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은 수백 명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던 그 옴팡밭에 나가 다시 농삿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주어내도 30년 동안 납탄환과 사람의 잔뼈는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달 전에 자살한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 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1978년 '창작과 비평사'에 발표된 이 소설이 한국문학사,한국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소설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의 첫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현기영 선생은 '순이삼촌'을 발표한 뒤 군사정권의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1947년 3.1절 기념식때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것이 제주 4.3 사건으로 가는 도화선이었다. 3월 10일 경찰 발포에 항의한 총파업이 있었다. 제주 도민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한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12개 경찰서를 공격하여 무장봉기가 촉발되었다.
이사건을 중요하게 여긴 미군정청 하지중장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3.10 총파업은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 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었고 남로당원 색출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군정 수뇌부들은 외지인들로 전원 교체됐고, 서북청년단원등 대거 내려와 주모자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만에
500여명이 체포됐고, 4.3사건 발발 직적까지 1년 동안 2500여명이 구금되었다. 테러와 고문도 잇달았다.
제주도민들은 육지인에 대한 반감은 이때부터 심해졌다.
1948년 3월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는 금세 폭발할것 같은 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조직을 수호하고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것을 투쟁목표로 했다.
5.10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고 했다. 그러나 5월10일 총선거에서 전국 20개 선거구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 투표수 과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한민국은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북쪽에도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하에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안마을로 피해온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려고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 한라산 속에서 숨어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심지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되면 그 부모와 형제 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이 자행되었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리고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4.3사건은 여기서 일단락 되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약 2만명~3만명,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었다.
그러나 4.3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비극적인 사태를 일으켰다.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사계리 '백조일손지묘'의 희생자들도 이때 학살된 것이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때 3천명이 죽임을 당했고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개방되면서 제주 4.3사건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남로당 신진세력의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겐 된 것이다.
그간 왜곡되어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아 가해자든 피해자든 역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제주 4.3사건은 2000년 1월 12일 제주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차원의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제주도민에게 사과하고 덧없이 죽은 영혼들이 폭도가 아니라 양민이었음을 확인했다. 결국 350여명의 남로당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3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인 것이다.
조천에서 김녕으로 가는 일주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함덕 지나자마자 도로변에 너븐이숭이 4.3기념관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너븐숭이 길가에 애기무덤들이 있다. 너븐숭이는 널찍한 돌밭이라는 뜻이다.
너븐숭이 애기무덤은 관도쓰지 않은 작은 돌무더기 같다. 현무암을 둘러 놓은게 전부인 애기무덤 몇기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무덤가 주변에 세운 비석엔
"평화와 상생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남겨진 유족들에게도 깊은 형제적 연대감과 평화를 기원하나이다"
애기무덤 곁으로 큰길 안쪽에 '순이삼촌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순이삼촌이라고 새긴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순이삼촌 소설의 문장들이 새겨진 여러개의 장대석이 널부러져 있다. 소설의 구절들을 읽게 되니 자연히 고개가 땅을 향하여 추모하는 자세가 된다.


작년 제주도에 갔을 때 북촌리 너븐숭이와 순이삼촌문학비를 보면서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23차 국토체험문화탐방 활동장소가 제주도로 확정되면서 순이삼촌을 읽게 되었다.
이곳을 미션장소로 넣었으나 숙소와 거리가 멀어 제주 4.3평화 공원으로 장소를 바꾸었고, 일정 중간에 올라오는 나만 혼자서 이곳에 들르게 되었다.
찾는 발길이 뜸해 조용한 너븐숭이는 일년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
첫댓글 글의 울림이 전해지네요. 양민학살사건으로 많은 분들이 상처를 받았는데 우리 사회가 모두 용서를 구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