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수도회] 기도하며 구원을 체험하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판관 13,2-7.24-25
† 복음 루카 1,5-25
★ 주님의 천사가 아내를 낳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그녀가
고초를 겪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그 아기는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되리라고 이른다. 그녀는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 이름 지었다(제1독서).
★ 루카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고 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는 의로운 사람들로서 흠 없이 살아가고 있었으나 나이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러한 즈카르야가 성소에서 분향할 때 가브리엘 천사에게서
아기의 출생 예고를 듣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탄에 천사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도
사람들의 삶이 결정적인 계기를 맞을 때 천사가 그들을 인도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대림과 성탄 시기에 복음이 전하는 천사들의 소식은
우리에게 더욱 큰 울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메시아의 잉태를
알리고, 요셉은 꿈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고 두려움 없이 마리아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탄을 알리는 천사들을 만나며 목가적 풍경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번잡함이 이 세상을 다 메운 것 같은 우리 시대에
천사들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미셸 세르는 자신의 저서 『천사들의 전설』에서
소통 단절의 시대를 극복하는 관계의 철학을 펼치며 현대의 천사론을
시도합니다. 세르는 오히려 도시적 삶을 가득 채운 ‘망’과 ‘의사소통’에서
천사의 흔적을 바라봅니다. 그는 오늘의 우리도 여전히 천사를 ‘만나고’,
천사의 의미를 ‘깨우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의 천사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성탄절의
천사들을 주제로 펼치는 대화입니다. 세르에 따르면 천사들은 ‘말의
전달자’로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가 마침내 살과 피로’ 도래할 것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지껄임’으로서의 언어를
넘어 ‘생명력과 사고력 그리고 신성이 있는 육신’으로 구현되는 말씀의
매개체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말이며 행위인 강생하신 말씀을 전했을
때 이제 인간의 역할이 시작됩니다.
“이제부터 천사들의 역할은 평범할 것이고, 그들의 시대는 끝날 거야.
천사들의 역할과 시대는 이미 종료되어 있을 거야. 왜냐하면 메시지는
여기에, 이 자리에, 이 활기찬 공간에, 동물들이 있는 이 외양간에, 네 발
동물들에 에워싸인 이 요람에, 이 냄새나는 구유에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천사들이 전해 줄 ‘말씀이 살과 피가 되시리라.’는
소식을 갈망합니다. 이는 곧 도래할 것이며 천사는 떠나갈 것입니다. 이제
육신을 지닌 우리의 사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3주간 금요일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뜻하지 않게 경험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바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바이러스입니다. 제 컴퓨터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프로그램들입니다. 바이러스는 제 컴퓨터의 속도를
느리게 하고, 정상적인 작업이 힘들게 합니다. 숨겨진 프로그램들은 제가
원하지 않는 사이트를 강제로 보게 합니다. 백신프로그램으로 어떻게 해
본다지만 저의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 제게 천사처럼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신부님,
전산실의 직원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감쳐진 바이러스를 찾아내고, 숨겨진
악성 프로그램을 없애 주고,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인터넷이라는 바다가 거센 파도가 있고, 암초가 있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감춰진 보물들이 많기에 오늘도 작은 배를 뛰어봅니다. 또 제겐
수호천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끔은 수호천사가 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의 신자
분들이 오셔서 마치 친정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지내다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삭막한
도시에서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작은 행복입니다. 신앙생활과 전례에
대해서 제게 전화로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아는 것들을 말씀드립니다. 아마도 그분들에게는 제가 수호천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다
자라서 친 손자들이 있음에도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하셨습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정상이 되도록 수술을 시켜 주셨습니다. 학교생활을 잘 하도록
매일 학교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키도 크고,
바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는 언젠가 고마워 할 것입니다. 장애를 지닌
자신을 입양시켜서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신 양 부모님이
수호천사였음을 알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날개가 달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임명장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뜻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 따뜻한 마음을 조건 없이 이웃과 나누면 됩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금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바로 천사의 손이 될 것입니다. 지금 나누는 사랑의 마음이 곧 천사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소명(召命) 의식 -너는 누구냐?-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뉴튼수도원 39일째),
판관13,2-7.24-25 루카1,5-25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소명(召命) 의식 -너는 누구냐?-
소명감, 소명의식이, 신원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래야 삶의 방향이,
삶의 목표가, 삶의 의미가, 삶의 중심이 확실해 집니다.
자기 삶을 소중하게 여겨 가꾸고 돌봅니다.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삽니다. 함부로 자기를 방치, 방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불림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합니다.
이런 소명의식이 없으면 참 무의미한 삶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별 의미 없는 삶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 지, 왜 여기 있는지, 왜 이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교백성들이 그분 앞에는 없는 것과 같고, 그분께는 허무와 공허로
여겨지는 도다." (이사40,17).
이교백성들이 상징하는바 소명의식이 부재한 이들입니다.
"너는 누구냐(Who are you)?“
이름을 묻는 것이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소명의식을 묻는 것입니다.
이름은 얼굴과 같습니다.
떳떳치 못하면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추듯 이름도 감춥니다.
하여 옛 지조 높은 선비들은 이름의 명예를 지키는데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이런 자기를 알게 해주는 소명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너는 누구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즉시 통쾌, 명쾌하게 자기 신원을 밝혔습니다.
오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태몽이나 환시 중에 주님의 천사로부터
아들들의 소명을 받는 부모들입니다.
예전에는 태몽이야기도 많았는데 오늘날은 듣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보라, 너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태몽 비슷한 환시 체험중에 주님의 천사로부터 아들의 탄생 예고와 더불어
태교 비슷한 내용까지 교육 받는 마노아의 아내입니다. 이런 환시나 태몽을
체험한 부모라면 자녀들이 받은 소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며
평생 자녀 교육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성소 안에서 요셉의 태몽과
흡사한 환시 체험중에 주님의 천사의 말씀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주님의 천사는 작명까지 대신 해 줌으로 '요한'이 불림 받은 신원임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시며 이어 그가 얼마나 고귀한 사명을 지닌 아들인지
소상하게 밝혀 줍니다. 어제 복음 역시 요셉이 태몽 중에
주님의 천사로부터 아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복음을 듣는 내용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아, 이런 태몽이나 환시체험을 한 부모들이라면
결코 자녀들을 자기의 소유물인양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태몽이나 환시가 있든 없든 자녀들은 모두가 거룩한 하느님의 귀한
선물들입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불림 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내 자녀에게 주신 소명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기도 중에
찾고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루카1,6).
새삼 요한의 부모처럼 신심깊고 순수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태몽이요
환시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예전 '부부 자격 시험이, 부모 자격시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부 자격 미달되는 이들이, 부모 자격 미달되는 이들이 부부가 됨으로,
부모가 됨으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파생되는가'
피정 강의 중 간혹 언급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부모를 보고 그대로 배우는 자녀들입니다. 세상에 부모보다 더 중요한
교사도, 부모를 대체할 수 있는 교사도 없습니다.
아무리 거칠고 험한 세상이라도 이런 부모를 둔 자녀들은 건재합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서 성탄츄리나무를 팔다보면 혼자 오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녀를 대동하고 와서 어린 자녀들이 나무를 고르도록
합니다. 아마 부모들에게 이런 존중 받은 추억들은 평생 자녀들 마음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보다
자녀교육에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고유의 성소요 소명의식입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주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묻고 대답하며
새롭게 확인해야 할 나의 성소요 소명의식입니다.
하여 영적지도자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안내하여 주는 것과
자기를 알게 해줌으로 소명의식을 강화해주는 것'이라 합니다.
어제 읽은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교만은 궁극적 죄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는 것이 궁극적 비극이다
(Pride is not the ultimate sin; forgetfullness of who we are is the
ultimate tragedy).‘
주님은 감사하게도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께 불림 받는
우리의 귀한 성소와 소명의식을 새롭게 일깨우시고 강화시켜 주십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마르1,1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도하며 구원을 체험하는 기쁨/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기도하며 구원을 체험하는 기쁨
루카는 요한과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구원사 속에서 그들 각자가 차지하는 자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길을 준비할
사명을 받고 기적적으로 태어났다. 즈카르야는 유다의 사제단의 24개 조
(1역대 24,10) 가운데 여덟 번째 조인 아비야 조에 속했다(루카1,5). 그는
사제 가문에 속하는 아론의 자손인 엘리사벳과 혼인하였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단순히 외적이고 법적인 면에서 의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율법과 제의(祭儀)의 규정을 충실히 준수하는 참 신앙인이었다. 그들은
의로웠으므로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은 죄 때문은 아니었고
(레위 20,20 이하; 2사무 6,23 참조). 나이가 많아 자녀에 대한 축복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의 기적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사제직무를 수행할 때
시작된다(1,8). 사제들은 과월절과 무교절, 오순절, 초막절을 제외하고
매년 두 주간씩 성전에서 의무를 수행하였다. 사제들은 분향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겼고 당시 18,000여명의 사제가 있어 분향은 일생에
한번밖에 못했다(1,9). 즈카르야가 제비를 뽑아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는
동안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1,10). 그는 개인적인
청원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와 구원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도하였을
것이다(다니 9,20 참조). 그때 주님의 천사가 ‘실제로 나타나’(ωφθη의
수동형) 분향 제단 오른쪽(εκ δεξιων) 곧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나타나는
자리에 섰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터이니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라고
일러준다(1,13-14). 여기에 루카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온다(χαρα, αγγαλια, χαιρω). 그런데 ‘학갈리아
’(αγγαλια)는 특히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함으로써 일어나는 기쁨과
행복이다. 곧 즈카르야의 기쁨은 아들의 탄생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도래를 위해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맡게 된 데서 오는 구원의
기쁨인 것이다. 요한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고(1,15),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며(1,15), 많은 이스라엘인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고(1,16)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1,17).
엘리사벳은 잉태하여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는데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하느님의 자비로 받아들였다(1,24-25).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되새길 것은 무엇인가? 즈카르야는 기도하는
중에 잉태 계시(선물)를 받았다. 그렇다! 기도의 자리는 늘 그렇게 하느님
현존의 자리이자 선물이 주어지는 자리이다.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물을 기대하지 말자.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조건을 통해서도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역사를 계속하심을 굳게 믿도록 하자! 그리고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알려준 대로 세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참 기쁨(학갈리아, αγγαλια)을 찾도록
하자! 나아가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잉태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자비로
받아들였듯이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들에 조용히 감사할 일이지
‘현상에 집착하여'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몸짓에 초점을 맞추어
동화되고 변형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삼손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품은 죽음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복음: 루카 1,5-25
< 삼손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품은 죽음 >
요즘 독서에서는 구약에서 메시아의 오심이 예언된 부분들만을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삼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교회 전통적으로 삼손이 바로 미래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삼손은 나지르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바쳐진 사람이고
어머니도 죄로 물들어서는 안 되고 아들도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도 나자렛 사람입니다. 나자렛 사람이란 나지르인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도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으로서 그 소명도 둘이 동일합니다. 삼손은
불레셋인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파견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도 죄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파견을 받았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삼손은 자신의 죄로써 눈이 뽑히고 죄인이 되어 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스스로’ 품어 안으시고 지옥까지 내려가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삼손이
적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자신을 희생하여 적들까지 모두 죽인
것처럼, 그리스도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당신의 것으로 삼고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당신의 죽으심으로써 당신이 품은 모든 인간의
죄까지 없애셨습니다. 죄를 없애버릴 수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지옥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을 통해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죄에 빠지면 하느님께서
주신 힘인 성령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삼손의 눈을 뺐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태생소경의 눈을 넣어주시는 것과 대비됩니다. 태생소경에게
진흙으로 눈을 넣어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세례를
상징합니다. 성령을 통해 새로운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니야의
안수를 받고 바오로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성령의
힘을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힘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실 때 하느님 또한 당신의 도우심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피땀을 흘리시고 십자가
위에서는 급기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십니다. 장님이 된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그렇게 버려지지 않고서는 인간의 죄를 품을 수 없습니다. 죄와
은총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품기 위해 스스로 하느님의 적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삼손을 통하여
불레셋의 심장을 무너뜨리도록 하신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죄를 없애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누군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요 부활’이십니다. 삼손도 그렇게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에 그들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 품 안에
하느님의 뜻, 하느님 자신, 즉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삼손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께서도 마치 삼손이 죄인이 되어 죄인들을 없애버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 또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시어 죄를 없애시어 인간을 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미래의 삼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는다는 것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품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삼손,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부활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이웃을 대신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 그분의 뜻, 그분의
존재,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몇 년 전, 일본에서 한 실패한 기업가가 자신의 실패담을 공개한 책을 내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부끄러울 수도 있는 실패를 공개함으로써
사람들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출판했다고 합니다. 솔직히
자신의 어두운 면을 공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자신의
잘한 것만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패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실패와 실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패와 실수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실패와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그런 내가 되기란 정말로 쉽지가 않습니다.
야구공을 보면 꿰맨 흔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왜 야구공을 이렇게
꿰매서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을 많이 가졌지요. 그 의문에 대해 누군가가
이 꿰맨 흔적인 봉합선이 없다면 멀리 날아갈 수 없다는 대답을
해주시더군요. 이 봉합선으로 인해 공의 가속도를 높여 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봉합선에 해당하는 실패와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실패와
실수들이 우리를 더욱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이는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백만장자 응답자의 80% 이상이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에
열심히 몰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나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패와 실수가 내게 없기를 간절하게 바라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포기에 빠지지 않는
용기,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이러한 우리를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지요.
그리고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러서 아이를 낳기에는 둘 다 너무 늙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이렇게 말하지요.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당시에 자녀가 없음은 실패라고도 불릴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더 이상 하느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가능하다고
포기했기에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조차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과 불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하느님 앞에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용기가 분명 하느님의 일을 내
안에서 이룰 수 있게 할 것임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들만이
하느님의 커다란 축복과 은총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사람이 따뜻한 마음을 잃는다면 무엇보다는 그 자신이 인생이 외롭고
비참하게 된다(칼 힐티).
회장의 유서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요,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쓸쓸하게 혼자 앉아 있는 노인을
만났다. 레이니 교수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 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외로워 보이는 노인을 찾아가
잔디를 깎아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서 노인을 만나지 못하자 그는 노인의 집을
방문하였고 노인이 전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장례식 장을 찾아 조문하면서 노인이 바로 <코카콜라 회장>을
지낸 분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 한 유족이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남긴 유서가 있습니다.” 라며 봉투를 건넸다. 유서의 내용을 보고 그는
너무나 놀랐다.
“2년여 동안 내 집 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주고,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깎아 주며,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
고마웠어요. 나는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너무 뜻밖의 유산을 받은 레이니교수! 그는
1. 전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과
2. 자신이 코카콜라 회장이었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
3.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잠시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큰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레이니교수는 받은 유산을 에모리 대학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제임스
레이니가 노인에게 베푼 따뜻한 마음으로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왔지만,
그는 그 부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를 학생과 학교를 위한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을 때, 그에게는
에모리 대학의 총장이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떠올려 봅니다. 세상의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평범한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겠지요. 그 결과 주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내 이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라.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어쩌다가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마침 즈카르야가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드리고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14).
그러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받게 될 이름,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습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이 불신 때문에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리야의 의심, 그리고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구원의 다가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불신
따위에 구애 받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조건 없이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나 멸망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의심함으로써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멸망이
되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근원이 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20,29).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한 주간의 사제직무를 끝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표징을 간직한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 주셨구나”
(루카1,25). 온갖 오해와 치욕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잃지
않고 일생을 충실하게 살았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부부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즈카르야에게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주신 분, 엘리사벳에게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는 믿음과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분,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혹 밀운불우(=구름만 많고 비는 안 온다)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은총의 비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계획이 숨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기에 반드시 우리 삶을
이끄시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흔들림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오늘 이기를 바랍니다.
“당신만이 나를 구해주실 하느님이시오니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시편25,5).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엑 신부 -
◈ [서울] 신앙인들은 양심과 자연 질서의 지킴이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신앙인들은 양심과 자연 질서의 지킴이
벙어리로 하루, 장님으로 낮에 2 시간을 체험했었는데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5개월간 벙어리로 지냈다는 건 감당하기 참 힘들었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그렇게 지냈다는 성경의 내용입니다.
대자연 운행의 힘님이신 하느님의 일을 의심한 대가로 받은 벌이었지요.
대자연 운행의 힘을 고의로 어기면 그에 따른 어떤 불행이 닥칠 거고요.
신앙인들은 양심이나 자연 질서를 어기면 벌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루카 1,2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고목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 13,2-7.24-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 1,5-25
고목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
유럽의 여러 형제들과 대화하던 중에 유럽 교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세속화와 물질만능주의화로 인한 그리스도 신자수의
급감도 큰 문제지만 사제 수도자들의 노령화, 성소자 급감으로 인한 위기는
1급 비상경보 상황입니다.
유럽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저희 살레시오회에서는 ‘유럽 프로젝트’
라는 이름하에 전 세계 살레시오회 관구에서는 십시일반으로 회원들을
유럽으로 파견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쪽 지역에서 나이 70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밉니다. 나이 80에 은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 관구장 신부님도 얼마나 상황이
어려웠으면 이번에 한 공동체 원장을 새롭게 임명했는데, 그분 연세가 90
ㅋㅋㅋ 이랍니다. 이거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귀만
먹으셨지 정신 명료하고 지팡이 짚고 걸음도 잘 걸으신답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관구장 신부님의 원장직 요청에 아주 기쁘게
OK하셨답니다.
90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두 사람의 인생도 이 대림시기에 아주
좋은 묵상거리로 다가옵니다. 두 분의 삶을 통해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 인간의 계획과 하느님의 계획은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평생토록 아들 하나를 간절히 기다려왔지만
끝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실망감이 하늘을 찔렀지만 두 분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보다’하며 완전히 꿈을 접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사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는 일도 때가 있는 법입니다.
가임연령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두 분은 그런 시기를 다
흘려보내고 이제 삶을 정리해야 할 노년기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 사람들이 보고 웃을 일이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즈카르야였기에 엘리사벳이 곧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전언에 아주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엘리사벳은 그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졌고, 조금은 창피하기도 했던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주셨구나.”
머지않아 두 노인의 품에는 건강한 아이가 안겨졌습니다. 죽어가던
고목에서 한 송이 향기로운 꽃이 피어났습니다. 인간들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하느님 안에는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을 바라보며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계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해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가는구나 하며 좌절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해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지금 나이에서 반 토막을
‘뚝’ 잘라내야겠습니다. 사실 요즘 60은 옛날 60이 아니라 젊은이입니다.
나이 들수록 더욱 영적으로 거듭 태어나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대림 참회 예식
2014년 나해 12월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알리다.>
▥ 판관기의 말씀입니다. 13,2-7.24-25
복음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5
대림 참회 예식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시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이시여, 오시어 우리에게 현명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O Sapientia, quae ex ore Altissimi prodiisti, attingens a fine usque
ad finem, fortiter suaviter disponens que omnia: veni ad docendum
nos viam prudentiae).
우리는 12월 17일부터 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후렴 때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하는 ‘오 후렴’(O Antiphona)을 부르면서 대림시기 제2부에
들어갔습니다. 임박한 주님의 성탄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들어높이는
때입니다.
12월 17일 저녁기도 ‘오 후렴’에서 노래한 대로,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시는 참 ‘지혜’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간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지혜이십니다. 이 지혜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을 바라볼 수도 또 올바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이 땅의 지혜를 비교 대조하면서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총명합니까? 그러한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sapientia terrena animalis diabolica).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3,13-18).
야고보 사도는 우리 안에 시기와 이기심과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지혜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악마적 지혜’(sapientia diabolica)라고 한
표현을 주의깊게 들어야 하겠습니다.
“악마"는 그리스어 diabolos, 라틴말 diabolus에서 나온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악마는 “중상모략하는 자, 이간질 하는 자,
분열시키는 자, 일치를 파괴하는 자, 고발자”란 뜻입니다. 악마는 우선
하느님에게서 나를 우리를 분리시키고, 동시에 우리 사이의 일치를
파괴하고 이간질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분열과 파괴의 영이 바로 악마,
마귀입니다.
수많은 사막 수도 교부들처럼 베네딕도 성인도 일치가 깨어지는 곳에는
악마가 있음을 직시합니다.
규칙서 머리말 28에서, 하느님의 장막에 사는 사람은, 유인하는 사악한
악마를 그 유혹과 함께 마음에서 쫓아내고 악마의 사소한 유혹까지도
그리스도께 메어 쳐 바수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베네딕도는 바로 앞 절에서 악마적 유혹의 구체적인 예를 시편을
인용하면서 열거하고 있다.
“허물없이 걸어가며 의를 하는 사람, 진리를 마음속에 품은 사람, 혀로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머리말 25-27). 이렇게 악마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을 베네딕도는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지혜의 사람
(vir sapientiae)”라 칭송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좋은 예를 베네딕도 전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수사가 자꾸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습관에 빠지자, 주위 장상들이 아무리 설득하고 벌을
줘도 자꾸 빠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니 베네딕도 성인은 그 형제 옆에 새까만 악마 새끼가 그
형제를 자꾸 나가자고 부추긴다는 사실을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악마를 쫓아내니 그 형제는 다시금 온전히 형제들과 함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전기 4장).
인간적인 판단과 사고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수도자 개인한테, 그리고 수도 공동체 내부에 악마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공격합니다. 내 안에 이유없는 공격성이나 분노나 불안감이 엄습할 때,
그리고 공동체 안에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의심, 시기와 질투가 늘어날 때,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나 다른 사람의 말을 강하게 거부하고자
하는 불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악마의 영향력과 공격을 봐야
합니다. 단순히 감정의 대립 혹은 사람과 사람의 갈등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안에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참 지혜이신 주님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영적 차원의
것이 보입니다. 드러나는 현상들만 보면 참 인간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 안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우리 각 개인과 우리
공동체 전체를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영적 성장의 도구들입니다. 여기서
회개와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 공동체 전체가 오시는 주님께
우리의 나약함과 허물을 고백하며 겸손되이 무릎을 꿇을 때, 천상 지혜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사랑의 전도자 사도 요한은 편지에서 지혜의 빛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2요한 2,7-11).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