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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자명고의 비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황 원 갑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이 이끄는 정예 특공대 3,000여 명이 낙랑국(樂浪國)의 도성 앞을 해자(垓字)처럼 가로막은 오늘의 대동강 북쪽 기슭에 다다른 것은 서기 32년(대무신왕 15년) 음력 10월 어느 날, 아직도 하늘에서 별빛들이 채 사라지지 않은 캄캄한 첫새벽이었다. 그들이 수도 위나암성(尉那岩城)을 떠난 것은 불과 닷새 전. 모두가 날쌘 기동력을 자랑하는 경장(輕裝) 기마병이었으므로 밤낮을 쉴 새 없이 달려 낙랑의 국경선을 돌파하여 마침내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참으로 천손족(天孫族)의 나라 고구려의 정예 특공대답게 전광석화같고 질풍노도 같은 기습작전이었다.
부왕 대무신왕(大武神王)의 특명에 따라 왕자 호동이 총수가 되어 출전한 고구려군은 이번 낙랑정복작전을 보다 전격적이며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대규모 정규전 때와는 달리 군마의 무거운 갑주를 벗기고, 군사들도 가벼운 갑옷과 투구 차림에 창검과 맥궁 같은 개인 병장기만으로 무장한 경장 기병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날살처럼 달려 내려왔던 것이다.
어둠에 쌓인 드넓은 강물은 조용히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폭이 넓고 어두운 까닭에 아직까지 강 건너편에 우뚝 서 있을 낙랑의 성벽도, 그 성문 앞을 지키고 있을 군사들도, 그 밖에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왕자님, 이제 이 강만 건너면 바로 낙랑의 도성이옵니다!”
이번 작전의 부장(副將)을 맡아 호동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침식을 같이하며 군사들을 지휘해온 대실발소(大室勃素) 장군이 마상에서 입을 열었다. 대실발소는 호동이 겨우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글과 무술을 가르쳐온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본래 관나부 사자(使者)였지만 대무신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류부 부장(部長)으로 발탁된 매우 현명하면서도 용기 있는 장수였다. 또한 그의 본성도 추씨(鄒氏)였으나 임금이 그의 출중한 자질을 높이 사서 대실이라는 새로운 성씨를 하사하였던 것이다. 대무신왕이 맏아들 호동에게 낙랑국 정복의 대임을 맡기면서 그의 사부인 대실 장군을 함께 보낸 것도 그만큼 그의 뛰어난 지략과 노련한 경험,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바로 저 낙랑국의 사위란 사실을 잊으셨나요?"
호동이 마상에 앉은 채 윗몸만 돌린 채 대실발소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이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라고 보기에는 믿기 어렵게 의젓한 말투요 태도였다. 호동의 말에 대실 장군이 소리낮춰 웃으며 대꾸했다.
“원,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소장이 어찌 그것을 잊을 리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그렇다는 사실을 왕자님께 일깨워드렸을 뿐이옵니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면 바로 밋밋한 언덕이고,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성벽이라오. 그러나 낙랑국의 성벽은 우리 고구려의 석성(石城)과는 달리 비록 토성이지만 그 속에 돌멩이와 통나무 따위를 박아 넣고 진흙으로 단단히 다져서 쌓아올렸기 때문에 쉽사리 허물어뜨릴 수도 없고 재빨리 타넘을 수도 없다오.”
“그런 까닭에 대왕폐하께옵서 영용하신 왕자전하로 하여금 낙랑 정복의 막중한 대임을 맡도록 하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 미리 약조한 대로 날이 밝으면 공주가 안에서 이내 성문을 열어주어야 할 터인데 잘 될지 걱정이 되는군요.”
"어쨌든 강부터 건너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소장의 생각으로는 상류 쪽의 비교적 얕은 여울목에서 강을 건넌 다음, 다시 성문 쪽으로 우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옵니다."
"맞는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선발대를 보내 그런 여울목을 보아둔 게 아니오? 이제 곧 날이 샐 터이니 도강을 서두르는 게 좋겠소!"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그런데, 왕자전하, 오래 전부터 낙랑국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그 무슨 자명고(自鳴鼓)니 자명각(自鳴角)이니 하는 보물은 정말로 있는 것이옵니까?“
대실발소가 이렇게 묻자 호동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지없이 중대한 군사기밀인 자명고와 자명각의 비밀을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지켜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군사가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고, 어차피 내일 낙랑성이 함락되면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을 스승에게까지 더 이상 감출 까닭이 무엇이랴. 그래서 호동은 그동안 고구려에서는 부왕과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던 낙랑국의 가장 큰 비밀을 대실 장군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도 낙랑국에 그런 신기하고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물을 보진 못 했다오. 장가를 든 뒤에 가장 먼저 공주에게도 그것을 물어보았지만 처음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하고 속 시원히 가르쳐주지 않더군요. 결국은 비밀을 털했지만..... 세상에 어찌 그런 신기방통한 신물(神物)이 있을 수 있겠소? 우리나라에도 없고 다른 어 느 나라에도 없듯이 낙랑국에도 그런 신기한 북과 나팔이란 애초부터 없었단 말이오.”
"아하, 그랬었군요!"
대실 장군이 놀라 탄성을 지르더니 이렇게 말허리를 이었다.
“그러면 그렇지요! 소장의 짐작도 그러했사옵니다. 적군이 침범하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이 있다니, 세상에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옵니까? 낙랑국에 과연 그런 신물이 있다면 어찌 우리가 싸움 한 번 없이 무사히 짓쳐내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소. 맞는 말씀이요. 하지만 놀라지 마시오 사부님! 알고 보니 그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것이 그 이름처럼 가죽으로 만든 북과 쇠로 된 나팔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가리켰던 것이라오!“
“아니, 뭐라구요? 자명고와 자명각이 북과 나팔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구요?”
“그렇다오! 낙랑국에는 앞일을 기막히게 잘 알아맞히는 매우 용한 주술사 부부가 있는데, 바로 그들을 가리켜 자명고와 자명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오! 자명고는 바로 남편이요, 자명각은 아내라고 합디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자명고는 둥둥둥 북소리를 내고, 자명각은 뚜뚜하고 나팔소리를 낸다던가.... 그런데 그들 부부는 낙랑왕 말고는 다른 사람들 앞에는 절대로 모습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오. 그리고 다른 나라는 물론 자기네 나라 사람들에게도 세상에 신기방통한 북과 나팔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그 신통한 무당 부부의 비밀을 지금껏 지킬 수 있었던 거라오.”
“아아,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군요! 낙랑국이 여태껏 북쪽으로는 우리 고구려와 옥저를 막고, 남쪽으로는 대방과 백제와 신라를 억누르며 위세를 뽐낼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그 자명고와 자명각이라는 마술사인지 주술사인지 하는 마귀같은 부부 때문이었군요!”
“그렇소. ....그런 비밀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공주를 설득하여 친정인 낙랑국 조정으로 돌아가 그들 부부를 미리 죽여 그 용하다는 입을 봉해버리게 한 것이었소. 어쨌거나 공주가 나와 약조한 대로 그들 부부를 죽이는 일에 성공을 했으니까, 그 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니겠소? 이제 다만 걱정되는 것은 공주가 그 일을 완수하고 아직까지 낙랑국 사람들에게 발각되지나 않았으면 하는 거요. 제발 아무 탈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말을 나누며 호동은 대실 장군과 친위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상류 쪽으로 이동한 다음 강을 건넜다. 그렇게 해서 그날 먼동이 훤하게 터오를 무렵 호동이 이끄는 고구려의 특공대는 마침내 낙랑국 도성의 정문 앞에 포진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가시(아내)의 나라, 가시아비(장인)의 나라 낙랑국의 운명이 낭군이요 사위인 호동이 이끄는 고구려 특공대의 공격을 앞두고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은 것이었다. 호동의 가슴속에서 순간적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미안하오 공주! 이건 나의 참뜻이 아니라오. 나는 진정으로 그대를 사랑하지만, 나라의 명령이라 어쩔 수가 없구려! 어쨌든 살아만 있어주오. 다시 만나면 내 진심으로 백배사죄하고 그대의 용서를 구하리라. 아아, 결국 나는 나라를 위해 공주를 속이고, 공주는 사랑을 위해 나라를 속이는 셈이 되고 말았구려!
차츰 밝아오는 하늘빛에 호동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아직도 해맑은 미소년이지만 이미 청년티를 보이는 골격만큼은 고조부 추모성왕(鄒牟聖王: 東明聖帝)과 조부 유리명왕(琉利明王), 그리고 부친 대무신왕 등 대제국 고구려 700년사의 기초를 단단히 다진 3대 영걸의 자손답게 다부지고 당당했다. 호동은 굳게 입을 다물고 말을 달렸다. 승리와 영광의 진군, 부국강병 대고구려를 위한 정복전쟁, 시조 추모성왕의 건국이념이기도 한 '다물', 곧 조상의 나라 대조선과 대부여의 광대한 영토를 모조리 되찾고자 하는 비장한 염원의 행군이었지만, 그 길은 또한 죽음을 향한 비운의 길이기도 했다.
천손족의 나라 대조선을 다스리던 단군(檀君) 왕검(王儉)의 후예, 대조선의 맥을 이어 북부여를 일으킨 천왕랑(天王郞) 해모수(解慕漱)의 자손 추모성왕이 졸본천 유역에서 나라를 일으킨 지 불과 100년 만에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고 남쪽으로는 오늘의 압록강과 청천강을 건너 마침내 대동강 유역까지 판도를 넓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호동은 지난봄 4월부터 이달, 곧 대무신왕 재위 1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겨우 반 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마음속으로 되짚어보았다. 그것은 그의 열다섯 해라는 결코 길지 않은 한 삶 가운데서 가장 힘겹고도 숨가쁘게 펼쳐졌던 대사건이며 또한 가슴아픈 운명적 시련이었다.
호동은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의 맏아들이지만 어머니 해씨부인(解氏夫人)이 정비(正妃)가 아닌 후비였으므로 그의 행복했던 나날은 철모르는 어린 시절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불린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無恤)이었다. 첫부인 송씨(宋氏)는 무휼이 태자로 책봉된 지 두 달 뒤인 유리왕 33년(서기 14년) 3월에 시집와서 태자비가 되었는데, 그때에 태자는 불과 열한 살이었고, 송씨 또한 그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열세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으나 위의 두 형인 도절(都切)과 해명(解明) 두 태자가 부왕과의 갈등 때문에 차례로 자살해버리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4년 뒤 부왕이 세상을 뜨자 왕위를 이으니 그때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대무신왕은 즉위 후 두 명의 부인에게서 각각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데 맏이가 곧 호동이요, 둘째는 해우(解憂)였다. 그런데 태어나기는 호동이 먼저 태어났지만 그는 제2왕비인 갈사왕(曷思王)의 손녀 해씨의 소생이었다. 호동이 태어난 뒤에 정비인 제1왕비 송씨의 몸에서 적자인 해우가 태어났으므로 호동은 자연히 왕위 계승의 잠재적 경쟁자로서 송씨 부인과 그녀의 측근들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 그리고 노골적인 질시를 받아야만 했다.
이름이 일러주듯 왕자 호동은 참으로 빼어난 고구려의 사내였다. 태어날 때부터 미목이 수려했지만 선조들의 용장(勇壯)한 기상을 물려받았으므로 자라면 자랄수록 인품과 무예가 출중하여 임금과 신하는 물론 저자의 백성으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 당시 고구려는 추모성왕이 여러 부족을 이끌고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이동하여 나라를 건국한 지 불과 100년. 도읍을 졸본성(卒本城)에서 위나암으로 옮긴 지 겨우 30년이 될 무렵이었다. 고구려는 이 100년 동안 세 임금을 거치는 동안 비류국 ․ 행인국 ․ 북옥저 ․ 개마국 ․ 구다국 같은 주변의 소국들을 굴복시키며 국토와 백성을 넓히는 한편, 다 같은 대조선- 단군조선의 후예인 북부여 ․ 동부여 ․ 황룡국은 물론 끊임없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중국의 한(漢)나라와도 맞서 피어린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나라의 기틀은 점차 굳건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방이 강적들로 둘러싸여 한시도 국방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호동의 나이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닌 장수들을 스승으로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고 병법을 공부해온 호동인지라 이제는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도 될 만큼 훌륭한 왕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 해우가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인지라 대무신왕은 비록 서자의 신분이지만 여전히 잘생기고 믿음직스러운 맏아들 호동을 총애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따금 호동을 임금의 정무소인 남당(南堂)으로 불러 중요한 국사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묻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 자신도 비록 정비 소생이긴 했지만 셋째 왕자로 태어난 까닭에 어쩌면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던지라 대무신왕은 이 영특하고 잘생긴 아들이 과연 자신의 뒤를 잇는다면 나라를 이끌고나갈 만한 왕재(王才)가 되는지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호동이 낙랑국으로 떠나기 전날에도 남당으로 호동을 부른 대무신왕은 이렇게 물었다.
“그래, 요즘도 열심히 무술을 닦고 있다지?”
“네, 폐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활쏘기, 칼쓰기며 말타기를 익히고 있나이다.”
“네 솜씨가 얼마나 늘었는지 이 아비가 한 번 보고 싶구나. 그런데, 너의 스승인 추발소... 아니, 대실발소 장군은 요즘 무엇을 주로 가르치더냐?”
"사부께서는 검술과 궁술 실력을 연마하여 무술이 빼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일국의 왕자라면 마땅히 뛰어난 용병술을 갖추는 것이 더한층 중요하다면서 요즘은 진법(陣法)을 비롯한 병법을 주로 가르치고 있나이다."
"지당한 말이로다! 그건 그렇고.... 호동아, 너 낙랑이란 나라에 관해서 들어보았느냐?"
"압록수를 건너 멀리 남쪽에 있는 나라가 아니옵니까?"
"뭐 그렇게 멀다고는 할 수가 없지. 말을 타고 불과 열흘이면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폐하, 그렇다면 우리 고구려의 다음 목표는 낙랑이란 말씀이시온지요?"
"어허, 우리 호동이 참으로 영특하구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것이 바로 너를 두고 한 말이구나! 그건 그렇고... 바로 그 낙랑국의 공주가 아직도 시집을 안 간 처녀인데 매우 총명하고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
“호동아, 너 낙랑국에 한 번 다녀오지 않겠느냐?”
“소자가 어찌 폐하의 지엄하신 명령을 거역하오리까? 명령만 내리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길을 떠나겠나이다.”
“내 요즘 너의 안색이 좋지 않을 것을 보니 무슨 걱정이 있는 듯하더구나. 그런고로 내 조용히 알아본 결과 너희 모자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느니라. 하지만 내 지금 당장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으니 당분간은 너희 모자가 힘들더라도 참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그런저런 까닭에 내 너로 하여금 바깥바람도 쐴 겸 해서 낙랑국을 다녀오라는 것이다. 무술과 용력이 빼어난 군사 수십 명을 딸려줄 터이니 사냥길을 가장하여 낙랑국에 잠입하여 그 나라의 사정을 자세히 살피고 오너라. 알아듣겠느뇨?"
"소자 폐하의 깊으신 배려에 오로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각골 명심하여 곧바로 준비를 갖추고 이내 출발하겠나이다."
그렇게 해서 호동의 낙랑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부왕과 모후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호동은 사냥꾼 차림으로 변장한 날랜 무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도성을 떠나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하여 압록수를 건넌 다음, 동남쪽에 있는 옥저 땅으로 향했다. 옥저를 우회하여 다시 서남쪽 낙랑으로 잠입하려는 이 계책은 낙랑국 세작(細作)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함이었다.
호동 일행이 사냥도 즐기고 물고기도 잡고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 경치도 즐기며 유람하듯 동남쪽으로, 또는 서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가며 마침내 낙랑의 지경에 들어선 것은 도성을 떠난 지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인 그해 음력 4월 말이었다.
그들은 패수 상류 쪽에서 강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때로는 사냥도 하고 때로는 물고기도 잡으면서 차츰 낙랑국의 도성을 향해 거리를 좁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100여 명의 신하와 군사를 거느리고 순시하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낙랑왕의 경호 무사들이 이내 말을 달려 호동의 무리를 포위했다. 예고도 없이 정체불명의 장정 수십 명이 나타나자 당연히 취한 조치였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낙랑의 백성도 아닌 고구려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리 당시까지는 고구려와 낙랑이 비적대적인 관계였다고는 하지만 이건 참으로 뜻밖의 사태였다. 하나같이 범같고 곰같이 억세게 생긴 고구려의 장정 수십 명이 국경을 넘어 도성 인근까지 이르도록 곳곳의 요충을 지키는 수비 군사들은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적군이 국경을 넘으면 귀신같이 알아내던 자명고와 자명각 두 부부 무당도 이번에는 아무 경고가 없었다는 점이 더욱 이상했다. 낙랑왕은 결국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자명고 ․ 각 두 점쟁이 부부가 고구려는 우리의 적국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월경(越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들이 적군으로서 국경을 몰래 넘어왔다면 신통력이 비상한 '인간 경보기'인 그들 부부가 이런 사실을 경고하지 않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포위당한 고구려 사내들은 낙랑군의 감시 속에서 최리의 앞으로 끌려갔다. 호동이 먼저 말에서 내려 낙랑왕에게 예를 올리고 나서이렇게 말했다.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낙랑국 대왕께 문안 인사를 올리나이다."
"오오, 그대가 바로 그토록 이름난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란 말이오? 뜻밖에도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해주었구려! 참으로 반갑소이다! 빼어난 용모와 자태가 소문에 듣던 바와 같이 천하의 미장부구려! ...하지만, 어인 연유로 북국의 왕자께서 이처럼 아무 통보도 없이 불쑥 우리 땅에 나타나신 게요?“
"대왕께서는 소생의 무례를 마음껏 꾸짖어주소서! 소생이 아무 통보도 없이, 허락도 받지 않고 이처럼 귀국 땅을 밟았으니 참으로 대죄를 범했나이다. 하오나, 소생이 이처럼 수하들을 거느리고 여기까지 이르른 까닭은 오로지 낙랑국의 산천경개가 마치 지상낙원같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사옵니다. 봄 날씨가 하도 좋아 수하들과 사냥을 겸해 유람을 나선 길이었는데 나날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산굽이며 물줄기를 따라내려오다 보니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사오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넓으신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러고 호동은 이렇게 덧붙였다.
“대왕께서 천만다행으로 소생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면 바로 이 길로 말머리를 돌려 저희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부모의 품에서 응석이나 부릴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아름다운 얼굴에 자태 또한 의젓한 호동이 이처럼 입을 열어 청산유수처럼 시원시원하고 매끈매끈하게 술술 변설을 쏟아내자 낙랑의 군신은 모두가 일시에 넋이라도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해서 그들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구려 왕자 호동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낙랑왕이 마상에서 두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아니, 아니 되오! 이대로 그냥 돌아간다면 섭섭해서 안 되지요! 또, 그러면 그동안 쌓아온 우리 낙랑과 고구려의 우호관계는 어찌 되겠소? 비록 누추하고 보잘것없지만 나의 궁궐로 모실 터이니 여행의 피로라도 풀고 가도록 하오.”
속으로는 몰래 성벽을 타넘어가서라도 낙랑국의 사정을 살펴보고 싶었던 호동인지라 낙랑왕의 초대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얼른 고맙다고 사례하고 나서 수하들을 거느리고 최리를 뒤따라 낙랑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낙랑왕도 호동을 데리고 대궐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 그러지 않아도 고구려의 호동 왕자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매우 잘생기고 똑똑하다는 소문을 들어 언젠가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처럼 제 발로 찾아올 줄을 어찌 알았으랴. 오늘 실물을 보니 참으로 명불허전이란 옛말이 그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우리 공주의 배필로 조금도 손색이 없어. 내 반드시 이 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북국의 왕자를 사위로 삼고야 말리라! 그렇게 하여 고구려와 사돈만 맺게 된다면 우리 낙랑의 안전은 반석 위에 올라앉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적어도 한창 팽창하는 기세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에게 망해버린 저 개마국이나 구다국 신세는 면할 수 있으리라....
그런 속셈으로 호동을 데리고 대궐로 돌아간 낙랑왕은 곧바로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 찬 음식상을 마련하고 아리따운 무희들이 갖가지 간드러진 음악에 맞춰 잘록한 허리와 팡파짐한 궁둥이를 쉴 새 없이 흔들어대면서 요염하게 춤추고 돌아가는 흥겨운 잔치판을 벌여 호동 일행을 환대했다.
호동과 낙랑공주의 운명적인 첫 만남도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낙랑왕이 잔치판이 한창 무르익자 왕비에게 공주를 불러오라고 한 뒤 귀여운 딸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호동에게 인사를 시켰던 것이다.
“낙랑의 공주가 고구려의 왕자님을 처음 뵈옵나이다. 소녀의 인사를 받으소서!”
낙랑공주가 부왕의 지시에 따라 호동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데, 그 목소리가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또는 꾀꼬리가 노래하듯 맑고 곱기 그지없었다. 호동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로 답례하며 이렇게 응답했다.
“호동이라고 하옵니다. ....오래 전부터 공주님이 천하제일의 미인이시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참으로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과연 공주님은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 아름답기 그지없으십니다!”
호동의 찬사에 기쁨과 수줍음이 겹쳐 공주의 두 뺨이 이내 빨갛게 물들었다. 공주도 눈을 들어 호동을 한 번 쳐다보더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오오, 어쩌면 저렇게 잘 생긴 사내가 다 있을까! 고구려 호동 왕자의 용모가 웬만한 미녀보다 한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저토록 미목이 수려한 소년은 내 생전 처음 보는구나! 게다가 비록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라는데, 의젓한 태도에 말솜씨까지 출중하니 저토록 훌륭한 사내를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으랴!
사실 낙랑공주는 그 해에 이미 스무 살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이미 혼기를 한참 넘긴 나이였다. 그녀가 나이 스물이 되도록 시집을 안 간 까닭은 오로지 낙랑국 안에서는 알맞은 배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이는 다섯 살이나 아래지만 천하에 둘도 없이 잘 생긴 호동을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천생연분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두 청춘 남녀의 오고가는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낙랑왕 부부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 최리가 한바탕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참으로 오늘은 기쁜 날이로다! 자, 모두들 보라! 그 누가 이 두 사람을 보고 감히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라고 아니하랴? 공주는 수줍어하지 말고 북국 왕자의 곁에 앉아 재미있는 말동무가 되어드리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환영연은 절정의 분위기로 치달았고, 그 연회석에서 첫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급속히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었으며, 또한 두 사람의 혼인도 전격적이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정략결혼이 된 셈이었다. 비록 호동과 낙랑공주도 미처 몰랐고, 또한 대무신왕과 최리왕이 미리 약속한 바도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혼인은 정략결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나라 임금이 미리 짜고 한 일도, 미리 상의한 일도 아니고, 동상이몽에 불과했지만 각자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식들의 정략결혼을 바라던 두 나라 임금의 속셈이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호동과 낙랑공주는 만난 지 불과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낙랑국의 대궐에서 낙랑왕 부부를 비롯하여 모든 대소 신하의 축복을 받으며 성대하고 화려한 혼례식을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들 두 사람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젊은이가 혼인하여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낙랑의 백성도 한결같이 기뻐하며 축복을 아끼지 않았다.
호동이 아내가 된 낙랑공주를 데리고 귀국 길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열흘쯤 뒤.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지도 않은 때였다. 낙랑왕은 사위와 딸이 가는 편에 고구려에게 우호를 다짐하는 국서(國書)와 더불어 수많은 진귀한 보물을 혼인선물로 딸려 보냈다. 그리고 졸지에 사돈이 된 대무신왕에게도 따로 안부의 편지와 함께 여러 가지 진기한 선물을 우호의 표시로 보냈다.
하지만 최리는 호동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중한 혼인선물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고구려로 돌아갈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선물이란 바로 낙랑국 최고의 국가기밀인 자명고와 자명각의 정체였던 것이다. 호동은 그 비밀을 꿀처럼 달콤하고 꿈같이 황홀한 신혼 첫날밤에 신부인 낙랑공주의 입을 통해 알아냈던 것이다.
호동은 낙랑공주와 부하들을 데리고 도성인 위나암성으로 돌아오자 마자 부왕에게 그동안 낙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고한 뒤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혼인한 사실에 대해 죄를 청하면서 아내 낙랑공주로 하여금 부왕을 비롯한 왕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대무신왕과 모후를 비롯하여 모두가 천하절색인 낙랑공주와 호동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는데, 특히 용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왕녀답게 기품이 우아한 낙랑공주는 모든 왕족의 호감을 얻었다. 다만 제1왕비 송씨만이 속으로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바탕 요란한 신고식이 끝나고 신혼부부의 거처도 마련된 다음, 호동은 밤이 깊은 뒤에 홀로 내전으로 부왕을 찾아뵙고 낙랑으로 떠나기 전에 부왕이 은밀히 지시한 사항, 즉 자명고와 자명각의 정체에 관해서 전말을 자세히 복명을 했다.
보고를 받은 대무신왕은 매우 기뻐했다. 낙랑국의 허실을 샅샅이 살펴본 것에 그치지 않고 낙랑공주까지 아내로 맞아 데리고 온 호동의 활약이 그지없이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대무신왕이 호동에게 낙랑국 정복작전의 총수를 맡긴 까닭도 그런 크나큰 공로에 대한 포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조치에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으니, 만일 호동이 총수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낙랑국 정복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비록 적장자는 아니지만 왕위계승의 가능성이 높아짐은 물론 맏아들로서 그의 입지 또한 더한층 굳어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복동생 해우는 적자라고 하지만 아직도 젖비린내가 풀풀 나는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말이다.
물론 고구려 조정에서 군사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낙랑국에 대해 회유작전을 펼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승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결혼을 계기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합병을 권유한 것이었다. 이제 사돈의 나라도 되었고, 그 일이 아니더라도 본시 우리 고구려와 낙랑은 다 같은 조상의 나라 대조선의 후예요, 똑같이 한나라 오랑캐의 핍박을 받아 여러 차례 나라의 기업을 옮긴 뼈저린 역사를 지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제 두 나라를 합쳐 더욱 강한 국력으로써 한족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자고 설득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최리의 태도는 완강했다. 우리 낙랑은 남쪽으로 나라를 옮긴 이후 한나라와 아무 원한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활발한 무역으로 나라가 점점 부강해지고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 고구려에게 흡수되어 스스로 국운에 조종(弔鐘)을 울리랴 하고 펄펄 뛰었던 것이다. 귀여운 공주를 고구려에 며느리로 준 것도 두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우호의 뜻이었거늘 그런 호의를 무시하고 되레 나라를 거저 삼키려들다니, 이런 불한당같고 날강도같은 놈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천둥처럼 화를 냈던 것이다.
호동 왕자도 아내인 낙랑공주에게 친정아버지인 최리왕을 설득하는 편지를 보내게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낙랑공주를 꾸짖는 답장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불충한 편지를 또다시 보낸다면 그때에는 아예 부녀간의 인연을 끊어 버리겠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나서 최리왕은 마침내 설득을 포기한 고구려가 무력침공의 위협을 들먹이자 더욱 분기가 충천하여 사돈의 나라고 뭐고 고구려와는 이제 끝장이라면서 펄펄 뛰었다. 나아가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국제결혼도 원인무효라면서 공주를 돌려보내라는 요구까지 했다. 따라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남은 해결책은 전쟁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즉 대무신왕 15년의 낙랑 정복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비록 소수 정예부대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펴는 것이지만 정복군의 총사령관인 호동으로서는 출전 전에 미리 처리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적군의 침범을 귀신같이 알아맞힌다는 자명고와 자명각 두 부부 점쟁이의 제거였다. 호동은 부왕의 명령을 받고 출전에 앞서 아내 낙랑공주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그동안 낙랑국이 당신의 친정이기에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두 나라를 합병하고자 부왕과 내가 노력했고 당신도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구려. 이제 전쟁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됐소. 그러므로 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터이니 들어줄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저는 당신의 아내인데 부탁은 무슨 부탁이어요? 무엇이든 분부만 하셔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가리겠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이번 전쟁에 내가 총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소. 그런데 걱정은 당신네 나라의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두 점쟁이요. 그들이 있는 한 우리 군사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나역시 전사하여 사랑하는 당신을 다시는 못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이오. 이 일을 장차 어쩌면 좋겠소? 그래서 말인데.... 매우 힘들고 괴롭겠지만 당신이 미리 친정으로 돌아가서 그 두 무당을 없애주지 않겠소?“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말이었으므로 낙랑공주가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사랑이냐 조국이냐 하는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운명의 기로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눈먼 여인이 낙랑공주가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낭군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어찌 낭군의 뜻을 거역하리오! 어찌 낭군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으리오. 다만, 소녀를 버리지만 않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아껴주신다면 반드시 그들 부부를 처치하겠나이다!”
그렇게 해서 낙랑공주는 호동이 이끄는 고구려의 특공대보다 열흘쯤 앞서 친정인 낙랑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귀국하기 전에 호동과 미리 약조하기를, 낙랑으로 돌아가면 낙랑왕이 고구려의 청을 거절했으며, 그들의 결혼이 원인무효라면서 딸을 돌려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고구려 왕실로부터 소박을 맞고 쫒겨 왔노라 둘러대기로 했다. 그리고 호동은 아무 달 아무 날 이른 새벽에 낙랑성을 기습 공격할 터이니 그 전날 밤에 틀림없이 자명고와 자명각 부부를 죽이고 나서 곧바로 성문을 열어놓으라고 시켰다. 그렇게 두 부부는 작별을 했는데 그것이 이승에서는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두 사람이 어찌 알았으랴.
“아니 뭐라구? 고구려 군사들이 쳐들어왔다구?”
“대왕폐하! 빨리 성을 빠져나가 피하셔야 하옵니다! 적군이 이미 성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나이다!”
낙랑왕 최리는 급보를 받자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린가 하고 놀랐다. 국경에서부터 수백 리 지경을 아무 기척도 없이 무인지경을 달려 이렇게 쳐들어오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고구려 군사들은 땅을 파고 내려왔는가, 아니면 하늘을 날아서 쳐들어왔는가. 게다가 성문은 누가 열어주었기에 벌써 성내로 침입했단 말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최리는 대소 신하들을 버려둔 채 내전 깊숙이 자리잡은 신당(神堂)으로 달려갔다. 자명고와 자명각 부부에게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아무 경보도 발령하지 않았는지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노한 얼굴로 신당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이럴 수가! 두 부부 무당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설 정도로 분노한 낙랑왕은 뒤따르던 호위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지 빨리 조사하여 보고하라!”
그 결과 진상은 이내 밝혀졌다. 범인은 바로 사랑하는 공주였던 것이다. 며칠 전에 돌아와 서방이라는 호동에게 소박맞아 친정으로 쫓겨 왔다면서 울고불고 하소연하연 공주가 바로 자명고와 자명각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준 범인이라는 것이었다. 노발대발한 낙랑왕은 고구려 군사들이 이미 대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사들을 시켜 낙랑공주를 잡아오게 했다. 그리고 잡혀와 꿇어앉아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는 공주를 내려다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천하에 몹쓸 년아! 사내에게 눈멀어 나라를 팔다니,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너는 이미 내 딸도 아니니 내 손에 죽어야 마땅하리라! 예라, 이 천하에 죽일 년아!”
그러고는 보검을 빼어들고 공주의 목을 힘껏 쳐버렸다.
호동 왕자와 직속 무장들이 궁궐로 뛰어든 것은 공주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궁궐 안을 뒤지고 다니며 공주를 찾던 호동은 마침내 낙랑왕과 신하들이 몰려 서 있는 후원에 다다랐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낙랑공주가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져 뒹구는 참혹한 모습을 발견했다. 고구려 군사들을 보자 낙랑의 군신과 시위 무사들 모두가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을 했다.
호동은 낙랑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최리는 이제 더 이상 장인도 아니요, 적국의 임금으로서 그저 포로 신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죽이지 말고 꼭 사로잡으라는 부왕의 명령이 있었으므로 함부로 죽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내의 희생을 발판삼아 승리를 거둔 호동은 낙랑왕과 대신들, 수천 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 위나암성으로 개선을 했는데,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맏이 호동이 낙랑국 정벌이라는 큰 군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자신의 아들 해우가 장차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될까 매우 겁을 먹고 근심 걱정이 병이 되어버린 제1왕비 송씨가 호동을 제거하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송씨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임금에게 호동을 모함했다. 호동이 군공을 세운 것을 기화로 교만방자하게 굴며 자신을 깔보고 있으며, 정비인 자신을 능멸하는 것도 모자라 임금이 모르는 사이에 여러 차례 자신을 욕보이려고 덤벼들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연발했다.
대무신왕은 왕비 송씨의 말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하여 호동을 미워하면 안된다, 호동은 결코 그렇게 경우 없는 아이가 아니라며 왕비에게 화까지 냈다. 처음에는 그렇게 호동을 편들고 감싸주던 부왕이었다. 하지만 듣기 싫은 노래도 여러 차례 들으면 화가 나는 법이다. 또 예나 이제나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토록 무시했건만 밤이면 밤마다 울고불고 난리법석을 떨면서 호동을 모함해대니 대무신왕도 마침내 질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호동을 불러 제1왕비의 말을 전하며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호동이 울면서 부왕에게 고했다.
“폐하께서는 이제 소자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왕후께서 비록 낳아주신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게는 어머니인데, 소자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어머니의 허물이 드러날 터이고,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걱정을 하실 터이니 소자가 어찌 그런 불효를 저지를 수 있사오리까?”
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 호동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대무신왕도 더이상 추궁하지 못하고 물러가라고 일렀다.
호동이 부왕의 앞에서 물러나 어머니 해씨부인에게 작별인사를 올리니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어머니는 그저 비오듯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못했다.
호동은 가장 아끼는 노복 하나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강변으로 나아가 노복에게 자신의 칼을 빼어서 쥐어주며 칼끝을 꼿꼿이 세운 채 들고 있으라고 한 뒤 앞으로 달려들어 그 칼에 스스로 찔려 죽어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던 낙랑공주를 잃은 뒤 호동은 왕자의 신분도 싫었고 대고구려의 왕위도 바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은 한바탕 비극으로 끝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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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편을 쓰기 위해 사서와 사료들을 찾아보다가 자명고와 자명각에 관해 새삼스러운 의문이 떠올랐다. 적군이 침범하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이 정말로 있었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에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그런 신통한 보물이 어찌 실재했으랴.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앞일을 비상하게 잘 알아맞히는 무당(주술사)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호동의 나이가 15세라는 점은 대무신왕이 11세에 태자가 되어 15세에 즉위했으며, 호동과 낙랑공주의 혼인,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이 대무신왕 재위 15년의 사건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산출한 것이다.
역사소설을 쓰면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점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료를 확보하고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집필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이라도 있어야만 소설까지 역사왜곡에 일조한다는 비난을 면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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