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사막
이선희
거울 속에 사막이 있다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앞으로 가야 하는 얼굴이 있다
바람이 머물다 간 곳에 만들어지는 사구들
바람은 질서에 불성실했으므로
사막이 바람의 알을 사구로 키웠다
한없이 높기만 하던 계단 그 무수한 三자들
같이 흐르지 못해서 생긴 미간 사이의 川자는 깊이도 패였다
혼자가 두려워 짓밟히면서라도 같이 하고자 하던 八자의 시간도 있었다
거울 속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민얼굴
골谷 패인 넓디넓은 사막이다
군데군데 숨겨진 오아시스는
종종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그들의 기록은 믿지 않기로 한다
까마득히 빛나는 이들도 믿지 않기로 한다
허망한 모래의 기록이 깊이 판 박혔다
화장은 무성의한 바람의 행적을 덮는 일
오래된 골谷은 좀처럼 덮어지지 않고
살수록 곳곳이 함정인
부실한 사막엔 사구들이 늘어가고 있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북극 항로}에서
히말라야 산간의 오지나 안데스 산간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삶이란 외줄타기이고, 이 외줄타기가 삶의 예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사하라 사막이나 중국의 고비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들의 삶이 ‘천형의 형벌’과도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히말라야의 산간과 안데스 산간의 삶이나 사하라사막과 고비사막의 삶은 어쩌면 대동소이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전자의 삶은 예술이 되고, 후자의 삶은 천형의 형벌이 된다는 것은 국외자로서의 나의 편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막은 오지이고 불모지대이며, 그 어떤 생명체도 대부분이 살아갈 수가 없다. 일년내내 비가 거의 오지 않으며, 한낮에는 몹시 덥고, 한밤중에는 몹시 추울 수도 있다.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어쩌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해도 너무 좁아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가 없다. 이 불모의 땅, 이 최하천민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미화시키고 아랍인들과 유태인들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에 저절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힘든 것이다. 인간의 삶의 무대는 불모지대의 사막이고, 그 삶의 형태는 천형의 형벌이며, 이 천형의 형벌이 오히려, 거꾸로 삶의 예술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인간의 자기 위로와 자기 찬양의 최고급의 예술이며, 이 예술의 극단적인 형태가 종교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은 시이고, 모든 경전은 시의 주석에 불과하며, 모든 사제들은 우리 시인들의 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선희 시인의 [거울 속의 사막]의 주인공은 사제이자 예언자이고, 우리 인간들의 삶의 예술을 주재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거울 속에 사막이 있”고,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앞으로 가야 하는 얼굴이” 있다. 그 거울 속에는 “바람이 머물다 간 곳에 만들어지는 사구들”이 있고, “바람은 질서에 불성실했으므로/ 사막이 바람의 알을 사구로 키”운 역사가 담겨 있다. 사구는 모래언덕이자 바람의 알을 뜻하고, 시인은 바람의 아내이자 바람의 알, 즉, 사구의 어머니를 뜻한다. 시인의 얼굴이 사막이 된 것은 바람과 눈이 맞아 그 모든 예의범절에 불성실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바람의 알을 낳고 키우는 천형의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없이 높기만 하던 계단 그 무수한 三자들
같이 흐르지 못해서 생긴 미간 사이의 川자는 깊이도 패였다
혼자가 두려워 짓밟히면서라도 같이 하고자 하던 八자의 시간도 있었다
거울 속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민얼굴
골谷 패인 넓디넓은 사막이다
이선희 시인의 [거울 속의 사막]의 ‘석 삼三자’는 상하의 삶의 계단을 뜻하고, ‘내 천川자’는 수직적인 삶(물)의 흐름을 뜻한다. ‘여덟 팔八자’는 상호간의 공생과 공존의 관계를 뜻하고, “거울 속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민얼굴”의 ‘골 곡谷자’는 만고풍상의 넓디넓은 사막의 삶을 뜻한다. 이 세상의 어느 성인군자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붙잡아 맬 수가 없고, 그 어떤 천하제일의 사기꾼도 그의 삶의 족적과 그 기록을 지울 수는 없다. ‘석 삼三자’와 ‘내 천川자’와 ‘여덟 팔八자’와 ‘골 곡谷자’의 민얼굴은 이선희 시인의 상징과 상형문자의 숲이며, 그의 [거울 속의 사막]은 그 암호해독이자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담긴 사주풀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이 세상의 삶의 무대는 불모지대의 사막이고, 그 삶의 내용은 바람의 알을 낳고 바람의 자식을 키우는 천형의 형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쓰디 쓴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의 결과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일 수도 있다. 군데군데 숨겨진 오아시스는 모래바람 속의 신기루와도 같고, 모래바람 속의 신기루와도 같은 역사는 그 어느 것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까마득히 빛나는 별들도 허망한 모래의 기록에 지나지 않으며, 그 어떤 화장으로도 오래된 얼굴의 골谷은 좀처럼 덮어지지 않는다. 이선희 시인의 얼굴은 넓디넓은 사막의 골짜기와도 같고, 도처에 함정뿐이고, 그 부실한 사막의 사구들만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탄이고 악마이며, 도처에 수많은 함정과 밤하늘의 별들과 그 실체가 없는 신기루로, 그 모든 형제들을 유혹해왔던 것이다. 이 깊디 깊은 회의주의와 염세주의는 그것이 참된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의 결과라는 점에서 이선희 시인의 [거울 속의 사막]이 그 시적 완결성을 획득하게 된다. [거울 속의 사막]이 이 세상의 에덴동산이자 오아시스가 되고, 천형의 형벌과도 같은 삶은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삶이자 예술적인 삶이 된다.
화장은 가면과도 같고, 가면은 분식회계와도 같다. 분식회계는 사기꾼들의 얼굴과도 같고, 사기꾼들의 얼굴은 이 세상의 사막과도 같다. 정치인이라는 가면과 천사라는 가면, 아버지라는 가면과 어머니라는 가면, 자식이라는 가면과 효자라는 가면, 스승이라는 가면과 사기꾼이라는 가면, 목사라는 가면과 악마라는 가면 등,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이처럼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며, 이 가면들 속에서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찾아낼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시인의 첫 번째 임무는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 찾기이고, 저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우선은 자기 자신의 가면부터 벗기지 않으면 안 된다. 가면을 벗기고, 가면을 벗겼다는 생각까지도 벗기고, 발톱과 손톱의 모양과 내장 속의 수많은 음모들까지도 다 꺼내 보여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천형의 형벌’과도 같은 삶을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 이선희 시인의 [거울 속의 사막]에서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그 맑고 깨끗한 오아시스에서는 젖과 꿀이 흘러 넘친다.
시는 이 세상의 사막을 푸르고 푸른 지상낙원으로 가꾸는 사업이며, 너와 내가 다같이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
시는 모든 철학과 예술의 기본 음이며, 전인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
시는 노래이고 기적이며, 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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