 : 백 퍼센트 진짠데요. 그것도 최상품입니다.
신영 : ..........그럴 리가 없는데요.
감정사 : (기막힌 표정으로) 가짜라고 했을 때 그럴 리 없는데요는 들어봤어도,
진짜라는데 그럴리 없다는 대답은 감정사 생활 20년에 처음 들어봅니다.
신영 : 다시 한번 봐주세요.
감정사 : 뉴욕에서 따온 내 자격증에 걸고 말씀드릴께요. 최상품입니다.
이거 못해도 2천 넘게 주셨을 꺼 같은데.
신영 : 정말 진짜 맞아요?
감정사 : 이 칼라 좀 보세요. 보통 물건이 아니예요. 선물 받으셨어요?
신영 : ........네.
감정사 : (박스에 넣어 신영 앞에 놓는) 이런 선물 주는 남자면 당장 따라나서도 될 것 같은데요.
신영 : 그러니까요.
신영, 반지를 들고 돌아선다.
7. 고급 레스토랑 / 낮
커다란 와인셀러를 갖춘 레스토랑.
와인셀러 안에서 와인들을 고르며 열심히 라벨을 살펴보는 부기.
세련되고 화려한 옷차림, 자신감이 넘치고 활동적이다.
맘에 안 드는 표정으로 몇 병을 뽑아 놓기도 하고.
부기 : 와인 셀렉션은 훌륭한데 메뉴가 쳐지네요. 이렇게 좋은 와인은 빼버리던지 아님 메뉴를 바꾸세요.
이런 메뉴를 보고 있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요.
테이블에 접시, 와인잔 물잔 포크 나이프 등등 식기류를 쭉 늘어 놓고 보는 부기.
부기 : 식기들.... 최고급인데 일관성이 없어요. 무식한 졸부들이 집들이 할 때 이렇게 상을 차리죠.
메뉴판을 보는 부기.
사장, 떨떠름한 표정으로 부기를 쏘아보고 있다.
부기, 자신감있는 말투로 조목조목 지적한다.
부기 : 여긴 컨셉이 없는 곳입니다. 메뉴부터 인테리어까지 다 따로 놀고, 뒤쳐져 있어요.
적자가 아닌 게 이상한 거죠.
사장 : 김대표한테 맡기면 우리도 그만큼 될 수 있다 이거죠.
부기 : 지금 서울에서 제일 잘나가는 마리온, 키친 세븐, 그린 테이블. 모두 제가 오픈 컨설팅을 맡은 뎁니다.
사장 : 그럼 우리도 맡아주세요.
부기 : 대신 전 컨설팅료가 비쌉니다. 엄청.
사장 : 3개월 안에 지금 매출의 두 배 만큼 올려줄 자신이 있다면 야....
부기 : (맘에 안 드는) 두 배는 좀 그런데.
사장 : 돈 값은 하신다면서요.
부기 : 3개월에 지금 매출의 세 배.
사장 :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부기 : 컨설팅비 토해내고, 그만큼 보상해 드릴께요. 대신, 세 배를 넘을 땐 인센티브를 따로 주셔야 합니다.
(명함 꺼내놓으며) 지금 청담동하고 광화문에서 작업중이라
일을 맡기셔도 다음 달부터 착수 가능한 점도 알아주시구요.
8. 도로 / 낮
시원하게 뚫린 도로. 질주하는 부기의 최고급 승용차.
핸즈프리로 통화중.
부기 : 반지 감정해봤니?
신영(F) : 진짜래.
부기 : 잘됐네. 그거 팔아서 여행 갔다 와.
신영(F) : 나 이거 버릴꺼야.
부기 : 죽을래? 일 끝나고 들릴테니까 너 꼼짝말구 있어.
속도를 내 달려가는 부기의 차.
9. 신영네 아파트 외경 / 밤
새로 지은 깔끔한 주상복합 아파트.
10. 신영의 집 / 밤
35평형 정도의 아파트 거실.
신영 부스스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다.
초인종 소리 여러 번, 이내 성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
부기(E) : (문 두드리며 부르는) 이신영!
신영 : .......문 열렸어.
우편물을 잔뜩 든 부기, 문 열고 들어오는데 옷가지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고
피자 먹은 빈 박스(대형), 일식집 도시락세트, 맥주 캔, 구두 여러 켤레 등등 어지럽다.
부기, 냉정하고 차분하다. 너무 말짱해서 코믹하다.
부기 : .... (우편물 아무데나 던져 놓으며) 야!
신영 : (일어나 앉으며 서러운 듯) 부기야........
부기 : (피자 박스를 들어 신영을 팡 내리친다) 정신 차려.
신영 : (기절하듯 푹 쓰러진다)
부기 : 나이 헛먹니? 이제 남자한테 속지 않을 때도 됐잖아.
신영 : (누은 채 멀뚱히 눈만 뜨고) 자꾸만 변종이 생겨나. 갈수록 개량종이 나와, 나쁜 놈들이.
부기 : (남아있는 초밥 손으로 집어먹으며) 그래두 울고불고 안하고,
피자 한판에 초밥까지 챙겨먹은걸 보면 너두 개량종이야.
신영 : 그동안 다져진 슬픈 내공이야.
부기 : (남아있는 맥주 마시며) 반지는 어쨌냐?
신영 : 버렸다.
부기 : (펄쩍, 버럭) 너 미쳤어! 어따 버렸는데?
신영 : 쓰레기통에.
부기, 쓰레기통으로 후다닥 달려가 보면
텅빈 깨끗한 쓰레기통에 잘 보관한 듯 반지 케이스가 들어있다.
부기 : (비웃는) 쓰레기통에 잘 모셔놓군 뭘....
(열어보면 광채나는 반지) 와.... 이거 진짜 좋은 다이아다.
신영 : 왜 그랬을까. 어떻게 나한테 청혼하고 그날 밤에 딴 여자랑 모텔에 갈 수 있을까.
부기 : (답답하다는 듯) 내 말이!! 청혼 안하고 얌전히 모텔 갔음 욕먹을 일도 없었잖아.
신영 : (떠올리니 다시 열 받는다. 종이상자 안에 반지 던지고 구두들 던져 넣으며)
다 돌려 보낼꺼야. 그 남자가 선물한 거 반지랑 같이 다 돌려줄꺼야.
부기 : (상자에 들어간 것들 다시 꺼내 던지며) 얘가, 얘가.... 이걸 왜 보내. 배신당한 위자료로 니가 갖는 게 맞지.
정 보내고 싶으면 (허름 한 티셔츠 몇 개 뽑아 집어던지며) 이딴 거나 착불로 보내.
신영 : ..............(고개 숙인 채 가만히)
부기 : ..............우냐?
신영 : (벌떡 일어나며) 가서 물어봐야겠어. 왜 그랬는지.
부기 : (신영을 잡으며) 미친 거 아냐?
신영 : 날 진심으로 대한 시간이 다 합쳐서 30초는 됐었는지 물어볼 꺼야.
그날 왜 딴 여자랑 모텔에 갔었는지 들어야겠어.
부기 : 그 남자는 왜 하필 그날 거기 불이 났는지 궁금할꺼야. 방화범이 왜 그랬는지 그거나 먼저 알려줘.
신영 : (부기를 밀치며) 놔! 난 의문은 풀어야 돼. (겉옷을 집어 든다)
11. 고급 빌라 앞 / 밤
신영의 차, 와서 선다.
신영, 후다닥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는데 부기 조수석에서 따라 내리며.
부기 : 이러지 말구 전화를 하라니까.
신영 : 전화 계속 꺼져있다니까. 사무실 전화도 안 받아.
신영, 빌라 쪽으로 바쁜 발걸음 옮긴다.
부기,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가며
부기 : 야! 너 지금 후줄근한데 괜찮겠어? 초라해 보이는데...
신영 : ........(주춤... 걸음 느려진다, 살짝 걸리는)
부기 : 따져도 좀 꾸미고 가서 따져. 내일 파마도 새로 하구.
신영 : ...... 립글로스 있음 좀 줘봐.
부기 : 머리도 기름지구.....
신영 : (버럭) 립글로스 좀 달라니까!
부기 :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가방 뒤적거리는데)
이때 근처에서 ‘쨍그랑 와장창’ 대형 창문 깨지는 소리가 난다.
돌아보면 몸에 딱 붙는 정장차림의 세련된 여자 뒷모습, 빌라의 2층 창문을 박살을 내놨다.
왼손에 있던 차돌을 다시 오른손으로 옮겨 집더니 또 던진다.
보안업체가 설치한 센서가 깨진다.
신영과 부기는 뒤에 서 있어 다정의 얼굴을 자세히 보진 못한다.
술에 취한 다정, 빌라 한 곳을 보고 소리친다.
다정 : 박희철! 나와! 나랑 얘기 좀 해.
부기 : (소근) 그 놈 이름이 박희철이니?
신영 : 딴 사람이야.
부기 : 이 동네 터가 안 좋다.
다정 : 찰꺼면 진작 차지.... 너한테 차인 후에 내 인생이 너무 꼬여.
당장 나와. 나와서 변명이라도 해, 이 나쁜 자식아.
부기 : 넌 쟤 빠진 다음에 해야겠다.
다정 : 박희철! 너 나를 사랑하긴 했었니.
부기 : 저렇게 추할 수가.
신영 : ...... 립글로스 내놔.
부기 : (립글로스 준다)
신영 : (립글로스 받아 입술에 갖다 대는데)
다정 : (다시 한번 버럭) 야! 박희...(철)
이때 깨진 베란다 창문이 열리고 물벼락이 쏟아진다.
정다정 홀라당 젖고, 옆에 있던 부기와 신영 깜짝 놀라 허걱!
창문에서 화가 나 소리치는 장군형의 아줌마.
한손엔 김장 할 때 쓸법한 목욕통만 한 고무다라이를 들고 있다.
아줌마 : 박변호사 이사갔다고 몇 번을 말해! 신고하기 전에 제발 좀 꺼져.
다정 : (에취) 다 죽었어.....
아줌마 : 거기! 니들도 한패냐? 이것들이! (손에 든 고무다라이를 신영을 향해 내던진다)
신영과 부기, 놀라서 도망가는데 가속도 붙어 날아온 고무다라이가 신영의 상반신을 덮어쓴다.
신영, 고무다라이 쓴 채 와장창 넘어진다.
멀리선 웽웽웽 사이렌 울리며 보안업체 차 달려온다.
부기, 고무다라이를 들춰내고 넘어진 신영을 일으킨다. 두 사람 달아난다.
12. 신영 집 / 밤
얼빠진 듯 집으로 들어오는 신영과 뒤에서 깔깔대는 부기.
부기 : 아까 그걸 동영상으로 찍어놨어야 하는건데.... (깔깔...)
아우, 목말라. (냉장고 문 열고 쥬스 꺼내는)
신영 : 아... 답답해. (여전히 진지한) 그 반지가 가짜였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최상품 진짜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 엄마한테 인사도 온다고 했단 말야.
부기 : (인상 팍 쓰며) 너두 그 순진함을 좀 버릴래? 짜증난다.
신영 : 내가 왜 기자가 됐는지 알아? 궁금한 게 너무 많고, 세상에 알려주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기자가 됐어.
나 지금 미칠 것 같아. 그 사람은 왜 그랬는지, 아까 물벼락 맞은 여자는 또 정체가 뭔지.
부기 : 그 여자 구두랑 백, 멜리오니 가을콜렉션 한정판이었어. 보통 여자는 아냐.
신영 : 난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치만 서른여섯 살에, 날 사랑해주는 남자 하나 없이 지낼 줄은 정말 몰랐어.
부기 : 서른일곱엔 생길꺼야.
신영 : 그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난 거 아닐까.
부기 : 그 놈을 마지막으로 너의 삽질은 끝났어. 이제 진짜 괜찮은 남자 만날꺼야. 믿어 봐.
신영 : 우울해.
부기 : 우편물이나 확인하고 자빠져 자. (가방 챙겨 현관으로)
신영 : .....(우편물로 시선. 건성으로 보다가 놀라 청첩장 봉투 하나 를 집어 든다) 헉!
부기 : (신발 신다 버럭) 왜 또!
신영, 급하게 봉투를 뜯는다. 열어 보고 멍해진다.
신영 : ......윤상우 결혼한대.
13. 공원 일각 / 낮
낙엽 지는 가을. 다투는 상우, 신영.
상우 : 2년? 너 지금 2년이라 그랬니?
신영 : 상우야, 2년 금방이야. 니 비행스케줄 때문에 여기 있어도 우리가 자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상우 : 그래서 싫다는거야. 여기 있어도 자주 못 보는데 더 떨어져 있겠다구.
신영 : 너 워싱턴 스케줄 나오면 거기서도 볼 수 있잖아.
상우 : 너 그만하면 훌륭해. 또 무슨 욕심이 나서 2년 연수를 간다는 거야.
신영 :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그래.
상우 : 너 지금 서른셋이야. 2년 후면 서른다섯에 온다는 건데... 다 늙어서 결혼할래? 애는 환갑에 낳구?
신영 : 서른 다섯에 결혼하면 안되는거니?
상우 :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신영 : .........(상우가 어린애 같고, 황당하다) 일에 욕심을 낸다고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 나 너 사랑해.
상우 : ........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죽어도 연수를 가겠다면 헤어지잔 싸인으로 알겠어. (화나서 걸어간다)
신영 : 상우야.......
상우 : (뒤돌아 보지 않고 멀어져 간다)
신영 : ......(멀어지는 뒷모습 보고 있다가) ....안 갈게. 내가 잘못했어.
신영, 달려가 상우의 손을 잡는다. 상우, 뿌리치고 걸어간다.
신영 다시 달려가 손 잡는다.
두 사람, 투닥투닥 하다가 이내 손잡고 걸어간다.
14. 텅 빈 아파트 / 낮
30평형 대 아파트. 부동산 실장과 집 보고 있는 신영, 상우.
상우는 신나있다. 여기저기 보며 입이 헤벌쭉.
상우 : 역시 남향이라 밝고 좋네요. 겨울에도 길게 햇빛이 드니까 난방비도 절약되고.....
실장님, 여기 좀 싸게 해주세요.
실장 : 날짜는 언제로 잡으셨어요?
상우 : 집을 일단 마련해야 날을 잡던지 말던지 하죠. 이 집 맘에 드는데요.
상우, 다른 방으로 뛰어가며.
상우 : 이 방에서 보는 전망도 참 맘에 드네요.
실장 : 원하시는 선에 맞춰서 집 주인이랑 얘기해볼게요.
신영, 거실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있다. 상우처럼 신나있지는 않다.
상우, 방에서 헤벌쭉 웃으며 나오는데 멍하니 창가에 서있는 신영을 본다. 우울해 보인다.
상우 : .............
신영 : ........(인기척을 느끼고) ...!! (미소 지으며) 다 봤니?
상우 : ......넌? 저 쪽 방은 안 봤잖아.
신영 : 이 집이 제일 낫네.
상우 : ........ 별로 맘에 안 든다고 니 얼굴에 써있는데.
신영 : 아냐. 맘에 들어.
상우 : 그럼 집은 맘에 들어도 나랑 같이 살고 싶진 않은거야?
신영 : (짜증스런) 또 무슨 소리야.
상우 : 아니라고 해도 다 보여.
신영 : 나 힘들게 포기했어. 너 자꾸 이러지 마.
상우 : .........가.
신영 : 뭐?
상우 : 연수가라구.
신영 : .........상우야.
상우 : 우린 헤어지는 게 좋겠다.
신영 : ................
15. 미국 워싱턴 몽타주 / 낮
학교로고 찍힌 후드티 입고 책 들고 걸어가는 신영. 마주치는 외국인 동료들에게 인사하는 신영.
신영(E) : 상우야,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 있니, 메일에 답장 좀 해주지...
난 잘 지내. 숙제가 너무 많아서 매일 3시간 밖에 못자지만
행복해. 워싱턴 비행 나오면 꼭 좀 와줘. 보고 싶어 많이 보고 싶어.
파티. 개인 집에서 만든 조촐한 파티, 외국인 친구들과 건배하고 사진 찍고 즐거운 신영.
일본 여기자, 다가와 묻는다.
일본여기자 : 이제 연수 끝나면 바로 한국 들어가니?
신영 : 아니, 토마스네팀 따라서 체첸 반군들 취재하고 갈꺼야. 회사랑도 얘기됐어.
일본여기자 : 남자친구는 연락없구?
신영 : 2년 동안 한 번도 연락 없어. 나도 이제 다 잊었어.
16. 숲 속 / 낮
러시아 변방. 카프카스 산맥의 한 숲 일각.
미국 남자 토마스, 군 복차림을 한 체첸 사람들과 얘기 중.
신영, 한 쪽에 노트북 펼치고 쭈그려 앉아있다.
토마스 : (영어) 신영, 여긴 안전할꺼야. 그래도 혼자 멀리는 나가지 마.
신영 : 오케이!
숲 속 일각. 신영, 캠코더 들고 촬영하며 걷고 있다.
한참을 혼자 걸어가는데 아련히 멀리서 총소리가 들린다.
신영, 놀라 옆길로 뛰어가는데 밧줄로 엮는 덫에 걸려 몸이 거꾸로 들린다.
그물에 갇혀 허공에 떠 있는 신영.
신영 : 살려주세요! 토마스! 토마스!
그물망에 갇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신영.
해가 기운다. 신영, 눈물이 글썽.
신영 : 엄마........ 상우야.... 보고 싶다...
바람이 분다. 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신영, 그물 사이에 끼어 찌그러진 채 멍하니...
신영(E) : 왜 그런 기회가 나한테 왔을까. 시간을 다시 돌린대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
일 욕심 많은 내가 나빴나.....
나는 절대 버릴 수 없고, 상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기회가 왜 나한테 왔을까.
외롭게 살라는 하늘의 계시였나.
밤이 되고, 다시 낮이 된다. 다시 해가 기운다....
신영 : 상우야... 보고 싶다....
신영, 점점 탈진해 가는데 저만치서 수풀 헤치는 소리가 들린다.
신영 눈을 떠보면 총을 든 군인들, 신영에게 다가온다.
신영 :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그 중 험악하게 생긴 한 군인, 신영에게 총을 겨눈다.
신영 : .........(눈물이 핑글.....)
신영, 그 시간이 영원 같다.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 총소리 탕! 신영의 덫, 땅으로 툭 떨어진다.
그물 뒤집어 쓴 채 땅바닥에 누워 얼어붙어있는 신영.
토마스 달려온다.
토마스 : 신영, Are you alright?
17. 공항 / 낮
기장, 승무원들과 걸어오는 부기장 윤상우.
커다란 가방에 짐 잔뜩 놓고 앉아있는 신영, 저 멀리 걸어오는 상우를 보고 달려간다.
신영 : 상우야!
상우 : ..........
신영 : 나 방금 도착했어. 너 비행스케줄 있는 거 알고 여기서 기다렸어.
상우 : (냉정) 왜?
신영 : .......나 너 사랑해. 2년 동안 하루도 잊지 않고 있었어.
상우 : 그건 니 사정이구.
신영 : ........
상우 : 나 결혼하고 싶은 여자 생겼어. 날 잡으면 청첩장 보낼게.
신영 : ........! 상우야 이건 아니지.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상우 : 너랑 같이 보낸 시간,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
신영 : 그럼 뭐가 중요한건데.
상우 : 넌 일하고 출세하는 게 중요하고, 난 날 사랑해주는 여자랑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해.
신영 : 나도 너랑 같이.....
상우 : (말 끊어) 와... 이신영, 얼굴 좋아 보인다. 워싱턴 연수까지 다녀왔으니
앞으로 엄청난 활약 기대해도 되겠지? 수고!
18. 공항 일각 / 낮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
멀어지는 비행기 보며 눈물 흘리는 신영. 몇발짝 걷다가 푹 주저앉아 흐느낀다.
19. 신영네 거실 / 밤
눈물이 뚝 떨어지는 신영. 상우의 청첩장을 구긴다.
신영 : (이를 악무는) 윤상우...... 날 놓친 걸 피를 토하면서 후회하게 해주마......
(버럭) 그런데 방법이 없네... 아으윽!!
청첩장 박박 찢는다. F.O.
20. 기자회견장 / 낮
많은 카메라와 기자들로 북적이는 회견장. 태극기와 영국국기 벽에 걸려있다.
신영, 카메라 앞에 서서.
신영 : 옛날 애인에게 청첩장을 보내는 남자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아직도 못 잊고 있다는 뜻으로?
남자들의 배배틀린 속마음을 알고 싶은 UBN뉴스 이신영입니다.
카메라후배 : 여자들은 하여간..... 남자는 여자들처럼 복잡하지 않아. 그냥 결혼한다고 알려주는거야. 단순하게.
신영 : 글쎄 그걸 왜 알려주냐고, 왜!
카메라 : 혹시 알아? 선배가 술 먹고 밤에 전화할지, 아니면......
신영 : 아님 뭐 미련이라도 남았을까봐? 흥! 누가? (아무거나 걷어차며) 웃기고 있어. 웃기고 있어.
카메라후배 : (신영을 물끄러미 보며) 혼자 보기 아깝다니깐.
신영 : 어? 나온다.
멋진 정장차림의 외국 회장과 한국 전경련 고위인사 웃으며 입장 한다.
사진 후렛쉬 정신없이 터지고 뒤에 따라 나오는 정다정.
남색 수트차림에 하이힐, 깔끔한 진주귀걸이, 품위와 지성이 돋보이는 눈부신 미모.
여유 있고 우아한 걸음걸이. 지난밤의 추태는 찾아볼 수 없다.
기자들 무리에서 한 사람, 소리친다.
기자 : 회장님, 악수 한번만 부탁드립니다.
다정, 뒤에서 영국 측 회장에게 뭐라 속삭인다.
두 사람, 기자들 앞에서 웃으며 악수한다.
다시 한 번 카메라 플래쉬 터지고 정다정은 한 발 물러서 미소로 지켜본다.
그런 다정을 바라보고 있는 신영. 갸우뚱.
신영 : 저 여자 누구지..... 낯이 익는데...
21. 보도국 편집실 / 낮
신영, 테잎 돌려보고 있다. 다정의 모습, 곳곳에 찍혀있다.
신영 : 아, 진짜.... 샘슨 회장보다 이 여자를 더 많이 찍어놨어.
후배1 : 이 사람 인터뷰 해보심 어때요? 얘기 될 것 같은데.
신영 : 어떻게 얘기가 되는데?
후배1 : 지금 제일 잘나가는 통역사잖아요. 나라경제를 살린 적도 있고.
신영 : 이 여자가?
후배1 : 작년에 미국 윌러 회장 왔을 때요, 만찬 중에 다혈질 장태광 회장이 욱해서 엄청난 소리를 했는데
저 여자가 그걸 개그로 통역해서 아무일 없이 넘어갔대요.
그대로 직역했음 협상도 깨지고 파장이 엄청 났을꺼라구.
신영 : 결혼은 했나?
후배 : 노처녀래요.
신영 : 갑자기 정이 확 가네. 더빙실 비었나 좀 봐줘.
후배 : 네. (자리뜨고)
하명석, 다가온다. 모니터 보며.
명석 : 아니 이게 누구야. 정다정 아냐.
신영 : 아세요?
명석 : 우리나라 최고 미모의 통역사 아냐. 비록 나한테는 차였지만.
신영 : (놀라) 예? 선배랑 사귄 적 있어요?
명석 : 아는 후배가 소개팅 하라길래 싫다 그랬지. 아무래도 저 여자가 뉴스에서 날 보고 찍은 거 같아.
신영 : 설마요.
명석 : 저런 여자 피곤해. 눈만 높고, 똑똑한 척 잘난 척 혼자 다 할 껄.
신영 : 아닐 수도 있잖아요.
명석 : 아니어도 서른여섯 살 먹은 여자를 내가 왜 만나겠냐.
신영 : 선배 서른아홉이잖아요.
명석 : 스물일곱 큐레이터랑 요즘 만나고 있습니다.
신영 : 띠 동갑연하랑 얘기가 통해요?
명석 : 이쁘면 다 통하는 법이지. 나이 많다고 꼭 얘기가 통하냐?
넌 나이도 많고, 이쁘지도 않고, 얘기도 안 통하잖아.
신영 : 감사합니다.
명석 : 그날 밤 그 난리를 치고도 뻔뻔하게 출근하는구나.
신영 : ..........
명석 : MBS는 모텔 근처에 달린 CCTV 다 훑어서 방화범이 휘발유 통 들고 가는 그림까지 건졌는데....
현장 나간 이신영은 대체 뭘 하신건지. 그 정도로 물먹었음 넌 앞으로 10년이 괴로울꺼다.
신영 : 괴로워하면서 견딜테니까 걱정마세요.
후배 기자1, 뛰어오며.
후배1 : 선배, 부국장님이 찾으세요!
22. 부국장데스크 앞 / 낮
부국장, 신영을 보며 부드럽게.
부국장 : 이신영, 요즘 도는 얘기 정말이야?
신영 : .....무슨......
부국장 : 명퇴 신청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신영 : (놀라) 그런 얘기한 적 없는데요.
부국장 : (실망, 못 마땅,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래? 난 분명히 그렇게 들었는데 이신영 명퇴한다구.
정말 아냐?
신영 : 절대 아닙니다 부국장님.
부국장 : 그래? (퉁명스럽게) 알았으니 가봐. 기사 좀 빨리 쓰고.
신영 : ........네, 알겠습니다.
23. 보도국 복도 / 낮
신영, 울적하게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명석 : 부국장이 뭐라셔?
신영 : 뭐라시긴. 아이템 얘기하다 왔죠.
명석 : 명퇴 얘기 안 해?
신영 : .......아뇨.
명석 : 회사도 어려운 데 니가 좀 나서주면 좋겠다. 보도국에서도 서 너명 걸러내야 하나보던데.
신영 : 왜 하필 난데요?
명석 : 널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너 여기 계속 남아봤자 어떤 비젼이 있겠냐.
니가 9시 뉴스 앵커를 하겠냐, 보도국장을 하겠냐.
신영 : 선배는 10년 동안 꾸준히 날 무시하는데요. 저 워싱턴 연수도 다녀 왔어요.
명석 : 라인이 바뀌었잖니. 2년 전 국장 부장은 무작정 돌쇠마인드로 덤비는 널 기특하게 봤지만
지금 데스크들은 능력우선이지. 이제 넌 기댈 데가 없다.
신영 : 전 바빠서 이만. (돌아서는데)
명석 : 시집은 안 갈꺼냐?
신영 : 특종 백 개쯤 더 한 다음에요.
신영, 서러움이 올라와 목이 아프다. 눈가 벌개져서 눈물 참으며 걸어간다.
복도 끝까지... 참으면서.
24. 레스토랑 / 밤
오픈 직전의 매장. 아직 가구도 없고 허름하다.
목장갑을 끼고 작업복 차림의 부기. 사다리를 들고 화난 듯 바쁘게 움직인다.
부기 : 인테리어 팀은 조명을 어디다 준거야. 어디서 뒷돈 받고 형편 없는 델 데려왔어...
(사다리로 올라가 전구 뺀다) 여긴 램프를 뺄게. 벽 쪽 조명 좀 켜봐.
벽 쪽 조명에 불 들어오면.
부기 : 오케이! 그게 낫지. 조경팀 내일 언제 도착하는지 체크하고 아르바이트 지원자 명단 좀 뽑아다 줘.
신영, 들어온다.
부기 : (반갑게) 어? 이신영!
한 쪽에 신문지 펼쳐놓고 싸온 도시락 먹는 부기.
커다란 찬합에 밥이 가득, 옆엔 김치와 계란말이 멸치, 각종 야채들과 과일 등등등.....
신영, 배고팠듯 달게 먹고 있다.
부기 : 밤참 싸오기 잘했다. 아직까지 저녁도 못 먹고 뭐했니.
신영 : 9시 뉴스 있는 날은 정신없지 뭐.
부기 : 웬만한 식당보다 내 도시락이 훨 낫지? 조미료도 하나 안쓰고.
우리 건강하게 천년만년 잘살자.
신영 : 천년 만년 외롭게?
부기 : 너 이제 주말에 할 일 없지? 나랑 같이 땅이나 보러 다니자.
신영 : 나 그 남자 용서할꺼야.
부기 : 누구?
신영 : 누구겠어.
부기 : .........설마..... 그 반지남?
신영 :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구차하게 변명하는 전화 한 통화 없어.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는거지.
와서 질질짜고 용서를 구하는 것 보다 훨씬 쿨하지 않니.
그날 실수는 했지만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란 거야.
부기 : 그런 게 쓰레기가 아니면 누가 쓰레기야. 너야?
신영 : 청혼 받던 그날 밤으로 다시 돌아갈래.
부기 : (밥 싸주며) 자, 쌈 한 입 먹어 봐. 금방 제 정신으로 돌아 올꺼야, 신영아.
신영 : 나 추워. 이젠 말끔한 새 코트 아니라도, 대충 털어서 입고 싶어.
부기 : .........너 그렇게 궁해? 그 남자를 용서할 만큼?
신영 : (밝게) 나이 드는 게 이런 거지 뭐. 두루두루 이해하고 감싸 안을 수 있게 마음이 넓어지는 거.
(미소) 안 그래?
부기 : (눈길 안 준채) 누구세요?
신영 : 나 내일 자랑스런 선배상 받으러 가거든.
미용실 가서 이쁘게 하고, 학교가서 상도 받고, 그 남자 만나러 갈꺼야.
부기 :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말해서 미안해.
25. 미용실 / 낮
신영의 화사한 변신.
머리 다듬고 드라이 하고, 네일 관리 받고, 메이컵 받는 신영. 마음 가벼워 보인다.
눈 깜빡깜빡하며 웃어본다.
26. 방송국 복도 / 낮
산뜻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신영. 아나운서 장해진, 마주 오다.
해진 : 우와.... 자기 오늘 무슨 시상식 가? 너무 이쁘다.
신영 : 고마워. 애기는 잘 크고?
해진 : 그럼, 돌잔치 때 초대할게. 자긴 근사한 남자한테 청혼받았다며?
신영 : 근사한 애들 아니면 같이 안 놀잖아.
해진 : 난 자기 결혼 못할 줄 알았는데 너무 다행이다. 결혼식에 꼭 갈게.
신영 : 돌 잔치에 남친이랑 꼭 갈게. 수고!
해진 : (돌아서다) 참, 아까부터 1층 카페에 손님이 와있는 것 같던데. 사무실로 전화가 계속 왔었어.
신영 : (반가움) 누구? 남자?
혜은 : 아니, 여자.
신영 : ??
27. 방송국 카페 / 낮
신영,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들어서는데.
여자(E) : 여기요!
신영, 보면 20대 여자 손을 흔든다. (생각없고 철없고 단세포 20대녀)
신영 : .....(누군지 잘 모르겠는).....
여자 : (웃으며) 저 몰라보시는구나....
신영, 여자를 빤히 보는데.....
플래쉬 백 -- 모텔에서 소리치고 뛰어내리는 모습.
신영 : .........(인상 구겨지며) 혹시...?
여자 : 네, 그날 오빠랑 같이 있었던...
신영 : ........여긴 웬일이예요?
여자 : 오빠가 반지 돌려달래요.
신영 : !!!
여자 : 지금 받아갔음 좋겠는데.... (손가락 보면) 안 끼고 계시네요.
신영 : ..........
여자 : 화나서 안 끼고 계시구나. 그럼 더 잘됐네요. 언제 돌려주실래요?
신영 : 그 사람 더러 직접 와서 찾아가라 그래요.
여자 : 오빠를 만나서 뭐하시게요? 오빠는 절대 날 못 떠나요. 날 사랑한대요. 내가 더 편하대요.
신영 : 삼촌이란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여자 : 언니야말로 정신 좀 차리세요. 그 나이에 왜 그렇게 순진해요?
오빠처럼 잘난 남자가 노땅 동갑을 사랑할꺼라고 믿은 거예요?
신영 :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여자 : 이러니까 오빠가 부담스러워하지.
신영 : ............
여자 : 똑똑하고 마누라감으로 나쁘진 않은데 부담스럽다고 했었어요, 저한테.
신영 : 얘기 다 했음 일어나 줄래요?
여자 : 반지 돌려 주실꺼죠? (냅킨에 적어놓은 핸드폰 번호를 내밀며) 이리 전화주세요. 받으러 갈께요.
신영 : 너 모텔에 드나드는 거 부모님도 알고 계시니?
여자 : (웃으며) 뭐야.... 완전 촌스럽게....
신영 : 다음부턴 싸구려 모텔말고 특급호텔에 데려가 달라고 해. 아님 오빠네 집에서 재워달라고 하던가.
딴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한테 그렇게 해준단다.
여자 : 연락주세요. 안 돌려주면 고발할꺼야.
신영 : 고발이 아니라 고소가 맞아.
여자 : 흥!
여자, 일어서서 가려다 문득 뒤돌아.
여자 :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 나이까지 결혼도 못하고 애인도 없이 지내면 어때요? 너무 궁금해.
신영 : (여자를 빤히 보다가) .........살만해!
여자 : (살짝 비웃는 미소로 고개 끄덕끄덕)
신영, 혼자 남겨진 채 앉아 있는데 ‘와’ 하는 함성과 박수소리.
28. 고등학교 소강당 / 밤
‘자랑스런 동문의 밤’ 플래카드 붙어있다.
신영과 정다정의 대형 걸개사진, 양대 산맥처럼 걸려있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과 교사들 앉아있다.
신영, 앞에 서서 밝고 자신있고 당당한 표정으로 얘기 중.
학생들, 디카와 핸드폰으로 신영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신영 : 졸업한지 벌써 16년이 됐어요. 그 때 꼭 방송기자가 되고 싶단 꿈을 가지고 교정을 나섰는데
운 좋게 꿈을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도 가슴속의 꿈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앞에 서 있는 정다정. 자신감 넘치고 아름다운 자태 뽐내며 서있다.
다정 : 사랑스런 후배 여러분 반갑습니다. 정다정입니다. 전 지금 동시통역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제 일을 정말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신영, 옆에 앉은 중년선생과 소근.
신영 : 저 사람이 우리학교 나온 줄 몰랐어요.
선생 : 독일어 반이라서 몰랐겠지. 사실 학교 다닐 때랑 얼굴이 많이 달라졌어.
신영 : ......아.... (알겠다는듯 고개 끄덕끄덕)
다정 : (영어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어요.
지금껏 지나온 백년보다 앞으로 10년 동안 더 많은 게 변하리라고 봐요.
신영, 다정을 바라본다.
플래쉬 백-- 보도국 편집실.
명석 : 저런 여자 피곤해. 괜히 눈만 높고, 똑똑한 척 잘난 척 혼자 다할껄.
신영 : 아닐 수도 있잖아요.
명석 : 아니어도 서른여섯 살 먹은 여자를 내가 왜 만나겠냐.
다정, CF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이야기하는 중.
다정 : (영어) 크고 높은 비젼을 가져요. 야망을 가지세요. 여러분에겐 무한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선생 :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통역 좀 해줘.
신영 : (웃으며) 저도 못 알아들어요.
다정 : (영어) 우리집은 가난해, 난 키가 작아, 난 성적이 나빠... 미리 겁먹고 자신의 꿈을 시시하게 잡지 마세요.
왜? 우리는 소중하니까. 매일 거울 앞에서 한 번씩 말해요.
(자기 가슴을 치며) 나는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신영(E) : (동시통역 톤으로, 다정의 속마음을 통역하듯) 안녕하세요.... 36년 간 싱글로 살아온.....
외로움의 절정 정다정입니다. 오랜 세월 난 영문도 모른 채 싱글로 살아요.
(가슴을 치며) 지성과 미모를 갖춘 내가.
다정 : (영어) 전 여러분께 멋진 미래를 위한 세 가지를 알려 드리고 싶네요.
(세 손가락 꼽으며) 건강한 몸, 독서, 외국어 공부.
신영(E) : 남자들은 그저 가슴 크고 이쁘면 돼요. 인문 역사 상식보단
(세 손가락 꼽으며) 다이어트, 보톡스, 실리콘이 장땡입니다.
학생들 박수친다..........
학생들 한쪽에 차려진 다과테이블에서 쿠키와 음료수 마시며 신영, 학생들에게 싸인해 주고 사진도 같이 찍고...
다정 : 신영아!
신영 : .........안녕하세요.
다정 : 웬 존댓말?
신영 : 아니... 학교 다닐 때 본 기억이 없어서.....
다정 : 우리 1학년 때 스크린 영어반이었잖아. 나 은테 안경쓰고 머리 묶고...
우리 둘이 해리 샐리 역으로 연기도 했었잖아.
신영 : ........(기억이 떠오르는) 어머!! 그럼 그 정다정이 바로 너야?
다정 : 나 니 팬이야. 너 특종상도 받고 그랬었지? 오늘 기자회견 때도 너 봤어.
신영 : 아는 척 좀 하지. 나는 너 동창인 줄도 몰랐어.
다정 : 아깐 정신 없었구.... 나 오늘 몸살 기운 있어서 안 올까하다가 너 볼려구 일부러 온거야.
우리 맥주나 한잔 할래?
29. 바 / 밤
맥주 마시는 신영과 다정.
다정, 맥주병을 비운다.
다정 : (웃으며) 여기 한 병만 더 주세요.
신영 : 감기 기운 있다면서 괜찮니?
다정 : 괜찮아.
신영 : 감기는 어쩌다 걸렸어?
다정 : 그저께 밤에 갑자기 비를 맞아서.
신영 : 그저께 밤에 비 안왔는데.
다정 : !! 아... 동경엔 왔어. 그날 도쿄에 있었거든.
신영 : 응............
맥주가 온다.
다정 : 자, 우리 다시 건배!
신영 : 나 그렇잖아두 너 취재하고 싶었어. 조만간 내가 인터뷰 요청 할게.
다정 : 신영아, 넌 매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잖아. 괜찮은 남자 어디 없니.
신영 : (살짝 빈정상한다) 날 만나고 싶은 이유가 그거였구나. 남자 소개해 달라구.
다정 : 아니... 넌 인맥 풀이 넒을 것 같더라구... 나야 맨날 높은 어르신들 아님 외국인사들이니까...
괜찮은 남자있음 좀 소개 해주라.
신영 : 너 남친없어?
다정 : 없어. 5년 사귄 남친이랑 깨진지 오래야.
신영 : 그 사람이 혹시 박희철이니?
다정 : (경악) !!!!!
신영 : 그 사람 성북동 빌라에 살지 않아?
다정 : (강하게 다그치는) 어떻게 알아! 너 혹시 희철이 사귀니, 지금?
신영 : 아니.
다정 : 그런데 어떻게 알아. 희철이 새 애인이 너야? 맞지?
신영 : (불쾌해지는) 아니라니까.
다정 : (집요한) 그런데 어떻게 아냐구!
신영 : 너 그날 물벼락 맞았잖아. 동경에서 비 맞은 게 아니라.
다정 : ...........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적막. 시간이 멈춘 듯.
다정 : 여기요! 보드카 스트레이트.
신영, 가만히 앉아있다.
보드카 거의 반병이 비었다. 다정,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술만 마신다.
신영, 괜히 미안해 눈치 보며.
신영 : 아니... 난 너 기분 나쁘게 할려는 건 아니었구 다만.... 야, 좀 천천히 마셔.
다정 : (일어서며) 응급실 좀 가야겠다. 나 좀 데려다 줄래?
30. 병원 응급실 / 밤
신영을 끌고 들어오는 다정.
신영 : (따라오며) 너 어디 아픈거니? 위에 탈났어? 몸살이 심해?
다정, 비어있는 침상 한 곳에 덮치듯 뛰어올라 드러눕는다. 벌러덩.
신영 : (허걱) !!!
레지던트 한명 달려와 묻는다.
레지 :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다정 : 심장이 불편해요. 심장내과 김동찬 선생 좀 불러줘요. 오늘 당직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레지 : .........(목에서 청진기 내리며) 일단 저희가 먼저.....
다정 : 불러 달라니까요!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심장이 탔어요. (버럭) 빨리 오라 그래.
신영 : (허걱) !
신영, 다짜고짜 침상을 끌고 나간다.
31. 병원 복도 / 밤
침상을 밀고 달리는 신영.
다정 : 야, 너 어디 가.
신영 : 시끄러 너 조용히 해.
다정 : 야, 차 돌려. 당장.
신영 : 그제는 박희철, 오늘은 김동찬. 곳곳에 남자두 많다.
무서운 침상, 가속도가 붙어 무서운 속도로 굴러간다.
휄체어 타고, 링겔병 들고 걸어가던 환자들 모두 놀라 비켜선다.
당황한 휠체어, 엎어지고.
다정 : 야, 속도 줄여. 무서워.
신영, 있는 힘껏 침상을 확 밀어버린다.
다정, 눈이 동그래져 앞을 본다. 쭈르륵 굴러가 복도 벽에 쾅!
다정, 침상 아래로 떨어진다. 으악!
32. 부기네 거실 / 밤
각종 책과 잡지들로 빼곡히 찬 거실. 신영네 집 보다 훨씬 넓고 이국적으로 꾸며져 있다.
CNN 틀어놓고 스텝퍼 위에서 운동하며 TV보는 부기.
(E) : 아파트 인터폰 벨
부기 : (버튼 누르고) 네.
신영(F) : 아 짜증나, 치즈 좀 빌려줘.
부기 : ??
33. 신영네 거실 / 밤
치즈 나이프로 여러 치즈들을 얇게 썰며 신영과 다정을 유심히 보고 있는 부기.
다정, 한 쪽 종아리와 무릎에 파스로 도배를 했다.
다정 : 그 의사는 소개팅하고 다섯 번이나 잘 만났어.
친구커플이랑 넷이서 같이 논적도 있고 만날 때마다 즐겁고 좋았어.
신영 : 그런데 갑자기 연락을 끊은거야? 문자도 씹고, 전화도 안 받고?
다정 : 그것도 만날 약속을 해놓고. 주말에 양평으로 숯불갈비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
난 그날 입고 갈 옷까지 사놨는데 연락이 없어.
부기 : 유부남이 아니라면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었나 부죠.
다정 : 그럼 소개팅은 왜하고 다섯 번이나 왜 만나요?
부기 : 안될 껀 또 뭐예요.
신영 :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다정 :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신영아, 전화 좀 쓸게.
다정, 신영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들어 버튼 누른다. 귀에 대고 신호 가는 소리를 듣는다.
화들짝 놀라 끊고 전화기를 퍽 던지는 다정.
다정 : 나쁜 놈. 딴 번호 뜨니까 받는 거 봐!
신영 : 그렇다구 막 던지냐. 새 건데. (떨어진 핸드폰 주워 바지에 닦는데)
잠시 후, 신영의 핸드폰이 울린다.
다정, 얼른 발신번호를 본다.
다정 : 그 남자야. 니가 받아서 좀 물어봐줘. 왜 그랬냐구.
신영 : 내가? 싫어.
다정 : 내가 받음 끊을 것 같아서 그래.
부기 : 주세요, 내가 받을게.
부기, 핸드폰을 뺏어 받는다.
부기 : 여보세요. 김동찬씨 되시나요?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당신 대체 왜 그런거야.
신영, 뒤에서 부기를 덮친다. 부기, 엎어져 뒹굴고 신영, 핸드폰을 뺏어 끊는다.
부기 : 아흐 아퍼..... 너 왜 이래?
신영 : 그저께 생각을 해봐. 말린 사람이 누군데.
부기 : 말렸어도 끝까지 갔잖아. 물벼락 맞는 여자만 아니었음 너도 똑같은 짓 했을 꺼 아냐.
다정 : (표정이 굳고) !
(E) : 핸드폰 벨
세 사람 울리는 전화를 보고 있다.
신영 : ..........
다정 : ..........
부기 : .........
서로 마주보다 이내 신영, 전화 받는다.
신영 : 여보세요. 정다정씨 아시죠? 전 다정이 친구 이신영이라고 합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다정 : (긴장으로 꿀꺽)
신영 : 직접 만나 뵙고 싶은데 15분 후에 병원로비에서 뵈면 어때요? 네, 감사합니다.
다정 : 왜 전화로 안 물어보구?
신영 : 어떤 놈인지 얼굴 좀 볼라구. 가자! 부기 너도 같이 가.
부기 : 내가 왜?
신영 : 가보면 알아.
34. 병원 일각 / 밤
부기, 관심 없다는 듯 의자에 앉아 통화중.
부기 : 직원들 유니폼 봤는데요, 에이프런 길이를 좀 더 길게 해주세요. 칼라는 무채색이 좋겠구요.
다정, 벽 한쪽에 몸을 숨기고 저만치서 신영과 얘기하는 흰 가운 의사를 지켜본다. 서글픔과 그리움.
신영, 잘 생긴 의사와 서서 얘기 중. 자못 진지한 표정.
다정 : .........
신영,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남자에게 인사한다.
다정, 얼른 몸을 숨긴다.
신영, 걸어온다. 부기는 관심 없다는 듯 계속 통화중.
다정 : 뭐래? 니가 뭐라고 물어봤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봐.
신영 : 다섯 번이나 만나놓고, 그것도 숯불갈비 약속까지 해놓고 갑자기 연락을 끊으신 건
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서요.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다정 : (마음이 급한) 그랬더니 그랬더니?
신영 : 자기가 감기 들었다니까 니가 집에서 만든 유자차를 갖다줬대.
다정 : 응, 내가 그랬어.
신영 : 그때 갑자기 니가 부담스러워졌대.
부기 : ! (통화를 멈추고 바라본다)
다정 : .............
신영 : 그래서 만나기 싫어졌대. 대놓고 말하긴 미안해서 그냥 니 전화도 안 받고 있었대.
알아서 끊어지길 바랬는데 니가 너무 순진한 것 같대.
다정 : 죽여 버릴꺼야. (후다닥 달려가는)
신영 : 저럴 줄 알았어. (도움 청하는) 부기야!
신영과 부기, 다정을 잡으러 달려간다. 세 여자들의 병원 질주.
신영 : 거기 서! 다정아! 야!
부기 : 어디 총 없니? 쏴버리고 싶다.
부기, 달려가 다정을 잡아 둘러메친다.
35. 신영네 거실 / 밤
둘러앉은 세 여자. 다정, 좌절모드로 고개 푹 떨구고.
다정 : 나 쏘맥 좀 말아줄래. 오늘 그냥 바닥을 치고 싶다.
부기 : 다정씨 잘못이 아니예요. 댁 같으면 아플 때 누가 유자차 갖다주면 감동하지 않겠어요?
신영 : 그 남자는 감동이 아니라 부담으로 받아들였어.
부기 : 유자차는 핑계야. 언제라도 연락을 끊었을 놈이야. 오히려 이 쯤에서 끝난 게 잘됐다고 생각해요.
다정, 앞에 놓인 와인잔을 사약처럼 두 손으로 들더니 꼴딱꼴딱 다 마셔버린다.
신영과 부기, 벙 쪄서 바라보고.
다정 : (벌떡 일어선다) 다음 주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가서 공부해야 돼.
부기 : 술 많이 드셨는데.... 제가 데려다 드릴까요?
다정 : 우리집 여기서 기본요금 거리예요. 충분히 혼자 갈 수 있어요.
(부기에게 악수청하며) 부기씨라고 했죠? 초면에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에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하죠.
부기 : 환영입니다.
다정 : 신영아, 또 보자.
신영 : 도착하면 전화해.
다정 : (다정하게) 응, 또 보자.
다정, 현관으로 가는데 취해 한 쪽 무릎을 푹 꺾고 앉았다 벌떡 일어선다.
신영 : 야! 괜찮아?
다정 : 바이! 굿나잇!
36. 거리 / 새벽
어슴푸레한 새벽거리.
로우앵글에서 타이트하게 보여지는 남자들의 놀란 표정.
너댓명 남자들의 얼굴 모여 뭔가를(카메라 정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37. 신영 방 / 밤
불 꺼진 방. 신영, 침대에 이불 말아 감고 쪼그려 자고 있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신영, 더듬더듬 핸드폰 찾아 받는다. 잠에 쩔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발신자 확인.
신영 : 야, 왜 이제야 전화를 해.......
다정(F) : (숨넘어갈 듯 다급한 목소리) 신영아! 나 좀 도와줘. 나 죽어! 빨리!
신영 : (벌떡 일어나 앉으며) 뭔데! 무슨 일이야.
다정(F) : 칼이나 가위 좀 가져와 빨리! 나 죽어, 빨리!
38. 거리 / 새벽
어슴푸레한 새벽 빛이 감도는 거리.
신영, 두리번거리며 달려간다. 저만치에 사람이 하나 누워있는 게 보인다.
신영 : 다정아!
신영, 달려가 보면 다정 도로에 누워있다.
좀 떨어진 곳엔 통행금지 삼각 표시판 몇 개 서 있고 공사하다 남은 아스팔트 수레가 서 있다.
바닥을 보면 아스팔트 공사를 방금 한 듯 까맣다.
신영, 무릎 꿇고 앉아 자세히 보면 다정, 아스팔트 굳기 전에 누워 그대로 찍힌 채 붙어있다.
다정, 마음도 급하고 흥분해 있다.
신영 : !! 너 뭐야. 붙은 거야?
다정 : 도와줘. 움직일 수가 없어!
신영 : 아스팔트 굳기 전에 여기 누웠어?
다정 : 방금 청소부 아저씨랑 조기축구회 사람들이 봤어. 신고한다고 갔어.
경찰 오기 전에 빨리 뜯어 줘. 알려지면 나 끝장이야.
신영 : 집에 간다고 나가서 왜 여기 붙어있어?
다정 : 몰라.... 난 분명히 따뜻한 내 방에 누웠다고 생각했는데....
신영 : 빨리 일어나 봐. (잡아 당기는데)
다정 : 아.... 아..... 머리카락 다 뜯겨.
신영 : 가만 있어... 가위 어딨지... (주머니에서 가위 꺼낸다)
다정 : (가위 보고 걱정스런) 야, 최소한으로 잘라.
신영 : 다 붙었어. 힘들 것 같아.
다정 : 다 자르면 안돼. 다음 주에 중요한 회의 있어.
신영 : 그럼 뜯겨도 그냥 일어놔 봐.
신영, 다정을 잡아당겨 일으키려 애쓴다. 다정,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 안간힘.
신영(E) : 자신을 사랑하고 꿈을 향해 달렸던 여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이제 지치거나 영악해졌고, 자신이 귀한 존재란 걸 잊어가고 있습니다.
멀리서 경찰 차 소리가 난다.
신영 : 경찰이다. 뛰어.
다정 : 아... 다리 저려.... 못 걷겠어.
신영 : 야, 이러다 잡히겠어. 일어나 봐.
다정 : (일어나질 못하고) 아... 다리가 안 움직여.
신영, 다정을 들춰 업는다. 간신히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신영.
다정, 미안하고 고맙고.... 신영의 등을 꼭 붙들고 있다. 따뜻한 우정이 싹트는.
신영(E) : 내가 날 아끼지 않으면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요. 이를 악물고 날 사랑해야지.
오늘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란 걸 믿고 싶은,
새아침의 현장에서 이신영입니다.
신영의 차 출발한다.
잠시 후 경찰 차 와서 선다. 다정이 누워있던 자리, 인체모형으로 푹 꺼져있다.
거리로 아침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선다.
39. 호텔 라운지 / 낮
참한 차림의 20대 여자와 마주앉아있는 나반석. 선보는 중.
반석 : 옷이 참 예쁘신데요. 너무 잘 어울려요.
여자 : 감사합니다.
반석 : 제가 명품에도 관심이 좀 많거든요. 그거 어디 껀지 맞춰볼까요?
여자 : ...........?
반석 : 천사표! 하하하하...
여자가 맘에 드는 듯 밝게 웃는 반석.
40. 대학 캠퍼스 / 낮
전자기타 케이스를 메고 핸즈프리로 통화하면서 걸어가는 민재.
민재 : (짜증내는) 내가 그 딴 농담 촌스럽다고 절대하지 말랬지. 그 여자 맘에 들면 이제부터 내 말 들어.
눈을 마주치고 자꾸 웃어 줘!
지나가는 여학생들, 힐끗힐끗 쳐다본다. 몇 명은 호들갑스럽게 소곤소곤 ‘어머, 쟤 하민재 맞지?’
민재 : 스파게티 예술로 하는 집을 안다고 담에 같이 가자고 해. 정확한 날짜는 잡지 말구.
저녁 땐 오늘 너무 즐거웠다고 문자 꼭 보내고 내일 아침에도 굿모닝 문자 먼저 보내.
그리고 모레부터 이틀 동안 연락하지 마. 문자와도 답하지 말구.
저만치에 마이크를 든 신영과 카메라 후배 걸어가고 있다.
민재는 통화하느라 못 보고 지나가고.
41. 호텔 라운지 / 낮
반석 : 제가 스파게티를 예술로 하는 집을 아는데 언제 한번 가시죠.
여자 : 어머, 어딘데요?
반석 : ...... (장소는 모른다. 살짝 당황) 저기....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 나는데.... 하여간 있습니다.
42. 그룹 연습실 / 낮
민재, 줄 튜닝해 보며 계속 핸즈프리로 통화중.
민재 : 그리고 일주일 지나서 연락해. 바쁜 일이 있었다고 미안하다고 하고 또 이틀 동안 연락하지 마.
그럼 여자가 먼저 연락을 해올꺼야. 그때부턴 형이 다루기 쉬워져.
43. 한방병원 / 낮
최신식 대형 한방병원.
가운입고 바쁘게 걸어가는 젊은 의사 나반석. 가운 입은 모습, 샤프하고 이지적.
선 자리에서의 어벙함은 상상할 수 없다.
반석(E) : 연락이 없으면?
44. 진료실 / 낮
미니스커트 입은 미모의 젊은 여자, 미끈한 각선미로 누워있다.
반석, 여자의 다리를 잡고 무릎에 침을 꽂는다.
민재(E) : 뭐가 걱정이야. 형네 병원에 돈 많고 집안 좋은 여자들 엄청 많이 온다며.
진료실 밖. 전화에 버럭 화를 내는 반석.
반석 : 날 뭘로 보고 그 딴 소릴해. 난 내 환자 절대 여자로 안 봐!
45. 연습실 / 낮
우습다는 표정의 민재.
민재 : 뭘 그렇게 흥분해? 형, 연락 안와도 신경 쓰지 마. 세상엔 널린 게 여자니까.
민재, 앰프에 잭을 꽂고 기타의 줄을 튕겨본다. 매력적인 전자음 윙윙 울린다.
46. 학교 일각 / 낮
신영의 차와 회사의 보도차량 나란히 서 있다.
신영, 차 문 열어놓고 앉아서 통화중.
신영 : 총장님이 갑자기 교과부에(교육과학부) 회의를 가셔서요, 사무처장 인터뷰로 대신했....
(귀 따갑다는 듯 수화기 뗐다가) 예, 그럼 총장인터뷰 다시 따겠습니다.
후배 : 청사 들러야 해?
신영 : 여기서 스탠드업 하고 바로 가지 뭐. 비서실이랑 통화 좀 하고.
후배 : 카메라 세팅해놓을게. (가고)
(E) : 핸드폰벨
신영 : 여보세요.
여자(E) : 반지 언제 주실 껀데요?
신영 : (짜증.... 가방에서 반지 꺼내 조수석 앞의 콘솔에 던지듯 넣으며) 그렇잖아도 갖고 나왔거든.
이따 회사 앞으로 오던지.
47. 연습실 앞 / 낮
카메라, 삼각대에 서있다.
신영, 걸어오는데 건물 안에서 전자기타소리 흘러나온다.
신영 : 이 기타소리는 뭐야?
후배 : 잠깐만 조용해 달라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하네.
신영 : 어떤 또라이야.
48. 연습실 / 낮
신영, 문을 확 열고 들어간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보여지는 민재의 실루엣.
민재, 연주 중. 캐논의 변주곡이나.... 연주실력이 돋보이는 곡으로.
현실 세계에 살지 않는 남자처럼 멋져 보인다.
신영, 잠시 굳어져 민재를 보고 말없이 서있다.
민재, 시선을 느끼고 연주를 멈춘다.
민재 : .............뭐죠?
신영 : ........(잠시 멍했던 것 수습하는)
민재 : (다가온다) 연습실은 출입금진데....
신영 : 10분만 조용해주면 고맙겠는데요. (마이크 보이며) 네, 리포트 땜에 그러니까......
민재 : 그걸 왜 꼭 여기서 해야 돼요? 학교가 넓고 넓은데.
신영 : 무성기업에서 지어 준 건물이 이거니까요. 캠퍼스와 대기업의 관계에 대한 리포트거든요.
민재 : 연습 끝난 다음에 하면 안될까요? 맥이 끊기면 안되는데.
신영 : 학생 몇 학년이지?
민재 : 나이 많은 복학생입니다.
신영 : 좋아요. 먼저 10분 드릴께요. 나도 사정이 있으니까 10분후엔 나한테 양보 좀 해줘요. (나간다)
민재, 다시 기타를 드릉 튕기고.
49. 건물 밖 / 낮
신영, 차 앞에 서 있다. 안에선 기타 연주소리 계속 들려오고.
신영 : (쩔쩔매며 통화중) 네, 시간 잡았어요. 여기서 바로 달리면 시간내에 인터뷰 딸 수 있을꺼예요.
걱정하지마세요 부장님.
후배 : 15분 지났는데요. 우리 5분 내에 출발해야 인터뷰 딸 것 같아요.
50. 연습실 / 낮
신영, 들어온다. 민재, 앉아서 기타 치다가 악보에 표시하고... 작곡중이다.
신영 : 학생! 10분 넘었어요. 이젠 10분만 조용히 해줘요.
민재 : ...........
신영 : 학생!
민재, 본 척 만 척 기타연습만.
신영, 열 받아 돌아서 나간다.
51. 연습실 앞 / 낮
열 받은 신영, 나온다.
신영 : ........차 안에 공구통 있지?
52. 연습실 / 낮
악보 보며 연주에 몰두해 있는 민재. 멋진 기타음 울린다.
신영, 커다란 니퍼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온다.
민재는 기타에 심취해 신영이 걸어오는 것 못 보고 연주만 계속.
신영, 앰프에 연결된 선을 싹둑 잘라버린다. 기타에서 헛소리가 나며 연주가 끊긴다.
민재, 놀라 돌아보면 니퍼를 들고 서 있는 신영. 끊어진 줄이 보인다.
열 받아 이글이글 불타는 민재의 두 눈. 빤히 쏘아보고 서 있는 신영.
민재 : (버럭) 야!
민재, 열 받아 뛰어오고 신영 니퍼를 들고 민재에게 달려드는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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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다시 봐도 대본이 너무 재밌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