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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한홍구 지음
2부 유신, 겨울공화국의 사법부(1972~1979)
1. 유신쿠데타와 재임명에서 탈락한 법관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의 10월유신은 또다시 헌정질서를 짓밟았다. 대통령이 법관의 임명과 보직권을 모두 장악했고, 법관이 징계처분을 받아 파면될 수 있도록 하여 헌법의 법관 신분보장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다.
민복기- 1973년 3월 14일 제6대 대법원장에 임명. 유신시대 최장수 대법원장으로 있으면서 대한민국 사법부는 ‘회한과 오욕’의 시절을 겪게 되었다.
박정희는 1973년 3월 말 새 헌법에 따라 모든 법관을 새로 임명하여 껄끄러운 법관들을 걸러냈다. 대법원 판사 중 절반이 넘는 9명이 ‘의원면직’ 형식으로 물러났는데, 1971년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한 위헌판결에서 위헌의견을 낸 이들이었다. 중정은 표적 판사들 주변을 샅샅이 캤고, 민복기는 그들 중“국가관이 없는 판사들”이라는 이유로 재임명을 거부했다.
재임명에 탈락한 법관 41명 중 20여 명의 탈락 사유를 당시 신문 자료로 짐작해보면, 사법파동 당시 대법원장을 찾아가 법관들의 의사를 전달한 7명의 판사들은 사법파동 주동자로 지목되어 모두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무죄판결을 많이 해서 재임명에서 탈락된 판사들도 많았다. 유신헌법 발효에 따른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법관 정년 단축(고등법원장은 65세에서 63세로, 그 이하의 법관은 65세에서 60세로)으로 11명이 자동 퇴직 대상이 되었고, 10명의 법관은 탈락 사유를 확인하지 못했다.
- 털어서 먼지가 ‘안 나도’ 탈락 : 서울고법 김인중 판사
사법파동 때 대법원장을 면담한 평판사 대표로, 서울형사지법 재직 시 반공법 사건에서 자주 무죄를 선고하여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보부는 김 판사가 근무했던 지역에 수사관을 파견하여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다. 구체적 첩보도 없는 상태에서 김 판사에 대해 철저한 표적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비위도 적발하지 못하고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김인중 판사는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 ‘연좌제’로 인한 탈락-이건호 판사
정보부는 1971년 3월 23일 이건호 판사의 부친과 관련된 사실조사 지시를 내렸다. [신원 특이 판사 내사보고]에 따르면 1964년 6월 대법원에 보낸 자료에는 부친이 자진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0월에 보낸 신원회보에는 “북괴 정치보위부 청년 두 명에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고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해군방첩부대, 치안국, 관할인 성북서의 기록에 모두 이 판사의 신원에 문제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후속 보고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 판사는 1973년 3월의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 야당 의원 동생은 판사도 할 수 없어-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 강인애 판사
강인애 판사는 군 관련 민감한 사항을 국회에서 많이 질의해 유신 후 보안사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신민당 강근호 의원 동생이다. 형의 고문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자신의 토지를 급히 처분하려했는데, 중정은 위법사실은 밝혀내지 못했으나 반정부 성향이 강한 야당 의원의 동생이 형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한 일로서 기소되는 안했지만, 재임명에서는 탈락했다.
2. NCC 구호금 횡령 사건, 재판의 배후는 중앙정보부
1975년 4월 서울지방경찰청(서울시경)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 김관석 목사,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목사와 실무자 권호경 목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 등 개신교의 민주화운동 핵심 인사들을 구속했다. 박 목사와 권 목사 두 사람은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때 내란예비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권 목사는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박 목사는 같은 해에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두 목사는 1975년 2월 15일에 풀려났다가 두 달도 안 돼 또 구속되었다.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란 부활절 새벽예배 때 박 목사 등이 유인물을 나눠 준 일에 불과하다. 10만 군중 속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플래카드를 들고 군중을 유도해 방송국과 중앙청을 점령하는 내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를 씌워 서울형사지법 합의7부(재판장 김형기)는 박형규, 권호경 목사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재판장은 그 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동 법원장, 대법원 판사로 승승장구했다.
유신정권은 유신반대운동 종교인의 핵심들에게 횡령죄를 적용하여 파렴치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했다.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독일의 세계급식선교회BFW로부터 빈민지역 선교자금으로 2700만 원을 지원받았는데, 검찰은 “피고인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생계비로 지출한 것은 배임행위”라며 기소했다. 당시 선교위원회 회계실무자가 장부를 갖고 사라졌기 때문에 검찰은 배임과 횡령의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오락가락해 변호인들의 조롱을 받았다.
[K판사 비위 첩보에 대한 관련자 조사 결과보고]라는 1975년 8월 27일자 보고서는 K판사가 이 사건에 무죄를 선고할지 모른다는 첩보를 처음 입수한 후 정보부가 석 달이 넘게 그의 ‘비리’를 뒷조사했음을 보여준다. 그때 K판사는 당시 외부압력이 하도 심해 “대법원 앞에 가서 목을 매고 죽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라고 한다. 유신시대는 검찰의 구형량이 곧 선고 형량이라 ‘정찰제 재판’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던 시기다. 사건에서 K판사가 구형량의 5분의 1도 안되는 형을 선고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낮은 형량이었다
3. 긴급조치 1호, 4호와 사법권 침해
유신쿠데타 15개월 후인 1973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이래 박정희가 죽고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기까지 2159일간 국민들은 긴급조치라는 살생 흉기의 협박을 받았다.
박정희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유신운동을 벌이는 김대중 전대통령 후보의 입을 막기 위해 1973년 8월8일 백주대낮에 일본에서 그를 납치해 왔다. 이 사건은 유신쿠데타 이후 1년 가까이 잠잠하던 국내 민주화운동에 다시 불을 붙였다. 기독교방송과 동아일보 기자들이 모든 언론이 용기와 신념으로 외부압력을 배척하자는 요지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을 발표했고,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로 번져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1974년 1월 7일 문인과 지식인 61명은 집단적으로 개헌청원서명에 동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그 다음 날인 1월 8일 긴급조치라는 흉기를 꺼내 들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일체 행위, 유신헌법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과 긴급조치를 비방한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2호에서는 긴급조치 위반자 심판을 위해 군법회의법에 의한 군법회의와 별도로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비상군법회의가 설치되면서 특정한 형사사건에 관한 심판권한이 법원의 권한에서 제외된 것이다. 긴급조치는 대통령 1인의 손에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쥐어주었다. 이제 국민들은 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정보부에 의해 영장없이 체포되어 법관이 아닌 군인에 의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런 행위가 ‘합헌’으로 인정받았다.
긴급조치를 공포한 후에도 개헌청원서명운동이 중단되지 않자 정보부는 1974년 1월 15일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사상계] 주간과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을 구속했다.
긴급조치 1호에도 반유신운동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박정희는 4월 3일 한층 살벌한 긴급조치 4호를 공포했다. 긴급조치 4호는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약칭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교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등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 심지어 학생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거나 수업과 시험을 거부해도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상 초월의 악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년이 조총련, 인혁당 재건위 등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주장하면서 1034명을 검거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결국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 20년 등 피고인 모두 중형이 선고되었다.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이 모두 203명인데, 사형과 무기징역 빼고 유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의 형량만 합쳐도 1800년이 넘는다
4.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4년 4월3일 박정희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담화문’에서 주장했다. 이어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속,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혁신계 인사들을 반국가단체 조직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기소했던 사건이다. 중정이 사건을 수사하여 검찰에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도저히 기소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며 사표를 던지고 기소를 거부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10년이 지나 다시 잡혀 온 것이다. 1차 사건 당시 부하들의 항명으로 체면을 구긴 검찰총장 신직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건을 총지휘했고, 당시 중정 수사과장이던 이용택은 정치적 사건 처리로 악명높은 중정6국 국장으로 수사 책임자가 되었다.
민청학련에 대한 수사는 4월 25일 신직수가 민청학련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밝힌 다음부터 본격화되었다. 10년 전에도 인혁당은 있지도 않았는데 흔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조직은 공소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1심과 2심은 군법회의에서 이뤄졌다. 재판 직전까지 변호인 접견이 허락되지 않았고, 변호인이 요구한 증거는 모두 채택되지 않았고, 검찰 측 증인이 증언하던 날 반대신문은 커녕 가택연금이 되었다.
그런데 공판조서가 변조되었다. 대법원의 재판은 피고인을 직접 심리하지 않고 기록만으로 사건을 판단하기 때문에 공판조서 변조는 큰 문제였다. 법정에서 분명히 아니라고 부인했는데도 대부분 공소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종길, 조승각 두 변호사가 공판조서가 실제 답변과 다르게 작성되었다고 지적한 부분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공산 비밀조직을 구성하자는 회합 결의를 한 사실” 등 반국가단체 결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여덟 명이 사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혐의 때문인데 검찰 측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가 바로 피고인들의 자백이었다. 군법회의는 공판조서를 허위로 작성했고 대법원은 날조된 공판조서에 의거해 사형을 확정한 것이다.
1975년 2월 박정희는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석방하는 유화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난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된 것임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격분한 박정희는 인혁당 관련자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인과 변호인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변조되었다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더는 군법회의로 보내지 않고 일반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했고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
## 인혁당 사건과 공안검사들의 항명파동 ##
1963년 12월, 박정희는 육군 사단장 시절 자신의 법무참모인 36세의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무려 7년반 그의 재임 기간은 검찰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시기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었다.
공안검사들의 ‘양심적’ 기소 거부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중정은 구속 22명, 불구속 12명, 미체포 13명 등 총 47명의 피의자를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다. 피의사실의 핵심은 이들이 남파 간첩 김모의 지령에 의해 반국가단체 인민혁명당을 창당하여,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를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을 통해 ‘학생운동과 배후의 빨갱이’라는 도식을 처음 선보인 군사정권은 이후 위기 상황이 올 때마다 이 카드를 빼어 들었다.
공안 검사들은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중정 진술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공소를 제기할 수 없었지만 중정이 떠들썩하게 발표한 사건을 기소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구속만기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8월 31일 이용훈은 검찰총장 신직수에게 “공소 제기를 하여도 유죄를 받을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다”라고 수사 결과를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주연 서울지검장은 상부의 명령이라며 구속만기일 이틀 전인 9월 3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조건 기소하라는 최후통보명령을 내렸다. 공안검사들이 이 역시 거부하자 검사장은 검사장이나 차장 이름으로 기소를 하겠으니 기소장이라도 작성해달라고 사정했으나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등은 끝내 사표를 제출했다. 검찰 고위층은 당황하며 서울지검의 다른 검사들에게 기소장 작성을 부탁했으나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면 검사장님이나 차장검사님이 직접 기소하시죠”라며 빈정거릴 뿐이었다. 서주연은 그 날 밤 당직인 정명래를 시켜 공소장을 작성하게 해 검찰은 천신만고 끝에 인혁당 관련자들을 구속만기일 저녁에 기소했다.
그러나 1964년 9월 9일 국회는 법무장관 민복기를 불러 인혁당 사건은 6.3계엄 사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 추궁하며 중앙정보부 폐지론까지 제기하자 중정 부장 김형욱은 사건 재수사를 지시했다. 한옥신은 중정, 검찰관계자들과 수차례 합동회의 후 중정이 요구하는 대로 기소하기는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사건이 기소된 지 1개월 11일 만에 검찰은 26명 중 14명은 공소를 취하, 석방하고 12명은 당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한 공소장을 변경, 반공법 제4조1항(찬양,고무) 위반 혐의로 재기소하기에 이른다. 검찰 스스로 처음 기소가 무리한 것이었음을 자인한 것이다.
- 또 다른 인사 파동 그리고 ‘양심’의 실종
다시 출근한 사흘 만에 이용훈과 여운상을 서울고검 검사로 전보하고, 한옥신을 서울지검 차장으로 기용하는 인사안이 마련되었다. 여운상과 이용훈은 이 부당한 조치에 반발해 또다시 사표를 제출했고 20여 일 후 결국 수리되었다. 이 사건 이후 검찰의 양심은 실종되었다.
인혁당 사건의 재수사를 떠맡은 한옥신 검사는 1960년 4월혁명 전야에 이승만 정권과 경찰이 마산 3.15 의거를 공산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으로 몰고 갈 때 용공조작의 진상을 파헤쳐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일조한 용기 있는 검사였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 데모대회에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하자 경찰은 총에 맞아 사망한 희생자의 주머니에 이북 삐라를 집어넣었고, 북마산 파출소 방화 사건에 대해서는 공산분자의 사주로 6.25 때의 부역자가 방화한 것이라고 조작했다. 한옥신 검사는 경찰의 조작을 낱낱이 파헤치고, 정부에 불리한 수사는 하지 말라는 압력을 물리치고 마산 사건을 엄정히 처리해, 4월혁명으로 출범한 2공화국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곤욕을 치렀다.
민주당 정권은 1958년 이승만이 개악한 국가보안법에 불고지죄라는 조항을 신설했다. 불고지죄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를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조항으로 첫번째 걸린 사람이 한옥신 검사였다. 이종사촌 동생 김임종이 월북했다가 공작원으로 남파되어 한옥신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갔는데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임종의 가족은 모두 구속 기소되었지만 한옥신은 기소를 면하고 징계처분만 받았다. 인혁당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같은 재판 과정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한옥신이 직급과 상관없이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이 이러한 약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공안검사로 활약한 한옥신은 잠시 치안국장을 지내고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제1차와 제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었다. 대규모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는 정보부의 각본은 똑같았지만, 사건을 다루는 검사들의 태도는 천양지차였다. 1964년만 해도 용기와 자존심을 갖춘 검사들이 있었으나, 10년 세월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기간이었다.
5. ‘긴급조치 9호’하의 재판
1975년 4월 9일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이후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긴급조치 9호는 그동안 선포된 긴급조치 1호, 4호, 7호의 종합판으로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청원, 선동, 보도하는 일체 행위를 금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또는 수색이 가능했지만 제10항은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대한 관할권이 일반법원으로 규정했는데 이후 법관 기피신청이 있었다. 법원은 김지하, 한승헌, 김대중 재판 과정에서 제출된 법관 기피신청을 모두 기각했다. 민복기는 1974년 말에 열린 한 법원장 회의에서 유신체제는 가장 좋은 제도이며 법관들은 국가관에 입각해 재판하라는 훈시를 하여 국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1976년의 경우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으로 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모두 221명이었다. 그중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 하급심에서 거의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내린 이영구 부장판사가 법복을 벗게 되었다.
6. ‘사법부 독립’을 요구한 원주선언과 명동 사건
인혁당 사건 피고인 사형과 사이공 함락에 이은 긴급조치 9호 발동 이래 한동안 잠잠하던 반유신운동은 1976년 1월의 원주선언으로 되살아났다. 1월 23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신구교회 합동으로 열렸다. 기도회는 천주교 신부들 다수와 개신교의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조화순 목사와 함석헌 등이 서명한 것으로 따로 제목을 달지 않은 반유신선언을 채택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 인사들은 삼일절에 개신교도 천주교처럼 문건을 발표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3.1민주구국선언은 개신교측이 주도했지만 발표 장소는 명동성당이었다. 1976년 3월 1일삼일절 기념 미사가 거행되고, 마지막 순서로 바로 전날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등 11명이 서명한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와 국회의 최다선 원로인 정일형 의원 등 정치권에서도 삼일절 즈음한 시국선언을 모색하고 있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날 재야인사들이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펄펄 뛰며 이들을 잡아들이라고 직접 지시했다. 그날부터 관련자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검찰은 죄질이 나쁜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 11명은 구속 수사중이며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등 9명은 불구속으로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명동 사건의 공판은 긴급조치 9호 관련 재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쇼였다. 전직 대통령에, 대통령 후보에, 최다선 의원에 개신교의 내로라하는 지도자에,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해직된 교수 다섯 명이 포함되었다. 방청석 맨 앞의 20석쯤은 기자석이었는데 항상 만원이었지만 관련 기사가 신문에 한 줄도 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법정 밖에서는 가족들이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똑같이 차려 입고 법정 주변을 행진하거나 언론자유가 죽었다는 뜻으로 엑스표가 쳐진 마스크를 일시에 꺼내 쓰거나 민주주의 회복 등의 구호가 쓰인 양산을 한꺼번에 펼치거나 공개재판이라고 쓰인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활보했다.
3.1 민주구국선언 자체가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을 요구한다. 사법권의 독립 없이 국민은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시녀로 거느리는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라며 사법부의 독립을 문제 삼았다.
하경철 변호사는 “시국사건 변호인의 역할이란 무죄나 감형에 있다기 보다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충분히 진술을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주는 데 있다”라고 했는데, 변호인단이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 민주주의의 강연장을 만들었다. 재판장이 서둘러 심리를 종결하자 변호인단은 검사장의 논고 직전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고 전원 퇴장했으며, 불공정한 재판에 대한 항의로 변호인단 전원이 사임하여 최종변론 없이 1심을 마쳤다. 항소심에서 김대중 후보는 1심 판결문이 검찰의 공소장을 그대로 베낀 것임을 지적하며 “검찰이 증거도 안 대고, 요구하지도 않은 것도 전부 검찰이 부탁한 것 이상으로 판사가 판결을 해주었다. 이걸 보니까 이 나라의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것이 이렇구나 하고 한탄을 안할 수가 없었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