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쉼은 완성이고, 완전해서 거룩하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안식일 규정은 일을 하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쉬면서 하늘과 땅 그리고 자신을 지어내신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그냥 사람들이고, 때가 되면 죽어 없어지는 다른 동물들과 다를 게 없다. 그게 유다인들이 이방인을 개라고 부른 이유일 거다.
안식일 규정 입법취지는 잠시 생업에서 손을 떼고,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이다. 일하느라 지친 몸을 쉬게 해주고 여러 인간관계와 이런저런 걱정으로 상처받은 마음도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치료받으라는 거다. 하느님 안에 있는 영혼은 모두 온전해진다. 안식일은 따뜻한 날이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으로 규정해 놓지 않으면 사람은 관성의 법칙처럼 멈추지 않고 하던 대로 계속하고, 더 많이 벌어들이려고 일하고, 또 그렇게 일을 시킬 것이다. 그러니 주위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둘러보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거다. 추수 때 빠뜨린 곡식단을 가지러 되돌아가면 안 되고, 올리브 열매를 딸 때 안 떨어지거나 지나온 가지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한 규정은 그렇게 남겨진 것이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몫이기 때문이다(신명 24,19-20).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그런 규정이 없으면 악착같이 다 쓸어 담을 거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날을 꿈꾸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드러나게 하는 날인데, 똑똑하고 철저한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은 그 근본 입법취지는 잊어버리고 규정 준수에만 매달리게 했다. 법 자체에만 매달리고 백성에게 그렇게 가르치니 안식일 규정은 짐스러워졌고,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가 고팠다. 그래서 남겨진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까먹었다. 가난한 이들 위해 남겨둔 걸 배고픈 이가 먹었는데, 그걸 두고 추수를 했다고 고발한 거였다(마르 2,24). 그 고발에 대해 예수님은 다윗이 사제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먹었음을 상기시켜 제자들이 배가 고팠음을 증언하며 그들을 변호하셨다. 제자들은 추수한 게 아니라 밥을 먹은 거라고 하셨다.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은 엄격하고 두려운 재판관이라면 예수님에게는 따뜻한 아버지셨다. 제멋대로 집을 나갔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잔치를 벌이는 분이다(루카 15,22-24).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그분,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바로 그분이시고, 그게 우리의 희망이다.
주일미사 참례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십계명 제3계명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생업과 세속적인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더해 하느님을 몸 안으로 모셔 들이니 말이다. 사제가 강론을 잘 준비하지 않아 듣기 괴롭고, 전례가 아름답지 않아 실망스러워도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성체는 성체다. 사람은 하느님과 영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즉시 몸과 마음을 세속에 빼앗긴다. 세속적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지만 그 안에만 있으면서 하느님과 영원을 생각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강제 규정이라도 만들어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해줘야 한다. 고무줄을 계속 당겨 놓으면 결국 그 탄성이 없어지는 거처럼 몸도 기계도 멈추어 쉬지 않으면 고장나 탄성 없는 고무줄처럼 된다. 영혼은 영원하신 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 머무르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끊어진 연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주일미사 참례 의무는 나를 속박하는 짐스러운 규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두 시간은 내 영혼을 위해서 할애해야 하지 않겠냐는 가르침이다. 영혼이 영혼의 주인인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으며, 나중에 그 주인을 만나면 그 얼마나 당황하고 괴롭겠나.
예수님, 주님 덕분에 하느님을 아주 가깝게 대합니다. 주님이 안 오셨으면 하느님은 그저 두려운 분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만남이 여전히 기대되는 건 아니지만 주님이 그 오른쪽에서 저를 변호해 주실 거니까 마음이 놓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름으로 어머니를 부르니 하느님을 더 가깝게 느끼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