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 필 무렵
봄이 깊어질수록 들판의 색은 조금씩 달라진다.
연둣빛으로만 보이던 논둑 사이에 어느 날부터인가 분홍빛 작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보이는 꽃, 바람이 불면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리는 꽃. 자운영은 그렇게 조용히 봄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온다.
화려하지 않다.
멀리서 보면 이름 없는 풀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허리를 숙여 바라보면 그 작은 꽃송이 안에 얼마나 많은 봄이 숨어 있는지 알게 된다. 연분홍 꽃잎은 수줍은 미소처럼 피어 있고, 초록 잎들은 서로 기대어 바람을 견디고 있다. 나는 자운영을 볼 때마다 사람의 삶도 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크고 화려한 순간보다 조용하고 사소한 날들이 결국 인생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시골 논길에도 자운영은 많이 피어 있었다.
봄볕 아래 논두렁을 따라 걷다 보면 운동화 끝에 자운영 꽃잎이 살짝 스치곤 했다. 그때는 꽃 이름도 몰랐다. 그냥 봄이면 피어나는 들꽃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자운영은 오래전 기억까지 함께 피워 올렸다. 잊고 지냈던 풍경들, 그리운 목소리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까지도 말이다.
자운영은 땅을 살리는 꽃이라고 했다.
논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심어 두는 꽃. 자기 몸을 낮추어 결국 다른 생명을 살리는 존재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운영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아도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며 다른 사람의 삶을 비옥하게 만드는 사람들. 자운영은 꼭 그런 사람을 닮아 있었다.
햇살은 연둣빛 잎 위에 가만히 내려앉아 있었다.
꽃은 작았지만 빛은 그 위에 오래 머물렀다. 자연은 늘 작은 것들을 먼저 사랑하는 것 같았다. 키 큰 나무보다 이름 없는 들꽃에게 더 다정한 햇살을 내려보내기도 한다. 사람도 그러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크고 화려한 것들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삶의 깊이는 대개 작은 것들 속에 숨어 있다. 짧은 안부, 따뜻한 눈빛, 조용한 기다림 같은 것들 속에.
바람이 지나가자 자운영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그 모습은 꼭 오래된 추억들이 마음속에서 동시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 살아가다 보면 사람은 수없이 흔들린다.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그리움 때문에 흔들리고, 세월 때문에 흔들린다. 하지만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운영은 바람 속에서도 끝내 꽃잎을 놓지 않았다. 연약해 보였지만 쉽게 지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꽃 앞에 서 있었다.
작은 꽃 몇 송이가 왜 이렇게 오래 마음을 붙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자운영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히 피어나 조용히 사라지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을 부드럽게 물들인다. 사람도 그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은은한 봄빛처럼 남는 삶 말이다.
들판은 햇살로 가득했다.
초록과 분홍이 뒤섞인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은 풀잎 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풍경 속에 서 있으니 마음속 먼지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은 언제나 사람보다 먼저 삶의 답을 알고 있는 듯하다. 조급해하지 말 것, 너무 높이만 바라보지 말 것,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날 것. 자운영은 그런 말을 들꽃의 언어로 전하고 있었다.
살다 보면 화려한 꽃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꽃, 세상이 알아주는 꽃. 그러나 세월은 결국 깨닫게 만든다. 오래 기억되는 것은 화려함보다 따뜻함이라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드는 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조용한 진심이라는 것을. 자운영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자기 존재를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들판 전체를 봄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은 눈부시게 푸르고, 바람은 초여름 냄새를 조금씩 품고 있었다. 계절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꽃은 피고 지고,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어떤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봄날 논두렁에서 보았던 자운영처럼, 오래전 누군가의 미소처럼, 마음 한편에 남아 조용히 살아 있는 것들.
나는 꽃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분홍빛 작은 꽃들이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이 아직은 따뜻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운 날에도 결국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이런 풍경인지도 모른다. 이름 없는 꽃 한 송이, 햇살 한 줄기, 바람 한 점 같은 것들.
자운영 필 무렵이면 사람의 마음도 조금 부드러워진다.
각박했던 마음에도 연분홍 빛이 스며들고, 잊고 있던 다정함이 다시 피어난다. 그래서 봄은 늘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위로를 배운다.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꽃잎 위로 노을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자운영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람도 꽃처럼 제 계절에 피어나는 것이겠지.”
그리고 문득 알 것 같았다.
지금 내 마음에도 아주 작은 자운영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