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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게 시 판 스크랩 나란다 사원-항상 1만여 명 모여 공부한 인도의 ‘종합대학’
다람쥐 추천 0 조회 323 14.11.29 19:5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나란다 사원-항상 1만여 명 모여 공부한 인도의 ‘종합대학’

 

  지장 신행회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인 파트나를 떠나 라즈기르에 도착했다.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 유적과 ‘세계 최대의 대학’이 있었던 나란다(Nalanda) 사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라즈기르에 도착한 지 이틀 뒤인 3월 30일 꿈에 그리던 나란다 사원으로 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 라즈기르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져 있기에 멀지는 않았다.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녹음 우거진 거리를 달렸다. 도착하니 9시 30분. 마침 3월말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덥지 않은 햇살을 받으며 유적지로 난 포장로를 걸었다. 출입구인 돌문을 지나 유적지에 들어서니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건물 초석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나란다 사원에 들어온 것이다. 폐허로 변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유적이었다.

 

  나란다 사원. 서기 320년 건국된 굽타 왕조의 두 번째 왕인 쿠마라굽타 1세(415∼454)가 창건한 사찰. 가슴이 가볍게 떨렸다. 심호흡하며 이곳에서 공부했던 신라의 아리야발마ㆍ혜업스님 등을 떠올렸다.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는 사하(沙河)”(불국기)를 지나 천축에 도달한 스님들. 그분들이 그 옛날 여기서 수학했다.

 

  유적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찬찬히 걸으며 훑었다. 이슬람 침공으로 모든 것이 파괴됐을 텐 데도 여전히 거대했다. 대탑 주변에 앉아 나란다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창건된 후 나란다 사원은 역대 왕들의 보호에 힘입어 점차적으로 사역(寺域)이 확장됐다. 631년 당나라 현장스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엔 많은 승원과 탑, 예불당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사원’으로 변해 있었다.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승방(僧房)을 거느린, 당시 학문의 일대 센터였다.

 

 『대당서역기』와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이하 『삼장전』)에 의하면 ‘나란다’는 ‘시무염’(施無厭. 하염없이 베푼다)이란 뜻이다. 가람의 남쪽에 암몰라 장자의 숲이 있었는데, 그 못에 사는 용의 이름이 나란다였다. 연못 옆에 사찰을 세웠으므로 용의 이름을 따 나란다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모든 사원의 승방은 4층이며, 중각(重閣)의 용마루나 대들보엔 용무늬가 장식됐다. 두공과 기둥은 붉게 단청됐고, 큰 기둥과 난간엔 갖가지 조각이 새겨졌다. 인도의 가람 수가 천만 개나 되지만, 장엄함ㆍ수려함ㆍ숭고함에 있어 나란다 사원을 따라올 사찰이 없었다.

 

 『삼장전』은 특히 나란다 사원엔 주객을 합쳐 스님 수가 항상 1만 명이 넘었고, 모두 대승과 소승십팔부를 겸하여 배우고 있다고 밝혀놓았다. 불교뿐 아니라 속전이나 베다 등의 책과 인명(因明)ㆍ성명(聲明)ㆍ의방(醫方)ㆍ술수(術數)에 이르기까지 갖추어 연구했다. 경론 20부를 해득하는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이나 되고, 30부를 해득하는 스님은 500여 명, 50부를 해득하는 자는 현장스님을 포함해 10명이나 됐다. 당나라 현장스님(?∼664. 나란다 사원에서 5년 간 수학)의 스승인 계현(戒賢)법사만이 모든 경전에 통달했고, 덕이 높아 대중들의 법종장(法宗匠)이 됐다.

 

  강좌는 매일 100여 곳에서 열렸고, 학승들은 촌음을 아껴 배웠다. 학승들은 가르침을 청하고 깊은 이치를 토론하는 데 온종일을 소비했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서로를 일깨우고 가르쳤다. 젊은이나 나이 든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삼장(三藏)의 깊은 이치를 말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때문에 나란다 대학에 유학한다는 이름만 내걸고 노닐어도 모두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란다 대학에 입학하기도 어려웠다.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입학은 취소됐다. “나란다 대학에서 벌어지는 논의(論議) 마당에 끼고 싶어 다른 나라나 이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해 굴복하고 돌아가는 자도 많으니, 예나 지금이나 학문에 깊이 통달해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입문할 수 있었다. 유학하러 왔던 젊은 학자들이 학문에 관해 상세하게 논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가고 마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7∼명이나 된다. 세상 이치에 환하다고 자부하는 나머지 2∼3명도 대중들과 차례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점차 예리함이 꺾이고 명성이 퇴색돼 입문하지 못했다(『대당서역기』)”.

 

  이렇게 입학하기 어려운 나란다 대학에 신라스님들이 있었다. 당나라 의정스님(635∼713. 나란다 사원에서 10년 간 수학)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이름이 나오는 아리야발마ㆍ혜업스님이 바로 그들인데, 두 스님은 귀국하지 못하고 나란다 사원에서 구도자의 생을 마감했다.

 

  ‘쓸쓸한 상념’에서 깨어나니 햇볕이 상당히 뜨겁게 다가왔다. 대탑 쪽으로 갔다. 대탑 주변의 작은 탑들엔 아름다운 부처님 상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 얼굴이 파괴된 상태인데, 신체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대탑을 돌아 승원 유적으로 나아갔다. 마침 나란다 사원에 온 인도인 가족이 우리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월드컵은 안 보고 왜 인도에 왔느냐”고 웃으며 되물어왔다. “월드컵 전에 귀국한다”고 하자, 다른 질문을 해왔다.

 

  인도인 가족과 이별한 뒤, 엄청나게 큰 승원 유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평야뿐이다. “나란다 사원처럼 거대한 사원을 유지하려면 대단한 경제력이 필요한데…”라는 생각이, 평야를 보는 순간 대번에 해결되는 것 같았다. 사방의 벌판이 나란다 사원을 유지시켜준 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덕을 갖춘 대중들이 사는 곳이라서 자연히 엄숙했고, 건립 이래 7백여 년이 되었으나, 한 사람의 범죄자도 있었던 적이 없었다. 국왕도 흠모하고 중히 여겨 100여 읍(邑)을 희사하여 공양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읍의 200호로부터 매일 갱미(粳米)와 우유 수백 섬씩을 진상 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학인들은 힘들여 구하지 않아도 의복ㆍ음식ㆍ잠자리ㆍ여가(餘暇) 등 사사(四事)를 자족하고, 예업(藝業)을 성취할 수 있었으니 모두 장원의 힘이다(『삼장전』)”.

 

  1만여 명의 학인들이 한 장소에 모여 하루에 100강좌씩 들을 수 있었던 대학, 1500여 년 전에 그 같은 규모였던 대학은 나란다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학인들의 수업료는 무료였고, 그들은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되는 대학은 지금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시대도 아닌 당시에 나란다는 벌써 국제적으로 이름난 학처(學處)였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ㆍ티벳ㆍ몽골, 심지어 남방의 여러 불교국가들의 젊은이들이 나란다로 유학 갔다.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종합대학”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오가 가까이 오는지 강렬해진 햇살을 받으며 나란다 사원을 빠져나왔다. 마침 발굴 중이었다. 어떻게 발굴하는지 보고 싶어 유적지에 올라가니 인도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맨 채, 조심스레 땅을 파고 있었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파괴된 채 수백 년 간 방치된 나란다 대학은 1861년 비로소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이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를 토대로 나란다 승원 유적 터를 확인했고, 1916년부터 비로소 인도 고고국과 영국 정부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은 대략 46,000평. 동서 250m·남북 610m 규모인데, 주변 들판에 불룩불룩 솟은 언덕들도 모두 나란다 사원 유적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해주었다. 이 넓은 곳에 승원ㆍ탑ㆍ강당이 빼곡히 차 있었던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내려와 나무 밑에 앉았다. 토론하는 학인들의 모습, 열심히 설명하는 스승의 모습, 이 강당 저 강당을 쉴새없이 다니며 메모하는 학승들 모습 등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랬던 곳인데 이제는 유적만 있다. 세월의 무상함에 수수(愁愁)로워지지 않는 참배객이 오히려 이상하리라.

 

  나란다 사원엔 신라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나라 의정스님(635∼713)이 지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하 『구법고승전』)에 의하면 “나란다에 머물며 율과 논을 많이 익힌” 아리야발마스님도 돌아올 마음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동쪽 경계인 계귀(鷄貴, 신라)에서 나와 서쪽 끝인 용천(龍泉, 나란다 사원)에서 세상을 마감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혜업(慧業)스님도 당나라에서 천축으로 건너가 대보리사에 머물며 유적을 순례하고, 나란다 사원에서 오랫동안 강(講)을 듣고 불서를 읽었다. “내(의정스님)가 나란다 사원의 불서를 조사하다 우연히 ‘불치목(佛齒木) 밑에서 신라승 혜업이 베껴 적었다’는 「양론(梁論)」하기(下記)를 보고, 다른 스님에게 물으니 그는 이곳에서 죽었으며 나이는 60살에 가까웠다고 한다”는 내용이 『구법고승전』에 있다.

 

 『구법고승전』엔 다른 신라 스님들 이름도 나온다. 정관 연간(627∼649)에 대보리사에 도착한 현각(玄恪)스님은 대보리사에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 때 스님의 나이 40이었다. 현태(玄太)스님 역시 대보리사를 예배하고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죽은 곳을 알지 못하며”, 이름 모를 신라의 두 스님도 (당나라로) 돌아가는 도중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오로지 법(法)을 위해, 모든 것 다 버리고, 구도의 길에 나섰던 많은 신라 스님들은 인도에서, 이름 모를 땅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구법고승전』에 이름이라도 나오는 이 분들은 중국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의 사구(砂丘)에서, 혹은 파미르고원의 한 모퉁이에서, 또는 천축의 불교유적을 순례하다 이름 모를 곳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입적한 스님들에 비하면 행복한 스님들인지 모른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르지만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標識)가 되어주는”(『불국기』) 길이 바로 천축으로 가던 구도자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ㅡhttp://cafe.naver.com/jjnd/11073

 

 

 

 

  나란다 대학의 흥망성쇠

 

  세계 최대의 대학이자 최초의 불교 종합 대학 나란다는 붓다 재세 시 망고 숲 작은 학당에 불과했다. 붓다의 열반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지혜의 샘이 솟아났던 곳. 젊음을 수행과 교학에 쏟아 붓고 눈에 불을 켜 법음을 연구했던 스님들이 살던 이 공간은 들어서자마자 하버드보다 웅장했을 지난 시절을 상상하게 한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전성기의 나란다를 허공에 그려본다. 손끝의 저 자리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에 세워진 탑 위에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으리라. 그 깃발 다섯 성루에는 사방에서 도전해 오는 이단(異端)과 논쟁하기 위해 나란다에서 가장 명석한 다섯 학자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일만여 명의 스님들과 학자들은 촌음을 아껴 대승과 소승십팔부(小乘十八部)를 배웠고 도서관에는 수트라(經)와 사스트라(論)와 탄트라(tantra)를 연구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스님들의 얼굴에서는 늘 진지함이 묻어났고,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불법을 수호하고 탐구하는 도반이기에 모두가 한 가족이었으리라.

 

  곳곳에서 매일 백여 개의 각기 다른 주제로 강좌가 열렸고 토론으로 진행되는 법석에서는 열기가 식지 않았다. 선실(禪室)에서는 밤낮없이 명상에 몰두하는 스님들로 고요했다. 건립 이래 단 한 번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고 그 흔한 다툼 한 번 일지 않았던 곳. 보대(寶臺)가 별처럼 줄지어 섰고 옥루(玉樓)가 산처럼 솟아 있고, 높고 큰 건물들이 연기와 노을 위에 솟아 있어 창에서 풍운(風雲)이 일어났다. 처마 아래서 옥륜(玉輪)이 뜨고 지고,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위에는 연꽃이 떠 있고 풀들은 곳곳에서 생명을 피워냈다. 스치면 아름다움이 묻어날 것만 같은 이곳이 바로 나란다였다.

 

  그곳의 흔적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거대함은 끝없이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과 닿을 만큼 뻗어 있는 붉은 벽돌. 그 끝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천 년 전 그들의 학구열처럼 강렬하다. 그 당시 나란다는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나 철학, 수학 등 모든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눈 푸른 납자들의 최종 집결지였다. 그중에는 5세기 말에 갔던 법현, 혜초스님의 스승 금강지(金剛智), 7세기의 현장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각국의 외국 스님들까지 모여들었고 개중에는 신라의 스님들도 있었다. 이곳은 수많은 학승들이 목숨을 건 구도 여행을 감행케 했던 동경의 장소였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과 닿을 만큼 뻗어 있는 붉은 벽돌. 그 끝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천 년 전 스님들의 학구열처럼 강렬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들의 웃음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명이 들렸다. 칼을 손에 든 잔악한 무리가 몰려왔다. 이슬람의 군마(軍馬)들이 불어 닥친 것이다. 붓다가 열반에 든 뒤 여섯 왕이 대를 이어오면서 각기 절을 세우고 벽돌로 둘레를 쌓고 쌓아 만든 이곳을 그들은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나란다는 이슬람의 말발굽 아래 철저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은 스님들의 목과 배를 갈라놓았다. 사방으로 번진 피는 벽돌을 핏빛으로 붉게 물들였다. 승복 속 보드랍던 살갗이 잘려나가고 성불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그들의 서원은 갈기갈기 찢겨졌다. 모든 생명줄을 갈라놓았다. 남김없이. 그러나 스님들은 물러서지도 맞서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죽음까지도.

 

  일곱 달 동안 꺼질 줄 몰랐던 불길은 기어이 나란다의 도서관을 무너뜨렸다. 이백십사 일 낮과 밤 동안 쉼 없이 불탔다. 학승들이 뚫어지라 보던 손 떼 묻은 책들은 재도 없이 타들어갔다. 목마른 학문의 열정을 채워 주던 감로(甘露)의 전당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다.

 

  수천 번의 새벽이 지나고 지구가 수만 번의 태양 주위를 돌고 셀 수 없는 많은 별이 우주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 우리가 서 있다. 발밑 벽돌들은 아직도 꺼멓게 불에 탄 상처가 남아있다. 순례자들의 발길에 차이는 검붉은 벽돌의 생채기가 순례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부서지고 깨진 벽돌들이 아직도 제 몸을 깎아가며 나란다를 지키고 있다.

 

  이곳 하늘과 땅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슬람의 침략으로 수많은 선지식이 피투성이가 되던 그날을. 가슴이 시려온다. 이곳에 머물던 많고 많던 스님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나란다여.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울고 있는가. 그 울음은 소리 없는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찢기고 무너진 나란다의 허리에 스님 두 분이 가부좌를 튼 채 깊은 사유에 잠겨있다. 마치 천 년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듯한 깊은 침묵과 함께. 그 침묵이 붉은 벽돌을 적신다. 피투성이로 죽어간 학승들의 숨결과 그 침묵이 만난다.

 

  나란다여. 그대는 죽지 않았다. 몇 천, 몇 만 권의 책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그 심오한 뜻, 그 깨달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 그대들의 육체는 죽었을지 모르나 혼은 죽지 않았다. 하늘은 구름이 있어도 흐트러지지 않고 구름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오가게 한다. 하늘은 지혜의 자리이고 구름은 일시적인 어둠일 뿐이다.

 

  이슬람이여. 다시 오라. 다시 와서 우리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아라. 그러나 그대들의 칼이 아무리 우리의 심장을 찔러대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물질로서의 나란다는 무너뜨릴 수 있어도 마음속의 나란다는 영원히 살아있다. 나란다의 껍질은 태울 수 있으나 그 속은 뚫을 수 없다. 순례자들의 마음과 마음이 모여 무너지지 않는 반야의 또 다른 나란다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우리가 와 있다.

 

  죽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나란다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있다. 붓다는, 보이지 않아도 붓다를 볼 수 있게 하는 수많은 인연을 존재하게 했다. 그 인연은 나란다에도 있다. 우주 법계의 얼굴이 되어 피어 있다. 법계의 모든 질서가 이 꽃을 피우고자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마음자리 하나에 법계가 열리고 우주가 펼쳐진다. 나의 마음에도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른다. 순간 가슴에 샘물처럼 고였던 설움이 생명의 온기가 되어 찬연해진다.

 

  ㅡ『법보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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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12.01 10:44

    첫댓글 저 사진은 제가 아닙니다^^!!()()

  • 14.12.03 07:33

    그 옛날에 저렇게 웅장한 대학이 잇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15년쯤 되었나봐요. 인도여행한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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