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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9일
말씀 : 롬5:1
제목 : 십자가의 가치는 부활에서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떠나서는 선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원천, 핵심, 본질, 기원이며 모든 축복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를 떠난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며 그분과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복락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발했지만 그들 중에는 율법을 지킬 능력을 가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율법의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조차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미움으로 인한 살인, 음욕으로 인한 간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는 복락을 전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복락을 받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믿고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져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요점입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러므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리, 특히 십자가의 교리를 확고히 설정한 후 ‘그러므로’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어떠하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 그분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인간의 모든 고통, 즉 과거 수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인류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든 문제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그릇된 관계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숭배하며 죄악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탐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모반을 일으킨 결과 고통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것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면서 세상의 원리를 자주 언급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UN 산하기구들 즉, 유엔식량농업기구, 국제민간항공기구, 국제농업개발기금, 국제노동기구,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등의 국제기구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세계 질서와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늘 혼돈과 재해와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할 때까지 인간은 결단코 평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학식과 경험과 전문성이 탁월하더라도 악한 자리에 있는 한 인간은 평화를 알 수 없습니다. 여러번 말씀드린 예화입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은 누구에게나 습관적으로 "평안하십니까?"라고 인사하신다고 합니다. 하루는 공항대합실에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을 만나 "평안하십니까?"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병철씨가 "나는 아침에 침대에서 얼어나서 평안하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돈으로 평강을 살 수 없습니다. 사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한 삶에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정하시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문명 또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계속 축적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지으셨을 때는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으로 인해 죄악이 가득 찬 이 땅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직접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는 직접 하시겠지만 지금은 성령의 때, 구원의 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거두도록 심판하십니다. 예를 들어, 젓가락을 콘센트에 집어넣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아는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어린아이들에게 철저히 가르칩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리를 가진 아이들은 자꾸 콘센트에 손이 갑니다. 그것을 본 어른들은 "거기 손 집어넣으면 큰일난다."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제지합니다. 그러나 자꾸 손가락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아이들에게 "어쩔 수 없다. 집어넣어라. 젓가락 줄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댑니다. 이것을 '지엽적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훈, 경고, 징계를 위해 그냥 내버려두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연재해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뿌린대로 거둔다'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진 자들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는 순간순간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전쟁, 기근, 전염병 등등 오늘날의 모든 위기는 사람들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미워하고, 반역하고, 모독한 세상을 진노 가운데 두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본질상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평안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으로 살아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평안을 찾고 만족을 누리려고 발버둥치니까 헛되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와 쾌락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해봐도 평안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전 세계를 여행한 어떤 사람에게 어느 나라가 가장 좋은지 추천해 달라고 하니까 "제주도나 갔다 오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눈을 만족시킬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라도 계속 들으면 지겹습니다. 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식당이라고 몇 번 가면 안 갑니다. 입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로 만족을 누리기에 사람은 너무 큰 존재입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살기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옛날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것들로 만족을 누리기에 사람은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집이 달라지거나 의식주가 완전히 해결된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지식, 정보, 교육을 제공한다고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환경과 여건과 조건이 아무리 좋아져도 사람은 여전히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연과 우주는 철저하게 법칙에 따라 운행됩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기의 존재 법칙을 따를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설계법칙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쉼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합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와도 무서워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쌓여갑니다. 무섭지 않다고 최면을 걸고 자신이 넘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무섭고 공허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죄책감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항상 가슴에 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에서 떠난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 즉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 삼아 인간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다 퍼부으시고 완전한 심판을 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가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감당하셨던 것들, 즉 채찍,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무게, 조롱, 피 흘림, 울부짖음, 목마름 등 이 모든 것들을 용인하신 분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사랑, 용서, 긍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십자가로 인해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여 평안을 누리는 자로 세워졌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화평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제거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제거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제물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는 아담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받았습니다. 렘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세상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새로운 출생, 시각, 본성, 생명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십자가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롬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요약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눅10: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과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깨닫습니다. 성령은 능력의 영이십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유혹이 여전히 존 재하시만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빌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모든 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위대함은 무엇으로 증명될까요? 십자가는 어떻게 구원을 이룰까요? 십자가는 어떻게 죄를 씻어줄까요? 십자가는 왜 우리를 의로운 자로 부르는 능력이 있을까요? 십자가는 왜 우리의 화평과 평안이 될까요? 십자가 안에 모든 복락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은 왜 교회의 머리가 되셨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시대를 맞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질문을 아우르는 하나의 답은 바로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모든 것은 부활로 증명됩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으심은 헛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에 성령께서 오셨고,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리가 되셨으며,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오늘날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산 제물, 즉 화목 제물이시라는 진리와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 안에는 십자가의 말씀이 새겨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 용서, 능력, 은혜를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주도하시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성령께서 일하심으로써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역사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모든 역사가 부활을 통해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신비함을 누리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신비함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연단과 훈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