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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문명의 역적 - 수양대군
조선시대 500여 년간 수많은 간신, 난적이 있었으나 그 중 가장 큰 죄를 지은 만고역적이 누구인가 하면...
수양대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친 할아버지와 아 버지가 50여년에 걸쳐 쌓아놓은 역사적인 공로를 순식간에 짓밟아 회복
불능의 난신이 설쳐대는 불쌍한 사대속국 臣權 국가으로 만들었다.
조선 건국의 명분인 금척역학에 의한 고조선의 부활을 커녕 윤리보다는 폭력과 살육이 절대시되는 禽獸의 나 라를만들었다.
세종대왕인 아버지의 유언을 완전히 뒤집은 패윤적인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아버지가 ‘이들은 내가 인정하는 현숙한 여인들이니 어머니처럼 여겨라.
하는 유언을 남긴 계모 3명 중 두 여인(영빈강씨, 혜빈양씨) 을 처참하게 죽였고 아버 지가 받아들인 형님의 정실부인인 현덕
왕후 무덤을 파헤쳤으며 아버지 유언을 바르게 따르던명신들을 대부분 죽이니 아버지 세종대왕과는 철천지원수인 셈이다.
그러니 아버지를 따르던 올바른 신하들은 반항하다 죽거나 떠나버려 자신의 쿠데타 세력이나 반항 못하는 띨띨한 넘들의
세상이 되게 하였다. 똑똑한 동생은 반란 죄를 씌어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그 아내 와 딸들은 쿠테타 동지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었다.
어린 조카를 강제결혼시켰다가 폐위시켜 멀리 내쫒았다가 피살하고 여조카 시댁까지 몰살하여형님의 씨를 말렸다.
동생5명 등 친척, 외척, 충신 가족등 250여명을 학살했다.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귀양 보낸 동생이 반역했다는 보고를 받자 현재 경북영주군 순흥면일대 주민을 모두학살하여 일대를 폐허로만들기도 하였다.
나아가 단지 아버지 유언을 충실히 따랐던 신하들을 죽인데 그치지 않고 정절 은 최고미덕 으로 아는 그들의 아내와 어린 딸들을 세트로 한 남자에게 진상하는 등 그녀들을 친구들의 성 노리개 감으로 선물했다.
그 만고역적 놈의 이름은 李嚅 이고 왕자 때는 수양대군으로 불렸으며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천벌을 받아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차례로 죽고, 임금다운 짓은 거의 못하고 등신 같은 짓만 하다가 병들어 일찍 죽으니(그래도 13년이나 했네) 후대에 세조라는 거창한이름을 붙었다. 그의 초고의 참모인 한명회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결국에는 부관 참시를 당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넘의 호인 압구정의 이름은 우리나라의 부를 상징하는 강남동네의 동이름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도 그 넘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꾸준히 자손인 왕실에 도전하니 결국 200여년 후 숙종 임금 때
명예회복이 시작되고 영조 임금 때는 수양대군의 행동이 쿠데타이었으며 죽은 조카 단종이 정식 왕이요 사육신 등이 충신이라고 확정하였다.
매국의 역적질
수양대군의 역적질은 본질적으로 매국의 역적질이다.
명나라 환관의 지휘에 따라 꼭두각시 들러리 선, 완전히 명나라를 위한 역적질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인들은 수양대군의 만고의 역적질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즉 수양대군의 역적질이 사실은 왕권 강회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수양대군의 만고역적반란은 순간적인 욕심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된 것임이 명백하다.
인테넷이나 역사교과서 등에서는 양비론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어린단종이 사리사욕에 만연된 귀족들의 남행을 바로 잡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필요 악으로 강변하는데 편들고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과 그 배후세력과 지지자들의 행동거지를 추적해보면 그들은 이매 세종대왕의 정치자체를 거세하려고 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정치와는 이해관계상 화해할 수가 없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고.. 세종대왕의 정치자체를 부정하고 폐지하려는 목적으로 치말하게 준비하고 자행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종대왕의 정치는 한마디로 고조선의 영광을 재연하는 것이다.
고조선의 영광을 재연하기위해서는 고조선의 역학이 부활해야하고 그역학에 근거한 정치철학이 올바르게 정리되어야한다.
고조선의 정치철학이 뭔가?
이화 홍익이다.
이화홍익이 무엇인가?
고조선의 역학을 바로 익히고 그에 의하여 과학기술력을 높이고 이를 응용하여 백성들이 경제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하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역성혁명한 한 명분이 무엇인가?
바로 곶선의 영광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조와 그의 자제분들은 역학에 아는바가 별로 었었다
군바리출신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었다.
그들도 이러한 사정을 잘인식하였다.
그래서
보다 현명한 세자의 출현을 오매불망 희망하였다.
마침 그 희망이 나타난 것이었다 바로 세종대왕의 출현이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고조선의 영광을 재연하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님을 잘알고 장기전략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세자 이향을 충분하게 준비된 군주로 교육시키기를 바란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작업을 수행한다.
성균관에 입학하게 하고 첨사원을 만들어서 배우고 익히는 것을 잘 하게 하고
특히 집현전을 건립한 것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영해박씨의 후손들을 편저에 들게하여 황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명나라의 국기를 흔드는 속국의 반란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조선도 고려와 같이 명나라의 속국이었다. 이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신하들 중에는 간첩질을 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세종대왕의 일거수를 명나라의 환관들에게 보고하는 첩보망이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문종의 석연치 않는 죽음
뒤를 이은 문종은 왕위에 오른지 2년 4개월만에 죽어버리니 바로 왕실의 기강
도 흔들리게 되었다. 문종의 아들 단종은 수렴청정을 해줄 어머니나 할머니도 없었다.
어머니현덕왕후는 단종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정부의 삼정승인 황보인, 김종서, 정본이 단종을 보위해야 했다. 이 중에서도 좌의정 김종서가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보는데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세조, 수양대군이었다.
본래세종은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자 국정에서 손을 떼면서 왕실의 종친들을 조정에 대거 등용했다. 이는 점차 세종 때에 불어난 공신들의 권력을견제하고자 의도한 바였다. 그러한 종친들이 도리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실을보호한다는명목으로 권력을 움켜쥐려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수양대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권력을 더 키우고자 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그러한 상황을 보다못해서 단종을 페위시키고 왕권강화를 위해서 단종을 페위시키고 자신이 나섯다는 시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시야를 크게 보면 이미 수양대군의 배후에는 명나라의 보이지 않는 든든한 백이 있었던 것이다.
즉 명나라에서는 이미 세종대왕의 고조선의 부활 종치를 우려했던 것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고조선 부활정치를 전개한 것이었다.
즉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만들어서 천상열차 분야지도라든가 칠정산내외편 의 책력의 부활과 고조선 시대의 수글자인 정음의 창제 측우기, 개발, 앙부일구, 신기전 이향이 화차 등등을 구체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음악에서는 아악의 정리 농사직설 의방유취 등의 중국 미신적인 황제내경과 단절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셎오대왕의 이러한 정치는 매우 우려를 한 것이고 조선의 황실에 대한 점탐을 위해서 환단 들을 신속하게 파견하고 세종의 정치에 다해여 제동을 걸고자 최만리등과같은 귀족들을 규합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이를 수행할 적임자임을 파악하고 수양대군을 적극 지원한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일찍부터 장자인 이향을 고조선의 부활을 실제 재연할 능력을 갖춘 성군으로 키우고자 무진 애를 썼다
즉 이향으로 하여금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한 것이라든지
첨사원을 설치하여 이른시기부터 국사일에 경험을 쌓게 하다든지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환단 역학의 전승가문인 영해빡씨의 문중을 황실가까이 하게 하여 이향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소통하고 이향의 교육을 담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금척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묘역을 잘 관리하게 하였다.
영해박씨는 그에 대하 보답을 매우 중요한 일을 담당하게된다.
이향은 이들의 도움으로 고조선의 부활을 착실하게 수행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이를 점탐한 수양대군과 그 세력들은 문종을 제거하는 묘략을 꾸미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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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문종의 요절이 아쉬운 이유는 그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왕재였기 때문이다.
태종 14년에 태어나 37세가 될 때까지 문종은 왕위 계승을 준비 했는데
30세 부터 국정에 참여했다.
그런데 문종의 건강에 그림자가 엄습한다.
사실 세종은 임종 직전까지 문종의 건강을 염려 했다
문종의고질은 종기였다. 집권 2년차인 1452년 5월 5일, 종기는 문종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
때마침 일본 사신들이 한양에 도착했는데, 종기 때문에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대신들이 경복궁 사정전에 모였다.
어의 전순의가 왕을 진단한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종기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는 조금 덜하셨고 농즙(고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콩죽을 드렸드니 성상께서 기뻐하시면서
‘음식 맛을 조금 알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전순의는 세종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다.
천인 출신으로,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의 병을 낫게 하자 세종이 그에게 옷을 하사했다.
그는 [의방유취] 발간에 기여하기도 했다.
세종은 전순의를 대마도로 보내 일본 의술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했다.
한마디로 전순의는 내의원의 간판어의였다.
한편 전순의는 세종에게 처벌받은 적도 있다.
세종은 숨지기 석달 전인 1449년 12월, 황보인 정인지 등을 불러
‘내의 전순의 등은 동궁(문종)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삼가지 않았으니
참상(종6품)의 직첩을 빼앗고 조교(종9품)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삼가지 않는다’는 말은 의서 처방대로 치료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종은 부하들이 더 강한 처벌을 내리자고 주장했지만 직급만을 강등시킨채
세상을 떴다. 그런 전순의를 복직시킨 왕이 바로 문종이니 묘한 인연이다.
문종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 전순의에게 안마를 하사했다.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밀성군 이침의 병을 완쾌시킨 데
따른 포상이었다.
이처럼 어린아이의 병은 잘 고치던 전순의가 자신을 돌봐준 문종의 병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1452년 5월6일, 문종의 세자(단종)은 아버지의 괘차를 위해 신하들을 명산대천으로 보내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강맹경과 함께 지금의 돈암동에있는 흥천사로 갔다.
문종의 병 수발과 치료의 총책임은 도승지인 강맹경의 몫이었다.
5월14일, 상황이 급변했다. 성상의 병세가 위급해졌다는 전갈이 퍼지자
수양대군,안평대군,도승지 강맹경, 전순의 등이 그제야 [의방유취]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문종의 병은 예나 지금이나 종기였는데, 상태가 악화되어서야 의서를 펼쳐놓고 약을 찾았다.
다른 대신들에게는 임금이 위급하다는 연략을 하지 않았다.
문종실록에는 문종의 죽음과 관련해 의문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무릇 의료에 관한 모든 일과 기도하는 모든 일은 강맹경이
두 대군에게 여쭌 후 두 대군의 말을 받아 의정부에 고한 후 시행한다(문종실록2년 5월14일)
열두살 세자를 제치고 문종의 두 동생인 장성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치료를 주도했다는 뜻이다.
조선은 종친의 정치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며칠 전까지 두 대군과 함께 왕이 쾌차 한다던 어의 전순의가 의서를
뒤지는 사이 문종은 그날 오후 5시 강녕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종 때는 어의들이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이번에는 증세의 경중도 말하지 않고 쓰는 약도 대신들에게 묻지 않았다.
사흘 뒤 의금부는 강력 처벌을 주청했다.
“전순의는 주범이니 중하게 처벌해 목을 베고, 변한산과 최읍은 종범이니
장 100대에 유배 3000 리에 처하소서”
단종은 전순의의 목을 베는 대신 전의감 청지기로 직을 낮췄고,변한산과 최읍은
두사람은 아전으로강등시켰다.
도승지 강맹경은 단종에게 “양사의 언관들을 꾸짖으라”고 권했다.
선왕의 죽음의 의혹이 있으면 낱낱이 밝히는 게 원칙인 데 오히려 언관들을 비판하는 것은 도승지로서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단종은 전순의 등을 모두 복직시켰다.
이에 사헌부가 전순의의 복직에는 문제가 있다며 문종의 죽음을 재조사하고
나섰는데 놀라운 사실들이 뒤늦게 드러났다.
“허리 위의 종기에서 가장 기피하는 것이 몸을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입니다.
전순의는 문종께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구운 꿩고기를 기피하지 않고
올렸습니다. 종기의 고름이 짙어지면 침으로 찌를 수 있으나 짙어지지 않으면
찌를 수 없는 데, 전순의가 침으로 찌르자고 고집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문종 암살의혹사건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다시 미궁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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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만도 못한 만행
야심 넘치는 수양대군에게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한 역할을 옆에서 충실히 행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한명회다.
한명회는 하도 인물됨이 못생겨서 칠삭둥이라고놀림당했다.
머리도 커서 대갈장군이라는 꼬리표가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의 인물됨을 넘어비상한 머리를 눈여겨본 수양대군은 그를문객으로 삼았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왕위를찬탈하는데 방해되는 김종서를 없애기 로 결정한다.
이 거사를 이른바 ‘계유정난’이라고 부른다. 그는 단종에게 김종서가 역모를꾀한다는 누명을 씌우고 자신이 김종서를 살해한 경위를 합리화시켰다.
단종은 이 모든 행위를 수양대군이꾸민 것임을 직감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종은 슬슬 수양대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어서 그에게 양위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마침내 양위하고자신은 상왕으로 남게 됐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조정의 대신들 가운데 단종을 끝까지호위하여 복위시키려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은 죽음으로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사육신으로 남았다.
세조는 그의 왕권을 공고히하기 위해 조카 단종을 죽여야 했다. 세조실록에는 단종 스스로 목을 매 죽은것으로 나오지만 쉽사리 전부 다 믿어지지는않는다. 야사에서는 사약을 먹기 거부하는 단종을 끝내 뒤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는 설이 널리 퍼졌다. 세조는 태종의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왕권에 집착했다. 특히 명분도 없었던 그가 왕위를 찬탈하기까지 그를 도운 공신들의 힘이 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세조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정지해 언로를 제한했다. 고조선의 역사에관한 저술서들을 모조리 수거하였다. 그리고 이를 소지하거나 슴기는 자들은 모조리 참형에 처하고 연좌제를 실시하였다. 특히 오늘날 공산당의 감시망이라고 하는 상징으로 불리어진다. 오가작통법을 한명회로 하여금 철저히 수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저항에 밀려서 성종이후에는 광범위하게 정착이 된다. 오가작통법을실시해 백성들의 생활을 더 통제하기시작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법을 정비하는데 할애했다. 누구보다 체계적인 법의 필요성을절감했다. 그는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법과 정치 내용을 정리한 국조보감과 역사서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세조와 태종의 차이점은 공신에 대한 대우였다. 태종은 철저히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왕권 확립을 성공적으로해냈다. 그러나 세조는 공신의 지지 없이는 왕실의명분을 지키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만큼 공신의힘이 더 컸고 애초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데 큰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공신 가운데 홍윤성은말을 타고 지나가다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일 만큼 희대의 악명을 떨쳤다. 계유정난의 주인공인 정난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점차 조선은 백성들을 위한 나라가 아닌 그들만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수양대군이 1453년 왕위찬탈을 위해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임 정통성이 없는세조가한 일이란 고조선의 부활을 철저하게 막는 일이 가장 우선이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 유지하기 위하여 친왕세력을 확보와 관리였다. 수백여 명의 정난.좌익공신 책봉, 2,200여 명의 원종공신 의 책봉, 功臣會盟 등이 그것이다. 안평대군. 금성대군과 단종을 죽인 그는 남은 종친들 과 친화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었고 동조세력인 공신들과 친화하는 것이 왕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세조는 종친. 공신들을 불러 향연,활쏘기, 사냥에 그들을 참석시켜 친화를 다졌다. 나아가 소위 공신에게는 국가 경사, 내우외환 평정, 나라에 큰 행사 등을 계기로 아들, 아우, 사위, 조카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더해주었다. 이런 여러 계층에 대한 환심을 사기 위한 일은 재정 을 바닥나게 하여 백성의 생활고를 가져오고 왕실 재정도 피폐해져갔다. 한명회, 신숙주의 재산은 임금보다도 많았다. 그는 즉위 초부터 말년까지 자주 종친. 공신등과 음주 파티 장을마련하여 술을 마시길 권장하였다. 왕위찬탈에 따른 백성의 싸늘한 눈초리, 늘 아버지 세종의 환영이 보이는죄책감, 공직자들은 죽지도(사육신), 사표 던 지지도 못하고(생육신) 조정에 머물러있는 부끄러움에 고개 숙였다. 세종시절 유능 하고 뛰어난 인물로 채워졌던 조정 인물들은 이제 바보들로 채워진다.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절의있는 관리들이 처형되거나 사표를 내고 떠나버린 곳에 세종시절 궁궐안으로 발 들여놓지 못하던 양령대군, 계양군 등 못난 종친들이 무상출입하고, 세종때 미운오리였던 사위 안맹담, 황희가 제발벼슬하지 말라던 아들 황 수신등 도저히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넘쳐난다. 군신간의 경색된 분위기는 술을 필요로 했고 술은 그렇지 않아도 부도덕한 왕과 살아남은 종친. 신하들을 더 타락하게 했다. 술로 인하여 왕과 신하가 모두 실수. 실례하거나, 죽고, 술 중독이 되어 곤욕을당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신하는 왕에게너라고 부르고 왕은 신하에게 스와핑을 제안하며 만류하는 대신을 하인을 시켜 폭행하기도 한다. 술 취한 공신들은 유부녀를 겁탈하기도하고 남의 재산을약탈해도 역시 술 취한 왕은 눈감고 있었다. 결국 정통성 없는 세조정권은 술에 찌든나라를 만들었다 아버지 세종이 수십 년 동안 김종서 등을 시켜 완성한 북방 국경도 개판이 되었다. 지방 군민에 의해 유지되던 자주국방 개념을 반란이 두려워중앙에서 파견한 중앙군에만 의존하자니 강력하던 국경 부근의 사군 육진은 폐지되어 늘 만주오랑캐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힘없는 조정에서는 그들의 노략질을뇌물로 달랬고 백성들은 죽어갔으며 늘 당하다가 한 두 번의 정벌이 고작이었다. 당시 공신들, 남은 종친들은 프리**를 엄청 즐겼다. 늘 술로 살았으니 여자도 필요했으리라. 기생 으로는 부족하여 처녀들도 징발하고 시집가는 여자를 잡아가서 첩으로 삼는 공신도 있었다. 단종비등 감히 넘겨보지 못하던 여자가 노비로 되면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였다. 실록에 기록된 사육신등 충신들 가족 여인들의 수난 기록을 아래에 첨가한다 당 시 공신들의 부도덕함이 극치에 달했으니 이들에 끌려간 여인들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는 스스로 짐작 하기 바란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난신에 연좌된 부녀 내에 이소동의 아내 천비, 이공회의 아내 동이, 심상좌의 아내 미비을 개·딸 계금은 계양군 이증에게 주고, 이담의 아내 소사, 박기년의 아내 무작 지, 이오의 딸 평동, 이유기의 누이 효전 은 익현군 이관에게 주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딸 내 은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 에게 주고, 조청로의 어미덕경·아내 노비, 최득지의 아내 막덕, 이현로의 첩의 딸 이생은 좌의정 한확에게 주고, 이현로의 아내 소사, 민보창의 아내두다비, 김유덕의 아내 금음이·딸 옥시 는 우의정 이사철에게 주고, 성삼문의 아내 차산·딸 효옥, 이승로의 누이자근아지는 운성 부원군 박종우 에게 주고, 황보흠의 아내 석 을금, 박쟁의 아내 오덕·딸. 효비는 좌찬성 윤사로에 게주고, 이유기의 아내 설비·딸 가구지·말비·막금, 성삼고의 아내 사금 및 한살된 딸은 우찬성 정창손에게 주고, 이승윤의 아내 가은비, 지화의 아내 막금은 파평군 윤암에게 주고, 이휘의 아내 열비, 허조의 아내 안비·딸 의덕은 전 판중추원사 이계전에게 주고, 이자 원의 아내 유나매, 이개의 아내 가지 우참찬 강맹경에게 주고, 이윤원의 첩 분비, 이경유의 아내 효생은 판중추원사 이징석에게 주고, 박인년의 아내 내은비, 정효강의 아내 보배는 화천군 권공에게 주고, 원구의 아내 소사, 고덕칭의 아내 보금· 딸 신금은 우참찬 황수신에게 주고, 이해의 아내 종금·딸 불덕·불비, 김유덕의 누이 막장은 예조 판서 박중손에게 주고, 최면의 누이 선비, 조완규의 아내 소사·딸 요문은 병조 판서 신숙주에게 주고, 이석정의 아내 소사, 권자신의 아내 어둔·딸 구덕은 중추 원사 권준에게 주고, 안평대군의 아들 우직의 아내 오대, 김현석 의 아내 영금은 이조 판서 권남에게주고, 윤영손의 아내 탑이·딸 효도, 이 반경의 첩 막생은 중추원 사 박강에게 주 고, 김문기의 딸 종산, 최득지의 첩 지장비는 대사헌 최항에게 주고, 성삼성의 아내 명수, 정효강의 아내 효도·딸 산비는 병조 참판 홍달손에게 주고, 성맹첨의 아내 현비, 최사우의 첩 옥금은 판내시부사 전균에게 주고, 3개월간(1455. 6.∼1468. 9.)의 역사를 기록한 책.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심신의 아내 석정·딸 금정· 은정, 성승의 아내 미치는 계림군 이흥상에게 주고, 이의영의 아내 효생, 조극관의 아내 현이는 도절제사 양정에게 주고, 박순의 아내 옥덕, 박헌의 아내 경비는 이조 참판 구치 관에게 주고, 송창의 아내 소앙지, 황보석의 아내 소사는 전 예문 제학 윤사윤에게 주고, 이말생의 아내 관저·딸 경비, 김문기의 아내 봉비는 도절제사 유수에게 주고, 박대년의 아내 정수, 송석동의 아내 소사는 동지중추원사 봉석주에게 주고, 김승규의 딸 숙희, 권저의 어미 보음미는 동지중추원사 강곤에게 주고, 박계우의 아내 소비, 김승벽의 아내 효의는 예조 참판 홍윤성에게 주고, 유성원의 아내 미치·딸 백대, 이명민의 아내 맹비는 좌승지 한명회에게 주고, 황선보의 아내 복중·딸 덕비는 우승지 조석문에게 주고, 이호의 아내 개질지·딸 목금은 첨지 중추원사 유하에게 주고, 윤처공의 딸 숙비, 정원석의 아내 만금은 이조 참의 원효연에게 주고, 최치지의 아내 미치, 최윤석의 아내 봉비는 단천 군수 최유에게 주고, 황선보의 누이 소사, 이유기의 딸 소근소사는 형조 참의 황효원에게 주고, 조번의 아내 소사·딸 의정, 황의헌의 아내 복비는 병조 참의 한종손에게 주고, 원구의 누이 심이, 조완규의 딸 가이는 좌부승지 윤자운에게 주고, 윤위의 아내 소사, 정관의 아내 신경은 우부승지 한계미에게 주고, 이의산의 딸 소사·막금은 경상도 관찰사 조효문에게 주고, 이정상의 아내 삼비·딸 현비·정비, 최득지의 아내 마배는 겸 판통례문사 이극배에게 주고, 윤경의 아내 소사, 성삼빙의 아내 의정은 판종부시사 권개에게 주고, 봉여해의 어미 소비·아내 정순은상호군 유서 에게 주고, 민보흥의 아내 석비, 이윤원의 아내 대비는 판군기감사김질에게 주고, 대정의 아내 자근, 하위지의 아내 귀금·딸 목금은 지병조사 권언에게 주고, 이보인의 아내 물재·딸 옥석은 성균 사성 정수충에게 주고, 조완규의 누이 정정, 최사우의 어미 소사는 상호군 유사에게 주고, 식배의 딸 귀비·귀장·귀금·소근비, 유응부의 아내 약비는 예빈시 윤 권반에게 주고, 민신의 아내 우비·딸 산비는 대호군 안경손에게 주고, 이지영의 어미 석을금·아내 종비·딸 은비는 대호군 홍순로에게 주고, 송녕의 아내 소사, 권저의 첩 복가이는 대호군 조득림에게 주고, 김감의 첩 귀덕·딸 소비, 이양의 아내 월비는 대호군 이극감에게 주고, 중은의 누이 귀덕·딸 귀비, 장귀남의 누이 말비는 직예문관 유자황에게 주고, 정분의 아내 순비, 이석정의 첩 말생·딸 감물은 대호군 임자번에게 주고, 대정의 어미 내은이, 김감의 아내 소사·딸 복금·말금·아지는 전 호군 김처의에게 주고, 최면의 어미 소사·아내 점물아지·딸 부허 비는 사복 소윤 한서귀에게 주고, 최치 지의 아내 덕비·딸 백이는 전농 소윤 송익손에게 주고, 이승로의 아내 효정·딸 숙화, 이오의 아내 소질지는 군기 부정 설계조에게 주고, 이의산의 아내 참군·딸 아을금 은 사재 부정 권경에게 주고, 정관의 어미 소사, 장귀남의 누이 학비는 군기 부정 홍순손 에게 주고, 허조의 어미 화산·누이 소근소사는 겸 군기부정 곽연성에게 주고, 권저의 아내 계비·딸 순비는 호군 최윤에게 주고, 순생의 아내 가질비, 김선지의 아내 내은이· 딸 가야지는 전 부사직 이몽가에게 주고, 이석정의 딸 감상, 최면의 누이 막비는 도승지 박원형 에게 주라.”하였다. ◆ 그 넘의 공적이 크다고 말하는 이상한 이들도 많다. 공적의 예로서 육조 직계제, 호패법,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등을 든다. 그러나그런 일들이 자신과 공신들은 좋을지몰라도,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도 반길일이 없다. (호패법은 지 여편네가 폐지함)그리고 이런 것을 그의 업적 이라 해도 단종이왕으로 있으면 못했을 그만의 특출한 업적인가? 그의 업적이 출중하다 하려면 그 넘 에게는 절대 왕위를 줄 수 없다고 한 세종대왕보다업적이 더 뛰어나야한다. 그런 엄청난매우 좋은 소위세조의 업적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진짜 알고 싶다. |
★세조의 정비 女帝 정희왕후
(貞熹王后, 1418-1483)
조선 7대왕 세조왕비인정희왕후 (貞熹王后,1418~1483)는 파평윤씨로 영의정을 지낸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태어났다.
슬하에의경세자(덕종), 해양대군(예종)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는데 장남덕종이요절하고 차남 예종이 19세로 즉위
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고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의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승하하자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원손으로 있었으나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나서 '원자(제안대군)는
너무 어리고, 월산군(의경세자 장남)은 병치레가 많으니 자을산군(차남)으로 대통을 잇게하자' 하여 성종을 즉위 시킨
후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따지고 보면 계유정난 때 거사가 누설되어 망설이던 세조에게 갑옷을내어주며 독려했던 일이나아들과 손자 두 차례의
섭정에서 보듯이 1483년(성종14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힘은 생전의 세조만큼이나 기세등등하여 그녀를 女帝라고도 부른다.
남편을 조카의 자리를 빼앗아왕으로 만들고 아들(예종)과 손자(성종)의 수렴청정까지...
그녀는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혼맥을 통한 인맥을 구축한다.
정인지 아들을 사위로 삼고, 당대의 실세 한확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니 그가 의경세자비 소혜왕후 한씨로 나중에 인수대비
라 불리우게 되며, 작은아들 해양대군(예종)과는 한명회의 셋째 딸을 혼인 시키니 장순왕후이며,손자며느리로
한명회의 넷째 딸을 맞이하니 성종 비 공혜왕후이다.그녀는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예종은 병약하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하면서 왕위찬탈을 우려하여 이에 대비하는 마음으로한명회와결탁하여 왕권을 지키기로 한 것이며 한명회는보다 더 큰 세도와 세력을 원하였기에 딸2명을 왕비로 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덕종(德宗), 요절한 의경세자를 추존하여 붙인 묘호가 덕종이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이자신의 생부인 의경세자를 추존 한 것인데 효성이 지극해서 일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할머니 정희왕
후가 자기 큰 아들을 세자에서 왕으로 격상 시킨 것이다.이로써 성종은 요절한 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왕의 아들이 됨으로써 정
통성이 확립되었다.세조와 정희왕후부부의 인간적인 슬픔 이들 부부는 대군과군부인에서 국왕과 왕후의 반열에
올라 이후 조선의 임금을 이들자손들이 이어가게 되면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행복했을까?장남 의경세자는스무살에 요절하였고 (후일 덕종으로추존), 둘째아들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어맞이한 세자빈 장순왕후 (한명회 셋째 딸)는 원손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죽고 원손도 어미를 따라 갔다. 해양대군은 왕위에 올랐으나(예종) 14개월만인 스무살에 죽고 만다.
다시 의경세자의 차남자을산군을 왕위에 세웠으나(성종) 원비 공혜왕후 (한명회 넷째딸)이 18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둘과 며느리,손주며느리가 모두 스물도 못되어 요절을하고 마는 내력을 보면서결코 그렇다고 할수는 없을것이다.
성종의 그 다음 왕비(세조의 손주며느리)가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인데 이 폐비 윤씨로 말미암아 조선임금 중최초로 왕위에서 쫓겨나는 이가 연산군이다.그는 자신을 나무라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결국 돌아가시게 하였으며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겁탈하여 자결케하므로써 그 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의선봉이 되었다니 참으로아이러니 한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