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 소쉬르와 피카소
자전거의 핸들이거나 황소의 뿔인 것
큐비즘을 대표하는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이미 큐비즘이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진 1940년대에 매우 흥미로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황소머리〉라는 이 작품은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을 단순하게 재배치한 물건이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머릿속에 뿔 달린 황소를 떠올리는 동시에 황소의 얼굴과 뿔이 각기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이라는 사실도 파악한다.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서 자전거의 핸들은 황소의 뿔로 보이며 안장은 황소의 얼굴로 파악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삼각형의 물체가 안장이 되는가 혹은 황소의 얼굴이 되는가가 전적으로 핸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안장은 핸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닌 기호가 된다. 그것은 핸들도 마찬가지이다. 삼각형인 물체가 안장이라는 기호가 될 수도 있고 황소 얼굴이라는 기호도 될 수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피카소, 〈황소머리〉 Tête de taureau, 1942©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 2010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자전거 핸들과 안장을 재배치한 작품.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서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으로 보이기도 하고 황소의 머리로 보이기도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소쉬르는 언어의 의미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현실이 아니라 다른 언어와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피카소 자신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사실상 피카소의 이 작품은 스위스 출신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언어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집약적이고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언어 혹은 기호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현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차별적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라는 것이 소쉬르 언어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쉬르 언어학이 지닌 근본적인 통찰을 피카소의 작품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소쉬르 이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언어가 어떤 현실 대상을 지칭하는 기호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언어관은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언어란 현실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기호이며 언어의 의미는 곧 언어가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령 ‘사과’라는 언어 기호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과라고 부르는 물체를 지칭하는 기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언어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혹은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뒤집는다. 이런 점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은 혁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언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사과라는 현실의 사물이 먼저 있고 그것을 묘사하거나 지시하기 위해서 사과라는 말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 듯하다. 세계가 먼저 있고 그 세계를 묘사하거나 재현하기 위해서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실제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 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언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두 가지 성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제3의 성은 존재하지 않을까? 오늘날 일부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두 가지 성으로 성차를 확고하게 구분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어쩌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말은 현실 속의 인간을 지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인간은 누구나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사르트르의 부인이자 유명한 페미니스트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인간이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 말 속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호가 결코 현실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기호가 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 사례가 다소 모호하게 들린다면 다음의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 중 동서남북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쪽과 서쪽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묘사하거나 지칭하기 위해서 동쪽과 서쪽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 세상 어디에도 동쪽은 없다. 서쪽을 대표하는 유럽 역시 미국에서 보면 동쪽이다. 동서남북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편의상 방향을 구분하기 위해서 나눈 임의적인 잣대에 불과하다. 만약 사방(四方)이 아닌 오방(五方)의 개념을 사용했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섯 방향으로 봤을 것이며 교차로 역시 사차로가 아닌 오차로가 되었을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지닌 혁명성은 우리의 언어가 미리 주어진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언어는 세계와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언어적 세계가 우리의 현실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인간은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햇빛의 굴절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무지개가 다섯 개의 색으로 이루어졌는지 혹은 일곱 개의 색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렇게 소쉬르의 언어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이 언어를 통해서 창조된다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란 현실세계를 수동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수단이 아닌 현실세계를 창조하는 도구인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전거의 핸들이거나 황소의 뿔인 것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