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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마지막증거와사도요한의증거
요한복음 3:22-36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땅 시골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함께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믿는 자들이 불어났고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한편, 3장 22절과 4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셨을 뿐, 실제로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4장 2절은 이렇게 정확하게 진술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요 4:2).
그런데 세례 요한 역시 애논이라는 곳에 물이 많기 때문에 그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요 3:23-23).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뜻은 세례 요한이 현재 사역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중에 헤롯 안티파스 왕이 그의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자 간음 죄를 지은 것이라며 비난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여자의 딸 살로메가 헤롯 왕의 생일 날에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때 헤로디아는 그녀의 딸 살로메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서 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명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아무튼 지금 상황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고 애논이라는 곳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단 강 서편에서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예수님은 여리고 근처에서 사역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 곳에서 물 세례가 진행되었습니다. 두 명의 랍비가 있었고 두 그룹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한 랍비는 나사렛 예수님이고 다른 랍비는 세례 요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두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가졌고 모이는 사람은 점점 불어났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느덧 질투심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영생의 문제보다는 이 땅에서의 영광과 기득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이 요한의 제자들과 정결예식에 대하여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26절을 보면, 이 유대인은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이 베푸는 물 세례가 세례 요한이 베푸는 물 세례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쪽으로 모이는 것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관련되면서 죄사함을 가리키는 정결 예식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떤 유대인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시켜 베푸신 물세례 역시 정결 예식과 관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유대인이 정결 예식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과 논쟁할 근거가 없습니다.
한편, 구약의 정결 예식과 맞물린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베푼 세례는 예수께서 십자가 속량을 치르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새언약의 세례와 다릅니다. 구약의 정결 예식과 연관된 물세례는 다만 하나님의 어린양의 속량 및 부활하여 살아계신 어린양을 믿고 의지하여야 함을 가리키는 예표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우리도 어린양의 피, 즉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어야 하는 부정한 죄인이며 또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는 멸망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기득권에 큰 관심이 있던 요한의 제자들은 정결 예식 및 물 세례가 가리키는 메시야를 망각하고 사람 숫자만 따지면서 당장 자기들의 랍비인 세례 요한에게 가서 고자질을 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 3:36).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기득권에 관심이 큰 지라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도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지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사람들이 다 몰린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사람들이 우리 쪽이 아니라 저 쪽으로 모이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안달이 나서 속이 상한 상태에 있습니다.
자, 예수님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는데 그들의 랍비인 요한의 명성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의 스승을 따르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자기들의 인기와 기득권과 영광이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질투하며 시기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주시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질투 때문에 멀리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미 그들이 지극히 존경하는 세례 요한이 누차 나사렛 예수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였음에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정에 연연하여 세례 요한에게 충성하는 척하니 이 얼마나 한심합니까? 사실, 그들은 요한을 지지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군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영광을 누리고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고 싶은 마음이 그들의 진심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대답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기억하며 그저 하나님 앞에서 황공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생명을 주셨고 소명을 주셨으며 직분과 사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허락하셨고 제자들까지 많이 붙여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 한 순간도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도, 교회도, 직업도, 가정도, 건강도, 재물도, 교회에서의 직분도, 지식도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놓쳤습니다. 인간이 힘을 모아 쟁취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기 질투하여 상대를 무너뜨리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과 현상만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낙심과 불평과 시기 질투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무엇보다 세례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 사명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또다시 강조하며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보냄을 받은 자라고 너희에게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 나의 제자인 너희들 역시 이 사실을 증언해야 하느니라”(요 3:28).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 역시 세례 요한처럼 나사렛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따랐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은 진심으로 그들이 그가 가리키는 나사렛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진심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은 단지 메시아보다 앞서 나아가 수종 드는 선구자일 뿐이라고 또다시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3)라고 외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례 요한은 어리석고 교만한 제자들이 그가 받은 사명을 더 이상 망각하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합니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결혼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혼식에는 신랑과 신부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랑의 친구"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신랑의 친구’는 신부를 신랑에게 데려가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결혼식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것도 ‘신랑의 친구’가 감당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결혼식을 맡고 있는 신랑의 친구가 가장 기뻐하는 때는 피로연을 포함한 결혼식이 다 마친 후 신랑과 신부가 ‘신랑의 친구’를 찾아와 고맙다고 말하는 때였습니다. 그때 신랑의 친구는 가장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 마칠 때 임할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그를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면 세례 요한은 한없이 기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신랑과 신부의 결혼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는 ‘신랑의 친구’일 뿐입니다. 그의 기쁨은 주인공이 되는데 있지 않고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와의 원만한 결혼을 성사시키는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주된 역할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가장 위대한 말을 남깁니다. 모든 주의 사역자들과 주의 백성이 마음에 새겨야 할 명언을 남깁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런데 세례 요한이 이 말을 할 때 원어를 보면 (데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즉, “반드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뜻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받아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높이며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에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혔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소천하게 됩니다. 그 후 예수님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로서 세례 요한은 그의 호흡이 마치는 순간까지 “주의 길을 준비하라”(눅 3:4)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 역할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모든 구약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드러내어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며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신부된 우리를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내실 것이며 그후 신부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을 것이며 죄사함뿐만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오직 예수님만이 죄에 완전하게 승리하시고 십자가에서 속량하신 구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위한 그의 십자가 희생만이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 수 있는 우리의 죗값입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죄인들을 위해 중보자가 되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힘입고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주의 백성의 구원에 대한 모든 약속의 성취로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처럼 세례 요한에게서 시선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그들의 눈을 고정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오직 구주이신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신뢰해야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님을 살아계신 구주로 믿으시고 그분을 마음 속에 구주와 왕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내 죗값을 대신 치르셨다고 믿으십니까? 오늘 이 아침에 다시 한번 복음을 확인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을 때만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씻어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생을 얻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이 땅에 속한 기득권 때문에 어리석음과 교만과 질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지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놓친 신자들의 모습은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을 소홀히 합니다. 그 후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쓸데없는 사소한 것에 온 마음을 쏟으며 시기하고 분노하며 다툽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의 마음 안에는 교만이 쌓이고 정욕과 어리석음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세례 요한의 고백을 마음에 새길 때 교만과 어리석음과 썩어질 것에 대한 질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우리의 삶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모토를 새겨 놓읍시다. 그래서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더 예수님 중심으로 살며 예수님을 존귀하게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허영심과, 힘과 명성 또는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그분을 높이도록 부름을 받았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능력과 수고와 업적을 높이고 자랑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여야 합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겸손한 신자입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은 그리스도를 높일 필요성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높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당신 중심으로 만들어라. 자신을 왕좌에 앉혀라"라고 부추깁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우리는 종종 어둠의 음성에 굴복하고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끝은 언제나 수치와 미움과 질투와 비참입니다. 주께서 명하신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과는 무관한 헛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자가 되었더라도 여전히 지독한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죄라는 배신자가 숨어 있습니다. 그 배신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간교함과 교만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정욕과 기만입니다. 만일 이러한 죄에 물들게 되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기 위해 수군거리게 됩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어디서든 주인공이 되고자 온 마음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덧 마귀의 모습을 닮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겸손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은 참된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 무엇이 겸손입니까? 그것은 내 영광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겸손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는 남을 섬길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얻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능력은 하늘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흡이 마치는 순간까지 세례 요한의 이 위대한 삶의 좌우명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제 31절부터 36절을 살펴볼 텐데, 이 부분은 사도 요한이 말한 내용입니다.
사실 성경 학자들 사이에는 31-36절을 누가 말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31-36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구약 선지자들이 말하는 내용과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사도 요한의 대표적인 표현일뿐더러 구약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실 35절과 36절의 내용은 사도 요한이 “아버지와 아들”로 증언하는 복음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러한 패턴은 사도 요한의 글에 반복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2-23).
또한 요한1서나 2서에서도 이러한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 선지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많은 사도들 중에서도 특히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하는 주된 패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이 31-36절도 언급한 것이라고 하면 3장 26절의 상황과 32절의 내용이 서로 어긋납니다. 26절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러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 3:26).
그런데 32절은예수님을가리켜누군가가말한것인데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라고 합니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간다고 불평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이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이러한 근거로 저는 31절부터 36절은 새언약 시대의 사도인 사도 요한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마지막 언급을 기록한 후에 독자들에게 말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32).
요한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말하고 뒤에서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이전 설교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에서 하늘은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낙원이라고 불리는 삼천층 하늘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이며 또한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참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 곧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십니다. 이는 창조주로서 만물의 주권자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친히 보고 들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창세 전에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십니다. 이러한 증언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5-17)
그 외의 인간들은 땅에서 난 자들로서 땅에 속하여 있으며 오직 땅에 속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땅에서 난 이”는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과 대조되는 일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신 예수님과 비교될 수 없으며 또한 결코 땅을 벗어나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전하시는 복음은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또한 복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은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계시로서 오직 만물 위에 계시며 또한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만이 정확히 아시기에 그만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과 관련된 모든 구속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오시는 이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경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오신 나사렛 예수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어야만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실 십자가 속량 및 부활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되는 것이요, 죄사함 및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지만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이 말은 땅에 속한 자들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의 증언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2절과 33절을 함께 읽으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지 않지만 소수가 받아들일 것을 알려줍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러나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이로 보건대, 모든 세대마다 믿는 자들보다 안 믿는 자들이 항상 더욱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언제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의 무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러나 오직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의 증언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사도 요한이 1장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9-13)
이처럼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는 자들은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인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이 하늘로부터 오신 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 또한 그분에 대해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모든 약속이 진실하고 참되다는 사실을 믿고 확인하고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성취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 5:9-10)
[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8 나를저버리고내말을받지아니하는자를심판할이가있으니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느니라
](요 12:44-49)
결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고 믿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참된 분이심을 인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어서 계속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사실을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8:26-28)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0-11).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그분께는 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의 ‘인자’라고 불릴 때가 많았는데 주의 인성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으로 무한하게 부음 받으셨습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과 제사장들에게 부어졌던 하나님의 영은 제한적이고 간헐적인 것과는 달리 예수께는 항상 변함없이 하나님의 영이 한없이 충만하게 부어진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부으심으로 인해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완전하게 이기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셨으며, 지혜와 거룩함이 한이 없으셨습니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함으로 이 땅에 오실 때부터 한량없이 성령으로 충만하셨고, 나아가 주께 맡겨진 구원 사역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의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넘치는 하나님의 영의 무한하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무한하고 영원하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때 그분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량없이 무한하게 넘치셨습니다. 그분은 신성으로는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의 신격 안에서 성령과 무한하게 하나이신데, 그분의 인성은 이 땅, 곧 시공간 속에서 성령으로 한량없이 넘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은 한없이 신비하고 놀라운 분이시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 진리를 언급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5-36).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 아들에게 주셨다고 하니, 여기서 아들은 시공간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독생하신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시기에 만물을 받으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공간에 그리스도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받으셔야 만유의 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언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만물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이후입니다.
[
6 그(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그리고 이에 대한 예언은 구약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 7:13-14)
그러므로 현재 만물의 주인은 나사렛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실제로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며 얻어내신 죄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영광에 이른 생명’을 말합니다. 현재 예수님은 영광에 이르신 상태에 있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와 연합하면 영생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를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게 거룩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죄에 대해서도 무한한 분노를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도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서 지극히 공의하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아버지와 함께 극도로 분노하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과 어린양의 심판의 날이 이를 것입니다. 그때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의 문턱에서 한없는 공포에 휩싸일 것입니다.
[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5-17)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들은 주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될 것입니다(참조, 계 16:19).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계 14:10-11).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오, 성도들이여!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기 바랍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참조, 골 3:5-6).
그리고 우리가 정녕 알 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엄중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6-8).
사랑하는 여러분!
지옥은 지금도 그 무섭고 더러운 끔찍한 영향력을 이 땅에 사는 죄인들에게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는 인간들의 영혼에 지옥은 실제할 것이며 먼 훗날 주의 재림 때에는 지옥에 있던 영혼들이 수치의 부활로 일어나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
그러므로 더 이상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거룩한 삶과 의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 역시 더욱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기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흠도 점도 없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아내로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영광의 신부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첫댓글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