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지 - 천보산 - 칠봉산
백겁의 세월이 잠깐의 순간이라(光陰百劫一須臾)
절터 모래땅엔 잡초만 무성하네 (淨地金砂已草茂)
이끼 속 화랑에는 문도 닫히지 않았고(苔雜畵廊門不掩)
낙엽 가득한 우물엔 물 조차도 말랐네(菜塡香井水還故)
나옹화상의 공적은 진정한 고승이요(懶翁功業眞開士)
목은선생의 문장은 속된 선비 아니네(牧老文章非俗儒)
저물녘 홀로 서서 생각은 끝없는데(獨立斜陽無限思)
찬 안개 감도는 교목에 까마귀 울고 있네 (冷煙喬木有啼烏)
-백암성총(栢庵性聰)스님의 시-
*108바위 앞 천보산등산로 초입에서 발쵀했다
회엄사지 부도탑. 회엄사지는 만평쯤 된다니 얼마나 큰 대찰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내가 회암사지입구에 닿은 시각은 오전 10시 반쯤이었다.
회암사지박물관 앞에서 머뭇대다가 관람을 포기하고 회암사지로 직진한다.
초행길인 오늘 천보산과 칠봉산까지 종주하려면 시간여유가 충분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회암사지가 산자락 속의 절터 같잖은 드넓은 폐허궁궐터 같다.
드넓은 평지의 회암사는 입구에 우뚝 선 당간지주와
절 뒤쪽의 아득히 먼 부도탑이 화려하고 웅장했던 사찰의 규모를 어림잡게 한다.
화엄사지 당간지주, 깃대를 고정시키는 3개의 돌기둥의 높이는 3m를 넘는다
회암사의 영락은 안무 속에서 바위얼굴을 내밀고 있는 천보산만이 알고 있단 듯하다.
회암사는 고려 때 나옹선사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고,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머물며 왕실후원을 받다가
태조이성계가 퇴임 후 궁실을 짓고 살아 ‘왕실사찰’이 됐다.
숭유억불사상의 조선조에서 회암사가 더 융성했던 소이는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이었다.
한 땐 260여칸의 사찰경내에 3천 여명의 승려가 상주했으니 상상을 절한다.
회암사 전경
괴승으로 회자된 보우는 문정왕후의 죽음과 동시에 유생들의 탄핵으로 처형되고
사찰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암튼 왕실사찰인 회암사가 있었기에
세조와 연산군은 근처의 칠봉산과 감악산을 사냥터로 삼았을 테다.
회암사지를 일별하고 절골을 파고들어 회암사를 찾아들었다.
골짝을 흐르는 가녀린 물소리가 일상탈출의 전주곡이 된다. 고적한 산보자의 열락!
멋지게 폼 잡고 있는 소나무들 속에 암자마냥 숨어 든 회암사는,
특히 부도 밭의 아늑한 풍정은 한나절이라도 푹 머물고 싶게 한다.
무학대사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혼백이 머물고 있는 부도 밭을
오색등을 허리깨에 맨 적송들이 강강술래 춤사위를 벌리고 있어
유토피아가 이렇게 가까이 있나 싶다.
사람그림자도 없는 경내에 대웅전의 독경소리가 처연하다.
삼성각마당에서 선각왕사비에 오르고 108바위쉼터에서 배낭을 풀었다.
해찰을 너무 한 통에 정오가 다 됐다. 여기서부터 등산로는 여간 빡세다.
심심하면 인사하는 기암들을 맞느라,
그래 한 숨 돌리며 훔치는 풍경에 취해 등산삼매경에 빠진다.
바위틈에 뿌릴 박고 몸부림치는 듯한 소나무를 보면서
바위의 짝사랑을 상상해 보는 게 내가 산행 중에 즐기는 별난 맛깔이다.
사랑은 짝사랑이 참사랑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무생물인 바위의 소나무을 향한 구애는
세상을 읽는 눈과 귀동냥 땜일거란 데에 미치면 회의적이 되곤 한다.
드뎌 천보산정에 섰다. 며칠 전 올랐던 불곡산이 양주시가지를 끌고 안무 속을 향하고,
동두천시가지가 거뭇한 산 능선을 휘두른 채다.
오늘 회암사와 천보산은 송두리째 내차지인가?
황사예보 탓일까? 산님 그림자도, 숨소리도 없다.
108바위에서 정상을 오르는 된비알코스
천보산정에서 조망한 양주시, 바로 아래 공터가 희암사지
칠봉산을 향하는 하산코스는 신바람이 났다. 회암고개 다리를 건너면서 칠봉산등산로다.
육산의 칠봉산등산로는 MTB도로와 숨바꼭질하며 정상까지, 아니 끝까지 교차한다.
근디 평일이어선지 바이커 그림자도 없고 산님도 고작 두 분을 조우했다.
석봉을 지나 칠봉산정(506.1m)에 올랐다.
암송의 연애질이 볼만하고, 황룡산과 감악산마루금에 포위된 하늘이 검 튀튀 삐져 보인다.
남근바위(우)
칠봉산의 7개봉우리는 가당치도 않는 제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세조가 칠봉산을 사냥터로 사용하면서 붙은 명칭이지 싶다.
1)발리봉(發離峰) ; 왕의 사냥산행 시작지점
2)매봉(鷹峰) ; 왕이 수렵용 매를 날렸던 곳
3)깃대봉(旗臺峰 ) ; 왕이 수렵표시 깃발을 꽂은 곳
4)석봉(石峰) ; 왕이 돌이 많다고 푸념한 곳
5)투구봉(鬪具峰 ); 왕이 쉴 때 호위병들이 갑옷과 투구를 잠시 벗어 놓은 곳
6)돌봉(突峰) ; 왕이 사냥터를 뜨면서 돌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한 곳
7) 솔리봉(率離峰) ; 왕이 군사를 모아 떠날 채비를 하던 곳.
이라는 기록이 양주군지에 실려있다.
그렇게 7개의 연봉이 이어져 칠봉산이라 전해졌단다.
그 봉우리 이름만으로도 호기심 당기는 칠봉산이었다.
나는 오늘 7개의 봉우리를 밟으며 이 터무니없는 명명은
세조를 보좌하는 군졸들이 용비어천가를 부르듯 조아렸을 테고,
그래 더 나아가 어등산(御登山)이라고도 불렀다.
세조는 왕이 되려고 단종을 폐위시키고 사약을 내리며 사육신 등 수많은 인재를 죽인 냉혈한이었다.
그 업보 탈출구로 사찰을 찾고, 트라우마를 떨처내려고 사냥을 즐겼을지 모르지만
사냥은 또 하나의 살상이란 걸 간과했지 싶다.
줄곧 7봉우리 능선을 넘나드는 완만한 등산로는 트레킹하기 아주 좋았다.
칠봉산정의 벼랑바위
푹신한 육산에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암송의 동거,
그리고 나목들이 그려내는 수묵화의 전당에 흠씬 반해서다.
가식에 식상한 우린 민낯이 좋듯이 앙상한 나목들의 몸부림치는 듯한 엉킴이 새롭다.
겨울나목들이 아름답다. 여름철에 녹색의 장원을 이룰 능선을 걷는 상쾌함이라니!
또한 가을단풍이 아름다워 비단병풍을 친듯하다 해서
금병산(錦屛山.대동여지도에 표기)이라고도 한다는데 실감할 것 같았다.
칠봉산정에서 조망한 양주시가지
칠봉산 동쪽으로 하늘금을 그은 해룡산(661.2m)과 왕방산(736.4m)도 언젠간 오르리라.
내가 포천시 지행역사에 들어선 시각은 오후4시를 넘었으니
5시간 반쯤 걸려 11km이상 산속에서 노닌 셈이다.
경기북부 쪽의 산행 맛에 빠져든 나의 다음 힐링 처를 어디로 정할까?
열차에 몸뚱일 묻었다.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눈까풀을 내려닫았다.
산속의 그림들이 파노라마 친다.
산을 애인 삼은 건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라! 2021. 03 16
출처: https://pepuppy.tistory.com/1047 [깡 쌤의 내려놓고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