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용순 | 날짜 : 13-12-06 09:23 조회 : 1903 |
| | | 수종사에 올라 운길산의 가을이 농밀하다. 나무들은 화려한 옷을 훌훌 벗어 던지며 알몸으로 억센 동장군(冬將軍)을 맞으려 하고 있다. 가파른 포도(鋪道)에 거친 숨을 쏟으며 오르기를 40여분, 일주문에 걸린 ‘운길산 수종사’라는 편액이 보이고 낭랑한 염불 소리가 낙엽 사이로 스민다. 뒤따라 큰 키에 육중한 화강암 미륵부처님이 미소를 머금고 마중을 나와 계신다. 부처님 발아래에는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인이 고개를 숙여 합장하고 있다. 좌대 위의 양초들은 백팔가지 번뇌로 괴로워하는 중생들의 구원을 기원하며 굵은 몸을 태우고 있었다. 원초적인 번뇌와 외로움을 안고 태어나는 중생들, 더불어 세상살이의 상처까지 한 가슴 가득 채우고 있다. 나도 마음을 가지런히 모아 보려 하였으나 산 아래서의 추어탕 비린내를 씻어내지 못하여 다가서기가 민망하다.
비탈진 계단에 내려앉은 낙엽을 밟으며 무겁게 오르니 불이문(不二門, 둘이 아닌 문?)이 선문(禪問)을 던지며 들어오라고 한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생(生)과 사(死)가 하나라고 일깨운다. 불이(不二)를 알면 부처에 이를 수 있다하였으나 어리석은 중생들은 죽을 때까지 깨닫기가 힘들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와, 어려운 화두(話頭)를 얻는다.
절벽아래, 그 다음 절벽 위에 걸터앉은 수종사(水鐘寺)가 조심스럽다. 한 뼘 땅 끝에 앉아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가을볕이 좁은 뜰 안에 머물고 대웅전을 나선 목탁소리가 정겹다. 한복을 정갈하게 입은 젊은 여인이 시선을 끌며, 약사전을 거쳐 산신각으로 들어선다. 응진전 처마 끝, 풍경(風磬)은 살짝이 건드리는 가을바람에도 맑고 영롱한 노래를 부른다. 종 끝에 매달린 물고기는 두물머리, 큰물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헤엄치는 꿈을 꾸느라 두 눈을 감지 못한다. 수종사 뜰에서는 참배객들도 붉은 풍경이 된다.
천길 발아래에는,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찬탄하여 마지않았던 풍광(風光)이 아련한 물안개 속에서 선계(仙界)와 같은 자태를 들어낸다. 일찍이 조선의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은 ‘동방의 사찰 중 최고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다. 붉은 산 사이로 보이는 두물머리는 보는 이를 무아(無我)로 이끌어 일상의 고뇌를 잊게 만든다. 어느 동화나라의 하루처럼 두 줄기의 강물과 긴 다리, 그 위로 천천히 가고 있는 자동차들, 모두가 여유롭고 신비롭게 보인다. 태백산에서 흘러온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황급히 달려온 북한강이 드디어 이곳에서 만난다. 두 물은 팔당에 신방을 차리고 내밀히 몸을 섞어 마침내 한 물, 한강(漢江)이 되는 것이다. 그 근원이 신라, 고려와 닿아있는 수종사는 조계종 봉선사의 말사이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북한강을 따라 내려오던 세조가 이곳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아, 절을 중창하고 수종사(水鐘寺)라 하였다한다.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는 불과 13년 밖에 누리지 못할, 왕권을 탐하여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심지어 두 동생과 어린 조카까지 죽였다. 그 죄업을 씻고 번뇌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세우고 불경을 간행하였다. 수종사 중창도 그 시기였다. 그보다 먼저, 무슨 연유인지 불교에 귀의한 태종의 딸, 정의옹주의 부도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해탈문을 지나면 중창 당시 세조가 심었다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인간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550여년이란 나이를 당당히 밝히고 있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고작 몇 년 더 살아 보겠다고 숨을 헉헉거리며 힘겹게 이곳까지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이 비탈에 서서 세월에 따라 바뀌는 군상(群像)들을 지켜보면서 몇 백 년을 버티는데, 해탈문을 지나고도 해탈하지 못한 인간들은 백골조차 남기지 못한다.
수종사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하여, 시(詩)와 그림을 남겼다.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다산을 비롯하여 이덕형, 서거정, 이이, 김종직 등과 다선(茶仙) 초의선사도 인연이 깊다.
수종사를 노닐며/ 다산 정약용 담쟁이 험한 비탈 끼고 우거져/ 절간으로 드나드는 길 분명 찮은데 응달에는 묵은 눈 쌓여 있고/ 물가엔 아침 안개 떨어지누나 샘물은 돌기둥에 솟아오르고/ 종소리 숲속에서 울려 퍼지네 유람길 예서부터 두루 밟지만/ 돌아올 기약 어찌 다시 그르칠 수야 노년에 수종사 아랫마을 사제촌에 별서(別墅)를 짓고 살았던 한음 이덕형 선생이 수종사 주지 덕인스님이 찾아와, 남긴 시이다.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 앞개울 얼어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 만첩청산에 쌍련대 매었네 늘그막에 한가로움 누려봄직 하련만 수종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다실(茶室), 삼정헌 창가에 앉으면 통 창밖으로 두물머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약수로 끊여내는 녹차를 맛보려 항상 객(客)들로 넘친다. 두 물이 만나는 선경(仙境)은 잡다한 생각들을 잊게 하고, 따뜻한 녹차 향은 수종(水鐘)소리처럼 몸과 마음에 울려 퍼진다. 삼정헌은 나(我)와 시(詩), 선(禪), 차(茶), 그 모두가 불이(不二), 하나가 되게 하는 선계(仙界)이다. |
| 김권섭 | 13-12-06 16:46 | |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종소리 같아, 절을 水鐘寺라 했다는 절이어서 그런지 풍광이 절경이고 환상적입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묵객이 흔적을 남겨 놓은 절 가히 찬탄의 사찰, 가보고 싶습니다. 훌륭한 글 잘 감상했습니다. | |
| | 김용순 | 13-12-07 09:13 | | 김권섭 선생님, 수종사는 신라시대에 세워 졌는데, 페허가 된 고찰을 세조가 중창하였다 합니다. 양수리를 내려다 보는 전망이 일품입니다. 한양 도읍과 가까워 예부터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아 온 모양입니다. 언제 시간 나시면 한 번 가 보십시요. 감사합니다. | |
| | 일만성철용 | 13-12-06 19:39 | | 저도 수종사에 올라 그 여행기에 시 한 수를 남겼는데, 모 문인사이트가 문을 닫는 바람에 제글도 없어졌네요. 가시던 길에 운길산도 보시지 그랫어요. 한 20분 오르면 되는데-. | |
| | 김용순 | 13-12-07 09:17 | | 일만 선생님, 수려한 풍광에 감탄하여 시 한 수 지어셨던 모양입니다. 운길산 정상은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언제 한 번 올라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강승택 | 13-12-06 19:49 | | 운길산을 지나 수종사에 이르는 김선생님의 산행이 푸른 가을하늘처럼 청정해보입니다. 언제쯤 우리는 모든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새삼 을씨년스러워보이는 요즈음입니다. | |
| | 김용순 | 13-12-07 09:20 | | 강선생님, 그렇습니다. 벌써 금년도 다 갔습니다. 요즈음은 하루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 가는 것이 삶이 겠지요. | |
| | 임재문 | 13-12-07 00:35 | | 늦가을의 정취가 베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산사의 나라는 항상 그렇게 마음비우고 해탈하여 살라는 것만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순 선생님 ! | |
| | 김용순 | 13-12-07 09:22 | | 임재문 선생님, 매번 이렇게 꼬박 꼬박 찾아주시니, 정말 존경 스럽습니다. 추위에 항상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 |
| | 임병식 | 13-12-07 09:30 | | 운길산에 어디쯤이고 수종사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김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니 불현듯 한번 가보고 싶어집니다. 낙엽이 지고 바람소리가 맑아지면 산사가 그리워지는데, 다산선생과 한음대감이 머물렀다니 막연하게나마 수종사가 그리워집니다. 마음을 맑게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 |
| | 김용순 | 13-12-08 08:02 | | 임병식 선생님, 수종사는 풍광도 좋지만 서울에서 가깝습니다. 남양주시와 양평군 양수리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습니다. 내려다 보는 전망이 좋아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올랐던 모양입니다. 가까운 곳에 다산의 생가가 있습니다. 언제 한 번 순례를 하십시요. 감사합니다. | |
| | 임병문 | 13-12-07 12:49 | | 草衣의 발길을 붙잡고, 秋史의 걸음을 멈추게했다는 古刹 수종사, 먼하늘 구름은 낮게 드리우고/ 잎새져 고즈넉한 고찰/ 천년 영욕의 세월을 온몸에 휘감고/ 안개속 아련한 풍경소리/ 행여 놓칠세라 바람 잘때까지/ 한참을 그리 있었네. 수종사라는 어느 시인의 詩句가 떠오릅니다. 가을 山寺를 다녀오신 선생님의 개운함과 충만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항시 건강, 건필하소서. | |
| | 김용순 | 13-12-08 08:06 | | 임선생님, 시가 참 좋습니다. 예부터 수종사에 올라, 지은 시가 수도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수없는 많은 시를 탄생시킨 수종사는 정말 속이 확 터이는 전망입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 |
| | 이방주 | 13-12-08 13:27 | | 저도 연전에 운길산을 일주했습니다. 이른 아침 운길산에 올랐는데 남한강 북한강이 합수하는 그 너른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면 과연 운길산이로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걸려있는 다산의 시 수종사 모두가 감동이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니 인간과 자연 그리고 불계가 하나로 모여 있는 그날의 느낌을 다시 받는 듯합니다. | |
| | 김용순 | 13-12-09 07:44 | | 이방주 선생님도 수종사에 가 보셨군요. 예부터 한양 도읍이 가까워 수 많은 명사들이 다녀 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김창식 | 13-12-14 19:52 | | 서정적이고 고즈넉한 운치가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김용순 선생님. | |
| | 김용순 | 13-12-15 08:08 | | 김창식 선생님, 언제 짬을 내어 올라가 보세요. 큰 사찰은 아니지만 괜찮을 것입니다.날이 많이 춥습니다. 이곳은 오늘 영하 13도, 모든 것들이 꽁꽁 얼었습니다. | |
| | 류인혜 | 13-12-15 06:17 | | 집에서 가까운 수종사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일행이 없어서 망서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나이 많은 나무들이 있다고 해서 언젠가는 나무 수필의 소재를 삼으려고 기대합니다. 선생님의 수필을 읽으며 수종사에 다녀온 듯 마음 한편에 위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김용순 | 13-12-15 08:10 | | 류인혜선생님, 그곳에 세조가 심었다는 약 550여년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습니다. 한 번 다녀오십시요. 실망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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