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 /아버지에 대한 추억(1)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요사이 왜 이렇게 아버지 생각이 저를 완전히 붙드는 것일까요?
아버지 하늘나라에 가신 지 벌써 44년. 그런데도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 모두가 어제 일어난 일처럼
머리에 맴돕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두 번에 걸쳐 돌아 보겠습니다. 오늘은 그 1편을 올립니다.
아버지 17세 때 동갑이신 어머니와 결혼하셔 14년 여 큰 댁에서 사시다가 동네에서 다 쓰러져가는
빈집으로 분가하셔 어깨에 지게를 업고 사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남기신 추억을 새기며 보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불효자의 한을
토하며 용서를 빌고 싶어 이 글을 남깁니다.
17세에 결혼하신 부모님은 19세 때부터 아이를 낳으시기 시작하여 3 녀 3 남을 2년 터울로 낳으셨지만
두 살도 넘기지 못하고 3 녀인 누나와 차남인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4 남매를 먼저 보내시면서 부모님이
겪으셨을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 아픔을 견디시며 사시던 아버지가 동네에서 가장 허름한 빈 집(주민이 만주로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집)으로 분가 하여 나오신 때가 1940년 전후였으니 일제 강점기가 기울기 시작하는 무렵 제 나이 두
살 때였으니 무엇을 알겠습니까? 기억나는 것은 그나마 제가 네 다섯 살이 지난 후 이야기겠지요.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도 일제 말에 국민 누구나 가 다 겪으신 강제 동원 이야기입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그나마 하늘의 도움이셨던 지 아니면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이셨던 지 아버지는
고향에 있던 군산 비행장의 취사병으로 가셨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 남태평양 그 어디, 아니면 일본
어느 탄광에 가셨다면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하면 끔찍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지금 아버지와의 기억 첫 번째 드리는 이 이야기는 제가 네 다섯 살 때 철없는 때의
이야기 입니다.
아버지가 그처럼 취사 병으로 가신 후 아버지는 가끔 집에 오셨고 집에 오실 때는 아버지가 보지도 먹어본
적도 없는 것들을 가져 오셨으니 철 모르는 저는 얼마나 아버지를 기다렸겠습니까?
아버지가 가지고 나오신 것은 바나나, 미루크(밀크 과자 사탕), 빵, 사탕, 껌 등이었는데 다른 것도 가져오
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우리 백성들이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구경하고 맛보았겠습니까?
아버지가 가져 오신 그것들을 들고 나가면 동네 친구들이 어떻게 얻어먹을 수 없나 해서 졸졸 따라다녔지요.
사탕 하나로 친구들이 돌려가며 맛을 보는 재미에 우쭐대던 제 모습, 또한 저보다 네 살 위인 그 누나는 또한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을까요?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아버지는 그 어려운 일제 강점기를 넘기시고 귀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귀가 후
자유의 삶에서 시작되었던 삶이 아버지가 지게를 업고 사신 기억입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날만 세면 지게를 업고 산에 오르던 기억입니다.
해방 된 후 땔감이 부족하니 산이란 산은 모두 벌목을 시작하여 민둥 산으로 변해 갔는데, 푸른 산을 다
민둥 산으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 걸 모르고 일제의 착취에 숨죽이며 살던 사람들이 우선 급한
대로 땔감으로 사정 없이 벌목을 했었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큰 댁으로 갔었는데. 큰 댁에 가면 쌀밥을 먹을 수 있었기에 버릇이 되었지요.
그렇게 밥을 먹고는 얼른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는 날이 새면 지게를 업고 나가셔 민둥 산에 가셔서
등걸을 캐서 장작을 만들어 팔아 살림을 늘리는 일을 하셨기에 그렇게 뛰어 와야 아버지가 산에 가시면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나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 나서 산에 따라갔는데 아버지는 제가 또 따라올
것을 눈치로 알아보시고,
“ 얘야, 오늘은 집에 있어. 아버지가 올 때 칡 뿌리랑 캐 가지고 올 테니” 하시며 말리셨지만 저는 아무
말도 없이 아버지를 따라가면 먹을 것을 해 주시지 하는 기대에 차 있었는데 영락없이 아버지는 이 못난
아들 먹을 것부터 챙기시느라고 애쓰셨습니다. 아버지는 우선 칡 뿌리를 캐서 기다리는 저에게 먹이셨고
칡넝쿨도 잘라주셨고 산 딸기, 머루, 다래 등 배고프던 시절 무엇이던지 먹을 것 가리지 않고 먹게 하셨지요.
저는 그런 것들 먹는 재미로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철 모르던 자식이었습니다.
저에게 임시 먹을 것을 주신 아버지는 등걸을 캐는 일을 하셨고, 저는 그 사이 산에 피어있는 진달래꽃도
구경하고 냇가에서 가재도 잡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짓이 얼마나 아버지를 힘들게 한 일이었나
싶고 아버지께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렇게 어깨가 무너지도록 일을 하셔 몇 년 후에는 다 무너져 가는 집을 남겨두고 새집을 지어 이사하신
때가 제 나이 육 칠세 때였습니다. 그 헌 집에서 살 때 일본 군이 말을 타고 집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본
기억이 머리에 남아 있는데 워낙 험한 산 중이어서 그랬나 일본 사람을 본 게 그것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집으로 이사하셨을 때 얼마나 기쁘셨을 까요! 또 우리 남매에겐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그때는 새집으로 이사한 것이 좋기만 했지 그 사이 아버지 어머니가 흘리신 피 땀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새집으로 이사하시고도 아버지 어머니는 그토록 열심히 사셨습니다.
점점 논 밭이 늘어갔습니다. 분가 때 겨우 받아온 300평 다락 논에서 출발하신 아버지가 800평이 더
늘었고, 밭도 점점 새로 사셔서 여기저기에 밭을 장만하셨고요. 참으로 기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때를 회상하며 꼭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아버지가 그토록 힘든 삶을 사시면서도 밤이 되면
동네 사랑방에 가셔서 문맹이신 어머니들 모셔 놓고 춘향전, 심청전,별주부전, 장화홍련전 등 읽어주시면,
동네 어머니들 듣고 또 듣고 하신 이야기지만 매번 그렇게 감동하셨던 모습이 선합니다.
낮에 일을 하시고 지친 몸이셨을 텐데 아버지가 그렇게 해 주시던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러는 사이 제가 9살이 되던 해 해방된 다음 해 일제 강점기라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많은 어린이들이
일제히 학교에 가던 때입니다.
제가 9살이었는데도 부모님이 처음에는 저의 초등학교 입학을 거절하신 기억이 나는데 그도 그럴 것이
6 남매 중 4 남매를 잃으셨으니 남은 두 남매에게 행여 무슨 일이 생기실 까 걱정이 되셔 다른 아이들은
서당에 다녔는데도 서당에도 보내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시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초등학교를 입학한 저에게 부모님은 ‘높은 나무에 오르지 마라, 물에 들어가지 마라’ 하시는 말씀 뿐이었고
부모님 말씀을 쫓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항상 책을 소리 내어 크게 읽곤 하면 집 뒤로 길이 있었는데 저의 책 읽는 큰 소리에 지나가시던 어른들이
장영(저의 아명)이는공부 열심히 한다는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새집에서 살면서 아버지와 쌓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때의 삶이 그렇게 그립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이불 속에서 4 식구가 살을 맞대고 살던 기억이 부모님의 사랑이었구나 싶어 가장
행복한 추억이고 제일 따뜻한 자리에는 저희 남매에게 자리를 주시곤 했지요. 지금은 가족이라고
해도 각자 따로 사는 삶이니 그렇게 살을 맞대고 살던 정겨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간절한 그리움이요 정입니다. 겨울이면 추위를 이기려고 더욱 가까이 살을 가까이 하고
살았지요.
화롯불 지펴 놓고 손 따뜻하게 쬐면서 고구마 구워 먹던 그 맛 어디에서 찾을까요? 눈이 수북이 내리는
날이면 마당에 눈을 얼마간 쓸어 내고 바작(바지게)을 펴 새 잡는 자리를 마련하여 먹이를 찾아온 참새를
잡아서 구워 먹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닭 모이를 주고 서로 먹는 사이 힘 센 닭이 다른 닭 다 몰아내고 혼자 독식하려 하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약자 편을 들어 힘센 닭 쫓아내시고 다른 닭 편히 곡식을 먹게 하신 아버지, 항상 약자를 도우시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벼 이삭이 익어갈 때면 참새와의 전쟁이 매일 이어졌지요. 너 마지기 논이었지만 어린 저에게는 꽤 큰
논으로 보였기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참새를 몰아내던 추억이 아버지를 돕는 저의 길이라 여겼는데,
아버지는 저에게 어떤 일도 시키시지 안 했습니다. 바쁘신 아버지를 돕는 일이라 여기고 스스로 했던
일이지요.
농촌에 살면서도 자식에게 지게 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던 부모님이셨고. 어쩌다 한 번 지게를 짊어
보려 했지만 지게는 뒤로 넘어가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아버지는 지게를 업으셨는데 저는 지게를 짊어서 그랬나 봅니다.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저희 동네에서 400 여 미터만 가면 저수지 방죽이 있었습니다.
그 저수지에서 틈만 나면 아버지와 함께 더러는 저 혼자 낚시하던 기억은 참으로 많이 남는 기억입니다.
낚싯대라고 해야 동네 대 밭에서 곧은 대나무 하나 베어 만든 것이었지만 물 반 고기 반이었던 저수지에서
나갔다 하면 가지고 가신 고기 바구니(다래끼)에 가득 차도록 잡아오셨었습니다. 저도 많이 잡았고요.
아버지와 함께 걸어오면서 기뻐했던 추억이며 잡아온 고기를 어머니는 매운탕을 해주셨고 그 맛은 지금도
입가에서 돌고 있고 세상 어디에서 그처럼 맛있는 매운탕을 먹어본 기억이 없네요.
아버지는 또한 가물치 낚시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는데 가물치는 논에 벼 이삭이 조금 자랄 때쯤 저수지
풀숲에 알을 낳읍니다. 그러면 개구리를 낚시에 끼워 알이 있는 자리에 기어가는 모습을 보이면 어김없이
개구리를 잡으려고 물거든요. 잽싸게 걷어 올리면 가물치가 잡힙니다.
가물치 낚시 법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이 가르쳐 주신 기술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공산 괴뢰가 물러간 후 저의 고향은 평화로운 산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논에 물 대기가 끝나면 저수지는 물이 없게 되지요. 그러면 저수지에 사는 고기들을 잡으려고 가리라고
하는 병아리를 키우던 가리로 가리 질이 시작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출성 산 밑에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 7년 이 지난 후 처음 물이 말랐지요. 그러자 주민이
일제히 가리 질로 고기를 잡기 시작햇는데 아버지도 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고기 잡는 소리가 저수지에
가득할 때, 아버지도 참으로 큰 잉어를 잡으셨습니다. 잉어가 얼마나 컸던지 가리 주둥이로 나오지 못해
가리를 뒤집어 들고 나오시면서 아버지가 그토록 기뻐하시던 모습을 처음 본 듯합니다.
마침 군대에 가셨던 친척 아저씨가 휴가 나오셨는데 아버지가 잡은 잉어를 아저씨와 제가 함께 어깨 걸이를
하여 들고 오는데 잉어가 얼마나 컸던지 저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와야 했습니다.다. 집에 가져와 다랑이에
넣었더니 어찌나 큰지 꼬리를 물고도 남았습니다.
큰 가마솥에 넣고 실컷 다리니 하얀 국물이 많이 나와 여러 날 다려먹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흐뭇해 하시며 기뻐하시던 모습 눈에 선합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고향은 농사 외에 수박을 심어 팔아 생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수박을 심었고 얼마나 잘 가꾸느냐 에 따라 농촌 수입으로는 큰
보장을 약속하였습니다.
아버지도 앞에 있는 밭에 수박을 가득 심고 원두막을 짓고 지키는 일이 밤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서리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키고 계셨는데 하루는 서리를 하려 왔는데 아버지는 심장이 약하셔서 소리도 못 지르고 떨기만
하셨다더군요. 그 이후 밤이면 가끔은 누나가 저도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누나는 억척스러워 그런 일도 곧잘
했습니다.
그런 밤이면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구름과 숨바꼭질 하는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천국에서나 보는 모습처럼
그립습니다. 수박 서리 말고도 닭 서리라는 것도 있었어요.
그 시절 미풍양속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묵인하던 풍습이라고 해도 될까요? 정이 넘치던 시절의 추억입니다.
제가 아버지와의 추억을 남기면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남을 돕는 마음이 많으셔서 어려운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시면 거절을 못하시는 아버지였
습니다. 그래서 보증을 잘 서시었지요. 보증을 잘못 서면 결과는 아버지가 책임을 지셔야 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으시기도 하셨답니다. 그러시면서도 보증 서시는 일은 계속 하신 아버지이셧습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그랬는가요.
가을이면 추수를 마친 농부들이 벼를 말리기 위해 베어 놓은 벼를 논두렁에 세워 말리지요.
하루는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셔서 들 판에 나가셨는데 동네 박 씨 성을 가지신 어느 어른이 남의 벼를 자기
논에 옮기시더랍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시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요? 소문을 내서 동네에서 어렵게 사시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아버지는 조용히 타이르셨답니다.
제자리에 가져다 놓도록 하셨지요. 그래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먼 훗날 그 어른의 자제가 저보다 한 살 더 위였지만 같은 학년이었습니다.
하루는 하교 하는 자리에서 친구가 조용히 제 곁에 오더니 ‘고맙다’며 인사를 하더군요.
“무엇이 고맙다는 거야?‘ 하고 물으니 친구는 머뭇거리더니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를 용서하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저에게 말을 하지 안 했으면 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 친구는 항상
저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그 후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보였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때 다 그랬지만 저희들은 무명을 사다가 검은 물을 드려 바지는 검은 핫바지였고 저고리는 흰 저고리
였습니다. 검은 고무신이면 만족하던 때입니다. 책가방은 꿈도 못 꾸었고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월사 금을 내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그럴 때면 집으로 돌려보내 월사 금을 가져 오라고
했었지요.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그 어려운 삶에서도 한 번도 그런 일로 인해 저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고 키웠습니다.
세월은 흘러 6학년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가정 형편은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입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끝>
첫댓글 자서전을 한번 시도 해보심이 어떠실지요?
삶이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제 좌우명으로 답할까요?
"내 가슴속에는 피곤한 심장이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을 양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