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公 文谷 諱壽恒 領議政 正一品
(문충공 문곡 휘수항) 영의정 정 1품
公(공)의 字(자)는 구지(久之), 號(호)는 문곡(文谷), 시호(諡號=文忠)이며 仁祖(인조) 7년(1629) 己巳(기사) 8월 1일 7형제 중 세째 아들로 출생하였다.玄祖(현조)는 庶尹公[(서윤공) 平壤庶尹(평양서윤) 諱璠휘번)]이고, 高祖(고조)는 信川公[(신천공) 신천군수(信川郡守) 諱生海(휘생해)]이며, 曾祖(증조)는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諱克孝(휘극효)]이니, 할아버지는 文正公[(문정공) 文衡(문형) 淸白吏(청백리) 左議政(좌의정) 贈領議政(증영의정) 淸陰(청음) 諱尙憲(휘상헌)]이요, 아버지는 同知公[(동지공)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영의정(贈領議政) 휘광찬(諱光燦)]과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니, 처조부(妻祖父)는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김제남(金悌男)으로, 당대에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가문(家門)의 따님이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휘 수증(壽增)이 백씨(伯氏)이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휘 수흥(壽興)은 중형(仲兄)으로, 당대에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가문(家門)에서 仁祖(인조) 7년(1629) 己巳(기사) 8월 1일 7형제 중 세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서 원주(原州)에 계신 외할머니 댁에서 1년쯤 있다가 6살 때 할아버지가 계시는 안동에 내려가 16살까지 학문을 닦고 한양(漢陽)으로 올라와 仁祖(인조) 24년(1646) 丙戌(병술) 18살 때 반시(泮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어 진사시(進士試) 또 장원(壯元)하여 진사가 된 뒤, 효종 2년(1651) 신묘 9월 18일 상이 문묘文廟)에 배알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김수항(金壽恒) 등 7인을 뽑았고, 방방(放榜)할 때에 문과 장원(文科狀元)한 사람은 23살에 김수항(金壽恒)이며 특별히 어촉(御燭)을 하사(下賜)하였다.
그 다음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 병조좌랑(兵曹佐郞) ․ 사서(司書) ․ 경기도사(京畿都事) ․ 지평(持平)을 거쳐 효종 4년(1653) 계사 6월 14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지내고, 같은 해 11월 3일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9월 17일 춘당대(春塘臺)에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5등으로 합격하여 말을 하사(下賜) 받았고, 같은 해 9월 21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 言), 孝宗(효종) 5년 갑오(1654) 7월 19일 이조정랑(吏曹正郞), 같은 해 10월 4일 겸 중학 교수(兼中學敎授), 孝宗(효종) 6년(1655) 乙未(을미) 1월 26일 교리(校理), 같은 해 2월 13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8월 12일 남용익(南龍翼) ․ 이은상(李殷相) ․ 홍위(洪葳) ․ 이단상(李端相) ․ 안후열(安後說)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家讀書)를 하였다.
같은 해(1655년) 9월 25일 부교리(副校理), 같은 해 12월 10일 이조정랑 (吏曹正郞), 孝宗 7년(1656) 丙申 윤5월 9일 응교(應敎), 같은 해 7월 18 일 사인(舍人), 효종 8년(1657) 정유 2월26일 승지, 같은 해 5월 26일 이조참의(吏曹參議), 같은 해 10월 4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해 11월 6일 궁가(宮家)의 하인(下人)들 폐단(弊端)을 막아 달라는 상소, 같은 해 12 월 26일 승지(承旨)를 맡았다.
孝宗 9년(1658) 戊戌 6월 5일 승지(承旨), 7월 27일 부제학(副提學), 顯宗즉위년(1659) 己亥 5월 11일 찬집청 당상(撰集廳 堂上)으로 효종비(孝宗妃=인선왕후(仁宣王后)의 비에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차(昇差)하였다.
顯宗 1년(1660) 庚子(경자) 1월 16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달 28일 동지성균(同知成均), 같은 해 3월 10일 도승지(都承旨), 같은 해 5월2일 승지(承旨)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뒤 비가 와서 숙마(熟馬) 1필씩 하사(下賜)받았다.
같은 해 7월13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같은 해 8월 23일 예조참판(禮曹參判), 같은 해 9월1일 부제학(副提學), 11월 9일 이조참판(吏曹參判), 顯宗(현종) 2년(1661) 辛丑(신축) 4월 22일 중전 책례 옥책 제술관(中殿冊禮玉冊製述官)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 겸동지경연(兼同知經筵), 같은 해 윤7월 15일 겸동지의금(兼同知義禁), 같은 해 10월 16일 동지춘추(同知春秋), 顯宗(현종) 3년(1662) 壬寅(임인) 5월 5일 도승지(都承旨), 같은 해 5월 6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5월 25일 도승지(都承旨), 같은 해 7월 4일 이조참판(吏曹參判), 같은 해 11월 9일 청나라 사신(使臣) 원접사(遠接使)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 10일 지춘추(知春秋), 玄宗(현종) 4년(1663) 癸卯(계묘) 4월 27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5월 25일 예조판서(禮曹判書), 같은 해 7월 5일 이조판서(吏曹判書), 같은 달 11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11월 13일 이조판서(吏曹判書), 顯宗(현종) 5년(1664) 甲辰(갑진) 예조판서(禮曹判書), 같은 해 9월12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顯宗(현종) 6년(1665) 乙未(을미) 1월7일 대제학(大提學), 같은 해 12월 14일 형조판서(刑曹判書), 顯宗(현종) 7년(1666) 丙午(병오) 10월 8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해 12월 27일 이조판서(吏曹判書), 顯宗(현종) 9년(1668) 戊申(무신) 1월 10일 대사헌(大司憲), 같은 달1월 22일 예조판서(禮曹判書), 현종 11년(1670) 경술 3월 18일 지경 연(知經筵)을 제수하였다.
같은 해 5월 17일 우참찬(右參贊), 같은 해 6월 9일 예조판서(禮曹判書), 顯宗(현종) 12년(1671) 辛亥(신해) 1월 25일 대제학(大提學), 같은 해 3월 22일 판의금(判義禁)․, 顯宗(현종) 13년(1672) 壬子(임자) 5월 16일 44세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 되었다.
같은 해 6월 3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같은 해 11월 30일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이때에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이 미움을 사서 물러남을 보고, 남인(南人)의 재상(宰相) 허적(許績)을 탄핵한 대간(臺諫)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임금의 미움을 사서 顯宗(현종) 14 년(1673) 癸丑(계축) 9월 18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체직(遞直)되었다.
바로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顯宗(현종) 15년(1674) 甲寅(갑인) 3월 5일 북경에서 돌아 온 뒤, 같은 해 7월 26일 좌의정(左議政)에 승차하였다.
肅宗(숙종) 즉위년(1674) 甲寅(갑인) 8월 18 현종대왕(顯宗大王)이 승하(昇遐) 한 뒤 체직(替直) 상소를 여러 번 올리고 교외로 나아가 등청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일 우의정(右議政)에 좌천, 肅宗(숙종) 1년(1675) 2월 18일 다시 좌의정(左議政), 같은 해 7월 17일 원지유배령(遠地流配令)이 있었는데 이때에 죄목은 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종실(宗室) 복창군(福昌君) 정(楨)과 복선군(福善君) 남(柟) 형제의『추문=궁중여인(宮中女人)을 능욕하고 사생 활이 난잡하여 세간에 원성이 많았던일』을 들어 그 처벌을 주장했다가 집권파(執權派) 남인(南人)의 미움을 받아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다.
肅宗(숙종) 2년(1676) 丙辰(병진) 7월 27일 철원(鐵源)으로 이배(移配)되어, 같은 달 12일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시작 되니 남인(南人)이 실권하자 肅宗(숙종) 6년 (1680) 庚申(경신) 4월 3일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된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남인(南人)들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宋時烈) ․ 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이고, 그 후 8년간 영의정(領議政)으로 재직하고 肅宗(숙종) 13년(1687) 丁卯(정묘) 3월 13일 영의정(領議政)을 사직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직,되었다.
같은 해 태조어용(太祖御容)을 전주로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기사사화(己巳士禍)=『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가 낳은 왕자 윤(昀=경종)이 아직 강보(襁褓)에 싸여있고 정비(正妃) 나이 아직 아직 젊은데 더구나 후궁(後宮)의 소생(小生)을 세자(世子)에 책봉하려하자 송시열과 함께 시기상조라(時機尙早)고 반대했고, 숙종은 이때에 남인을 지지하는 소의(昭儀)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힘을 얻어 서인(西人)을 물리치고 남인에게 정권을 맡겨서 일어난 사화(士禍』가 일어나, 肅宗(숙종) 15(1689) 己巳(기사) 윤 3월 21일 양사에서 합계하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위리안치(圍離安置)하라는 비답 있어 진도(珍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이때 남인인 예조판서(禮曹判書) 민암(閔黯)을 비롯하여 판서(判書) ․ 참판(參判)등 남인경재(南人卿宰) 수십인(數十人)이 공격하고 사헌부(司憲府) ․ 사간원(司諫院)도 합계(合啓)하여 마침내 같은해 4월 9일 회갑(回甲)을 불과 네 달을 앞두고 향년 61세로 사사(賜死)되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경신출척(庚申黜陟)때 남인(南人)의 옥사(獄事)를 다스 릴 때 위관으로 소론(少論)의 반대에도 남인재상(南人宰相)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하여 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명분이 있으나 그것은 숙종(肅宗)의 뜻을 반대했던(원자책봉문제) 관계로 처벌 한 것을 사록(史錄)은 남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公(공)은 청음상공(淸陰相公)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이어 계승하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문인(門人),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종유(從遊) 하였고, 특히 우암(尤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 한때 사림(士林)의 종주(宗主)로 추대 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외척(外戚)=곡운공(谷雲公)의 손녀(從孫女) 영빈(寧嬪)을 말함』과 가까운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이기 때문에 소론(少論)의 명사(名士)로 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변려문(騈儷文)은 당대에 제일인자로 손꼽혔고 가풍(家風)을 이온 필법(筆法)은 단아하여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는 물론 초서(草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사후에 세평(世評)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 절의를 지켰다고 찬양했는데,
첫째는 남인의 역모(逆謀)를 꺾고 기강을 세웠고,
둘째는 소론(少論)의『이론(異論)=남인(南人)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더러 화(禍)를 당하면서 후회하지 않은점이며,
셋째 윤증(尹拯)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사(背師)한 죄를 통렬히 배척 하여 선비의 갈 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준 것 등인데 이 말은 노 론 쪽의 이야기이다.
소론측 에서는 송시열과 윤증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朝廷)을 시끄럽게 하여 이로 인하여 사림을 분열 하였다는 비난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우암(尤菴)과 윤증(尹拯)은 다 같이 정승(政丞) 반열에 있던 사람들인데 주상이 아니면 해결하지 못 할 사인이다.
남을 헐 뜻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든다.
拜位(배위)는 정경부인 安定羅氏(안정나씨)로 서기 1630년 庚午(경오) 人造(인조) 8년에 태어나, 서기 1703년 癸未(계미)肅宗(숙종) 29년 6월 22일에 卒(졸)하니 享年(향년) 74세였다. 아버지는 목사 星斗(성두)이고, 祖(조)는 참의 萬甲(만갑)이며. 증조는 輔德(보덕) 級(급)이니, 외조는 판서 金南重(김남중)으로 본은 경주이다.
膝下(슬하)에 6男(남) 1女(녀)를 두니, 1남은 영의정 몽와 昌集(창집)이고, 2남은 대제학 예조판서 농암 昌協(창협)이며, 3남은 증이조판서겸 제주 시호 文康(문강) 삼연 昌翕(창흡)이니, 4남은 증이조참의 노가재 昌業(창업)이요, 5남은 증이조판서 예빈사 주부 포음 昌楫(창즙)이고, 6남은 昌立(창립)이며, 1녀는 아버지가 군수인 李涉(이섭)으로 전주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金村(금촌) 子坐(자좌) 合窆(합폄)이고, 묘지는 우암 송시열이 撰(찬)하였으며, 묘갈과 用誌文(용지문)은 백형 곡운이 쓰고, 묘표는 아들 창흡이 撰(찬)하였다.
肅宗(숙종) 20년(1694) 甲戌(갑술) 4월 2일 사면복관(赦免復官)되었으며, 高宗(고종) 23년(1886) 丙戌(병술) 현종묘정(顯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진도봉암사(珍島鳳巖祠) ․ 영암녹동(靈巖鹿洞書院) ․ 영평옥병서원(永平玉屛書院) ․ 양주석실서원(楊州石室書院) ․ 전주호산사(全州湖山祠)에 배향(配享)되었고 저서(著書)는 문곡집(文谷集) 28권과 갑진북정록(甲辰北征錄)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방목 문곡집 송자대전 당의통략
안동김씨세보
[출처] 안동김씨 문곡 김수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