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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song of life Oil on canvas, Mother-of-pearl 102 x 72 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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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algia Oil on canvas, Mother-of-pearl 229 x 108 cm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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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algia 229 x 108 cm Oil on canvas, Mother-of-pearl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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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algia 229 x 108 cm Oil on canvas, Mother-of-pearl 2009~2010
내용자체가 장르를 결정지우는가, 재료자체가 장르를 결정지우는가 하는 문제는 특히 한국화 영역에선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다. 오명희의 작품에서도 먼저 이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의 작품의 내용으로선 전통적인 화조화의 맥락을 유지하고 있지만, 재료에 있어선 유채안료를 사용하고 있어 자칫 서양화가 아니냐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내용이 먼저고 재료는 이 내용을 구현해가는 수단으로서의 역할밖에 없음은 불문가지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료자체가 조형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단순한 수단으로서만 치부할 수도 없다. 재료가 수단이란 관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있는 터이기도 하다. 근래 젊은 세대층으로 내려올수록 재료의 관념은 과거와는 달리 대단히 희박해지고 있음을 목격할때가 적지 않다. 한국화니 서양화니 하는 장르의 구획자체가 무의미해진 경우를 목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림만 되면 되었지 굳이 한국화니 서양화를 구획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는 태도다. 하기야 오늘날 미술상황이란 이런 한가한 장르구분에 매달릴 일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 이미 한국화 영역에 아크릴릭이나 유채안료가 사용된지도 오래고 서양화의 주재료인 캔버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오래되었다.
오명희의 작품은 채색(전통적인 채색방법)을 위주로 한 환상적인 내용을 추구해 왔다. 파란 풀밭에 무늬가 화려한 손수건 한 장이 떨어져 있다든가, 화려한 색채의 천조각이 공중에 날라가고 있다든가 하는 환시적인 풍경으로 일관해왔다. 최근 발표된 근작들 역시 이 같은 환시적 내용의 맥락에선 크게 벗어나지 않으나 보다 화사한 색채구사와 화조화의 현대적 해석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 가득히 채워지는 매화나 벚꽃의 만개는 화면 전체를 전면화하고 있어 몹시 장식적인 요소가 강화되고 있는 인상이며, 나뭇가지에 깃든 여러 종류의 새들의 발랄한 모습은 화면을 한결 생기에 넘치게 한다. 전통적 화조화에선 볼 수 없는 대담한 화면 구성과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주는 환시적 설정은 현재와 과거가 한 화면속에 공존함이다. 전면이 만개한 꽃으로 뒤덮히고 있는 반면 뒷면은 어린시절에 보았던 (50, 60년대의 도시의 단면) 도시의 풍경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지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미묘하게 겹쳐진 화면은 시간이란 차원을 공간속에 끌어들임으로써 현실과 기억을 혼융시키고 있다. 흘러간 시간 저너머의 풍경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잠겨있는 점에 비해 화면전면은 화사한 매화나 벚꽃으로 인해 농밀한 생의 즐거움을 노래부르고 있는 느낌이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개의 장면이 시간이란 격을 두고 한 화면에 공존하는 상황은 다분히 위화감을 증폭시키는 초현실적 장치임이 분명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런 위화감의 장치를 통해 의식하의 세계, 꿈의 세계를 흥미롭게 탐색해보였다.
흑백톤으로 전개되는 배경의 풍경은 마치 빛바랜 옛 흑백 사진을 보듯 시간 저너머로 우리의 기억을 일깨워간다. 약간 건조한 회색빛 도시의 단면은 현대의 도시와는 또 다른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이 전면에 오버랩되는 화사한 꽃의 만개로 더욱 대비를 이루어주어 세월의 덧없음과 오늘의 삶이 주는 풍요로움이 극적 상황을 유도해주고 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 무대의 한 부분을 보고 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명희의 재료에 대한 혁신적 탐색과 내용에 있어 환시적 설정의 더욱 무르익어가는 전개는 그 독자적인 세계로의 확립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광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