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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재를 끌어모으다
국산 유도탄 개발 계획이 수립되면서 ADD는 단군 이래 최대의 이 단일 방위사업에 본격 착수했다. 실무 차원에서의 첫 임무는 국내외 모든 인재를 끌어모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ADD는 우선 기존 조직을 재편했는데, 홍용식 부소장 아래에 다음과 같이 6개 부(部)를 두고 책임자를 정해 유도탄 개발을 전담하도록 했다.
무유도 로켓 추진기관의 지상 연소 시험. 플래닛미디어
시스템통제단 : 이경서
추진기관부 : 목영일
기체부 : 홍제학
유도조종부 : 최호현
지상장비부 : 강인구
시험평가부 : 구상회
이렇게 조직을 정비한 ADD는 인재 영입과 교육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전신)와 각군 사관학교의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우선 영입하고, 입대를 앞둔 민간의 젊은 연구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특례보충역 제도도 만들어 시행했다. ADD 연구원으로 5년간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제도다.
미국과 서독에서 활동하던 해외 전문가들도 데려왔는데, 해외에서 들어오는 연구원들의 경우 이사 비용 일체는 물론 사택과 자가용까지 지급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현역 군인의 경우 ADD로 직장을 옮기면 월급이 몇 배나 뛰었다. 사병들 중에도 이공계 분야에서 외국 유학 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모집해 ADD 안에 근무하며 정식 연구원들을 돕게 했다.
이런 파격적인 조건과 전방위적 노력을 통해 실제로 국내외 연구소, 대학, 사관학교에서 많은 인재들이 홍릉의 ADD로 모여들었고, ADD는 이들의 재교육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1960년대에 KIST가 우리나라 과학 인재의 산실 노릇을 했다면, 1970년대에는 ADD가 그 역할을 이어받아 수행했다.
미국에서 얻어낸 선물
냉전 종식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까지 결행하던 미국은 대한민국의 ADD 창설에 대해 처음부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한국의 독자적인 무기 개발과 생산이 자신들의 국익에 보탬이 되지 않을뿐더러 동북아시아 정세에도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주한 미국대사와 국무부는 우리 정부의 기본 무기 개발을 위한 기술 지원 요청에 일관되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 육군의 'Army Research and Development' 회보에 실린 하딘의 동정. 미 육군 연구소에서 실험을 주로 담당했다. 그는 2006년 사망했다. 미 육군
반면에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체적인 무기 개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사정을 지속해 미국 측에 전달했다. 다행히도 미국 국방부는 주한 미국대사나 국무부와는 조금 다른 입장을 보였다. 한국군이 사용하는 구식 무기들은 더 이상 미국이 수리나 보수를 해줄 수 없고, 따라서 한국이 이를 위한 최소한의 기술력과 생산력은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한국이 기본 무기의 생산을 스스로 해결하게 되면 미국이 한국에 주는 방위비 지원금 역시 줄어들게 된다는 판단도 있었다.
이런 국방부의 입장이 미국 정부에 받아들여지고, 방어용 기본 무기의 생산에 한정한다는 단서를 달아 미국이 우리나라에 기술 지원을 하기로 최종 결정됐다. 그 구체적인 결과로 1972년 1월 초부터 하딘(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 하는 기술지원단이 ADD에 파견됐다. 당시 ADD는 제2차 번개사업을 추진 중이었고, 이때부터 미국의 기술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됨으로써 역설계로 만드는 모조품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설계도면에 의한 진짜 무기를 이때부터 만들 수 있게 됐다.
하딘은 또 ADD 연구원들의 미국 방산업체 연수 등도 추진했는데, 덕분에 심문택 소장과 이경서 박사가 미국 국방부 산하의 연구소들을 방문하고 구상회 박사의 미 육군 미사일연구소 연수도 진행됐다.
미국의 기술지원단이 ADD에 제공한 자료에는 미 육군의 AMCP(Army Material Commend Pamphlet)라는 것도 있었는데, 나중에 미사일의 기본설계를 위한 귀중한 참고자료가 됐다. 우리나라의 재래식 무기 개발을 위해 제공한 기술자료 패키지 역시 무기 개발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도면을 그리고 나중에 품질을 확인하는 절차 등을 수립하는 데 소중한 나침반이 됐다. 한국이 설마 유도탄 개발 계획까지 세우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자료들이 ADD에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미국이 자발적으로 건넨 선물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억지로 강요해 받아낸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국의 대학과 민간 연구소에서 나온 논문들도 초창기 미사일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됐다. 일본 도쿄대학의 펜슬로켓 개발 보고서, 미국 국립항공자문위원회의 기술논문, 일본 잡지 ‘항공기술연구’에 실린 일련의 논문들이 그런 기술자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ADD는 또 미국의 항공기 제조회사인 노스롭(Northrop)에 3명의 연구원을 연수생 신분으로 파견해 항공기 관련 기술을 익히도록 했는데, 이들은 낮에는 다른 직원들처럼 생산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관련 자료들을 복사해 책으로 만들고 이를 몰래 ADD에 보냈다. 연구원이자 기술자인 동시에 스파이이기도 했던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은 2년 만에 갑자기 중단됐다. 하딘을 단장으로 하는 지원팀이 한국에 너무 많은 기술과 자료를 넘겨주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본격적으로 백곰 개발을 시작한 1974년 이후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기술지원을 받을 길이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대전기계창과 안흥측후소
국산 유도탄 개발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핵심적인 2개의 연구시설이었는데, 유도탄의 기체와 고체연료를 만드는 연구소가 하나고, 완성한 유도탄의 발사 시험을 위한 시험장이 다른 하나다. 연구소 위치로 가장 먼저 검토된 곳은 김종필 총리가 추천한 지금의 과천 서울랜드 자리였다. 나중에 경남 양산의 철마지구가 추가되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방위산업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M16 생산 공장이 들어선 곳이다. 여기에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추천한 대전 대덕지구가 추가됐다.
대전기계창 부지로 결정된 수남리 전경. 플래닛미디어
적절한 연구소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 이경서 박사와 강인구 박사가 현지답사에 나섰는데, 과천은 휴전선에서 너무 가깝고 철마지구는 서울에서 너무 멀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위치상 그나마 적절한 곳이 대덕인데, 이 지역은 평지가 너무 많고 추진기관 시험을 위해 꼭 필요한 계곡지형이 너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
대덕지구를 돌아본 두 사람은 다소의 실망감을 안고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를 따라 상경하는데, 우연히 깊은 산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과 계곡을 보게 됐다. 마침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을 만나 인근의 지세를 물었고, 실제로 계곡 안으로 들어가 최적의 연구소 부지를 찾아내게 됐다. 원하던 계곡 지형도 많고 국도에서 가까우면서도 높은 산으로 사방이 막혀 보안에도 더없이 유리한 곳이었다.
결국 연기군 수남리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유도탄 연구와 생산을 위한 대전기계창을 건설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곳은 진주강씨의 집성촌이어서 강인구 박사가 마을 주민들의 이주를 설득하는 역할도 맡아서 해냈다. 곧이어 연구소 건설을 위한 공사가 본격 시작됐는데, 입구에는 ‘신성농장’이라는 위장 팻말을 크게 걸어놓았다. 부지 공사를 맡은 업체 이름이 신성건설이어서 그런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한편 유도탄의 발사 시험을 위한 시험장도 애초에는 포항의 장기곶을 검토하다가 기계창이 대전 인근으로 결정되면서 태안의 안흥에 건설하게 됐다. 이곳에는 기상 관측 시설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그 이름을 ‘안흥측후소’라고 붙였다. 나중에 이 발사시험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사택으로 아파트도 세우게 되는데, 이 아파트는 지금도 측후소아파트로 불린다.
경운기 공장에서 만든 홍능 1호
1973년 1월 청와대에 올라간 ‘항공공업 사업계획서’가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거쳐 다시 ADD에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으로 하달된 것은 1974년 5월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재가에 무려 17개월 정도가 걸린 것이다. 이 사이에 ADD에서는 연구원들의 개발 훈련과 기술 축적을 위해 사거리 40㎞ 정도의 무유도 로켓 개발을 추진했다. 본격적인 유도탄 개발에 앞서 일종의 워밍업으로 추진한 사업이다.
홍능 1호 발사를 앞둔 ADD의 간부와 연구원들. 플래닛미디어
무유도 로켓의 이름은 당시 ADD가 위치해 있던 홍릉에서 따와 ‘홍능 1호’로 하기로 했다. 홍재학 박사가 개발 책임을 맡았고, 안동만이 기체 외형과 구조 설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로켓의 외형을 그리는 것은 주로 이론적인 부분이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완성된 도면에 따라 실제로 로켓을 만드는 것은 국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켓 제작에 필요한 적정한 합금 등의 재료가 없는 것은 물론 정밀가공을 위한 기초 장비조차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최초의 모형은 합금을 써야 할 부품을 비교적 가공이 쉬운 알루미늄으로 만들고, 기체 내부를 비워둔 채 외형만 제작해 조립하기로 했다. 업체 2곳을 시제업체로 선정했는데, 우선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알루미늄 주조업체인 서울엔지니어링이 선정됐다. 다른 한 곳은 동체를 가공할 업체로, 수소문 끝에 경남 진주에서 경운기를 만들던 대동공업이란 곳을 찾아냈다.
시제업체가 선정됐다지만 도면만 넘기면 되는 게 아니었다. 연구원들이 업체에 상주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난생 처음 보는 부품을 만들고 직접 쇠를 녹이고 잘라 붙여야 했다. 당시 서울과 진주는 차로도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여서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서울에서 알루미늄으로 만든 부품들을 진주까지 실어날라 조립했다. 여기저기 틈과 구멍이 생기면 필러로 대충 메우고, 합금을 정밀 가공해 만들 부품도 일단은 구리를 녹여 모양만 흉내 내 만들었다. 그렇게 홍능 1호의 첫 모형이 1973년 연말에 완성됐고, 이 모델은 한동안 국방부장관실 앞에 전시되기도 했다.
1974년엔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발사 가능한 로켓 제작에 도전하는데, 연구원들은 다시 천리 길 진주를 밤낮으로 오가며 직접 쇠를 깎고 다듬어 기체를 만들고, 연구소 공작실에서 분해조립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ADD는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던 각종 계측기구와 치공구들을 들여오고, 여러 합금의 주조 과정을 개발하고, 고체연료 생산에 필요한 실험실 수준의 시설들도 완성했다. 이들은 책상에 앉아 도면이나 그리는 연구가 아니라 공장에서 노동자들도 꺼리는 위험천만한 작업을 직접 해야 했고, 배울 곳이 없었으므로 모든 것을 실험을 통해 직접 개발하고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홍능 1호의 실제 비행 시험은 1974년 12월 실시됐고, 시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연구원들은 잘만하면 실제로 중장거리 지대지 유도탄도 개발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하지만 지대지 유도탄 개발은 무유도 로켓 한두 개 만들어본 자신감만으로 덤빌 수 있는 과제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유도탄의 핵심기술을 모두 틀어쥔 최고 선진국이자 우리나라의 공격형 무기 개발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미국의 감시망까지 점점 더 조여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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