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대한제국공사관 태극기와 함께 걸린 경복궁 광화문 사진
이 글은 미국 워싱턴 D.C. 로건서클 역사지구에 위치한 주미대 한제국공사관 벽에 걸려 있던 작은 사진 한 장과 그 사진 속 경복궁 광화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수교를 맺고 1889년 2월에 이 건물에 공사관을 개설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1905년까지 16년간 조선과 대한제국이 자주국으로서 외교를 펼쳤던 이곳의 1층 복도 벽에는 태극기와 함께 경복궁 광화문을 찍은 작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조선의 외교관들은 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저 궁궐에 계신 국왕을 대신해 조선을 대표하고 있음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을까. 광화문은 조선 그 자체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일본에 빼앗겼다가 오랜 노력 끝에 2012년 문화재청이 재매입하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공사관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 ‘사진 속 사진’의 원본이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진은 1881~1882년경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속 한 인물이 이 시기에 운영되었던 별기군(別技軍)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서 발견한 진짜 보물은, 광화문 문짝에 붙어 있던 커다란 그림의 흔적이다. 비록 비바람을 맞고 사람들의 손을 타서인지 아랫부분은 너덜너덜 찢어져 있지만, 그림에 그려진 것이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들고 부리부리한 눈을 사납게 뜨고 있는 두 장군의 모습임을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궁궐 대문에 붙였던 문배도(門排圖)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문배그림을 붙여 새해 모든 재앙이 피해 가길 기원
문배도는 정초에 나쁜 기운과 험한 운수를 쫓기 위해 궁궐 정문에 붙이는 그림을 말한다. 홍석모(洪錫謨)가 1840년경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元日)’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도화서에서는 수성선녀도(壽星仙女圖)나 직일신장도(直日神將圖)를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데 이것을 세화(歲畫)라 하며 송축하는 뜻을 나타낸다. 또 금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는다.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또 한 장군은 절월(節鉞)을 들었다.
이 그림을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라고 한다. (중략) 이런 방법으로 삿된 귀신과 전염병을 물리친다. 모든 왕실 내외척들의 문간에도 이런 것들을 붙이며 일반 백성 집에서도 이를 많이 따라 한다. 금갑옷을 입은 두 장군은 사천왕(四天王) 신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나라 태종 때의 명장인 울지공(尉遲恭)과 진숙보(秦叔寶)라고도 한다.”
울지공과 진숙보는 당 태종이 악귀에 시달려 잠을 못 자고 있을때 궁 밖에 무장하고 서서 지키니 악귀가 나타나지 않아 당 태종이 화공에게 명하여 이 둘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육전조례(六典條例)』 도화서 진상조에 따르면 “세화는 차비대령화원이 각 30장, 본서 화원이 각 20장을 12월 20일까지 봉진한다. 문배와 액막이 그림은 장무관 2명, 실관 30명이 번갈아 맡아 각 전과 궁에 진상할 것과 문에 붙일 것을 모든 화원에게 분배하여 12월 그믐 전에 봉진한다”고 하여 새해를 맞기 전 도화서 화원들이 바쁘게 대량의 세화와 문배도를 그려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귀신이 무서워하는 존재를 그린 그림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는 이야기는 꽤나 친숙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처용 설화에서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그려 붙여 역신(疫神)을 쫓았고, 도화녀비형랑 설화에서는 여우로 변해 달아난 도깨비를 죽인 비형랑 이야기를 써서 문에 붙이는 것으로 귀신들을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 신라 때부터 문배와 같은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도 오랜 문신(門神) 풍습이 있어서 한나라 때의 문헌에 정월 초하루에 닭이나 호랑이, 신도[神茶]와 울루(鬱壘) 같은 신장의 그림을 그려 문에다 붙인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풍습이 6세기경에는 정초의 연례행사로 정착되었고 명·청대에는 연화(年畵)로 크게 유행하였다. 그 연원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새해에는 액운도 질병도 얼씬하지 못하길 바라며 귀신도 무서워할 강한 장군의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풍습은 시대와 나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궐문에 붙였던 문배도는 비바람에 노출되니 금세 해어지기 마련이고, 매년 새로 그려 붙였으므로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이 사진이 발견됨으로써 궁궐 정문에 붙였던 문배도의 실제 모습을 흑백으로나마 접하게 된 것이다. 이를 단서로 경복궁관리소에서는 2021, 22년 설날 연휴에 광화문 문배도를 재현하여 붙였다.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에 사진 및 기록의 금갑장군 도상과 유사하면서 유일하게 완형이 남아 있는 문배도가 전하고 있어 광화문 문배도를 재현할 때는 이 유물을 활용하였다.
사진 속 광화문은 먼 미국에 나가 있는 조선의 외교관들과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얼굴과 같았다. 그 광화문에 붙인 문배도는 19세기 말, 이제 막 세계무대에 발을 내민 작은 나라에 닥칠지 모르는 액운을 앞장서 막아보려는 염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사진이 찍힌 후 조선을 휩쓴 역사의 회오리는 광화문과 경복궁을 이리저리 할 퀴었다. 광화문은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지어지면서 헐려 옮겨졌다가 6.25전쟁 때는 폭격을 당해 문루가 소실되었고, 1968년엔 경복궁 축과 틀어진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 소재로 복원되기도 했다. 2010년에야 경복궁 창건 당시의 위치를 찾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40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모든 나라가 긴밀히 엮여 영향을 주고 받는 세상이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 당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광화문은 여전히 역동적인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얼굴이다. 우리는 또 광화문에 문배그림을 걸며 새해엔 병마와 액운과 모든 재앙이 우리를 피해 가길 기원한다. 새해를 맞는 우리의 마음에도 근심과 불안이 피해 가도록 긍정과 의지의 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님 두 분을 그려보자.
글, 사진. 이홍주(궁능유적본부 학예연구사)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3-01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