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쨍하고 더운 것과 습하고 더운 것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네 기분도 다릅니다. 땀을 흘려도 기분 좋게 날 수 있고 바람이라도 분다면 한결 상쾌해집니다. 그런데 진득하니 기분도 가라앉고 몸도 축 쳐지기 일쑤입니다. 이런 날 바깥을 걸으면 자칫 조그만 일에도 폭발합니다. 모두가 서로 조심해야지요. 기온은 그리 높지 않음에도 습기 찬 더위를 지내야하는 날은 하루가 힘들지요, 이제 6월이 시작되었고 얼마 후 장마도 당해야 합니다. 막강 더위가 예보되어 있는데 당해봐야 알겠지만 우리는 아직 40도 열기를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물론 금년에도 그런 정도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냥 우리의 여름이기를 바랍니다.
5월은 앞뒤 연휴에 모두 비를 맞았습니다. 놀 생각 말고 일이나 하라는 하늘의 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운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찌 됐건 지나갔습니다. 샌드위치 공휴일, 이 주말은 어찌 되려나, 가만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야 오거나 말거나 가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맑은 하늘을 보는 것은 기분이 상쾌합니다. 여름 거반 다 가기까지는 이런 연휴가 없네요. 휴가철이나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휴일을 따지는 것이 우습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살자니 그게 다 영향을 주고받더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전철을 타고 외출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코로나 팬데믹 시즌도 끝나고 첫 날이었습니다. 세상에! 숨어있던 노인들이 모두 나왔나요?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하니 자리 앉을 생각은 접었습니다. 다리 힘을 길러야지, 다짐하는 수밖에요. 자 여름 출발입니다. 건강해야 다음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건강하게 또 한 달을 이겨내기 바랍니다. ^)^
2023년 6월 3일 김종우 목사 드림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잠언 18 : 13 - 14)
<인어공주>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함께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상대방에게 귀를 여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아는 길은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읽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가능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등등 그의 말을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듣기를 거부하면 첫걸음부터 뗄 수가 없게 됩니다. 당연히 두 세계는 그냥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태는 특히 권력관계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나타납니다. 예컨대 부모 자식 관계나 스승과 제자, 직장에서 상사와 직원 그리고 계급 상 상하관계로 되어 있는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방향의 대화만 있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른 세계를 살게 됩니다.
아비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고 어미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세계나 육지의 세계에서나 부모 자식의 관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양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자식의 관계 속에서는 문화 차이를 넘어 비슷한 듯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이니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습니다. 하지만 자식의 인생이 부모의 인생을 연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은 자식의 길이 있습니다. 부모의 바람이 자식에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법칙은 없습니다. 그렇게 강요한다면 서로가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라면 둥지를 떠날 차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만들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 쉽지 않지요.
자라면서 다른 세상에 대한 꿈과 동경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꾸준히 따라가며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 꿈에 대한 열정이 강할수록 삶 자체를 거기에 맞추어 진행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그 열정을 이해하며 돕는 자가 될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면 훼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자기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지요. 그것이 자식을 위한 일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살아온 경험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식의 꿈이 부모의 꿈과 일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행히 비슷하기도 해서 가업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자식의 길을 인정하고 응원하는 편이 낫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시작되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바다의 왕 ‘트라이튼’의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 ‘에리얼’은 육지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그것을 이루려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왕은 그런 딸의 소망을 포기하도록 극구 반대하며 애쓰지만 속된 말로 자식을 24시간 감시하며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날 폭풍에 난파당하는 육지의 ‘에릭’왕자를 구해줍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왕자는 의식이 돌아오는 중 어렴풋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여 있습니다. 에리얼은 왕자를 찾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두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서로가 그리워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육지로 가고 싶습니다. 그 왕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육지로 올라가려면 그 몸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체에 다리를 가져야 합니다. 오라비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싶어 하는 사악한 바다 마녀 ‘울슐라’는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려하고 있습니다. 마침 에리얼의 간절한 소망을 눈치 챕니다. 둘의 간절함이 마주쳐 거래를 합니다. 네게 다리를 줄 테니 사흘 안에 에릭과 키스를 하면 네 것이 된다. 그 숙제를 풀지 못하면 너의 힘이 내게로 온다. 즉 네 아비의 힘이 내게로 오는 것이다. 내가 바다의 여왕이 되는 것이다. 위험한 거래입니다. 그러나 에리얼의 간절함이 성사시킵니다. 문제는 입을 봉한 것입니다. 듣기는 해도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육지로 나서게 됩니다. 에릭의 궁전까지는 들어갑니다. 에릭의 눈과 마음에도 에리얼이 들어왔습니다. 이상하게 찾고 있는 바로 그 여인의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마녀 율슐라가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물론 에리얼의 돕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하고 또 어떻게든 붙여놓으려고 합니다. 시간은 다되어가고 잇습니다. 모든 것을 잃느냐 육지의 사랑과 꿈을 얻느냐 하는 판가름이 곧 날 것입니다. 막바지 둘 사이에 대단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원하는 대로 권력을 쟁취하려던 순간 마녀는 최후를 맞게 되고 잃었던 왕권의 상징인 불의 삼지창도 도로 찾아 아비에게 넘겨줍니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안정을 되찾습니다.
인어공주가 유색인종일 수 있느냐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디즈니 영화사에서 획기적인 시도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잘 아는 대로 유럽의 동화이기에 그들의 문화가 나타납니다. 여태 영화로나 애니메이션으로나 인어공주는 백인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색다른 광경에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이야기에 빠지다보면 그다지 신경이 써지지도 않습니다. 하기야 여태 보아온 것이 있으니 조금 어색하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바뀌었으니 또 모르지요. 아무튼 그냥 어른용 동화로 보면 됩니다. 바다 속 풍경도 아름답고요. 영화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를 보았습니다.
알고나 전하는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매우 큰 지진들을 경험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기억나는 것은 인도네시아, 아이티,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일으킨 일본, 최근의 튀르키에와 시리아의 지진 등입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재앙입니다. 준비가 잘 되어 있다고 정평이 나있는 경제대국 일본도 큰 피해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아직도 모릅니다. 바로 핵발전소 때문입니다. 아무튼 지진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자연재앙들이 인류를 두렵게 만듭니다. 홍수와 기근이 여전합니다. 전쟁은 심심하면 터지지요. 테러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마지막 때’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요즘은 식상해서인지 그럼에도 좀 잠잠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세상 끝 곧 마지막 때에 관하여 묻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7 - 8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렇습니다. 전쟁, 기근 그리고 지진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특히 지진들을 당하면서 자주 마지막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더욱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19 - 20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런 환난의 때에는 도망을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아이 밴 자나 젖먹이는 자 곧 임산부들은 도망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더욱 힘든 때요 화가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런 날을 두려워하여 결혼도 회피하고 아이 낳는 것도 삼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설교를 하면 여자 성도들은 더 두려움을 갖지 않겠습니까? 근래 출산율이 낮아져서 국가적으로 대책을 세우느라 야단입니다. 이에 부응하여 교회들도 앞장서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서는 결혼과 출산을 자꾸 하라고 격려하고 어느 교회에서는 마지막 때 화가 있을 것이라 겁을 준다면 말이 됩니까? 어느 교회를 따라가야 하는지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일단은 먼저 하고 보라고요? 성도들이 갈피를 잡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듭니까?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경고하신 것이 있습니다.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참 그리스도와 참 선지자가 하는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오셔서 당신이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요 19 :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리고 선지자는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로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들이지요. 그렇다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거짓말을 전하겠지요. 그런데 거짓말이라고 전하겠습니까? 결단코 참말이라고 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는 본인들은 자기가 전하는 그 말이 거짓말이란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우선 말씀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마 24 :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을 보며 감탄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반응을 하십니다. 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 웅장한 성전이 다 무너진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더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삶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선민, 하나님 중심의 삶을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 그 하나님은 바로 성전에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다고요? 어안이 벙벙한 일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끝장이란 뜻입니다. 그야말로 마지막 때이지요.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3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 말씀을 보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은 같은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 임하심은 재림을 뜻하지요. 이미 거기 계시는데 또 임하시는 것을 말하니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성전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무너진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더구나 우리 하나님 백성의 삶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백성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선민, 세상 가운데 특별히 택함을 받은 백성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세워주신 성전인데 또 무너지다니요.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언제요? 그리고 그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 때는 분명 세상 끝입니다. 메시야가 오는 때일 것입니다. 두렵지만 궁금합니다. 제자들이 질문하면서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야기 서두에 또 경계하십니다. 4 - 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미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예수 이름을 팔면서 그런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잘 보십시오. 3절에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이런 일’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성전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가장 큰 일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런 날이 올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궁금하지요. 그래서 물은 것입니다. 요즘 우리야 성전 무너지는 일은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이 무너지는 일에 훨씬 관심이 많습니다. 전쟁이 일어난다,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등등 신문의 톱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은 때맞춰서 ‘마지막 때’를 설교하지요. 예수님은 ‘성전’을 말씀하시는데 왜 세상 이야기로 바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의 출발을 잊고 중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리, 전쟁, 기근, 지진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는 잊은 것입니다.
다시 기본을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지요. 바로 하나님 백성입니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눈은 누구에게 맞춰져 있습니까? 예쁜 아이도 옷 잘 입은 아이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눈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자녀입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세계가 다 하나님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불러서 제사장으로 만들고 그러고 나서 세상을 맡기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다 불러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 백성을 불러서 그들을 제사장으로 만들어 세상을 맡기시려는 것입니다. 벧전 2 :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너희’는 세상사람 전부를 말하지 않습니다.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영의 세계가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편이고 하나는 마귀의 편입니다. 그래서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요1서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 곧 마귀에게 속한 영이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서는 마귀 사단이 대장이지요. 그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영은 이 육의 세상에서 일할 때 직접 일하는 것이 아니지요. 육체를 가진 사람을 자기 일꾼으로 세워 그에게 함께 하여 일합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를 택하여 그에게 임하여서 일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모세를 세워서 모세와 함께 하셔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선지자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마귀도 마찬가지로 일합니다. 자기 목자를 세워 그와 함께 하여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자는 성령이 함께 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목자는 악령이 함께 할 것입니다. 문제는 마귀가 함께 하는 즉 악령이 임하여 일하는 목자가 자기가 마귀의 종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택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 마귀의 종노릇한다면 누가 그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사회를 쥐고 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 장로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실상 하나님의 성전을 장악하고 하나님 백성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핍박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종들이었고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한분뿐이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시지요.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아비를 마귀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마귀가 함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전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종이 일합니다. 하나님께로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지요. 그렇다면 마귀의 종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훼방해야 하는데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성전이지요.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하나님 성전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마귀의 목자다, 라고 밝히면서 전하겠습니까? 그러다가는 하나님 백성이 다 도망을 갈 것입니다. 결코 마귀의 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마귀의 종인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름 받아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데 마귀의 영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눅 22 : 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유다 본인이 알겠습니까? 알고서야 스승을 파는 자로 남지는 않겠지요. 그러므로 쓰임 받는 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인지 사단의 종인지 모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믿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네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네가 가르치는 말씀이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를 따라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백성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답니다.(요 8 : 44)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전하는 교훈의 말씀에는 틀리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마 23 :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모세의 율법 그 교훈은 지켜라, 다만 저들이 행하지 않는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시는 겁니다. 진리의 여부는 거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교훈의 말씀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거짓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잠 30 : 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하나님 말씀에 가감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성경을 닫으면서 경고하심도 그것이었습니다. 계 22 : 18 -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더하고 빼고 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 말씀에 더하고 빼고 하는 일을 감히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두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목자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 뜻과 다른 거짓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의 징조를 말씀하십니다. 마 24 :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심판의 때 즉 재앙이 닥치고 있으니 임산부들이 도망을 가야 하는데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래서 화가 있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그런 뜻으로 주신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전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빙자하여 더하고 빼고 짜깁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는 자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모르니까 전하는 것이지요. 그는 자기 속에 이리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겉은 분명히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의 탈을 쓴 이리일 뿐이지요.
먼저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성경 속의 역사적 사실이나 교훈의 말씀으로는 별 탈이 없습니다. 현재도 과거도 아닌 앞으로의 일에 대한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 예언(묵시)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하실 일을 당신 종 곧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십니다. 암 3 :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데 당시 일어날 일이 아니라 먼 장래의 있을 일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로서는 전하는 선지자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실제 사건이 나타나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사 29 : 11 - 12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예언 곧 묵시의 말씀은 목자도 백성도 당시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예언의 실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군가 안다면 마귀가 가만두겠습니까? 또 마귀가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니 봉해놓은 것입니다. 말씀은 있는데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봉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비사 곧 비유로 기록하였지만 때가 이르면, 곧 언약(예언)이 이루어질 때는 밝혀진다는 것이지요. 실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알려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임의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전하니 그게 다 거짓말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그 목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마귀의 영이 함께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아비가 마귀였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아는 대로 그들은 자기네만 성경을 가장 잘 아는 자요 백성을 가르치는 자들로 자부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웬 거지같은 예수라는 청년에게 찾아가는 것을 이해도 못하고 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 있는지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무시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몇 번 마주하였는데 말문이 막히는 질문이나 하고 있으니 자존심까지 상했습니다. 목숨처럼 지키는 율법을 자기 식으로 말하고 안식일조차 넘나듭니다. 그러니 살려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들으니 말씀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자기 지식과 선입관에 매여서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행 17 :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렇습니다. 과연 맞는 말인가 자기가 가진 기존의 지식이 아니라 성경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사실 예언에 대해서는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세하게 맞춰봐야 합니다. 무작정 반대만 하니 눈앞에 하나님 약속하신 목자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지막 때 예언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약속대로 오시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우리 또한 그들과 똑같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