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나이에 미국 유학, 체력과 정신력으로 버틴 소년 유일한
주간조선 2015.06.12 15:00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上] 유학 시절부터 상인 자질 발휘 보따리·숙주나물 장사로 성공
- 1946년 귀국 후의 유일한 가족.
“자넨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네. 모쪼록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나. 그리고 언제나 조선인의 긍지를 잊지 말게.”서재필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일한에게 용기와 신념을 안겨준다. 1925년 유일한은 서른이었다. 일한은 배 갑판 위에서 세차게 물결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벅찼다. 그는 일제 강점에 신음하는 조국과 동포에게 헌신하리라 결의를 다졌다. 일본이 조국의 국권을 빼앗고 엄청난 자본으로 경제권을 송두리째 거머쥐고 있을 때에도, 뜻 있는 민족상공인들은 신상(紳商)의 정신으로 근대기업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제와 결탁한 정상배(政商輩)가 나라 경제를 휩쓸고 있을 때에도 이를 개탄, 조국의 독립을 가슴속에 꿈꾸면서 조선인의 기업 풍토를 이룩하려는 큰 뜻은 일부 기업인들에게서 끊임없이 이어졌다.유일한은 불과 아홉 살에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으며 자본주의 정신을 배우고, 이 신념으로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켰다. 일한은 외국 땅에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인 서재필·박용만의 지도를 받으면서 선배 동지들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키웠으며, 귀국 뒤 기업 활동에서도 자본주의 참뜻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한다.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 유기연은 경북 예천이 고향이었는데, 조선팔도를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평양에 정착, 어렵사리 점포를 마련한다. 농산물·건어물상으로 시작, 잡화상과 고급양품 도매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유기연은 기독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다. 그가 서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평양은 개화기 기독교가 번성한 고장이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서양 선교사들과 여러 민족지도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문화를 일깨우며 청소년을 지도했다. 안창호·조만식을 비롯 많은 애국지사들이 민중계몽운동을 펼쳐 나아갔다. 이승만·장승만·박용만 등 이른바 ‘3만’으로 일컬어지는 선각자들도 자주 서울에서 애국심을 불붙게 하는 계몽강연을 했다. 어느 날 유기연은 박용만의 연설에 감동하여 만나기를 청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라 걱정을 주고받다가, 신생국가 미국의 눈부신 발전 이야기를 듣고 문득 유기연은 아홉 살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 공부시키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훌륭한 결정입니다! 이번에 미국 유학을 떠나는 아이가 몇 있습니다. 유군도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요.”아이 혼자 미국에 보내기로 한 유기연의 결심은 무모했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기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의지와 결단력이 굳센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기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일한은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미국에서 혼자 힘으로 공부하면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유일한은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를 거쳐 헤스팅스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 또한 즐겼다. 특히 미식축구에 푹 빠졌다. 미식축구는 격렬하고 힘든 운동이었으나 타고난 체력과 훈련으로 극복하고 헤스팅스고등학교 대표선수까지 되었다.유일한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상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미국에서 초·중·고 그리고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며 그곳에서 직장생활도 했고 자기 사업체도 창업, 운영했다. 미국은 그를 키워준 제2의 고향이며, 거기서 배워 익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기초한 자본주의 근본정신은 인생의 신념이자 철학이 되었다. 유일한은 헤스팅스고등학교 시절부터 자립하기로 결심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등 여러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꼭 알맞은 신문배달원 일을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본디 이름 ‘일형’을 ‘일한’으로 바꾸었다. 한자로 일한(一韓)으로 쓰게 되면 한국인이라는 뜻에 더 맞는다고 여겼다 일한이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그즈음 북간도로 이주해 살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형편이 어려워지자, 귀국하여 장남 노릇을 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일한은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평소 자신을 믿어주는 담임 교사와 상담을 했다.
“전 미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자식이 성장하면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책임지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귀국하라시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아직 미국의 선진학문을 다 배우지 못했네. 지금 귀국한들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무슨 일을 하겠나. 그보다는 미국에서 좀 더 공부하여 성공한다면 가족들을 더 잘 부양할 수 있지 않겠나.”
담임 교사는 은행에서 일한이 100달러를 융자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주었다. 일한은 감사를 표하고 집으로 돈을 보낸 뒤, 디트로이트 변전소에서 일하며 1년 만에 그 돈을 모두 갚았다. 1916년 스물한 살 때 유일한은 미시간대학 상과에 들어갔다. 융자금을 갚느라 입학이 1년 늦어졌다. 그는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했는데, 이때 피고용인이 아닌 경영인이 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일한의 상업적 재능은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 수입되는 비단·손수건·양탄자 등 특산물을 보부상처럼 등에 지고 손에 들고 다니며 팔았다. 이 착안은 적중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장사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 꽤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의 상인 자질은 대학 졸업 뒤에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유일한은 대학에서 자본주의 이론을 배웠고, 졸업 뒤에는 한동안 제너럴일렉트릭에서 회계 일을 하면서 글로벌 경영 실무를 익혔다.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사업을 하기로 한다. 숙주나물 장사였는데, 대학 나온 사람이 하기에는 하찮은 사업이었다. 이윤이 남는다면 일의 귀천을 어찌 따지랴. 숙주나물 장사는 크게 성공했다. 수요가 늘자 그는 대학 동창 왈리스 스미스와 동업으로 자본을 끌어들여 사업을 확장했다. 1922년 생산공장을 건설하면서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Co.)’를 세웠다. 이때 유일한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회사는 번창했고 제품은 디트로이트, 시카고뿐만 아니라 펜실베이니아, 뉴욕에까지 알려져 주문이 몰려들었다.
미국의 노예해방은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19세기 후반 자원개발과 교통기관 발달에 힘입어 석유업·철강업 등 거대산업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독점화되었다. 공화당이 남북전쟁 뒤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별다른 간섭이 없었던 것도 산업자본이 거대해진 이유의 하나이다. 1890년대 들어서자 남부·동부유럽에서 이민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이민과는 달리 주로 경제적 이유로 미국에 왔으며, 민주주의 경험이 없었다. 종교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므로 기존 이민자들과 잘 동화되지 못해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1920년대에는 할당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테오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오른 1901년부터 윌슨 대통령 제1기 끝 무렵인 1919년까지는 독점반대 사회개혁이 행해졌으며 이른바 혁신주의시대라고 일컬어진다.
1910년 조선이 국권피탈되자 많은 애국지사가 해외로 망명했다. 총칼을 앞세운 헌병·경찰통치시대 일본의 한국인 탄압은 극에 이르렀다. 억압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만세 함성은 팔도강산을 뒤흔들어 민족혼을 일깨웠다. 해외에서도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일어난 대한독립만세는, 그야말로 온 세계를 울리는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이때 미국 곳곳에서도 독립운동집회가 열렸다. 1919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다. 이때 유일한은 미시간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는데, 그도 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 무렵 미국에는 농업이민 및 국권피탈 뒤 망명한 애국지사와 정부관리, 유학생 등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청년학생들이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주도했고 서재필·이승만·박용만·장덕수·김도연·이대위·정한경 등이 학생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유일한은 이 집회의 결의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선포하는 일도 맡았다. 필라델피아 대회는 그에게 새로운 사상적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부터 일한은 조국과 민족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일한은 1924년에 미국에서 국제무역회사인 뉴일한주식회사(New Il Han & Company)를 세운 바 있는데, 이때 그는 서재필을 사장으로 초빙했다. 유일한은 30년 연상인 서재필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존경했다. 일한이 귀국할 때 서재필은 미술을 전공한 딸에게 새겨 만들게 한 ‘버드나무가 그려진 목각품’을 정표로 선물했다.
“자네 성이 버들 유(柳) 아닌가. 강인하게 잘 자라며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처럼 동포에게 건강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주고, 자네가 앞으로 할 일들과 고국의 미래도 그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일세.”
1925년 유일한은 중국계 여학생 호미리(胡尾利)와 결혼한다. 그녀는 미시간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동양 여성 최초로 코넬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1926년 일한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 박사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에비슨은 유일한이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호미리가 세브란스의전 소아과 과장을 맡아주기를 바랐다. 일한은 고국에 영구 귀국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지만, 에비슨의 제의를 받아들일지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기보다는 기업을 세워 조국과 민족에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미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굳히고 있었다. 그는 라초이식품회사의 지분을 정리한 25만달러로 의약품들을 구입했다. 먼저 약 종류를 주종으로 하는 무역회사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 1926년 귀국 당시 동아일보에 게재된 유일한·호미리 부부.
1926년 유일한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미리는 한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남편의 뜻을 따랐다. 그해 12월 10일 일한은 서울 종로 덕원빌딩에 유한양행을 창업하여 사장이 됐다. 아내 호미리는 에비슨의 부탁을 정중히 사양하고, 유한양행 사무실 덕원빌딩 2층에 소아과를 열고 가까운 거리에서 남편 일을 도우며 틈틈이 의료봉사 활동을 펼쳐 나갔다. 유한양행은 처음부터 국민보건을 목적으로 세운 것이니만큼, 약품 말고도 화장지·생리대·비누·치약과 더불어 농촌에서 필요로 하는 농기구·염료를 수입 판매했다. 다른 제약회사들은 과장광고를 일삼았지만 유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때까지 모두 세로로 된 광고문안을 가로로 바꾼 새 신문광고로 눈길을 끌었고, ‘먼저 의사에게 문의하라’며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올바른 치료가 된다고 강조했다. 약만 팔아먹으면 그만이라는 악덕상인의 사고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계몽적인 문안으로, 서재필 선생이 만들어 준 ‘버들표 유한양행’은 국민의 마음속에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심어갔다.“기업의 첫째 목표는 이윤추구입니다. 그러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또한 기업의 생명은 신용입니다. ‘정직’이 버들표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죽어 돈을 남기거나 명예를 남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참된 신뢰입니다.”유일한은 늘 이렇게 사원들에게 강조했다. 유한양행은 창립 5년여 만에 탄탄한 기반을 쌓아, 미국 업체 아보트와의 거래를 시작으로 1930년대에는 프랑스·영국·독일의 저명한 제약회사와 제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기업이 번성함에 따라 유한양행은 사옥을 서울 서대문구 신문로에 정하고 만주와 다롄에 창고를 마련, 중국 본토에까지 대리점을 두고 판로를 확장해 나갔다. 이와 같이 무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자 미국 선박회사 및 보험회사의 대리점도 운영했다. 그렇게 유한양행은 크게 성장해 1936년 6월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게 된다. 1937년부터는 중국 중부 및 서북부지역·만주·동남아까지 판로를 확장했다. 이 무렵 영업망 구축을 위해 만주를 둘러보고 온 한 회사 간부가 일한에게 건의를 했다.“만주 곳곳에 마약중독자가 늘어나 헤로인, 모르핀이 아주 비싼 값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만들어 팔면 어떨까요?”일한은 불같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나더러 아편 장사를 하란 말이냐. 살리는 약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죽이는 약을 만들자니, 그건 사람으로서 할 소리가 아니다!”그는 당장 사표를 쓰라고 지시했다. 주위에서 만류하고, 그 간부도 거듭 조아린 끝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유한양행은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일한은 이렇게 말한다.
“일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에게는 늘 일본 경찰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세금을 제때 내지 않는다면 저들은 트집을 잡아 회사를 무너뜨리려 할 게 뻔합니다. 유한양행은 모든 종업원이 함께 타고 가는 큰 배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회사는 꼭 지켜내야 합니다.”
1930년대 유한양행은 서울 서대문 본사와 소사공장, 다롄·톈진 지점과 상하이 출장소, 사이공 출장소, 대만의 타이베이 출장소까지 합치면 종업원이 1000여 명이나 되는 대기업이었다. 소사에는 유한양행 말고도 25개나 되는 일본 회사가 있었으나 실적은 유한양행이 가장 우수했다. 유일한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유럽 및 남북미대륙 시찰여행을 떠났다. 선진국 제약업계를 둘러보고, 유한양행에서 생산한 약품과 한국 농촌 특산물 판로도 개척하고자 했다. LA 출장소를 세우고, 유럽 지역 판로를 열어갔다.
유일한은 문득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시대는 날로 발전하고, 어제 이론이 오늘 바뀌고 그것이 내일 또 어떻게 바뀔는지 모르는 것이 학문의 세계였다. 그가 전공한 상과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즈음 비행기와 배의 발달로 서신 연락도 빨라졌으며 통신수단도 발달해 있었다. 일한은 생각대로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서울 본사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세계 정세는 그다지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1939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운이 차츰 나돌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시작으로 유럽은 전쟁에 휩싸였다. 미국에도 그 여파가 밀려오고 있었다. 유일한은 아시아 지배 야욕에 불타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일제는 일본과 한국에 있는 미국인은 물론 친미 인사와 회사들을 핍박할 게 틀림없었다. 그는 서울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 폭격을 감행,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미 육군정보처(OSS)는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부터 정보를 분석하고자 이 두 지역 사정에 밝은 인사들로 구성된 고문실을 두었다. 이때 유일한을 한국 지역 담당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대지’ 작가인 펄 벅을 중국 지역 담당으로 초빙했다. 유일한과 펄 벅은 이때 처음 만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친교를 이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서울의 유한양행도 곤경에 빠졌다. 일본은 모든 행정을 전시 체제로 개편하고 물자 통제를 심하게 했다. 모든 기업체는 자재난을 겪어야 했고 의약품 회사는 제약원료 구입로가 끊겨 제대로 생산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유한양행은 한국인이 세운 민족기업이고 사주(社主)가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자칫 적산으로 몰수당할 위험도 있었다. 유일한은 일본 상인이나 회사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꿋꿋이 지켜 나갔는데, 그 때문에 일본인 제약업자의 시기와 모함으로 총독부 감시와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총독부는 유한양행 임직원 근로자들의 반일사상을 핑계 삼아 수시로 연행해 회사 운영을 어렵게 했고, 잦은 세무사찰을 벌였으며, 금융 면에서도 많은 불이익을 주었다. 이러한 실정에서도 유한양행 임직원들은 일치단결해 흐트러짐 없이 꿋꿋하게 시련을 이겨 나갔다.
고정일 /소설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