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나는 강남의 한 커피전문점에 앉아 있었다. 물론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약속시간 30분 전에 그곳에 도착했고, 나와 만날 사람은 차가 밀려서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그곳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나는 도합 한 시간을 쓸쓸하고 한적한 강남의 한 커피전문점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교통체증이 심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시간을 넉넉히 잡아 출발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으며, 상대방은 평소에 늘 다니던 길이라 얼마쯤 걸릴 것이라는 정확한 계산으로 출발했는데 뜻밖에 길이 막혀서 계산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것뿐이었다.
살다보면 그런 엇갈림은 아주 흔한 것이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홀로 앉아 있었던 한 시간,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동안에 나는 정녕코 이해할 수 없는 풍경 하나를 만났다. 도무지 해독이 안 되는 그 여자...
그 여자들은 나보다 먼저 커피전문점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손님은 창가에 앉은 그 두 사람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몇 명의 손님들이 들고 날고 했지만, 그녀들이나 나처럼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나는 창 쪽보다 출입구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알고 보니 창가의 그녀들과는 대각선의 위치여서 관찰하기로 하자면 두 사람 모두를 아주 용이하게 해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저절로 관찰이 시작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가방에 넣어간 책을 꺼내 읽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녀들의 화기애애하고 밝은 모습이 보기에 아주 좋았다. 쉴새없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소리가 크지도 않았다. 대화 몇 마디마다 반드시 끼여드는 함박꽃 같은 웃음들, 그러나 그 웃음소리 또한 절대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것은 수다가 아니었다. 행복한 담소였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 의자는 푹신했고 커피는 향기롭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 그늘 하나 없이 완벽하게 행복해 보인다. 사십 쯤의 나이, 입성은 소박해도 품위가 있고, 얼굴은 아줌마여도 미소는 십대의 것처럼 싱그럽다. 이만하면 거의 그림 같은 겨울 오후의 담소 풍경이다.
대화의 내용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커피전문점의 주인아저씨가 열심히 골라서 들려주는 열창의 재즈 음악들 사이사이로 소근소근 소근소근, 그녀들의 말소리는 깊은 밤 눈 내리는 소리처럼 부드럽게 걸러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마 친구 사이인 모앙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되어 혈육이나 다름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저렇듯.있어서 행복한 존재들인 것이 부럽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한참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첫부분이 시작되었다.
먼저, 오른쪽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무어라고 즐겁게 담소하며 핸드백과 목도리를 챙겼다. 왼쪽의 여자도 일어났다. 그러나 왼쪽의 여자는 옆자리의 소지품들을 챙기지 않았다. 아마도 오른쪽 여자만 떠나는 모양이었다. 오른쪽 여자가 테이블을 떠날 때 한 번, 입구에서 찻값 계산을 하고 난 후 또 한 번, 두 사람은 다정한 눈짓과 작별의 손짓을 서로 교환했다. 그리고 오른쪽 여자는 커피전문점 문을 열고 떠났다.
이제 왼쪽 여자만 혼자 창가에 남았다. 왼쪽 여자는 갑자기 태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피곤해서? 졸려서? 나는 그녀에게서 그만 시선을 거두려고 했다. 그 순간, 고개 숙인 왼쪽 여자의 어깨가, 파도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잠시 후, 여자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급히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또 닦아 내다가 , 감당을 못하겠는지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다시 테이블 위로 쓰러져내렸다. 이번에는 엎드린 그 여자의 윗몸 전체가 다 출렁거렸다.
와? 왜? 한 시간 내내 그림처럼 행복한 담소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왜? 아니, 그렇다면, 저토록이나 큰 절망과 슬픔은 도대체 어디에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마음속 하나 가득 저만한 절망을 숨기고 어떻게 그처럼 환하고 밝은 척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소근소근. 하하하,를.....
어쩌면 자존심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시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혈육 같은 친구 앞일지라도 결코 내색하고 싶지 않다는 바로 그 자존심.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처치 곤란한, 바로 그 자존심이?
얼마 후, 폭풍 같은 울음을 다 쏟아 낸 왼쪽 여자는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를 하나 매달고, 담담하게 일어나 조신한 걸음걸이로 그곳을 나갔다.
ㅡ이레, '작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