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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 새벽별 본다며 5시반에 밖으로 나가
따라 나가니 오리온과 북두칠성이 아주 잘보인다.
물론 이름 모르는 다른별들도 선명한데 별자리 공부 좀 해야겠다.
(사진에 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보입니다.)
지난저녁 남은 소고기 구워 아침을 먹고 나서는 길이다.
금원산(1335m)은 옛날 금빛원숭이가 있어서 금원산이라 하였고
4km능선으로 이어진 기백산(1331m)도 좋으나 등산에는 눈 돌리고
앞 오른쪽 집이 우리가 잤던 집이다.
안내소 가기전에 모형 노란원숭이 두마리가 있어서 생각하니 금원산의
금색원숭이 형상이로구나.
가섭암(迦葉巖)으로 가는길에 자운폭포 보고
왼편 포장안된 주차장에 주차하고
가섭사(迦葉寺) 일주문에 해당하는 문바위로 가는데 처음 만나는 개천은 다리로 건너고
두번째 개울은 쉬웠고 세번째가 조금 어려웠다.
문바위(단일 바위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바위란다.)
바위아래에는 몇사람이 비와도 젖지않을 만 한 굴(?)이 있네.
계단 끝에서 왼쪽 틈으로 들어가면
왼쪽은 기울어진 바위 오른쪽은 수직 바위가 서로 기대어공간이고
오른쪽 바위에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다.
금원산(金猿山)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져 있는 마에불(磨崖佛)이다.
가섭암지(迦葉庵址)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남향 바위의 삼존불이 있다.
<<삼존불 부분에 삼각 선을 그어 구획하고,
가운데는 보주형으로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새겼다.
가운데는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연꽃 수미단 대좌 위의 본존불은 넓은 얼굴에 눈은 작고 삼각형의 코,
크지만 밋밋한 귀는 토속적 인상을 준다.
좌우보살의 얼굴도 비슷한데 화려한 옷자락은 좀 번잡스런 느낌이다.
삼존불 모두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납작하다.
본존불의 각진 어깨,밋밋한 가슴,부자연스레 가슴에 모은 팔,
막대같은 다리,좌우로 벌린 발등과 같은 도식적인 처리는 고려불상의 특징이다.
오른쪽에 새겨진 연대(내 사진에 연대는 안찍혔다) 로는 1111년에 만들어졌고
아래의 가섭암은 1770년대까지 절이 있었다.>>
이상은 사인보드(사진은 나무 그람자 때문에 잘안보여서)에 있는것을 옮긴 글이다.
마애불상 앞에서 내다본 단풍산
문바위 위에 수세좋은 나무가 자란다.
가섭암 계단 내려와 바로 왼쪽 길로 오니 냇물 건너지 않고 다리까지 바로 오게되네.
주차장의 단풍
거창 위천면 강청리에 있는 동계 정온(1569-1641)의 고택을 보러 가는길의 은행나무 가로수
구비구비 산허리를 도는데 운해가 좋아 찍으려 해도
편도 일차선이라 넓은데 나오려나 가다보니 산길을 벗어났다.
동계고택 마을 좌측의 운해와 가마귀
동계정온고택 앞의 넓은 논은 곧 연못으로 만들거란다.
동계 정온 고택(桐溪 鄭蘊 古宅1569~1641)
공사중이라 어수선하다.
야옹 정기필(野翁 鄭夔弼 1800~1860) 살던집(안의 현감이 지어준 집)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건계정과 거열산성 가는길은 은행나무 가로수길이다.
장만리 충신정려(章萬里 忠臣旌閭)
字는 문숙(文叔) 호는 동호(東湖)이며 임란때(1592년)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업고 갔단다.
다음해 40의 나이로 사망, 1891년 고종28년 정려비를 내렸다.
아래다리 건너기전 오른쪽에 있다.
다리 건너 왼편으로
바로 건계정이라는 이름도 같은 음식점이 있는데 그것도 영구 건물로,
누가 허가 해준것인지 우리 네사람 모두 못마땅 해하며 지나갔다 지나왔다.
4,50여m 더가면 건계정이다.
다리가 볼품은 없어도 SUV차와 좀더큰 트럭도 드나든다.
건계정(建溪亭)은 거창장(章)씨 문중이 1905년에 세운 것으로,
문중의 시조인 평보(平甫) 장종행(章宗行)이 고려 충렬왕(1240년)때 중국으로부터 귀화했는데,
그의 아들인 두민(斗民)이 공민왕 때 홍건적들이 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들을 지휘하여 개경으로부터 홍건적을 몰아내어 국란의 위기를 극복한 무훈을 세우자,
이에 대한 공로로 공민왕이 두민을 아림군(娥林君)으로 봉했다.
이에 그 후손들이 두민의 공을 기려서 세운 정자이다.
건계정 계곡은 역사, 지리, 군사상의 요충지로 자리하였으나
지금은「거창」하면 건계정을 생각할 만큼
고풍스런 정자와 맑은 물이 굽어 도는 물길과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명소로서 자리한다.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거창을 소재로 하는 글이나 문학소재의 대상에서 으뜸이 되었던 곳이다.
건계정은 영천의 맑은 물 위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 등 위에 지어진 거창 장씨의 정자이다.
정자가 지어진 바위를 구배석이라 한다. (퍼온글)
건계정(建溪亭) 앞으로 흐르는 냇물
상류에는 새로 만든 다리가 높다랗게 있고.
이제 거열산성(居列山城)으로 간다.
왼쪽, 운동기구중에 집에서 하던 꺼꾸리가 있어 발걸고
뒤로 넘어가니 걸리는데없이 순식간에 뒤로 수직으로 뒤집어져
발 안걸었으면 목 부러질번 했다.일어날 수도 없어
옆에 있던 다른 부인이 이르켜 줄가요 하네.
한사람으로 안되어 두사람 덕분에 겨우 바로섰네.
집의것은 오른쪽에 각도 조절하는 핀이 있고
어깨에서 옆구리로 벨트도 있는데.
다른이들도 조심해야겠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왼쪽으로 가도 같은 정상으로 간다.)
정상 거의 가까이 갔는데 오른쪽 봉이 더 높아보이는데다가
여러 부인들이 오른쪽으로 가기에 정상을 물으니 자기들이 내려온 왼쪽이란다.
정상 갔다가 다른봉으로 가는중인가보다.
오른봉이 더높아보이는데...
동서가 왼쪽 앞에서 오라고 소리친다.
왼쪽 아래 하부약수가 보이는데 내려올때에 들리기로 하고.
나하고 처제는 성위 돌길로,처와 동서는 성벽아래 길로 걸었다.
진달래가 여기저기 많이도 피어있다.
여기는 성벽이 높고
건흥산성(乾興山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 약 1.5km, 성벽 높이 8m이다.
신라에 망한 백제의 충신·열사·의용군들이
나라를 재건하려는 목적으로 지리산,덕유산 일대에 쌓은 성이다.
백제 멸망 이후 이곳에서 치열한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663년(문무왕3) 신라의 김흠순(金欽純)·천존(天存) 등의 공략을 받아 함락되었다.
성은 덕유산 줄기의 건흥산 꼭대기에 위치하여
성 아래에서는 성곽이 보이지 않으며,
산세(山勢)와 능선의 기복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이다.
서쪽 성문지(城門址)에서 성 아래까지 옛날 도로가 남아 있고,
7개소의 망루를 세운 흔적이 있다.
동쪽 성문 밖에는 평탄한 지대가 있어
당시에 병사 훈련이나 목마(牧馬)를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 안에는 건물의 유적으로 보이는 축대와 우물터가 있으며,
성벽은 대부분 남아 있는데 당시의 석재가 그대로 있어 원형 복원이 가능하다.
(퍼온글)
성위 폭이 정말 4m는 되겠다.
한참을 더가니 성이 허물어졌는지 다시 쌓고있구나.
차전자와 쑥이 많아 저녁에 쑥부침개 먹으려면 각자 자기 먹을만큼 뜯잔다.
"노인이라구도 남편이라구도 형부라구도 봐주는 사람이 없네"라고 투덜대며 나도 뜯었다.
먹고는 살아야지.ㅋㅋ.
산성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내려오니 하부약수 물이 좋아 두컵 마시고
거울찍기 거울이 깨끗하지 않아.....
웃어보라니 웃어보고.
이부근은 습지로구나.
금시발복이라도 되어 재상이라도 나왔나 무덤만 초라하네.
앞에서 쉬어가라네 하더니 그냥 가는구나.
내가 힘들었나보다.
올라갈때에 뒤집어져 혼난 꺼꾸리에 왔으니 다내려온거다.
12시20분 차에와 귤먹으며 건계정을 한번 더 바라보고
아침8시부터 4시간20분동안 바지런히도 돌아다녔네.
길 잘못들어 한바퀴 더돌아 거창박물관으로 간다.
이형석탑(異形石塔)이라 했으나 신라고찰인 아림사지(娥林寺址)의 유물이란다.
가섭암터의 탑
금원산 옛가섭암터의 고려시대 탑
송림사터(松林寺址) 석조여래좌상
경남 도 유형문화재 제311호
박물관에 들어가니 거창의 역사가
선사시대-삼한(三韓)시대-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근현대거창으로 분류되어있다.
각시대별로 유물도 있고 도자기 선사사대의 주거 석관묘등
읍단위의 박물관으로서는 알찬 규모로 보인다.
거창박물관에 대동여지도가 있어서 이상했는데
거창읍 가지리 밀양박씨 문중 소장품을 기증받은 지도이다.
1861년 초간본은 아니고 1864년 재간본이다.
박물관직원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관람한다.
석관묘
사슴뿔모양잔(높이 20.2cm, 4~5세기 가야시대) 용인 태평양박물관소장
금동보살입상 신라불상 보물 285호 간송미술관소장
백자상감초화문편병(白磁象嵌草花紋扁甁) 조선 세조때(1466년)
국보 172-1호 호암미술관소장
거창을 떠난 문화재로서 안타까와 하는...
모두 모조품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파리장서운동이 뭔지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이란))
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다.
1919년 기독계와 불교계가 주동한 가운데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는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일으켜 이에 호응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인데 137명의 유림 대표가
전문 2천 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장서는 심산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정으로 가져갔다.
임정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씩이나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면우 곽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유림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유림들이 3ㆍ1운동 발기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장서운동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큰 이유로는 2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독립선언서에는 왕조의 복고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이에 서명하는 것은 한국 유림의 전통에 어긋나고,
다른 하나는 신학문을 배우며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분이야 어찌되었건 그 동안 은둔과 보신을 제일로 삼아온
영남 유림의 영수 곽종석이
왕년의 의병장이요, 호서 유림의 영수 김복한과 손을 잡고 일어난 변신이었다.
유림 대표들의 독립청원운동은 4월 2일 성주의 만세시위 때
이와 관련된 성주의 유생들이 체포되었으나
완강히 비밀을 지켰기 때문에 활동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곽종석, 장석영, 송준필 등 20명만 노출되어 체포당했다.
후에 상해에서 각 고을 향교로 발송한 한문 본 청원서가 발각됨으로써
137명의 이름이 알려졌다.
퍼온글
나처럼 몰랐던 분 있으면 늦게나마 아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렸습니다.
어제 수승대 동네에서 소 먹었으니 오늘은 돼지 먹어야지.
직원에게 물으니 해설하던분이 벌써 식당 갔다며 식당을 알려주어
장원급제식당에서 고추장석쇠구이(돼지고기)를 먹는데 푸짐하고 맛도 좋았다.
옆모습
앞에서 본 문화센터
처가 다니는 우리동네 문화센터 보다
박물관옆 거창의 거창한 문화센터를 본 처는 엄청크다며 놀란다.
사진찍으라 해 찍으려니 박물관까지 물러나야 되겠다.
전속 연극단원도 있는지 또 상설로 무대에 올리는지 연극 소품도 보인다.
거창을 떠나며 농협하나로마트에서 부사사과 사려니 아직 수확이 안되었단다.
마침 오늘 첫 출하되는데 같은 하나로마트인데 다른 곳에 나왔을지 하여
부사 아닌 다른 사과를 한상자 사고
합천군 대양면 정양늪으로 가는길의 가로수 단풍이 한창이다.
얼마전 방송에서 금개구리 서식지에 공사를 하여 밤중에 헤드램프 비추며
붙들어 안전한 다른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더니 그 금개구리구나.
대충 둘러보는데 중복된것 빼도 이런 안내판이 31개나 된다.
수달도 있구나.
사온 사과 나누어 먹으며 잠시 쉬고
내버들은 늦가을이라 잎이 볼품없다.
펜스 밖으로 나가 습지 외곽을 걸어보려고.
산에서 늪으로 물이 들어오는 수로인가보다.
정양늪을 한바퀴 다 도는구나.
늪 사무실도 문을 닫아 옥상에 올라 늪을 휘~둘러보고
함벽루(涵碧樓)로 간다.
함벽루로 왔다.
함벽루(涵碧樓)
걷기길은 잘만들었구나 조금 지나가 함벽루를...
제일강산이라 강릉 경포대 생각난다.(강쪽에서)
우암의 글씨와
남명선생의 시
함벽루 가는길 초입에 커다란 집이 있어 궁금했는데
일하는 부인이 내다보며 절의 공양간이라기에
공양 할 수있냐 하니 지금은 안된단다.
더 지나며 보니 공양간 보다 작은 연호사(烟湖寺)구나.
이제 숙소가는길에 합천호도 보고
합천호 댐
왼쪽으로 좀 더 가서 찍을 것을 두탑이 붙은것 같구나.
댐 상류는 호수 같고
댐 아래는 오줌줄기 같다.
합천호수가의 풍경좋은 돌담집으로 가며 전화하니 안받더니 문자에 답이오는데
주인이 모임으로 대구에 있는데 열쇠위치 알려주며 방에 들어가라네.
처제가 밀가루와 튀김용 기름 일습을 준비해 와
소주 안주에 거열산성에서 따온 쑥으로 부침개 만들어먹며
야구구경으로 하루를 보낸다.
첫댓글 문바위, 마애삼존불, 간계정, 거열산성, 정양 늪 생태공원, 함벽루 등.....
특히 거창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대동여지도 " !
지금의 지도와 비교해도 그리 틀리지 않으니
당시 "김정호선생" 얼마나 고생했는지 상상이 되네요
아무튼 깊어져 가고 있는 이 만추의 계절에....
덕분에 오늘도 발품 팔지 않고 거창주변 유명 관광지 관광 잘 햿습니다
상은님 때문에 여행기 올릴 마음이 생겨요.고맙습니다.
간계정이 아니고 건(建)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