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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페르시아-스파르타등간의 전쟁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서 ..잘 모르는 것이 있어서요..
거기에서 기원전 6세기 말..5세기 초..이런 말이 나오는데..
모르겠거든요..
AD 이후라면..저도 알죠..
근데 기원전은....
예를 들어서 기원전 6세기 말이라고 하면.. 기원후 6세기 말처럼..그냥 560년이후~599년까지 인지...
즉, 기원전 5백몇년도에서 중간(100을 반으로 나눈 시기인 50년)을 기준으로...570년, 580년인지..아니면 520년,510년인지 헷갈리더라구요..
또, 유물등의 제작시간을 알려고 할때도 520년대 혹 520년 무렵이라고 하면 뭐 알겠는데..그렇지않고 6세기 말, 4세기 초 하면 전까지는 기원후 방식으로 했다가 좀 이상한듯하여 반대로 하고..그랬다가 다시 기원후로 하는등 년대를 잘못 이해한적이 어제오늘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터득한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세기..
6세기 라고 할때...년도에는 600은 안들어갑니다. 500에서 599까지
기초부터 착실...
그리고 초, 말 이런것은
초는 앞선시기..말은 뒤의 시기입니다.
(기원후) 6세기초이면 520년, 530년을 가리킵니다. 6세기 말이면 570년,580년등을 가리킬것입니다.
그럼 기원전으로 가볼까요..
기원전 6세기 말..
기원전 570년일까요 , 기원전 520년일까요.
제가 앞에서 말했죠...
말이란것은..뒤의 시기라고..
기원전 570년하고 기원전 520년하고 어떤게 더 뒤의 시기인가요...
숫자 크기가 아니라니까요...
기원후 처럼..말이라고 해서..자리수의숫자가 커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기원전 520년이 더 뒤의 시기이죠.
그렇습니다.
기원전 6세기 말이란것은 기원전 570년,590년이 아니라 510년,515년 등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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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페르시아 전쟁』의 글을 친것입니다.
자그로스 산맥에는 새처럼 산봉우리에 매달려 살거나 울창한 삼림에 숨어 지내며 도토리만으로 목숨을 연명해갈 만큼 지독하게 원시적인, 그러다 보니 왕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한 미개인들이 살고 있었다. 자그로스 산맥으로 되풀이하여 원정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곳의 미개인들의 저항은 끝날 줄 몰랐다. 아시리아인들의 그 우수한 전쟁기계도 산지족들을 다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 원시인들도 아시리아의 습격이 잦아지자 아시리아라는 이름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곧 아시리아에 인간 약탈품(포로)을 제공해주기 시작하게 된다. 아시리아도 차츰 그것으로 자신들의 위대함을 입증하려고 했다. 산으로 올라갔다 평지로 내려오는 인간 토벌대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평원, 아슈르, 님루드, 니네베 등지의 신성한 도시로 내려왔다. 그때마다 이들 뒤에는 벌거벗은 몸뚱이를 결박당한 포로 행렬이 비척거리며 따라왔다.
아시리아는 주민 전체를 이동시켜 제국의 주변으로 밀어내고 점령 지역의 주민들을 또 다른 지역에 이주시키는 습성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원전 8세기 말 호라산 하이웨이 지역은(주요 거점, 중간, 앞, 뒤) 이제 아시리아 제국에 공식적으로 흡수되어 아시리아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자그로스 산맥은 숲이 울창한 험준한 지역인데다 기후 또한 사나웠지만, 계곡은 토끼풀이 무성한 목초지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몇 세기다 지나자 이곳에는 스스로를 ‘아리아Arya,' 곧 ’아리아인Aryans' 으로 칭하는 종족이 하나둘씩 꼬여들었다.
말이라면 당연히 호라산 하이웨이 지역에 거주하던 아리아인 부족들이 느슨한 연합체인 메디아산産이 최고로 인식되었다. 아시리아 군은 이 우수한 말을 손쉽게 공물을 제공받았다.
이런 침묵을 깨고 불길한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615년, 키악사레스Cyaxares라는 이름의 왕이 모든 메디아 부족장들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아시리아 제국 내 다른 반항적 봉신들의 동맹과 합세하여, 군대를 이끌고 요새를 박차고 나와 아시리아의 동쪽 면을 기습 공격을 하였다.
아시리아의 드넓은 북부지역은 강국으로 급부상 하고 있던 메디아가 차지했다. 메디아 왕들도 삼류 부족장의 딱지를 떼고 새로운 지위에 걸맞은 정복사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610년 메디아는 북부 시리아를 공격하고는 가는 곳마다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기원전 585년에는 (현 터키 서쪽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리디아와 전쟁을 벌였다. 양측은 일식으로 전장이 깜깜해져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수 없을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고 나서 서둘러 메디아와 리디아 사이에 높인 할리스 강을 두 제국의 국경으로 삼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30년 간 근동에는 평화와 힘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메디아의 새로운 왕 아스티아게스가 다른 나라를 공격할 의도를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제국들과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전란 터에서 멀리 떨어진, 메디아 북동쪽의 미개지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황무지와 현 아르바이잔 지역으로 원정대를 이끌고 가, 예전에 아시리아 왕들이 했던 대로 메디아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에게 아스티아게스라는 이름의 두려움을 각인시켰다. 아직 부족티를 벗지 못해 유목민 상태에 머물러 있는 민족에게 근동 군주들의 위대한 전통은 너무도 생소하였다. 그 때문인지 근동 군주들의 전통은 메디아 왕의 야망에 다른 방식으로 불을 질렀다. 아스티아게스는 스스로를 리디아 왕이나 이집트 파라오와 비교하면서, 그런 지위를 가진 메디아 왕이 제국을 천막에서 통치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도 메디아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지역의 군주들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 다시 말해 왕궁, 보고, 대수도 등을 소유하기로 했다. 금과 돌덩이들로 그의 장려함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호라산 하이웨이를 타고 자그로스 산맥 정상에 올라 이란 고원 입구에 서면 어떤 전설적인 서사시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황홀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각기 다른 색깔이 칠해진 입곱 개의 찬란한 성벽 안에 자리 잡은 그것은 톱니 모양을 한 흉벽 안족 테두리에 금판과 은판이 박혀 있는 호화찬란한 궁궐이다. 메디아 왕들의 본거지였던 그곳 엑바타나(현재 이란 중서부 하마단 주의 주도 하마단)는 지어진 지 1세기도 지나기 전에 세계의 교차로가 되었다. 또한 동서양 교역의 요충지로서,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자그로스 산맥 전체는 물론이고
메디아 부족장들에게 그것은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왕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왕국 내의 끊이지않는 파벌싸움 덕에 자신들의 사적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둘 씩 아스티아게스(Astyages(재위, 기원전 585~550)의 세력권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색색깔의 왕궁 벽이 세워지기 전 엑바타나는, 그 이름에 ‘집회장소’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부족들의 집회장소로 쓰였던 허허벌판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그 모든 증거들이 나타나는 와중에도 야릇한 꿈, 몰락하리라는 경고, 왕국의 파괴 등 불운이 닥치리라는 환영에 늘 시달렸다고 한다.
기원전 843년 아시리아는 아시리아 제국 북쪽에 위치한 산맥으로 진격해 들어가 그들이 ‘파르수아Parsua족’ 이라 부른 부족과 전쟁을 벌였다. 그후 2세기 뒤, 파르수아족과 이름이 비슷한 종족이 저 남쪽의, 가그로스 산맥 하단 지역과 걸프만의 무더운 해안지대 사이에 위치한 안샨Anshan 왕국의 폐허 위에 둥지를 틀게 된다. 그러나 어떤 연대기 작가도 이들이 같은 종족인지 아닌지는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종족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이 몰아낸 종족의 문화를 일부 흡수하고 나서야 이웃 정주민들의 의식에 파고들 수 있었다. 이들 정주 민족(안산)은 몇 세기 동안 계속돼온 관습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곳을 예전 명칭대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침입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새로운 고향 땅을 자기들 방식으로 부르고 싶어했다. 결과적으로 안샨은 시간이 가면서 전혀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안샨이 파르사Paarsa가 되고 파르시가 페르시아Persia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Cyres(재위, 599~529)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라고 한다. 키루스의 어머니는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나네로 키루스를 낳기전에 어떤 꿈(김유신 여동생의 꿈과 같음...오줌이 넘쳐서...덮쳤다나 )을 꾸었는데 이 것에 대해 메디아의 왕위를 위태롭게 할 징조 라고 하였다고 한다.
과거 페르시아인들은 지금의 남부 이란의 평원과 산지에 이름도 없이 처박혀 살던 산악 부족이었다.
기원전 533년 공포의 기병대를 조직하여 산맥의 남쪽을 공격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수척 열세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여인네들까지 전쟁터로 나와 키루스와 전사들의 힘을 북돋아주었다. 이 전쟁은 3년간이나 자그로스 산맥을 뒤흔들다 기원전 550년 돌연 끝이 났다.
가죽바지를 입어야 하는 참담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참고 견딜 만큼 가난에 이골이 난, 그의 백성들이 보여준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신을 당하지 않았어도 아스티아게스는 메이다 제국이 보유한 막강한 재원으로 전쟁에서 분명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메디아 군 사령관이자 부족장들 가운데 지도자격인 하르파구스Harpagus가 변절하여 전투 중에 반란을 일으키고 아스티아게스를 사로잡아 키루스 측에 넘겨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메디아인들의 말로는 갓난아기 키루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바로 하르카구스였는데, 그는 명령을 어기고서도 아기를 죽인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몇 년 후 아스티아게스는 그 일을 알고는 하르파구스 몰래 그의 아들을 죽여 시체를 갈기갈기 찢은 다음 양고기처럼 조리하여 그에게 먹이는 잔혹한 복수를 했다고 한다. 하르파구스는 신하로 남아 있었다.**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체이기도 했다.
‘안샨의 왕’ 키루스는 페르시아의 대표 부족인 파사르가다에족, 다시 말해 아케메네스가의 족장이었다.
메디아를 괴롭혀온 많은 문제들, 이를테면 메디아인 백성들이 과거의 부족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한 왕과 그것으로 자신들을 규정하려 한 귀족들 간의 갈등...
그는 메디아인들을 노예로 마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메디아 귀족들을 그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아스티아게스도...연금을 주어 품위 있는 삶을 살게 해주었다. 물론 메디아의 금고 안에 든 내용물은 안샨으로 죄다 실어갔다.
무더운 여름 페르시아의 저지대가 뙤약볕에 타들어 갈 때도 엑바타나만은 산꼭대기에 시원한 눈 모자가 씌워져 있고, 성벽 아래 경사지에는 계단식 과수원과 정원이 들어서 있어 청명한 대기와 푸른 초원이 넘실대는 천국이었다. 그런 이유로 엑바타나는 메디아의 수도로 계속 남았고, 더운 여름 몇 달 동안은 키루스 제국의 수도 역할도 했다.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Kroisos(재위, 기원전 560년경~546년)였다. 기원전 547년 그는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할리스 강 쪽으로 개군을 몰아갔다. 그것을 본 키루스가 자그로스 산맥을 급히 내려와 그를 대적하러 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는 흩날리는 먼지와 진흙 더미만 남은 채 파괴된 아시리아의 도시들이 권력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무언의 증인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야망을 품은 인간에게는 그조차 경고 못지않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는지, 키루스는 원정을 하기에는 늦은 계절이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크로이소스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전투는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는 계속되었다. 크로이소스는 겨울이 다가오자 키루스가 자신을 추적해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수도 사르디스로 군대를 철수했다. 사르디스는 에게 해에 사흘이면 닿을 만큼 서쪽에 치우쳐 있어 메디아 국경에서 오려면 까마득히 먼 거리 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은 퇴각하지 않았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무릅쓰고 크로이소스 뒤를 밟으며, 그의 동맹국 군이 해산하고 징집병들이 흩어지기만을 조용히 숨어 기다렸다. 그렇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크로이소스의 경계심을 풀고 사르디스를 무방비 도시로 만든 뒤 키루스는 공격을 개시했다. 크로이소스는 사력을 다해 남아 있는 병력을 끌어모았다. 먼저 리디아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기병대 공격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군의 돌격이 이어졌고, 크로이소스의 생포로 양측의 혈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페르시아의 승리에는 메디아인 기병대의 역할도 컸다. 그들이 양피외투와 강인한 산악 말로 겨울 원정에 필요한 완전군장을 갖추고, 자신들의 맡은 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준 결과였다. 메디아인 장수들도 많은 기여를 했다. 원정 기간 동안 키루스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으뜸은 역시 하르파구스 였다. 그는 리디아 기병대의 마지막 공격이 있기 바로 전, 짐 나르는 낙타들을 페르시아 군 전선의 맨 앞에 세울 것을 제안했다. 키루스가 그의 조언대로 하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에 놀란 리디아의 말들이 전열을 이탈하고 날뛰는 바람에 페르시아 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키루스는 이 승리에 고무되어, 비아리아인인 리디아인에게도 전에 메디아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회유책을 썼다. 그 덕에 크로이소스도 사형을 면하고 정복자의 측근이 된다. 금은보화로 가득 찬 크로이소스의 금고도 사르디스에 그대로 남겨두었고, 공물의 수납업무도 그곳 토착 귀족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리디아인들은 키루스의 이 같은 아량을 나약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키루스가 엑바타나로 떠나기 무섭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동자는 키루스가 가장 신임하여 금고의 책임을 맡긴 귀족들이었다.
대노한 키루스는 그 행위를 배은망덕한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즉각 군사행동에 나섰다. 그는 엑바타나의 신규 병력을 사르디스로 급파했다. 관용 따위는 보여주지 말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관용은 커녕 예전의 잔인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리디아의 도시들은 유린되었고, 반란의 주모자들은 처형되었으며, 추종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하르파구스는 페르시아 서쪽 지방의 해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어 리디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직책에 어울리는 냉혹함으로 리디아 사건을 마무리 지은 뒤, 곧바로 ‘고해bitter sea'(에게 해)라 불라는 에게 해 연안의 아시아 주변 지역을 따라 페르시아 군기를 꽃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 지역에는 남의 군침을 당기게 하는 번영을 구가하며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야우나Yauna'로 알려진 민족, 곧 이오니아인들이 사는 도시들이 해안선을 따라 산재해 있었다(애우나는 ‘이오니아인’이라는 말의 변형으로 근동 지역에서 ‘그리스인Greek'에 대한 일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10장 2절에, 야벳의 아들이 ’야완Javan'으로 나와 있는 것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리스인들은 키오스 섬과 사모스 섬도 이도니아 도시들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이오니아 도시는 총 열두 개가 된다)
하르파구스에게는 잦은 분란으로 동맹전선을 구축하지 못하는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무척이나 손위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도시들을 야금야금 무자비하게 정복해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어찌나 무섭게 났던지 많은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 지배를 받기보다는 바다 건너 시칠리아나 이탈리아 반도로 도주하는 쪽을 택했다.
이오니아인들은 하르파구스에게 항복 할 때도, 새로운 지배자들이 어떤 민족인지 몰라 헷갈려했다. 그 후에도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은 ‘메디아인’ 이라 불렀다.
사르디스에서 돌아온 키루스는 이번엔 동쪽 지평선으로 눈을 돌렸다.
메디아만 중앙이사이 초원 사카족에게 정복되어 28년간 지배받았던 뽀족한 모자를 쓰고 도끼라는 심상찮은 무기를 든..
그는 사카족 지도자를 붙잡아 정중히 대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침략군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복종을 하고 페르시아 왕을 위해 봉사 하면서, 얼마 안 가 곧 사카족을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 흉포한 군대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낱 부족일뿐이었다.
사카족이 살던 곳 너머에는 인간의 모든 야망, 아니 가장 위대한 정복자의 야망도 조롱하는 듯한 광활한 평원, 시도 때도 없이 산적이 출몰하여 음산하기 짝이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평원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평원의 끝에 이르면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무지 너머에는 랑하 강이라는, 전 세계를 에워싸고 도는 망망대해가 흐르고 있다고 했다. 단조로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횡당하고 있던 키루스는 그렇게까지 멀리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행군 중 커다란 강을 만나자 강둑에서 휴식을 취하며, 개펄과 모기가 들끓는 그곳을 페르시아 군 진군의 종착지로 정했다. 그러나 작사르테스 강(시르다리야 강)은 수심이 얕고 이곳저곳 섬이 떠 있어, 천혜의 국경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자 키루스는 자연의 부족한 부분을 일곱 개의 국경 도시를 세워 보완한 다음, 그 가운데 제일 큰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키루폴리스Cyrupolis' 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기원전 540년, 동쪽 국경이 확정되자 그는 마침내 그 전략을 시험해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그로스 산맥으로 돌아온 뒤...약탈의 눈길을 돌렸다. 이라크 남부의 비옥한 평야가 바로 그곳 이었다.
키루스는 일흔 살에 전장에서 생을 마쳤다.
아무튼 그를 죽인 부족의 여왕은 승리감에 도취하여 그의 유체에서 머리를 잘라내 피가 가득 찬 가죽 술통에 던져넣었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늙은 영감의 정복욕을 풀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근동인들 머릿속에는 키루스가 자나깨나 인육에 굶주린 밤의 악마로 자리 잡게 되었다.
키루스는 기원전 529년 여름에 죽엇다. 그의 유체는 그를 죽인 부족에게서 돌려받아 페르시아로 운반해온 다음 이미 세워져 있던 커다란 비석 옆에 매장되었다.
제국이 얼마나 무질서하게 졸속으로 건설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얘이기도 하다. 석조 건축물 너머 널따란 언덕과 평원에는 가축들이 떼 지어 돌아다녔고, 단조로운 지형을 바람이 한바탕 불고 지나가면 금빛 찬란한 건물 이구와 주랑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석조 건물인 왕궁조차 막사나 천막과 다를 바 없이 설계가 엉성했다. 그곳이 키루스 부족 명칭인 파사르가다에로 알려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파사르가다에는 부족이 명칭이자 키루스 제국의 첫 수도 이름이었다)
키루스는 슬하에 세딸과 두아들을 두고 있었다.
키루스는 죽기 전에 장자 캄비세스를 왕세자에 봉하고 차남 바르디야(일명 스메르디스)는 박트리아 총독에 임명했다. 그리고 바르디야는 공물 지급을 면제 받았다.
키루스가 세워놓은 양위계획은 예정대로 공표되었다.
이것은 페르시아 관습에서는 없는 해괴망측한 근친상간이었으나 캄비세스가 그의 두 누이, 아토사와 록산느를 부인으로 맞아 들인다.
캄비세스는 이것으로도 모자라, 마구스가 곡을 하고 기원하는 가운데 해 뜨는 쪽으로 향하도록 설계된 무덤의 황금 석실에 키루스 시신을 안장할 때도, 자신의 장자상속권을 주장했다.
캄비세스가 부왕을 죽인 자들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 그렇게 하려면 동쪽으로 대군을 몰고 가야 하는데 그 경우 동생의 분노를 살 위험이 있었다.
용병에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기고만장한 사제들의 착취 때문에 고대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라오의 힘은 여전히 강대했다. 캄비세스는 4년 동안 침략 준비를 했다. 제국의 종속국들에게 압력을 가해 공물과 세금을 받아내고, 선박을 건조 또는 징발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페르시아 왕은 해군을 소유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고양이를 방패에 박아두는 작전으로 이집트 군 궁수들의 손을 꽁꽁 묶어두었다고 한다.
이집트 도시 한곳에서 나오는 수입은 몽땅 페르시아 두 자매 여왕의 신발값으로 들어갔다.
이집트를 변화시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제계급을 굴복 시켜 징세를 해야 하는 절박한 문제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캄비세스는 토착 파라오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무자비한 정책으로 비대해진 사원 영지를 강제로 징발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데 무려 4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어쏘, 그 과정에서 자연히 사제들의 철천지원수가 된다.
페르시아 귀족들은 바르디야가 대안이었다. 바르디야는 키루스 대왕의 아들일 뿐 아니라, 부왕에 못지않게 왕의 자질을 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건한 체력을 가진 그에게 ‘타니옥사르세스Tanyoxarces' 곧 ‘장대한 체격’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고, 페르시아이들의 특선 무기인 활 쏘는 솜씨는 가희 전설적이었다. 말썽 많은 동부 국경을 10여 년이나 지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사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입증할 만 했다. 다른 면에서도 바르디야는 부친과 닮은 점이 많았다. 전투에만 능했던 것이 아니라 유화정책에도 소질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층의 원성에도 신경을 쓰고, 캄비세스의 부당한 과세에 짓눌려 지내는 종속민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 바르디야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음을 슬쩍 뀌띔에주기 시작했다. 그 조치대로라면 페르시아의 종속민은 앞으로 3년간 공물 지급을 면제받고 세금도 더 이상 납부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있었다.
아프리카 정복을 완결 지은 캄비세스는 그제야 불현듯 자신의 배후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그는 페르시아 민족의 우수성을 머나먼 리비아 사막, 그보다 더 먼 “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전설적인 에티오피아이들의 땅에까지 심어놓는 위엄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522년 초 마침내 그는 기나긴 귀향길에 올라 한시라도 빨리 본국에 닿기 위해 전력을 다해 말을 질주했다. 그러나 우수한 군대와 많은 귀족들이 아직 캄비세스 휘하에 있는데도 상황은 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기원전 522년 3월 11일 바르디야가 공개적으로 페르시아 왕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한 달 뒤 동부지역은 그를 왕으로 환호했다.
그러다 캄비세스가 시리아로 진군을 계속하기 위해 말에 오르다 자기 칼에 허벅지를 찔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칼에 찔린 상처에서는 괴저가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며칠 뒤 그는 숨을 거두게 된다.
이는 마구스에 의해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마구스는 록산느가 머리없는 아이를 낳는 광경을 보고 캄비세스 혈통이 끊어지리라 하였다.
기원전 522년 7월, 마구스의 집전 아래 바르디야는 부왕의 어의와 왕관 카디리스를 쓰고 정식으로 페르시아 왕위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캄비세스의 왕비이자 자신의 누이이기도 한 아토사와도 혼인을 하였다.
여전히 음모와 소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그것이 사고였든 아니었든 여하튼 캄비세스의 죽음은 바르디야에게만 횡재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시리아에서 자그로스로 통하는 도로변에는 그때까지도 캄비세스의 군대가 지휘관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왕의 먼 사촌으로 캄비세스의 ‘창 받는 자’였던 약관 스무 살의 다리우스도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창 받드는 자는 공식적으로는 궁정의 실세임을 드러내는 칭호였다.
바르디야에게 부족장들의 충성심은 분열돼 있었고, 불확실했다. 종속국들에게는 환영받았는지 모르지만, 세제 개혁안도 페르시아 지배층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르디야의 적으로 간주된 자들의 영지, “목초지, 가축떼, 노예와 집들”을 몰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음모 가담자들은 총 일곱 명이었고, 이들 모두 페르시아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음모자였던 부유한 고관 오타네스(딸이 바르디야의 왕비임)도 왕권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고브리아스는 다리우스의 장인이자 누이의 남편이었다. 또 다리우스의 형제 아르타페르네스 또한 용기와ㅜ지혜를 겸비한 드문 인재로 일곱 주동자안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일이 어떤 식으로 결정이 나든 기꺼이 뜻을 함께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후일 대담함 못지 않게 냉혹함을 보여줄 때도 과장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범죄행위를 떠버릴 유형이 아니었다.
다리우스는 일에 시중을 기하기 위해 음모자를 더 끌어모으자며 시간을 끌려고 하는 오타네스에게 일의 즉각적인 실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9월에 이들은 먼저달려 여름수도가 있는 메디아 국경에 도착하게 됐다.
9월 하순, 페르시아 왕 살해 음모자들이 자그로스 계곡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니사니아 평원의 북단을 따라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앞에는 토끼풀 무성한 목초지가 펼쳐졌다.
16만 필의 말, 그것도 백마가 평원을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파사르가다에서는 매달 키루스의 성묘聖墓 앞에 니사이아 말 한 필이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9월 29일, 바르디야는 니사이아의 이른바 시키아바우티슈라는 요새에 있었고, 다리우스가 그를 추적하여 잡는다.
암살단 일행은 요새문 앞까지 태연히 말을 몰고 가서는 왕을 알현하러 왔다고 큰소리를 쳤던 모양이다. 요새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은 그들이 고관임을 알고 주눅이 들어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문을 열어주었다. 누군가 그들을 저지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왕의 처소에 다다른 뒤여서,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다. 암살단은 통로에 있던 조신들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바르디야 처소로 난입해 들어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때 왕은 첩실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기습을 당한 와은 부러진 의자 다리로 침입자들을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역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왕을 단검으로 찌른 자는, 다리우스의 ‘충실한’ 형제 ‘아르타페르네스’였다고 한다.
캄비세스는 이미 몇년전에 바리디야를 처형했다. 지금의 왕자 바르디야는 사기꾼이 다. (바르디야가 죽음을 당한 이후..나온 말)
다리우스 측은 이 가짜 바르디야가 ‘가우마타Gaumata라는 이름’ 마구스였다고 서둘러 발표한다.
오타네스의 딸, 그러니까 바르디야의 부인 파리디메가 바르디야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태초에 신중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시간과 창조의 존재를명할 때, 우주에 질서를 불어넣기 위해 진리인 아르타Arta를 만들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르타 없이는 형태도 아름다움도 없었을 것이며, 지혜의 주主 마즈다가 움직이게 한 존재의 대순환도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는 행해지지 않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에 검은 연기가 함께 하듯이, 아르타에도 거짓인 드라우가Drauga가 따라붙게 마련이었다. 이 두질서-하나는 ‘완전’ , 다른 하나는 ‘거짓’으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는 시간만큼이나 오래도록 서로 투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시키아바우티슈에서는 어의, 활, 방패로 이루어진 왕권의 표징들이 적법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이며,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인정받게 될지는 암살이 일어난 날 저녁까지도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음모자들은 누가 왕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니사이아 평원을 달려온 귀족들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왕이 될 자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조로아스터(정확한 생몰년도는 알 수 없고 대략 기원전 1200년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자신의 새로운 교의를 통해, 사람들의 기존 관념대로 우주의 순환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모든 거짓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영원의 평화를 수립하는 대결말, 다시 말해, 우주적 묵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최후의 결정적 승리를 관장하는 것 또한 다른 이란인들이 늘 믿고 있듯이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지고의 전능한 존재로, 유일하게 창조되지 않은 신, 곧 생명, 지혜, 빛의 주인 아후라 마즈다였다.
여섯 명의 빛의 정령, 성스러운 불멸자들인 아메샤 스펜타Amesha Spenta(아멘샤 스펜타는 인격화된 개념이기도 하고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하다)가 그들이었다.
조로아스터는 메디아인도 페르시아인도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의 지식은 동쪽에서 자그로스로 온 것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모두 일치했다.
키루스 제국은 분명 신정체제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도 그것은 ‘조로아스터적’ 국가가 아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계속 자신들의 고대 신을 믿었고, 산과 흐르는 물을 경배했으며, 왕의 묘에 말을 희생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는 관례적으로는 이교적이었으나 감성적으로는 조로아스터 교의를 완전히 도외시하지 못했다.
죽은 사제의 시체를 새와 개의 먹이로 내높기 시작한 측(그렇게 하지 않으면 페르시아인들은 대역죄를 범한 끔찍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키루스는 이란의 여러 종족에 대한 지식의 지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란의 옛 핵심지역 관습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박트리아나 소그디아나에서 멀리 떨어진, 그의 부족의 본거지 파사르가다에 깜짝 놀랄 만한 세 개의 건축물을 세우도록 명령한 것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꼭대기 안쪽을 넓게 깊게 파 그 안의 뜨거운 흰 재로 불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만든 석조 성화대가 그것들이다.
시키아바우티슈에서 북쪽으로 24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평지 한가운데에 자그로스 산맥에서 가장 신성한 산, 이른바 ‘신들의 처소’로 알려진 비시툰의 자매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바르디야가 습격한 장소가 가까운 이곳에서 다리우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방식대로 순수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에 희생을 바쳤다.
페르시아 국경지역에 위치한 고대 왕국 엘람에서는 공공연한 반란이 일어났다고 했다. 바빌론(현 바그다드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에서는 왕을 사칭하는 자가 오랫동안 공석으로 비어 있는 왕권을 주장하고 나섰다고 한다.
태초에 지구가 바닷물로 덮여 있을 때, 신들의 왕 마르두크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그것을 흙으로 덮은 뒤 물과 섞어 끈적이게 만든 다음, 그것으로 에사길라Esagila라는 집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세계 최초의 건물이었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것은 변함없이 바빌론 중심부에 서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메소포타미아는 인구 조밀하고 비옥한 지역이긴 했으나 오래전부터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마치 흡혈귀처럼 먼 곳의 나라들을 집어삼켜 그곳의 주민 몇 산물로 자신들의 거대한 입맛을 충족시키며 나라를 지탱해갔다.
바빌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onidus(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왕, 재위 기원전 556~539년)는 바빌론이 함락될 때 노령이었는데도 슬하에 많은 자식을 남기고 죽었다. 이 계승자들 중의 하나가 바르디야 살해로 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 10월 초, 스스로 네부카드네자르 3세로 선포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동쪽 엘람의 반란으로 페르시아와 연락이 두절되었는데도 본국으로 향하지 않고 메소포타미아로 직행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도랑과 운하가 많은 그 지역 티르그스 강쪽의 땅은 저 남쪽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보다는 비옥하지 않았을 것이다. 티그리스 강은 유프라테스 강에 비해 제방의 경사가 급했고 페르시아어로 티그르스가 ‘화살’을 의미할 만큼 물살이 빨라 농사에도 부적합했다. 하지만 그곳은 관개에는 부적합했지만 방어선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메디아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선을 굳건히 하고,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확 트인 평지를 방어하기 위해, 너비 8미터 높이 10미터의 장대한 방벽을 세웠다. 톱니 모양의 이 방벽은 황량한 평원 너머에서도 눈에 띌 만큼 그 모습이 당당했다. 세워진지 60년이 지난 뒤까지도 이 ‘메디아 성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르곤 1세(기원전 2350년경) 바빌론 왕들은 스스로를 아카드 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르만에서는 나보니두스의 딸 엔 니갈디 난나 왕녀가 간수하고 있던 옛 기물 수집품에 낱낱이 이름을 붙여, 대중교화를 위한 전시물로 이용했다.
마르두크의 코를 얼굴에서 떼어냈다. 이일로 바빌로니아인들의 감정을 결정적으로 자극했고 결국 나보니두스를 파멸시킨 원인이 되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왕이 바빌론 최대의 사원인 에사길라를 찾아 경고의 시선을 보내는 마르두크의 황금 상 앞에서, 빰을 맞고 귀가 잡아당겨지는 굴욕 의식을 치른다.
이때 왕이 눈물을 흘리면 신의 마음이 흡족해진 것으로 해석되었다. 반면 왕이 사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의 왕국에 재앙이 닥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보니두스 아래 통제불능으로 치솟기만 하던 인플레이션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수십년 동안 바빌론 토착 지배자들의 대리인 역할을 해온 은행가 집안 에기비스가家만 해도, 나보니두스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는 곧 새로운 체제에 적응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돈이 달리기 시작하자 에기바스가는 파산의 위험에 직면했다. 기원전 522년 늦가을, 바빌론 본사와 지소들 간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에기바스가의 두 형제는 페르시아에서 살해되었다. 은행부채는 산더미처럼 늘어만 갔다.
10월 초 페르시아 선발대는 이미 메디아 방벽 앞에 당도해 있었다. 거기서 다리우스는 군대 일부를 때내 티그리스 강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병사들은 말, 낙타, 부풀어오른 짐승 가죽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기원전 522년 12월 13일, 다리우스는 네부카드네자르 3세의 군대와 일전을 벌여 그들을 격파했다. 그리고 엿새 후(19일), 두 번째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빌론 군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남은 기병들을 데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수도로 도망을 쳤다. 항복하려고 뒤에 남은 병사들 중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리우스는 단번에 바빌론을 접수했다.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대도시가 뿜어내는 거대한 연기와 먼지 구름이 그의 시야를 자욱히 가렸다. 25만 명의 대인구가 바빌론의 좁고 꼬불꼬불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바빌론은 벽돌, 시체, 오물이 뒤범벅된 비좁은 도시였던 것 못지 않게 방만한 도시이기도 해서, 그것의 일부나마 감싸주려면 죄장의 성벽의 필요로 했다. 바빌론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 성벽도 너비 2590제곱킬로미터에, 화려하게 장식된 여덟 개의 커다란 성문, 거기다 유프라테스 강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자연의 장벽을 대신하여 “집채 같은 파도처럼 큰 물살을 이루는” 해자의 보호까지 받는 거창한 규모였다.
바빌론 최대의 기녀물, 1700만 개의 벽돌로 지어진 높이 100미터의 계단식 탑, 통칭 에테멘난키Etemenanki라 불리는 ‘하늘과 땅 사이 경계를 이루는 사원’ 이 있었다.
다리우스가 바빌론에 머물고 있는 동안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가 거둔 승리는 다른 적에게 치명타가 되지 못했다. 그가 지배하고자 하는 지역 전체에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에서 반란과 전쟁의 소식이 들려왔다.
다리우스는 니딘투벨Nidintu-Bel(이 인물의 신원은 알 수 없으나, 정황은 왕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이었던 자가 왕을 사칭했다며 네부타드네자르를 규탄했다. 그러고는 ‘가우마타’ 시신을 허겁지겁 치워버릴 때와 마찬가지로 나딘투벨도 개선가도로 행렬시키지 않고 허둥지둥,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뚝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했다. 왕위 사칭자의 근위대로 생각되는 49명의 장수도 그와 함께 처형했다.
사방에 흩어져 있어 수적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다리우스 왕의 군대는 바빌론을 점령했는데도 곧 적군에게 전복될 것만 같았다. 이제는 페르시아까지도 반란을 일으키는 형국이었다. 바르디야 귀족들의 당파싸움은 파멸적이었지만, 그것은 또 바르디야의 이름을 내건 일은 그의 죽음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그들은 서둘러 쿠데타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귀족 가운데 한 명인 바히아즈다타Vahyazdata를 왕으로 추대한 다음 그가 진짜 바르디야라고 선포했다. 그 밖에도 왕을 사칭한 자들은 많이 있었다.
엑바타나를 점령한 프라오르테스Phraortes라는 서둘러 자신을 지배자로 인정해준 페르시아 제국 동쪽 절반의 반도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옛 메디아 제국의 황금기를 되찾겠노라고 공언했다.
목숨을 건 사투는 모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동지였던 부대들 간에 벌어졌다. 바히아즈다타군은 인접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페르시아 동쪽으로 나아가다, 다리우스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그 지역총독의 저지를 받았다. 북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프라오트테스를 지지하는 북쪽의 반군은 페르시아인 장수뿐 아니라 프라오르테스의 나라, 다시 말해 메디아인 장수도 포함된 다리우스 지지자들의 반격을 받았다. 한편 메디아에서는 눈발이 흩날리는 영하의 추운 날씨속에 부족장들끼리 호라산 하이웨이 쟁탈전을 벌였다. 기원전 521년 1월이 되자 프라오르테스의 군대는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해서 니사이아 평원까지 다다른 그는 두 달 전 다리우스가 했던 것처럼 언제라도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갈 찰나에 있었다.
히다르네스를 지휘관으로 한 소부대를 호라산 하이웨이로 보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그곳을 지키도록 했다.
양측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승패는 판가름나지 않았다. 프라오르테스 군대는 치명타를 입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 히다르네스는 신성한 비시툰 산 산봉우리 절벽 앞에 참호를 구축한 다음 그곳에서 다리우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4월, 바히아즈다타에게 대승을 거두었다는 승전보가 날아오고 북쪽 지역의 반란도 진압되자 다리우스는 마침내 메디아 워정에 매전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바빌론의 예비군을 끌고 당장 히다르네스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프라오르테스 군과 목숨을 건 혈전을 벌여 그의 군대를 격파하고 프라오르테스를 산 채로 붙잡아 쇠사슬로 몸을 결박했다.
두 달 뒤 다리우스는 바히아즈다타와도 전투를 벌여, 두 번째 승리를 거둔 다음 프리오르테스처럼 이번에도 그를 말뚝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했다.
이제 바르디야임을 주장하며 왕을 사칭하는 자는 더 이상 없을 터였다. 살해된 왕도 그제야 땅에 묻어 주었다. 바드리야의 비妃인 아토사는 이제 다리우스의 비가 되었다.
다리우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부인은 키루스의 둘째 달이자 아토스의 동생인 아르티스토네였다.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다리우스의 부친 히스타스페스...
기원전 521년 엘람과 메소포타미아는 여전히 꺼져가는 반란의 불씨를 솔솔 피워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리우스의 승리는 누가 봐도 확고부동했다.
기원전 520년 다리우스의 벽돌동들이 비시툰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성가시기 그지없는 엘람인들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엘람인들은 도통 믿음이라는 걸 모르는 구나. 이자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 않아.”라고 말하였다.
다리우스의 장인 고브리아스가 군대를 이끌고 엘람으로 쳐들어가, 거의 흔적도 없이 대번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은혜의 산Mount of Mercy의 발치에서 바히아즈다타와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이 말뚝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했졌다. 그리고 이곳을 ‘파르사Paarsa'라 명명했다.
캄비세스 치세 말년, 제국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재정적 위기도 해결됐고, 키루스와 그의 아들들이 엉성하게 만든 공물제도도 능률적으로 개선하여, 제국의 최말단, 저 지방 곳곳까지 세금이 빠짐없이 징수되도록 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무너진 기념물의 잔해를 치우지 않고 그것을 봉한 다음 그 위에 새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가 세워지기 전부터 제국 전역에서 활동 중이던 은행가 집안 에기비스가가 이미 그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고, 다른 상인들과 은행가들도 곧 그들의 뒤를 이었다.
기원전 519년, 일군의 종족이 또다시 제국의 북쪽 경계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는 반란이 일상화된 사카족도 있었다. 다리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그런데 길잡이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뙤약볕이 내리쬐는 스텝지역 한가운데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서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는 물도 없었고 그렇다고 비가 내릴 기미도 보이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다리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언덕 꼭대리로 올라가 어의와 왕관을 벗고 땅에 왕홀을 꽂은 것이다. 그런 다음 땅에서 어둠의 그림자가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자 왕 중의 왕은 큰 소리로 기원을 읊었다. 과연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더니 대지를 흠뻑 적셔준 것이다. 그것을 보자 다리우스는 의관을 정제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반란군을 토벌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예전에 캄비세스가 서쪽으로 파견했던 페르시아 군이 사막의 모래폭풍에 통째로 휩쓸려간 적도 있었다(캄비세스 치세를 다룬 헤로도토스 사료는 그다지 믿을 게 못 되지만 그래도 여하튼 그렇게 말하고 있다. 리비아 사막 모래 밑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캄비세스의 실종된 군대에 대한 유골 수색작업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점도 이참에 밝혀둔다-지은이).
기원전 518년 동쪽으로 눈을 돌린 그는 신비에 싸인 인더스 강 유역으로 소함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신속히 침략을 하여 펀자브를 정복했고, 사금, 코끼리, 그 밖의 진기한 물건들을 공물로 징발했다. 인더스 강도 상징적으로 대왕의 지배하에 두었다. 커다란 항아리에 그 강물을 담아오게 하여 대왕의 금고에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다른 곳의 강물도 그것과 섞어 대왕의 영광을 더욱 빛내주었다.
그래도 아직 인더스 강 너머에는 페르시아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도 공식적으로 페르시아 지방에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대왕의 은혜를 입었다. 그것은 탄원자들이 대왕에게 흙과 물을 바치면 대왕은 그들에게 관심의 따스한 불빛을 비춰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의 제국은 “성벽은 파괴하고 기병대가 날뛰고 도시를 정복하는” 와중에 건설된 제국이긴 해도,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피지배 민족의 도전에 직면했을 경우에 대비한 교묘한 대응책도 강구해놓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들은 순종적인 민족에게는 평화와 질서를 보장해주는 정책을 쓰는 한편, 분할하여 통치하는 정책을 구현하는 방시으로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다리우스와 왕권을 다툰적 있던 오타네스는 에게 해 동부연안을 누비고 다녔다. 사모스 섬도 페르시아 제국에 정식으로 병합되었고 인근의 다른 섬들도 페르시아 함대가 닥쳐올 것에 대비하여 왕의 사절단에게 흙과 물을 바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리디아에 가 있던 키루스는 에게 해를 건너온 스파르타 사절단의 예상치 못한 방문을 받게 된다.
아시아족 치고 스파르타인을 모르는 민족은 없었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인(헬레나)을 모른다는 사실보다 페르시아인들의 이질성을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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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스kidaris: 세로 홈이 파인 페르시아 왕관
사신邪神과 악마들, 다시 말해 다이바dai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