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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는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남부의 마을 바도비체에서 3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롤 보이티와는 예비역 육군 장교였고,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1929년 4월 13일 그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다. 보이티와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의사였던 그의 형 에드문드가 성홍열 환자를 치료하다가 그 자신도 감염되어 죽었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그는 누나, 형,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등 가족 모두를 여의었다. 어렸을 때 그는 고향의 번화한 유다인 공동체와 깊은 교제를 맺고 있었다. 청년 시절의 그는 운동을 무척 좋아하였으며 특히 축구 경기 때에는 골키퍼로 뛰었다.
‘롤렉(Lolek)’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보이티와는 1938년 고등학교 학업을 마치고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과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운동선수, 배우, 각본가로서 천부적 재능을 가진 만능인이었다. 유명한 폴란드 여배우가 주최한 스피치 페스티벌에서 시 낭송으로 2위에 입상한 적도 있었으며, 학교 연극반에서는 주연 배우나 공동 제작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을 만큼 큰 두각을 나타냈으며 라틴어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어,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등 10개 국어에 능통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어는 유창하게 하진 못했지만,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었다.
1939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한 후 야기엘로 대학교는 폐교되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보이티와는 독일의 강제 이송을 피하려고 솔베이 화학공장의 노무자와 석회암 채석장의 수공 노동자,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는 1941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당시 보이티와는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가며 유대인들을 피신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 지하 연극 단체를 만들어 비밀리에 연극 공연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끊임없이 문학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때로는 각본을 쓰기도 했다.
1944년 8월 6일 “검은 일요일”에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후 게슈타포에서는 그와 유사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크라쿠프의 청년들을 대거 검거하기 시작했다. 보이티와는 가택 수색을 당하자 대주교의 저택으로 도망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은신하였다.
1945년 1월 17일 밤에 독일군이 도시에서 물러가자 보이티와를 비롯한 학생들은 파괴된 학교를 재건하는 일에 앞장섰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몸소 겪은 그는 사람이 이념과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깨닫고 1942년 크라쿠프 교구장인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추기경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카롤 보이티와는 사피에하 추기경에 의해 1946년 11월 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신학을 공부하고자 로마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에 들어간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서 드러난 신앙 (Doctrina de fide apud S. Ioannem a Cruce)》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 전문직 학위를 받았다. 그해 12월에 크라쿠프의 야기엘로 대학교로부터 신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마침내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8년 여름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크라쿠프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진 외딴 시골마을의 사제로 파견되었다가 1943년 3월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누스 교구로 전임하였다. 그는 야기엘로 대학에 이어서 루블린 가톨릭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 보이티와는 기도와 철학 토론 그리고 시각장애인과 병자들을 위한 간호를 목적으로 스무 명 이하의 젊은이들을 모아 “작은 가족”이라고 불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이백 명으로 집단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매년 스키와 등산, 카누를 하러 고향인 바도비체 근처 언덕으로 여행을 떠났다.
보이티와 사제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는 크라쿠프의 가톨릭 계열 신문인 《Tygodnik Powszechny》에 일련의 논설을 게재하였으며 그의 저술 덕분에 성직자로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크라쿠프 대주교를 보좌하는 옴비의 명의(名義) 주교로 임명된 그는 1958년 9월 29일에 주교품을 받았다. 당시 38살이었던 그는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였다. 이때 ‘온전히 당신의 것’이라는 뜻의 Totus Tuus를 사목 표어로 삼았다. 1962년 7월 16일에 보이티와는 참사회의 대리로 뽑혔다.
1962년 10월 보이티와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해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12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크라쿠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67년 6월 26일 바오로 6세는 보이티와 대주교를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체이사 디 산 케사레오 인 파라티오성당의 주임사제급추기경
공의회에서 그는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과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문헌에 대한 결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1960년 보이티와는 성과 결혼 문제에서 현대 사회의 새로운 견해로부터 지키고자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옹호하는 《사랑과 책임》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67년에 그는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에서 유산과 인공적인 산아 제한 같은 문제를 다루어 그에 대한 금지를 공식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그가 교황이 되는데 큰영향 을 주었다
1978년 8월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보이티와는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하였다. 다음 교황으로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출되었으나 즉위한 지 34일을 넘기지 못하고 선종하자 다시 콘클라베가 개최되었다. 콘클라베에 참석하려고 바티칸 시국으로 갔을 때 그는 폴란드 정부가 국외 반출을 허용한 10달러에 해당하는 돈만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1978년 10월 22일 월요일, 여덟 번째 투표에서 마침내 보이티와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쉰여덟 살로 130년 만에 처음으로 예순 살 이전에 선출된 교황이었다. 또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출신 교황이기도 했다. 선출된 날에 그는 눈물의 방으로 안내되어 교황의 옷인 하얀색 비단 수단을 입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작품 《쿠오 바디스》에 관한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쿠오 바디스》는 박해당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로마 제국을 누르고 승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2]
보이티와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전임자가 택한 이중의 이름을 그대로 취함으로써 생전에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바오로 6세의 의지를 이어받고 싶어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더불어 그는 1978년 10월 22일 요한 바오로 1세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대관미사보다 훨씬 간소한 즉위미사를 통해 정식으로 등극하였다. 1978년 11월 12일 로마 주교로서 그는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1981년 5월 13일 요한 바오로 2세는 터키인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의 흉탄에 맞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당시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하던 중이었다. 서둘러 그는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게멜리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총알이 교황의 심장을 1㎜ 차이로 비켜간 덕분에 대동맥과 척추를 다치지 않은 교황은 6시간의 대수술 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관중에게 붙잡혀 있던 아자는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중태에 빠졌던 교황은 4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이태 뒤 1983년 12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암살미수범이 있는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가 20분 동안 둘이서 비밀 대화를 가졌다. 교도소에서 나온 교황은 “그와 나 사이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로 남을 것이다.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하자. 나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다.”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사면을 요청했다. 당시 교황은 파티마의 성모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믿고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총알을 파티마의 성모상에 봉헌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탈리아 의회 조사위원회에서는 교황 저격 사건의 배후에 소련의 KGB가 계획하고 인솔하였으며 불가리아나 동독 등이 협력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 측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에서 일어난 공산권 최초의 자유노조 연대를 지지함에 따라 동유럽에서 활발하던 민주주의 혁명 열풍에 그대로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 교황 암살 음모를 실행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혹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는 없다. 소련 측은 자신들의 연루의혹을 부인했다. 저격범 아자는 배후가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저서 《기억과 정체성》에서 “아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격을 계획했다.”라고 적었다.[3]
요한 바오로 2세는 두 차례에 걸친 필리핀 방문 동안 알 카에다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테러범들은 1995년 교황이 필리핀 방문 도중 연설하기로 되어 있던 공원에 폭탄을 장치해 교황이 공원에 도착하면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었으나 이 폭탄이 마닐라의 한 아파트에서 미리 터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1999년의 두 번째 교황 암살계획은 교황의 필리핀 방문 계획 전격 취소로 성공하지 못했다.[4]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이미 탁월한 학식과 예술적인 재능을 겸비했을뿐더러 운동 실력까지 뛰어난데다가, 재임 중 104차례 국외방문을 통해 무려 193만㎞를 돌아다니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많이 하기도 하였다.
생전에 ‘하느님의 육상선수’, ‘행동하는 교황’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였던 그였지만,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비롯한 여러 합병증으로 왼손을 떨며 왼쪽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 외에도 만성적인 무릎 관절염을 앓으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하여 보행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또 오른쪽 어깨뼈와 대퇴골이 골절되었으며 결장, 담석 제거수술, 악성결장 종양, 맹장염 수술과 수차례의 독감 치료를 받는 등 나이를 먹음에 따라 건강이 날로 나빠져 갔다. 치세 말년에는 요로 감염에 따른 패혈성 쇼크로 심장과 신장 기능의 약화가 겹쳤다. 그리고 독감이 인후염으로 나빠졌고 호흡 곤란 증세도 찾아와 호흡을 돕기 위한 기관절개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목에 삽입된 인공호흡기 튜브를 통해 호흡하였으며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더불어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해 체중이 19kg이나 급감했다.[5]
요한 바오로 2세는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2005년 3월 31일부터 요로감염을 비롯해 각종 만성질환으로 말미암은 심한 고열에 시달리다가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위중한 병세에도 그는 입원을 거부하고 대신 노자성체와 병자성사를 받고 사도 궁전에 계속 머물기로 하였다. 교황의 선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만 명의 인파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교황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축원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2005년 4월 2일 오후 9시 47분 사도 궁전에서 선종(善終)하였다. 향년 84살이었다. 공식 사인은 패혈성 쇼크와 치유 불가능한 심부전 증세이다. 선종 직전 그는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며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울지 말고 우리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창문 쪽을 응시하며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른팔을 들어 올려 “아멘.”이라고 강복한 뒤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교황의 선종 소식을 전해 들은 군중은 교황의 공적을 기리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는 고인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이탈리아식 추모 방식이다. 교황의 조국 폴란드에서는 전국 각지의 성당에서 종이 울리고 관청의 확성기를 통해 사이렌이 울렸다. 폴란드 정부는 즉각 조기를 내걸고 6일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6]
2005년 4월 4일 사도 궁전에 있던 교황의 시신은 성 베드로 광장을 거쳐 운구되어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되었다. 바티칸은 교황의 장례미사 전날까지 일반인들이 교황의 시신을 참배하고 조의를 표할 수 있도록 하루 24시간 개방하였다.[7] 이에 교황의 시신을 보려고 10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몰려들어 수 킬로미터 정도 길게 줄을 서는 바람에 로마 시내가 큰 혼잡을 빚기도 했다.
교황의 장례 미사는 2005년 4월 8일 오전 10시 추기경단 의장인 독일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훗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집전되었다. 단일 장례식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로 각국 성직자 600여 명과 기타 종교 지도자 1400여 명, 200여 개국의 왕족과 국가원수 그리고 400여만 명에 이르는 일반 조문객들이 대거 참석하였다.[8] 장례 미사를 마친 뒤 성 베드로 대성전 밑 지하 묘소에 안장된 교황의 유해를 담은 관 위에는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덮였으며, 대리석을 사용한 묘소 외벽에는 교황 이름과 생존 연도가 새겨졌다. 추모 인파는 요한 바오로의 이름을 반복해 외치면서 즉시 성인으로 추대할 것(Santo Subito)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여론에 따라 후임자인 베네딕토 16세는 죽은 뒤 5년 안에 개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성인 추대 절차를 이례적으로 앞당겨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인 추대를 위한 자료 수집을 공고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2009년 12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영웅적 덕행의 삶을 살았다고 밝히며, 가경자로 선포하였다. 2011년 5월 1일에는 복자로 시복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에큐메니컬 운동 즉,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앙전통을 존중하고 대화하는 교회일치운동과 다른 종교와의 대화 추진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교황은 1982년 영국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와 캔터베리 대주교를 만나 가톨릭과 성공회의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발전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054년 대분열 이후 처음으로 정교회 국가인 루마니아와 그리스 등을 방문해 정교회 성직자들과 합동 성찬예배를 집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교회와 가톨릭이 분열된 원인인 동서교회 분열에 대해서도 반성하였다. 1999년 10월에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교와 의화 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양측간의 구원론을 놓고 500년간에 걸친 교의 논쟁을 끝냈다.
1986년 4월 로마에 있는 유다교 회당을 방문해 유다인은 그리스도인의 형제라고 불렀다. 1999년 3월에는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을 만나 11세기 이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세계의 정상이 문명의 화해를 다짐했다. 교황은 또한또 석가 탄신일을 앞두고 전 세계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9] 2001년 5월에는 시리아를 방문하여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불어 아시시에서 세계 주요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세계 평화기도의 날 행사에 참석, 함께 기도함으로써 사회 정의와 생태계 보전 그리고 모든 폭력 종식을 호소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교회 내부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성 비오 10세회를 파문에 처하는 한편, 해방 신학에 대해서도 그들의 마르크스주의 경향을 지적하면서 오류라고 단죄하였다.
그 밖에도 성직자에게도 결혼을 허용하고 여성도 성직자가 될 수 있게 하자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단호히 거부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발전 계승시킨 그는 1983년 1월 25일 새 교회법을 공포하고 1992년 11월 16일에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공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소 혼란스럽고 자유로운 신학 분위기에 교회의 교리를 재정리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재임 동안 482명을 성인으로 시성했는데 이는 지난 4세기 동안 시성된 성인들보다 더 많은 수치다. 또 마더 테레사 수녀를 비롯해 1,338명을 복자로 시복했는데 이 역시 지난 4세기 동안 탄생한 복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10] 1984년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된지 200년이 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순교자 103명을 시성하였다.
2000년 3월 5일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시에 따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해 과거 교회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인류에게 저지른 각종 잘못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다. 심지어 같은 해 3월 1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에 대한 이단 심문, 십자군 원정, 유다인에 대한 차별, 다른 종교와의 반목, 여성에 대한 억압,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 등 교회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일일이 거론하면서 그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윤리와 사회 문제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속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의 성향이었던 그는 동성애와 낙태, 안락사, 인공 피임, 인간 복제, 사형제도 등을 “하느님의 의도와 자연법칙을 어기는 행위”라며 죄악으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교회의 전통적 가치관을 옹호하였다. 또한, 서방 세계가 과도한 물질 만능주의 풍토 때문에 도덕과 신앙심이 타락하는 점도 비판했다. 그는 자유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체제라고 생각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 체제가 노동자를 위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며 ‘국가 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생산수단 국유화는 무산 계급을 위한 사회화가 아니고 관료화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 체제를 붕괴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사람을 이윤체계에 예속시키는가 하면 노동에서의 소외현상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주의는 소외를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생활필수품의 부족과 경제적 비능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11] 그는 측근에게 “내 몸 안에는 분명히 공산주의에 대한 항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사회와 그 모든 비극을 생각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체제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하기도 하였다.[12]
국제 문제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군사력 경쟁이나 경제 제재 등 위협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공산독재체제를 종식하는 데 공헌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출 소식을 들은 소련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의 주민이 교황으로 선출된 배경에는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해체를 의도한 것이라고 보았다. 조국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압제에 시달렸던 탓에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던 교황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핫라인을 통해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수차례의 고국 순방을 통해 레흐 바웬사 등 당시 연대노조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연대의 봉기를 촉발했다. 이어 교황은 폴란드 국민 70여만 명이 모여든 집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라고 직접 촉구했다. 그는 “여러분은 인간입니다. 굴욕적으로 살지 마십시오.”라고 역설함으로써 공산주의 독재에 대한 저항의 불을 지폈다. 결국, 연대노조는 최초의 자유총선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이러한 폴란드 공산 정부의 붕괴와 맞물려서 동유럽 공산 국가들에서 잇따른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또한, 1989년 당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접견은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앞당긴 것으로 평가된다.
1979년 니카라과에서 마르크스-레닌을 추종하는 좌익 세력이 부패무능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정권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집권했을 때, 해방 신학을 추종하던 일부 신부들은 총칼을 들고 좌파 저항군에 가담하였다. 그 공로로 좌파 정권에는 신부 네 명이 각료로 임명되기까지 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같은 정치 사제들이 게릴라와 좌파 정권 참여를 탈선으로 간주하고 손을 떼게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1984년 니카라과를 직접 방문해 좌파 정권과 맞섰다. 그는 50만 명이 모인 군중집회에서 해방 신학 추종자들을 정면으로 꾸짖었다. 그는 니카라과의 “인민 교회라는 것은 해괴망칙하고도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질타하면서 그런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통박했다. 니카라과 사람들이 교황을 알현할 때, 문화부 장관으로 입각한 어네스토 카르네달 신부가 다가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어부의 반지에 입맞춤하려고 했다. 그 때, 교황은 손을 뿌리치고 “그대는 그대의 직분과 교회와의 관계를 명백히 하시오!”라고 쏘아붙이며 외면하였다. 교황의 이와 같은 단호한 의지는 남아메리카에서 해방 신학을 몰아냈고, 몇년 후 니카라과에서 마르크스-레닌 정권의 몰락을 촉매시켰다.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한민국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공식서한을 보내 당시 사형수로 복역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선처를 적극적으로 호소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대중을 요한 바오로 2세의 요청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 그로부터 2년 후 김대중을 국외로 추방하는 선에서 일단락지었고 이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공식 서한을 보냈다.[13]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찾아가 종전을 설득했고, 1999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에도 특사를 파견하여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라며 평화를 호소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에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분쟁 종식을 위한 단식기도를 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유럽의 문화형성에서 그리스도교가 맡았던 기본적 역할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새 유럽 헌법 조약을 위한 유럽 연합 회의에서 유럽 헌법의 서문에 유럽의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확인하는 문구가 포함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한편, 교황은 냉전이 종식된 후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 된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군사정책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2003년 교황은 미군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전쟁에 반대한다. 전쟁은 항상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이다.”라면서 비난했다. 조지 W. 부시에게 전쟁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밝힌 그는 국제 연합의 중재를 통해 외교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며 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은 평화를 배척하고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이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한다는 점도 못마땅하게 여겼다.[14]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직에 있는 동안 총 117개국을 방문하였다. 이탈리아 국내여행은 146회, 국외여행은 104회로 거리를 모두 합하면 124만 7613킬로미터로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의 3.24배에 달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을 만큼, 그가 방문한 곳에는 시종일관 수많은 인파가 집결하였다. 이 모든 여행 경비는 바티칸이 아니라 교황이 방문한 나라에서 전적으로 지급하였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한 요한 바오로 2세는 국외순방을 할 때마다 자신의 몸에서 뽑은 혈액을 가지고 다녔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혈액형은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에 교황청 관계자들은 응급 시 외국 혈액은행의 도움 없이도 대처할 수 있도록 교황 자신의 피를 미리 준비하였다.[15]
1979년 6월,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찌감치 공식 방문한 나라 가운데 하나는 조국 폴란드였으며, 그곳에서 교황은 환호하며 반기는 군중에게 항상 둘러싸였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1980년 폴란드에 자유와 인권 존중을 요구하는 자유노조 운동이 형성되었다. 나중에 다시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교황은 자유노조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그의 지속적인 방문으로 자유노조의 힘이 강화되었으며, 마침내 1989년 폴란드를 시발점으로 소련에 의한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차례차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미국과 성지와 같이 교황 바오로 6세가 이전에 방문했던 나라는 물론, 멕시코, 아일랜드, 대한민국, 푸에르토리코, 일본 등 이제까지 그 어느 교황도 방문하지 않았던 다른 수많은 나라도 방문하였다. 최초로 영국을 방문한 교황이기도 한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에 영국 성공회의 최고 지배자인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접견하였다. 또한, 쿠바를 최초로 방문한 교황(1998년)이기도 한 그는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재 뿐만 아니라 종교적 표현에 대한 쿠바의 태도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2000년, 현대인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이집트를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콥트교회 지도자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접견하였다. 더불어 요한 바오로 2세는 2001년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슬람교 모스크를 방문하여 기도한 최초의 교황이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묻힌 장소인 우마위야 모스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95년 1월 15일, 제10차 세계 청년 대회 기간에 필리핀 마닐라의 루네타 공원에서 집전한 그의 미사에는 400만에서 8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수가 모인 것으로 여겨진다. 2000년 3월,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였다. 2001년 9월에는 카자흐스탄과 아르메니아를 방문하여, 수많은 이슬람교도 청중과 함께 그곳 나라들에 열린 그리스도교 전래 1,700주년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2002년 11월 14일에는 교황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 의회에서 연설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통일로 세속적인 권력을 완전히 상실한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정식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백 년 이상 비(非)타협적인 자세를 유지해왔다.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의 갈등은 1929년 양측이 상호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면서 공식적으로는 해결됐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금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의회 연설은 바티칸과 이탈리아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한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았다.[16]
이날 의회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금의 이 연합체가 그동안 서로 너무나도 다른 국면과 환경, 변화를 위한 당면과제, 역사적 모순을 거쳐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라며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의 격정적인 역사에 대해 회고했다. 교황은 또한 이탈리아 자체의 정체성은 “이탈리아 생존의 근원인 그리스도교 정신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라고 덧붙였다.[17]
그는 여행기간 내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자신의 신심에 중점을 두었으며,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성지들, 특히 아일랜드의 노크, 폴란드의 쳉스토호바, 포르투갈의 파티마, 멕시코의 과달루페, 프랑스의 루르드를 방문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두 차례 방한하였다. 1984년 5월 3일에 그는 역대 교황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의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식을 맞아 방문했으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103명을 바티칸이 아닌 현지에서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도착 성명 첫머리에서 《논어》의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인용해 한국어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인사했고 마무리도 역시 한국어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한반도의 온 가족에, 평화와 우의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축복이 깃들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방한 당시 그는 한국 역사책 번역본을 읽고 “혹독한 시련에도 민족의 정통성을 꿋꿋이 지켜온 한국의 역사가 모국 폴란드와 닮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 바오로 2세는 40여만 명이 모인 부산 강연에서 개발독재로 억눌린 삶을 살아온, 그러니까 노동자로서의 인권을 억압받아온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민중들이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던 당시의 암울한 정치 상황에서 볼 때 민감한 발언을 했다. 또 그는 방한 마지막 행사로 장충 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들과의 대화 시간에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을 알리겠다”라며 젊은이들이 들고 온 최루탄 상자를 흔쾌히 받기도 하였다. 5월 4일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를 찾아가 “예수님께서 친히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격려하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 축복을 내려주었다. 교황의 소록도 방문은 당초 방한 일정에 없었으나 “소외된 사람들을 찾고 싶다”라는 교황의 뜻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18]
그 뒤 교황은 1989년 10월 5일 ~ 10월 8일에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맞아 대한민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 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하기도 하였으며, 전두환 독재정권의 국가폭력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그 후에도 한국에 큰 사건이나 재해가 있을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왔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에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태풍 매미로 말미암은 피해 때는 위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2000년 3월 바티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여 북한 방문을 권유하자 요한 바오로 2세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교황청은 평양에 천주교 대주교를 파견하고 북한에 수십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화해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그러나 교황청이 교황의 방북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북한 내 전교활동 인정과 성직자 입북 허용에 대해서 북한 측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교황의 방북 계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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