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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이고니온 전도와 그 영적 교훈
사도행전 14:1~7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고니온 성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아 도망나와서 가게 된 성읍입니다. 이고니온 성은 튀르키예 중부 내륙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약 144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약 삼일을 걸어서 그곳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고니온 성은 고원 위에 있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이 닦아놓은 도로가 연결된 상업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도 어김없이 유대인들이 적지 않게 모여 살고 있었고 그곳에도 유대인 회당이 시내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곳에 도착하자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 전도의 우선 순위를 언제나 지키려고 애를 썼음을 보게 됩니다. 며칠 전에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에서 그토록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를 받고 쫓겨난 경험이 있으나 이번에도 다른 곳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에 먼저 찾아가 복음을 전도한 까닭은 첫째로 유대인에게 다음에 이방인에게 전하라는 주님의 전도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 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가 니도미놈늬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한 설교 내용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전한 말씀과 동일할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함과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의 상속의 축복을 전했습니다. 사도는 인간 자신의 노력과 수고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객관적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은 구원을 전했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축복이라고 전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 점을 항상 기억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택정하시어 부르심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힘써서 얻은 구원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피 흘려 죽기까지 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영생 부활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우리 자신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음에 대한 감격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충성하는 것이지, 우리가 자신을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며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구원의 핵심입니다.
종종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성화(聖化)의 과정에 집중하여 가르치는 주의 종들이 있습니다. 성화의 삶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신앙의 요점 중 하나입니다. 성도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모든 죄가 이미 용서받았고 이미 천국 백성으로 확정되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죄를 범하더라도 그냥 회개하면 되니까 크게 거리낄 것 없다고 방탕한 삶을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으며 스스로 속이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함이 없이 나태하고 방탕하고 세상적인 욕심에 가득하거나 세상 염려에만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가르침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화의 삶은 어디까지나 구원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강조해야지, 자칫 구원받으려면 거룩한 행실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구원의 조건으로서 성화를 가르치게 되면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써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명 자력 구원론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구원받으려면 이렇게 저렇게 선한 행위를 해야 하고, 죄를 범하면 안되고, 이렇게 복종해야 하고, 저렇게 많이 헌금해야 한다는 등 수많은 행위의 짐을 지게 됩니다. 그 결과 죽을 때까지 자기 구원을 얻으려고 늘 전전긍긍하면서 죄의 종으로살아갑니다. 늘 속박되어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이며 그것은 복음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객관적 구속의 은혜를 우리 신앙 지식의 중심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린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생명 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해두시고, 우리에게 영생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가 믿어지게 되고 그의 전적인 공로 덕분에 우리가 거듭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원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성전 바깥 뜰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에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항의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25~30)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자기 양인지, 누가 자기 양이 아닌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자기 양이 아닌 경우에는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구원자 되심에 대하여 믿어지지 않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 백성들과 연대감이 생기지 않고 늘 이질감을 느끼고 세상에 대한 애착감이 여전히 강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택한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격이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자기가 값없이 구원받는 은혜를 입은 것이 한없이 경이롭고 감사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함께 연대감을 느끼지 않고 주님을 믿는 주의 백성들과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세상 즐거움을 내려놓게 됩니다. 세상 친구들로부터 비웃음과 멸시를 당하여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그리고 죄사함과 부활 소망과 천국 소망을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또한 자기의 못된 성품들을 하나 하나 내려놓고 점점 거룩하고 의롭고 참되고 착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힘쓰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또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영혼의 소원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즉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더 닮아감으로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한 조건을 이루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요 주님의 제자가 되었기에 구원의 감격 때문에 그렇게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적 구원론과 달리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자꾸만 행위를 달라야 하고, 애써야 되고, 헌신해야 하고, 구제해야 하고, 자기의 죄를 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하고, 돈을 얼마를 교회에 바쳐야 하고, 전도를 의무적으로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해야 한다고 강권적으로 요구한다면, 그것은 행위구원론에 가까운 치우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지나치게 값싼 구원론, 그냥 예수님만 입술로 고백하고 교회만 형식적으로 다니기만 하면 구원받은 자요 천국 백성이라고 가르치는 가르침도 큰 문제지만, 그 반대로 이렇게 저렇게 인간적인 행위를 꼭 해야만 구원받는다는 행위 구원론적 가르침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이 객관적 희생과 대속의 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의 구원의 모든 값이 다 치러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복된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지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관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진리의 바탕 위에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맙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꼭 붙들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자, 주님을 닮아가고자, 날마다 성령과 말씀 안에서 기도하며 순종과 감사함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 회당에 들어가서 모인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복된 구원의 진리를 선포했을 때에 그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 사도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을 열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1절에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참된 복음 진리의 말씀은 이처럼 강력한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생명의 능력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지면 그 자체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의 심령 안에는 핵폭발처럼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르신 말씀 중에 마가복음 4:26~29 말씀에도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면, 씨앗을 땅에 뿌리기만 하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땅은 사람의 마음이요 뿌린 씨앗은 주님의 생명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의 씨앗을 사람의 심령에 뿌리기만 하면 땅 자체 곧 사람의 심령이 그 말씀의 씨앗을 받아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시간이 지나면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나는 것처럼, 저절로 생명의 믿음이 그 심령 안에서 충실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생명의 복음의 씨를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말씀 자체의 생명의 능력이 사람의 마음의 밭의 땅과 생명의 화학 반응을 통하여 이렇게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고 구원의 믿음을 갖게 하고 구원받은 자답게 변화된 삶의 열매까지 맺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되는 대로 만나는 이들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만 합시다. 농부가 그러하듯이 씨를 뿌리고 자주 돌보기만 합시다. 그리할 때에 우리를 통하여 복음 전도를 받고 양육을 받은 자들 중에 반드시 택함을 입은 자,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가 생겨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은 반드시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듣기를 싫어하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복음 전도를 방해하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고니온 회당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이곳 이고니온 회당에서도 유대인들이 문제였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은 자기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마음까지 선동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 대하여 악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였으니, 3절의 기록된 말씀에 보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고니온 성읍 사람들을 선동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핍박 중에도 사도가 적어도 6개월 정도를 그곳에서 버티면서 계속 복음을 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회당 내에서 계속 전하지는 못했을 것이요 믿음을 갖게 된 이방인 형제의 집이나 공공 장소를 잠깐 빌려서 복음 증거를 계속하면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표적과 기사를 주시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습니다. 3절의 이 말씀을 보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
여기서, 주께서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표적을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이 진리임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확실함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하나님의 아들 딸의 됨과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 됨과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각양 은사와 기도의 응답의 은혜를 주시는 것과 저주의 속량함과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음과 성령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과 평안함을 누리게 됨과 귀신이 떠나가게 되는 것과 병들이 낫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표적과 기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참되시고 살아 계신 분이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고 그가 장차 세상에 심판자로 오실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진리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상과 잡신과 여러 가지 신화와 미신에 사로잡혀 살던 이방인들이 사도들의 따르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그들이 전파하는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사와 표적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믿음을 도우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만약 표적과 기사를 나타났는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이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그의 만유의 주재자 이심과 그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이적과 표적을 일으킨 사람의 개인이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독차지 하고 그 표적과 기사 자체의 대단함만 나타내게 된다는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표적과 기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경고한 바 있으며 사도들도 경고하였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경고한 바와 같이,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도 큰 이적과 표적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도 애굽의 마술사 얀네와 얌브레도 모세를 통하여 나타난 이적을 처음에 몇 가지는 흉내내기도 했습니다. 사도 시대에 사마리아 성읍에서도 오랫동안 마술사 시몬이 큰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로부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놀라움을 안겨주었듯이, 지금도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로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다고 해도 항상 그 열매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표적과 기사는 항상 복음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임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의 말씀에서 이르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6:31)
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엄청난 이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을 본 사람들이 천국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기적을 보고 체험함으로써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은 모세와 선지자들 곧 성경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천국 지옥이 있음을 믿게 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온 간증을 전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을 입증하는 역할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표적과 이적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큰 이적과 표적은 무엇이냐면 믿음 없던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의 주님 되심을 믿어 구원받는 것 자체가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은혜를 입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저기 이적과 표적을 보려고 쫓아다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분하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복된 일입니다. 즉 성경의 말씀을 조용히 풀어서 증거되는 말씀을 듣는 중에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심령의 조용한 은혜를 입고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훨씬 더 값지고 고상하고 복된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컵에 물을 따를 때 한꺼번에 몽땅 붓는다고 컵에 많은 양의 물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컵에 차분히 적은 양의 물을 조금씩 따를 때 그 컵에 한 가득 다 물이 차도록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더하려고 이적과 표적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이요 표적과 이적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보이는 표적과 나타난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은 우리 마음에 기록된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함을 통하여 차분하게 주 예수를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심령의 잔잔하나 뜨거운 열심을 갖는 것임을 항상 기억합시다. 날마다 맞이하는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은혜가 충만해지는, 가장 크고 값진 이적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매일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들이 “오래 있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사도들이 그곳 이고니온에서 약 6개월 정도 머물면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그렇게 장기간 복음 전도 사역을 지속한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대적자들이 계속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거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믿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그럴수록 박해하려는 세력도 더 강력하게 결집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반대자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집회 장소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위협하거나 집회하는 장소를 에워싸고 큰 소리로 방해하거나 잠을 자고 쉬는 숙소에 와서 그 창에다가 돌덩이를 던지는 일을 계속 했을 것입니다. 그 주동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 지역의 주민들을 선동하며 그 성읍의 관리들을 포섭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공격하려고 선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느 날 작정하고서 몇 백 명이나 떼를 이루어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 성의 관리들까지도 박해자들과 한 패였기 때문에 그들의 폭력 행위를 제지하는 치안 담당자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대로 진행되면 큰 사고가 생기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그러한 상황을 보면서 서둘러서 다른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그 성에서 빠져나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동쪽으로 도망쳐서 거기로부터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루스드라 성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계속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복음 전도에 대하여 강력한 훼방이 일어나고 그들을 죽이려드는 대적자들이 있을 때에는 상황을 살펴본 다음에 서둘러 몸을 피하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다메섹 도성에서 나바테아 왕 아레다의 신하가 바울을 체포하려고 성문을 막고 수색하였을 때에 사도 바울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벽으로 난 창으로 광주리에 몸을 숨겨 내려와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어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함으로써 핍박을 면하게 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순교도 마다하지 말고 그 자리를 고수하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는 마당에는 위급한 경우에는 속히 그곳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선교의 경우에도 중국 내륙에 들어가 선교할 때에 중국인들 가운데 기독교에 반대하는 자들이 선교사들이 아기들을 잡아 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폭도들이 몇 천 명이 몰려들어 선교사님들의 숙소를 공격하고 불을 지르고 약탈하고 사람들을 때리는 등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때 그들을 피하여 선교사님들이 피하여 이층에서 떨어지고 상처를 입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들을 당한 기록이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이렇게 포악한 대적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공격당하는 일들을 겪으면서도 끝없이 용기를 잃지 않고 복음 전도를 계속함으로써 복음이 널리 퍼져나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주 화요일에 중국 산동성에서 선교하는 이상조 선교사님이 저희 교회에 내려오셔서 저랑 낮에 식사를 하면서 중국 상황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선교 보고서도 건네주셔서 읽어보았습니다. 현재 중국은 시진핑 집권 2기에 발효된 종교조례법과 시진핑 국가 주석 재임 3기를 맞아서 반간첩법을 시행함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 활동이 극히 위축되어 있습니다. 외부적인 집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고 교육도 공산당의 지시된 것 이상을 가르치면 안되고 헌금도 불법적인 것으로 인정됩니다. 외국인 선교사님들은 간첩으로 몰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탈북자 구출 활동은 반간첩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중형이 선고되어 거의 탈북자 구출 활동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상조 선교사님도 말씀하기를, 지금까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님들이 90퍼센트가 중국을 떠났노라고 얘기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떠나 제주도로 와서 지내는 분들이 많고 일부는 다시 동남아 지역으로 선교를 다시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몸을 낮추고 추방될 때까지는 끝까지 거기서 전도하며 주의 종들을 교육하는 일을 다하고자 한다고 각오를 밝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떠나는 선교사님들도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아서 때를 기다리는 선교사님들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면 동남아 지역에 한국 선교사님들에 의하여 부흥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총신대학원 동기 목사님 중 한분도 인도네시아에서 청년 전도를 하고 있는데 매우 활동적인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쪽에서 막히면 저쪽에서 문을 열어주시곤 합니다. 그러므로 핍박이 있을진대 몸을 낮추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도의 문이 열리는 쪽을 바라보고 기도하면서 계속하여 전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진대 핍박 중에도 남은 형제들이 자기의 신앙을 지키면서 선교사님 없이도 스스로 교회를 세워나가게 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새롭게 전도한 곳에서도 새로운 복음의 불길이 붙어 전도가 더 활성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전도하다가 반대가 있고 핍박이 있고 성과가 없다고 해서 중단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계속하여 전도를 쉬지 맙시다. 그리할진대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전도의 문도 열어주시고 이전에 뿌린 씨앗도 헛되지 않아서 그곳에서도 택한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주님께로 나오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바람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너무 무리하게 억지로 일하지 맙시다. 사도 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자기 고향 다소에서 십 년을 은인자중하게 하시어 때를 기다리게 하신 바 있고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 끝에는 가이사랴 감옥에 이 년 동안 꼼짝없이 머물게 하시기도 하셨고, 로마 감옥에서도 이년 동안이나 또 머물게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일할 때도 있고 쉴 때도 있고 갇힐 때도 있고 자유롭게 다닐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서 영혼을 구원하려는 거룩한 열심을 끝까지 품고 늘 영혼 구원을 놓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핍박과 반대를 만나거나 아무런 성과가 없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전도의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계속 전도의 땀을 흘립시다. 성과가 없거나 반대가 있거나 핍박이 없는 것조차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뜻대로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신 자리에서 작은 바울, 작은 바나바가 되어서 영혼을 건지는 영혼 추수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꾼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혼 구원은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 일을 가장 기뻐하시며 친히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십니다. 하지만 홀로 하지 않으시고, 그 영혼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입과 손과 발이 되어 일할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실 수 있겠고 천사를 동원할 수 있겠지만, 기이하게도 하나님은 미련한 방식인 성도들의 전도 사역을 택하시고 교회와 성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전도 사역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복된 사역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길은 좁고 힘들고 사람들이 안 알아주고 외롭고 상처가 많은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기뻐하시고 알아주시고 함께해주시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가 순교를 앞두고 쓴 마지막 편지에서 이르기를
“너는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2:3)
이라고 말씀하였고,
“너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령관이신 그리스도의 군대의 일원으로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군대에 들어온 자들이 몸을 사릴 수는 없습니다. 격렬한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이 위험을 마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가 가진 것들을 가지고 주의 군대의 일에 참여하비다. 입이 있으면 전도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기도하고, 재물이 있으면 재물을 사용하고, 시간과 건강이 있으면 그것을 드리고, 지혜와 지략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주의 싸움에 모두 참여합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의 거룩한 싸움에 참여하여 헌신한 우리에게 이 싸움이 끝나는 그 날에 사령관 되신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귀한 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