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곽 흥 렬
어디 입맞춤할 데가 없어서 그래 거기다 대고 키스를 하는가. 언젠가 어느 대중매체는 전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병들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발등에다 입을 맞추는 교황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솔직히 처음엔 이맛살이 찌푸려졌었다. 어쩌면 거기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다분히 가식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몹쓸 생각마저 들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야 할 장면에서 어쩐지 느끼하고 객쩍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음은, 무슨 일이든 변하고 바뀜을 거부하는 평소의 가치관이 작용을 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그것이 내 곰팡내 나는 선입견이었음을 깨닫고는 꽈배기처럼 뒤틀린 사고 관념을 크게 뉘우쳤다. 그 몸가짐은 분명 진실한 낮춤의 꾸밈없는 실천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처럼, 세상에서 가장 그늘진 곳, 소외받은 이웃들에 대한 마음 낮춤의 표시로 발에다 대고 입맞춤을 한 것임이 틀림없겠다.
어찌 되었든 비단 나만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 성도 싶다. 흔히들 발 하면 천시받는 존재의 대명사처럼 치부하지 않는가. 누군가로부터의 대접이 영 시원찮을 때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고 불평을 표출하는 것만 봐도, 발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아주 형편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신체의 맨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히 시선을 내리깔고 대하게 되는 부위가 바로 이 발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세상에 발만큼 충직한 사도使徒가 있을까. 아무리 타고난 효자라도 영을 거스를 때가 있지만, 발은 뇌가 지시하는 명을 거역하는 법이 없다. 이따금 어지러워진 머리를 식히려고 가벼운 산책길에라도 나설라치면 발은 삽살개처럼 제가 먼저 채비를 한다. 그곳이 진흙구덩이든 가시밭길이든 가리지 않고 뇌의 명령만 내려지면 조건 없이 나선다.
사람이 네 발로 기어 다니다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발의 부담은 갑절로 늘어났다. 이것은 발의 입장으로 보면 퍽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일생 동안 걸음을 옮겨 디디면서 떠받쳐야 하는 하중荷重이 대체 얼마일까. 어림짐작으로도 어쩌면 바위를 드는 힘보다 더 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발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구시렁구시렁 불평을 늘어놓는 법이 없다. 묵묵히 자기 임무를 충직하게 수행할 따름이다.
발의 미덕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평소 그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손이야 탈이 나면 조금 불편하긴 할망정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발에 문제가 생겼다 하면 꼼짝없이 구들목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 보면 발이 담당한 소임이 실로 크고 무거움을 알겠다.
모든 신체 부위 가운데 특히 발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구족口足화가들이다. 그들의 삶에서는 손이 맡은 역할을 고스란히 발이 대신한다. 불의의 사고로 사지가 마비되어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을, 발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서 건져 올리는 일등공신이다. 이때의 발은 목숨의 무게에 값할 만큼 소중하다. 이로 보면 이 하나만으로도 발은 제 나름의 존재 가치를 당당히 지니고 있다 하겠다.
발은 성실함으로 그 값이 매겨진다. 산목숨이 어디를 가지 않으랴. 세상천지 방방곡곡 두루 유람할 수 있음은 오로지 이 발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부지런한 자가 세상을 차지하나니, 발품을 팔면 무엇이든 하나라도 얻었으면 얻었지 잃을 일은 절대 없다. 발로 뛰는 보람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 발의 논리다. 손은 잽싸긴 하지만 변덕을 부리길 잘하는 데 비해, 발은 굼뜨긴 해도 우직스러울 만큼 충직하다. 이치가 그러하건만 공기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으면서 그 소중함을 모르듯, 발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으면서 정작 발의 귀함은 잊고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네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 아닌가 한다.
발의 미덕은 그 이타적 속성에 있다. 우리가 흔히 계획한 일이 뜻같이 이뤄지지 않아서 무슨 수단을 강구할 때 ‘손을 쓴다’고 하고, 계속 이익을 내지 못해 하던 일을 접어야 할 때 ‘손을 턴다’고 표현한다. 그에 반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동료나 이웃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려는 마음을 낼 때는 ‘발 벗고 나선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손이 개체 지향적이요 이해타산적이라면 발은 공동체 지향적이요 자기희생적이라고 하겠다. 이 점이 손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발의 따뜻한 품성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들어 발 마사지가 젊은 여인네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인 모양이다. 박대만 당하던 발이 바야흐로 옳은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던 데서 이제는 발톱까지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른바 ‘네일 아트’라고 불리는 미용술이다. 손톱이 여태 예술적 대상까진 승격되지 못한 사이에 발톱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따지면 발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 따라 귀천貴賤은 변하고 바뀌어 가는 것이 세상사 정한 이치 아니던가.
이처럼 소중한 발도, 그러나 한 번 잘못 놀리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발이란 일단 들여놓기는 쉬워도 빠져나오기는 어려운 법, 멋모르고 발을 들여놓았다가 빼도 박도 못해 남모르는 고충을 겪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본다.
나는 어느 지인知人을 통해, 재미 삼아 시작한 증권 투자로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몰려 버린 한 법조인의 사연을 알고 있다. 투전놀이라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멋모르고 덤벼들 때는 뜻밖의 횡재를 하는 수가 생긴다. 그도 처음 얼마간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모양이다.
한데 이것이 그만 화근이었다. 은근히 욕심의 독버섯이 고개를 내밀었다. 불로소득의 짜릿한 성취감 속에 도사린 함정을 그는 헤아리지 못했던가 보다. 차츰 투자 액수를 늘려 갔고, 거기서 그만 발목이 잡혀 버렸다. 대박을 노리고 발을 들여놓았다가 결국 쪽박을 차고 만 것이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가진 전 재산 수백억 원을 몽땅 털어 넣고 빈털터리가 되어 노숙자 신세로 떠도는 한 중년 사내의 사연도 어느 신문은 가십 기사로 전한다.
그 비운의 당사자인들 처음부터 그처럼 엄청난 액수를 쏟아부으려 했을 것인가. 어떻게 하다 보니 무엇에 홀린 듯이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침내 헤어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몰려 버렸음이 분명하다. 모두가 첫발을 잘못 들여놓아 패가망신에 이른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이런 일로 보건대, 사람은 모름지기 아무 데나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일이 아니다. 첫단추를 잘못 꿰면 연쇄적으로 뒤틀려지는 법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어찌하여 생겨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우리네 인생살이란 어쩌면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발놀림은 아닐까. 평소 천덕꾸러기같이만 여겨지던 발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줄을, 세상을 살아가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곽흥렬 약력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그동안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 세태비평집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를 비롯하여 총 12권의 책을 내었고,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코스미안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12년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창작기금을 받음.
첫댓글
어떤 이의 수족이 되어서~
라고 손과 발이 함께 하지요.
지나 온 길을
발자취라고 하지요.
발자취란 말은 있어도
손자취란 말은 없어요.^^
손사래 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발로는 사래친다는 말은 아예 없습니다.
손과 발은 같이 하기도 하고
따로 맡은 일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손발을 맞춰서
잘 해 나가야 좋은 사회를 이룩합니다.
발을 글 제목으로 올려주신 곽흥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발자취는 있는데 손자취는 없고 손사래는 쳐도 발사래는 치지 못한다는 글을 보면서 평소 손과 발에 대하여 깊이 사유해 보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유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유하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술술 댓글을 풀어내시는가 봅니다.
아이들 동화, '해와 바람' '떡갈나무와 갈대'가 생각난다.
발도 소중하게 손도 소중하게
다 소중하게 오래 건강하면 좋겠다.
혹여 동화를 좋아하는 분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곽흥렬 지난번 글에 쓴 내 댓글은 못 본 모양이구나. 반말로 댓글을 써서 좀 이상했겠다. ㅎㅎ
27기 고등 동기라 말 높이는 것이 서로 어색할 것 같아서.
난 3-10 이과 김규익이다.
담부턴 서로 편히 말하면 좋겠다.
@마음자리 그러네. 본명을 쓰지 않으니 누군 줄을 몰랐네.
내 밑에서 공부하고 있는 인연들과 문학 활동을 하는 분들이 하도 많아서 본명을 쓰지 않으면 일일이 다 기억을 할 수가 없다네.
신체의 제일 밑바닥에 있지만 하는 역할은 대단한 발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의 제일 밑바닥에 있기에 가장 소홀히 여기기 쉬운 부위가 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도 발이 탈나면 꼼짝없이 자리보전을 해야 하니, 그만큼 중요한 부위가 또한 발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전에 사고로 발을 다쳐 고생하셨던 적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제는 두 발로 자유로이 다니실 수 있다니 참 다행입니다. 손이야 탈이 나면 조금 불편할 뿐이지만 발이 탈나면 꼼짝없이 자리보전 해야 하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지요. 그래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위가 발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