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조의 자동차는 국산자동차 1호인 "시발 자동차" 였습니다. 그리고 시발(始發)은 처음으로 국산을 만든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시발 자동차는 1955년에 처음 생산되었는데, 미군에서 불하받은 지프 엔진, 변속기, 차축 등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국산화율은
50%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철이 귀한 시절이라,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인 시발은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으며,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 했으나, 한대 만드는데 4개월 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당시 시발 한 대 값은 8만환이라 너무 비싸서 별로 팔리지 않았는데 1957년 광복 12주년 기념 박랍회에서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면서 널리 알려져 고객이 몰려 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시발자동차를 만든 이는 정비기술자 출신의 최무성씨인데, 개발 후 2년 동안 파리만 날리다가 기념박람회 이후 갑자기 고객이 밀려드는 바람에 계약금만 1억환 이상을 받아 공장도 사고 양산체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지 못해 시발 자동차는 8만환에서 30만환까지 가격이 뛰었다고 합니다. 또한, 부유층 사이에는 시발 자동차를 사기 위한 시발계(발음이 약간 어색하네요..ㅡㅡㅋ)를 부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고 합니다.
시발자동차의 전성기는 1962년까지 였다고 합니다. 1962년에 자동차 공업 보호법이 시행되고, 일본의 닛산과 기술 제휴한 새나라 자동차가 산뜻한 차를 생산해 내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시발 자동차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당시 최무성씨는 새로운 차 개발에 많은 돈을 썼고, 또 5.16쿠테타로 정부 보조금까지 중단 된데다가 새나라 자동차와의 경쟁에서 밀려 결국 1963년을 끝으로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팔려나간 시발자동차는 총 3천여대 라고 합니다. |
첫댓글 나의 공업고등학교 시절 현장실습으로 2개월가량 생산에 참여 했었습니다. 최무성사장, 최*성부사장, 최순성전무 등 3형제가 운영했었고 유명 인사로는 오원철(박정희 시대 청와대 경제?특보)씨가 관리부장으로 있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의 상황이지만 어려운 여건에서 노력하던 기술자들의 모습이 선하다
공장은 용산구 원효로쪽의 신계동과 문배동에 있었고, 본사는 종로2가 국일관 근처에 있었다. 그때와 비교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기술진보는 세계적인것이다. 자동차공업은 기계공업의 꽃이라 할만큼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 옛날을 회상하며 글이 있기에 올려 보았다. 그대로 복사해, 쿠테타로 정정함.
옛 생각에 뭉클 하시겠습니다.존경하옵는 우리 회장님 !
시발의 역사와 추억이군요. 그런데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5.16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군사정변으로 기술되어 있고 학계, 언론도 군사쿠데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본연의 임무를 이탈하여 4.19 혈투로 출범한 정부를 전복한 행위는 엄연히 반역이고 쿠데탑니다. 이를 혁명이라 하면 후대가 따라 배울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동차 역사공보 맛 좀 봤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