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봤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노래를 모창하면서 이 노래를 모르냐고 반문하며 밥말리란 남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장면 분명, 미국 혹은 밥 말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웃음이 터져나왔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영화속에 밥말리를 모르는 여자처럼 극장 안의 관객들은 조용. 단 한명도 밥 말리를 아는 이가 없었던듯한 느낌이었다.
밥 말리는 누구일까? 그를 만나게 된 것은 몇해전 태국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다. 전세계의 여행의 메카, 배낭여행의 메카라고도 불리우는 태국 방콕의 카오산. 카오산 거리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여행자가 넘쳐나고 그들의 취향이 가득 담긴 모든 문화가 응축되어있다. 티셔츠를 파는 가게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넘쳐난다. 그리고 한 쪽에 체 게바라와 거의 엇비슷한 수준으로 걸려있는 한 남자의 얼굴. 그가 바로 밥 말리였다. 밥 말리를 몰랐던 나는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남자는 누구길래 저렇게 체 게바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의 얼굴이 박혀진 무수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을까. 이내 답이 풀렸다. 이미 서구권에서는 알려질 만큼 알려진 레게 음악의 신. 그가 바로 밥 말리였다. 단순한 가수라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숭배하진 않을터 그에겐 뭔가 다른것이 있었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슬럼가인 '트렌치타운'에서 1945년 2월 5일, 영국군 대위와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그리고 축구와 음악에 푹 빠진 소년으로 성장했다.
"나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아버지에 대해 알지도 못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일주일에 겨우 20실링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교육을 받았다면 아마도 멍청한 바보가 되었겠지요" 그의 저항정신의 스승은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자메이카의 음악은 곧 레게음악이다. 레게음악은 한가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1838년 자메이카에서 노예해방이 이뤄지고 난 뒤, 영국으로부터의 식민경험에 짓눌린 민중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기억이 승화된 것이 레게다. 또한 레게는 시대를 넘어서 자메이카 민중, 빈민가의 슬픔과 저항을 노래한다. 레게음악은 지미 클리프가 주연한 영화 〈The Harder They Come〉(1973)을 통해 알려 지면서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밥 말리를 통해 세계 각국으로 널리 퍼졌다. 레게 음악과 함께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흑인들의 해방 사상을 담은 신흥종교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 라스타파리아니즘은 기독교와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이 결합된 종교로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를 구세주의 재림으로 여기는 신비적 요소가 강한 종교이다. 이 종교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부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 하여 부모에게 받은 머리카락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작이라는 공자(孔子)의 가르침 때문에 머리카락을 매우 소중히 여긴 우리 조상들처럼 어떠한 신체 훼손도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신도들은 자신의 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이 상투를 틀었듯 드레드록(dreadlock)이라는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영혼을 승화시킨다고 믿으며 피우는 ‘간자’라는 일종의 환간제 ‘마리화나’를 피웠다. 이 종교는 노예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이 다시 아프리카로 회귀해야 한다는 운동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밥 말리는 라스타파리아니즘에 따라 드레드록을 하고 마리화나를 피웠으며 또한 열다섯 살 무렵에는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소신를 전파할 목적으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웨일러스(Wailers)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웨일러스라는 말은 '외쳐대는 사람들'이라는 뜻. 웨일러스는 노래를 통해 혁명을 얘기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강한 신념은 급진적 정치성향으로 상승하기도 한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 그러기에 레게는 단순히 신나는 음악이 아니다. 그 음악 속에는 아주 오랜 옛날 아프리카의 초원을 누비던 자유와 노예로서의 수난과 저항의 DNA가 숨어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가 1974년에 발표한 대표적인 앨범 <내티 드레드(Natty Dread)>에 수록된 곡들은 자유라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외침이자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으로 빼앗긴 권리를 찾자는 힘찬 주장의 멜로디였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우리는 선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위선자들을 가려내고 있었죠. 긴 투쟁 동안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또 많은 벗들을 잃었죠. 위대한 미래, 당신은 지난 날들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 눈물을 닦으세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여인이여 울음을 그쳐요, 어여쁜 소녀여, 눈물을 거두어요.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그때 지는 밤새도록 통나무를 태워 불을 지폈지요. 우리는 옥수수죽을 끓여 함께 나눠먹었고요. 두 발은 나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에요. 그래서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해요. 내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잘 될 거예요. - ‘No Woman, No Cry(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Natty Dread> 앨범의 두번째곡 - 밥 말리는 이 노래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밥 말리의 행보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6년 자메이카 총선을 앞두고 사회주의 정당인 인민국가당(PNP)을 지원하는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친미우익정당인 자메이카노동당(JLP)의 사주로 의심되는 총기 테러로 부인과 매니저가 크게 다치고 자신도 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밥 말리는 약 2년 동안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대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78년에 고국으로 돌아 왔다. 혼돈에 빠진 자신의 나라에 돌아와 함께 비를 맞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국을 위해 평화 콘서트를 기획하는 등 정치 변화를 꾀했다. 또한,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레게음악을 통해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그의 기념비적 앨범인 《Legend》(1984년)는 전세계적으로 1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온 세상에 레게 음악을 알렸다. 밥 말리는 1981년 5월 11일, 안타깝게도 36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앞으로도 계속 불러질 노래를 남기고. 레게는 자메이카인이 발 디디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연주되고 있으며 세계인들에게는 자유를 상징하는 흥겨운 저항음악으로 영혼 깊숙이 입력되어 있다. |
첫댓글 또 이렇게 한명의 음악인을 알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