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 하트(인디언 추장)의 ‘메투셀라’
우리 부족 사람들은 환경을 관찰함으로써 예측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바위 속에 있는 것까지 읽을 수 있었다. 바위 위의 이끼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이끼는 대개 북쪽, 즉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자란다. 이끼가 자란 어떤 바위나 나무의 북쪽 부분을 덮고 있다면 우리는 아주 힘든 겨울을 나게 될 것이다. 남쪽 부분에는 북쪽 부분만큼 많은 이끼가 끼지 않는 것일 일반적인 현상이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날씨에 큰 변화가 있을 때 뿐이다. 이를테면 지구의 궤도가 이동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화 등이다.
우리 인디언들은 지구의 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가 이동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렇게 해서 회오리 바람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부족은 이런 단서를 보고 겨울이 오기 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지 알고 있다. 우리 부족 노인들은 북쪽을 가르키며 ‘돼지 기름이 부족하게 만드는 방향’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사냥해서 저장시켜 둔 것이 언제 부족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땅과 하늘과 바람에 대한 관찰이 날씨 변화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다. 우리는 자연에 아주 민감해서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눈이나 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것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제이다. 매일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게는 공해까지 만연해서 날씨 변화를 감지하려는 능력에 방해를 받고 있다. 텔레비전은 켜기만 하면 기상 통보관이 나와서 날씨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들의 예측은 빗나간다.
우리 부족의 어떤 사람은 별을 보고 무언가를 읽어 낼 수 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을 보고서 무언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 부족에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는 노인 한 분이 계셨다. 내가 처음으로 그분을 알았을 때도 노인이었고, 내가 자라는 동안에도 노인이었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노인이었다. 나는 그 분의 나이가 얼만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메투셀라’라고 불렀다. 내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그 분의 집에 들렸었다. 그때 그 분을 하늘을 보고 계셔서 내가 질문을 했다.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저기 있는 저 줄들이 보이느냐?”
내 눈에는 줄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분이 나를 정직한 청년으로 만든 것이다.
<나중에 네가 나이가 들면 우리나라 제복을 입게 될 것이다. 왜냐면 아주 큰 전쟁이 일어날테니까>
나는 그것을 잊고 있다가 어느 추운 겨울밤에 일인용 참호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다. <너는 우리나라의 제복을 입게 될 것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분은 이미 몇 년 전에 별을 보고 내가 어떤 식으로 군대에 갈 것인가를 예측했다. 그 분이 본 것은 국기의 줄들 같은 것들로서, 그것들은 하늘에서 서로 상대방을 가르켰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시였다. 메투셀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예언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주위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 그 영화의 내용은 아주 정확한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그 영화는 아주 정합합니다만 한 가지는 틀린 것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인 던바는 죽으라고 말을 달려서 버팔로 떼가 온다고 얘기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인디언 부족들은 버팔로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이 버팔로를 찾아 냅니다. 버팔로 떼가 어떤 부족이 있는 곳에서 수 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때도 그들은 이미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에는 메투셀라 같은 점쟁이들이 있어서 그들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직관력은 대단히 높았다. 원주민 인디언들은 그들이 아주 민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통해서 특정한 동물의 영혼의 존재를 감지 할 수 있었다. 버팔로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와 같은 직관력을 갖추어야 했다. 그것은 버팔로가 인디언의 주식으로서 아주 중요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버팔로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버필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그놈들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어느 쪽에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만일 그 영화에서처럼 버팔로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인디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한밤붕에 잠에서 깨어 <버팔로가 이곳에 있다>라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겠지만 인디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옛날에 철도를 가설할 때, 많은 나바호 인디언들이 가설 작업에 동원되었다. 한번은 한 무리의 나바호 인디언들이 어떤 굴곡 부분에 철도를 놓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공사 감독관이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열차가 탈선해서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오.”
“여기 설계도에 보면 이런 식으로 설피하도록 되어 있소. 따라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니 따르시오.”
감독관이 계속해서 설득했지만 나바호 인디언들으 여전히 거부했다. 마침내 설계사가 그곳에 와서 설계도를 들여다 보았다.
“여러분 이들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인디언들의 직관력과 관찰력이 재앙을 막은 것이다. 그들에게 과학적인 지식은 없지만 그럼에도 열차의 무게와 속도가 급격한 커브에는 사고를 낸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에게 자연 및 자신들의 직감과 교류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의 노인들은 그들을 숲속으로 떼려가 눈을 가리고 특정한 나무 옆에 앉게 했다. <우리가 다시 올 때까지 눈을 가리고 여기 앉아 있거라. 이 나무와 함께 있어라. 그것을 만지고, 껴안고, 기대고, 옆에 서 보아ᄅᆞ. 그리고 그것에서 무언가를 배워라.>
그렇게 한나절 가량이 지난 후에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다시 마을로 데려와 눈 가리개를 풀어주고 이렇게 말했다.
“가서 네 나무를 찾아보아라.”
수많은 나무들을 만진 후에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보냈던 시긴을 보냈던 그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많은 나무를 만질 필요도 없었다. 높은 수준의 직관력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은 자신의 나무로 바로 갈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나무에 끌려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무에게 무엇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다. 나무가 있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하이킹을 할 때 우리는 종종 활엽수 잎이나 침엽수의 바늘에 손가락 끝을 대곤한다. 그냥 그곳에 서서 그것들을 만지면서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무들은 늘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다. 활엽수의 잎이나 침엽수의 바늘 끝은 대기를 숨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래서 우리 부족 사람들은 나무에 커다란 존경심을 나타낸다. 나무는 우리의 친척이다. 우리는 나무를 가리켜 ‘서 있는 키 큰 형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