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김대중 대통령, 민주당 총재직 사퇴 선언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11월 8일 10·25 재·보선 패배 이후의 민주당 내분 사태와 관련, 경제와 남북관계 등 국정에 전념하기 위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 선언은 대선후보 경선을 둘러싼 민주당 내 권력투쟁과 함께 여야관계, 정부 대 정치권 관계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김 대통령은 이날 오후 민주당 당무회의에 친서를 보내 이같이 사퇴 의사를 밝히고, 사퇴서를 제출한 12명의 최고위원 중 총재의 권한을 대행할 한광옥(韓光玉) 대표를 제외한 11명의 최고위원의 사표를 수리했다. 김 대통령은 이들 11명의 최고위원을 당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 이와 함께 당직자들의 사표도 전원 수리하고, 내년 초에 있을 전당대회를 포함한 정치일정과 중요 당무를 처리할 비상기구를 과도체제로 구성토록 했다.
여론은 김 대통령이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뒤 총재직을 포기했던 전력(前歷)과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복귀했던 전례를 환기시키며 총재직 사퇴의 진의(眞意)를 반신반의했지만, 정파적 입장을 벗어나 국정에 임할 경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했다. /조선
[1997년] 세계최대 중국 삼협댐 물막이공사 완성
세계 최대인 중국 삼협댐 공사중 물막이 공사가 1997년 11월 8일 완성됐다. 물막이 공사는 강 양쪽에서 토사를 부으며 전진, 강 중심에서 맞닿게 하는 작업이다.
중국정부는 물막이 공사완성 후 바로 시작할 댐 공사비로 2천억달러를 예상했다. 중국인들이 장강으로 부르는 이 양자강 물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면은 중국 중앙 CCTV를 타고 12억 중국인들에게 중계됐다. 삼협댐 건설은 `물속의 만리장성 공사`라고 불릴만한 대역사였다.
1919년 손문이 처음으로 안을 냈고, 1956년 모택동, 1958년 주은래, 1980년 등소평 등이 의욕을 보였으며, 1992년 4월 중국정부의 결정으로 현실화됐다. 2009년 댐이 완성되면 높이 185m, 길이 2331m 총출력 1820KW, 저수량 393억입방미터로 저수량, 발전용량 모두 세계최대가 된다. 또 양쯔강 중상류 지역에는 평균 너비 1.1Km 길이 6백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삼협댐은 당시 기후-환경변화와 수질의 변화, 토사침적 등의 문제로 국내외 환경전문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조선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비핵화선언 발표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1980년 이후 불거지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11월 8일 '이 시각 우리나라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북한의 핵 포기를 촉구했다.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연구를 계속하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지만 발등의 불인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괴로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남북은 이어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와 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아시아와 세계 평화 안전에 이바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재확인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반도비핵화선언은 남북이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한반도 핵위협 제거의 근거를 마련했다.
남북은 이 선언에서 핵 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할 것과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고 한반도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사찰을 실시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북미 간에 전쟁 직전의 긴장관계가 조성되면서 사문화되고 만다.정보관리부 /매일신문
[1990년] 1만여명의 안면도 주민, 핵폐기물 저장시설 설치 반대시위
1990년 11월 8일 안면도에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안면도 주민 1만여명이 이날 오전부터 밤 늦게까지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안면지서와 예비군 무기고가 불에 타면서 폭음이 진동하고 내뿜는 연기로 안면도 일대 상공은 한때 화염에 휩싸였고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주민과 학생 등 1만여명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안면읍 버스터미널 광장에 모이기 시작, 오전 11시쯤 핵처리장 설치반대 궐기대회를 가졌으며, 안면도내 16개 초중고 학생 3천7백여명 중 3천여명이 등교를 하지 않고 집회에 참석했다. 일부 주민은 읍사무소와 파출소를 점거하는가 하면 시위상황을 살피러 현장에 있던 군청직원 5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경찰은 시위가 과격해지자 1천1백여명의 경찰을 투입, 시위대들이 점거하고 있던 읍사무소를 되찾았다.
경찰이 투입되자 시위대는 도로에 설치했던 드럼통과 폐타이어 등 바리케이드에 불을 질러 읍 전체가 폭발음과 연기 등으로 30여분간 검은 연기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안면도에 핵폐기장을 설치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과기처 장관과 충남도경국장이 경질됐다. /조선
[1984년]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제14차 우주여행 시작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Space Shuttle Discovery, 궤도선 제식번호: OV-103)은 미국 NASA의 우주왕복선 중에서 현재 운용중인 3대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는 애틀랜티스와 인데버이다.)
1984년에 초도비행을 했다.
실제 임무를 수행한 3번째 궤도선이며, 현재 운용되는 3대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디스커버리호는 연구와 국제 우주 정거장 조립 임무에 사용되고 있다.
최초비행일 : 1984년 8월 30일 ~ 1984년 9월 5일
최후비행일 : 2009년 8월 28일 ~ 2009년 9월 11일/위키백과
[1965년] 영국, 사형제 폐지
1965년 11월 8일 영국이 사형제 폐지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상·하원을 통과한 사형폐지법안에 서명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형벌의 기본원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농경시대엔 범죄자를 가둬둘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했다. 흉악범이라도 탈출하면 오늘날 같은 추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불안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사형은 불가피했다. ‘마녀 광풍’이 불어닥친 중세 때는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등 수많은 공개처형이 있었다. 18세기 유럽을 휩쓴 계몽사상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사형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는 저서 ‘범죄와 형벌’(1765)에서 사형제 폐지를 처음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코스타리카 등 여러 중남미 가톨릭 국가는 19세기에 사형제를 없앴다. 사형제 폐지 목소리가 높아지고 많은 국가에서 제도 폐지로 이어진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61년 국제사면위원회(국제앰네스티)가 출범했고 1977년 사형제도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스톡홀름 선언에 16개국이 서명하면서 사형제 폐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은 사형제 폐지를 회원국 가입 선결조건으로 규정한다. 터키는 EU에 가입하려고 2002년 8월 사형제를 없앴다. 한국에서는 1989년 사형 폐지 운동협의회가 결성된 뒤 사형제도 폐지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김영삼 정부 말인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집행이 이뤄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형집행이 없었다. 한국은 2007년 말 앰네스티가 인정하는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가 됐다. 그래도 사형제의 존폐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킨다. 죽음으로 죄를 갚게 해야 할까, 갱생 기회를 줘야 할까. 존치론자는 흉악범 사형이 국민의 법 감정과 사회정의에 부합하고 범죄 억제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폐지론자는 국가에 의한 제도적 살인이며 사형제가 있는 국가라고 해서 흉악범죄가 줄지 않았다고 맞선다. 또 오판의 여지, 정치적 악용 우려도 제기한다. 앰네스티는 2006년 전 세계에서 집행된 사형의 91%는 중국과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수단, 미국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2007년 유엔 총회는 사형 집행 중단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동아닷컴
[1950년] 세계 첫 제트전투기 교전
6·25전쟁은 한민족에게는 큰 비극이었지만 전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공중전에 관한 것이다. 1950년 11월 8일 압록강변 신의주에서는 세계 최초로 제트 전투기 사이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당시 미 공군이 B-29기를 엄호하기 위해 F-80C 전투기 편대를 출동시켰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중국 공군은 미그-15기를 출격시켰다. 양측이 신의주 상공에서 조우하면서 벌인 교전의 승리자는 미군이었다. 러셀 브라운 중위는 자신의 F-80C기로 미그-15기를 격추하며 첫 제트 전투기 격추자로 이름을 올렸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제트기 성능 자체를 보면 미그-15기가 훨씬 나았다. 소련으로부터 원조받은 미그-15기는 롤스로이스제 엔진은 물론 23mm 기관포 2문, 37mm 기관포 1문에 강력한 무장 후퇴익까지 지닌 최신예 전투기로 미 공군 주력 F-80은 물론 F-51(P-51), 미 해군의 F9F까지 완전히 능가했다.
기계 성능에서의 열세를 극복한 것은 2차 대전 유럽·태평양 전장에서 다양한 전투경험을 한 미군 조종사들의 비행 실력이었다./매일신문
[1932년] 법조인 배명인 출생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58~68년 서울·청주·부산·대구 지방검찰청 검사, 1968년 법무부 송무과장(訟務課長), 1971년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 부장검사, 1973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1974년 동 형사1부장, 1976년 동 성북지청장, 1978년 대구지방검찰청 차장검사, 1979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1980년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1981년 대검찰청 차장검사, 같은 해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1982년 법무연수원장, 1982~85년 법무부장관, 1985년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객원교수, 1986년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1988년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지냈다. 1989년 이후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를 지내고 있으며, 홍조·청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1923년]독일, 비어 홀 폭동 발생
1923년 11월 8일 저녁 히틀러와 소수 나치 당원이 뮌헨의 한 맥주집에서 열리는 우익 정치모임에 난입했다. 히틀러와 소수 나치당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독일 우익 군사지도자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연합했으며, 1년 전에 있었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을 본뜬 ‘혁명’을 계획했다. 우익 정치모임에 난입해 그곳에 있던 우익 지도자들로부터 베를린에서 일어날 ‘혁명’에 가담하겠다는 합의를 억지로 얻어냈다. 다음날 나치 당원 약 3,000명이 뮌헨 중심지 마리엔플라츠로 진군하던 중 경찰 저지선에서 일제사격으로 인해 나치 당원 16명과 경찰 3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반란자들은 정부가 강력히 대응하자 ‘혁명’ 계획을 포기했다. 그뒤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 바이에른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루덴도르프는 석방되었고, 히틀러는 반역죄에 대한 최소 형벌인 5년형의 징역에 처해졌으나 실제로는 란츠베르크에 있는 요새에서 8개월 동안만 복역했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그의 교서가 된 <나의 투쟁 Mein Kampf>의 많은 부분을 썼다. 사진은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사열하는 히틀러(1939)/브리태니커
[1911년] 법률가 이태희 출생
1911. 11. 8 평남 강동~1999. 10. 27 서울.
1937년 일본 도호쿠대학[東北大學] 법과를 졸업했으며 1953년 미국 예일대학교 법과대학원과 1962년 댈러스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1948년 대검찰청 검사, 1949년 법무부 검찰국장 및 서울지방검찰청장, 1951~58년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학장, 1958년 국제대학장, 1959년 서울변호사협회장, 1960년 검찰총장, 1962년 법학원, 1972년 법무부 변호사징계위원 등을 지냈으며, 그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11년] 중요무형문화제 1호인 종묘 제례악의 전 보유자 성경린(成慶麟) 출생
성경린은 1911년 음력 9월 18일 여의도 북쪽의 밤섬에서 태어났다. 서울 토박이로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친정인 종로구 계동의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이수익은 기독교에 귀의해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늘 성경을 읽거나 문학서적을 탐독하셨기 때문에 어린 성경린도 그런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사립 승동기독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잘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어린 시절 꿈은 문학으로 뜻을 펴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따라서 취직이라도 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외가 아저씨뻘 되는 분의 권유로 이왕직아악부양성소 시험을 치르게 된다. 모집 정원 18명에 지원자는 80~90명이나 됐지만 성경린은 무난히 합격했다. 이 때부터 그의 아악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매달 15원이라는 거금의 장학금을 받으며 열다섯 살에 중학과정을 공부하며 가장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이다. 성경린은 1926년 4월에 이왕직아악부 아악생 제3기생으로 입학했다. 중학생 과정인데, 1년 동안 배운 실기의 양은 엄청났다.
이후 성경린은 1946년 3월부터 경성방송국에서 해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국악 해설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소양과 능력이 풍부한 그는 성춘풍이니 이춘풍이니 하는 필명으로 라디오 창극, 국악 무대 등의 원고를 쓰기도 했다. 틈틈이 고대소설과 야사 등을 뒤적거려 국악 무대의 자료를 찾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가 아악의 보전에 대해 헌신적 노력을 바쳤던 대표적 사례로는 이주환과 함께 했던 활발한 활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환과 성경린은 광복 직후 대한국악원과 아악부 간의 갈등에서 부원의 동요를 막고 아악부를 유실시키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운니동 국악원 집을 빼앗기고 아악이 계승되기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을 때 계동의 조그만 사가에서 그 불씨를 지켜온 공로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는 1950년대 이화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전임교사는 아니지만 한참동안 출강하면서 국어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은 인접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분을 갖게 했으며, 특히 월탄 박종화과도 친교를 맺으며,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1997년 세종대왕 탄신 육백 돌을 맞아 제정될 육백 돌 대상을 수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문화계 지도자로서의 성경린의 역할은 해방 직후 젊은 시절부터 비롯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에 개원한 국립국악원의 제2인자인 악사장을 맡고, 1972년 국악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 등 그는 조용한 가운데서도 차분하게 국악 행정을 펼쳐 나갔다.
또한, 성경린은 많은 레코드 출간에도 기여를 했다. 주로 레코드의 해설서를 쓰는 작업이었다. 국악대전집, 민요삼천리 등의 전집류 레코드 출간에는 그의 해설이 빠질 수 없었다. 2000년에 그는 후배들에게 1억700만원을 기탁한 기금으로 만든 관재 국악상은 3년마다 수상자를 내고 있다. 그 후로 그는 국악원에서 후진들을 지도하고 대한민국 국악을 육성했다. 하지만 그는 2008년 3월 5일 오후 2시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였다.
[1900년] 미국 여류소설가 마거릿 미첼 출생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1.8~1949.8.16)의 유일한 작품으로 집필기간이 무려 10년(1926~36)에 이르고, 일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으로 평가받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총 5부작으로 이루어진 대하드라마다. 남북전쟁(1861~65)과 패전, 재건시대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아름답고 강인한 스칼렛 오하라의 인생과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에 비해 연약한 이상주의자 애슐리 윌크스에 대한 스칼렛 오하라의 사랑, 물질주의적이며 행동가인 레트 버틀러와의 애증 등을 한데 엮은, 간결한 문체와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발행 후 1년 동안에 150만 부가 팔렸으며 1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1936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39년 빅터 프레밍 감독이 비비안 리(스칼렛 역), 클라크 게이블(레트 역)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기도 하였다. 한편 1991년 미국 소설가 A.리플리가 속편격인 '스칼렛'을 써서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다.
[1895년] 뢴트겐, X-선 발견/빌헬름 콘라드 뢴트겐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독일의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1895년을 20세기 과학사의 기점으로 삼는다. 그만큼 X-선은 현대물리학과 진단의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X-선 발견 역시 우연이었다.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다. 고전압이 걸린 고진공관을 이용해 작업을 하고 있던 뢴트겐이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자 음극선이 금속 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하면서 투과력이 강한 알 수 없는 광선이 발생하고, 이 광선이 고진공관을 둘러싼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 책상 위에 있던 백금시안화바륨 종이를 감광시킨 것이다.
‘미지의 빛’이라는 뜻에서 이 새로운 광선을 ‘X-선’이라 명명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했다. 12월 22일, 자신의 처 베르타의 왼손을 감광판 위에 놓고 실험한 결과 살아있는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혀 나왔다.
사진은 이듬해 학회지에 제출한 그의 논문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와 함께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1901년 첫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때까지 “사회의 도덕성에 반한다”는 이유로 그는 대중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한 신문은 “여성의 속옷 밑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광선을 발견한 뢴트겐을 사악한 기계장치와 함께 땅속에 파묻어야 한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발명가 에디슨의 조수는 X-선의 효능을 검증해보기 위해 자신의 신체에 X-선을 노출시키는 실험을 하다 죽기도 했다.
[1793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개관
프랑스 파리를 짧은 일정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곳.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다. 들어가자니 적어도 반나절은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이 아깝다. 겉만 보고 가자니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아 찜찜하다. 결국 다른 볼거리를 포기하고 들어가도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진다. 전시 규모가 방대해서 어디부터 볼지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대명사인 루브르가 처음부터 지금의 용도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센 강가에 처음 지어질 당시의 루브르는 요새였다. 규모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으며 어둡고 칙칙했다. 15세기 말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수아 1세 때 루브르는 궁전으로 탈바꿈을 시작했다. 뒤를 이은 왕들도 경쟁하듯 건물을 추가로 지었고 안팎을 조각, 그림, 태피스트리로 장식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인 건축가를 불러들여 호화로움을 더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루브르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였다. 1672년 한층 더 화려한 베르사유궁이 완공됐기 때문이다. 이후 왕들은 베르사유를 거처로 삼았고 루브르는 방치됐다.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운명을 뒤바꾼 혁명은 루브르의 운명도 바꿔 놓았다. 날마다 계속되는 베르사유궁의 호화 파티에 분노했던 파리 시민들은 그해 10월 루이 16세를 루브르로 데려갔다. 다시 왕의 거처가 된 것도 잠시. 1792년 루이 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루브르는 혁명 세력의 차지가 됐다. 이보다 앞선 1791년 이미 혁명정부는 루브르를 ‘과학, 예술의 모든 기념물을 모으는 장소’로 지정했다. 1793년 11월 8일 루브르는 ‘중앙 예술 박물관’이란 이름 아래 대중을 위한 장소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박물관이 문을 연 뒤 혁명군은 이웃 나라와의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루브르로 가져왔다. 이후 권좌에 오른 나폴레옹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점령지에서 가져온 유물로 루브르를 한층 살찌웠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35만여 점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 유물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모여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루브르는 문화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수많은 왕궁 가운데 하나’로 남을 수도 있었던 곳을 대중에게 선사한 조상들의 혜안 덕분이다./동아닷컴
[1674년] ‘실락원’을 쓴 영국 시인 존 밀턴 사망 (1608~1674)
장편 서사시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이 1674년 11월 8일 사망했다. 66세였다. 영어로 작품을 쓴 위대한 작가를 꼽으라면 세익스피어 다음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로 그의 시들은 뛰어났다.
밀턴의 삶을 지탱한 두개의 지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청교도주의와 르네상스적 교육을 통해 얻은 인문주의였다. 크롬웰이 이끈 청교도 혁명 속에서 밀턴의 종교적 신념과 인문주의적 교양은 서로 합쳐져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었다. 열두 권으로 이뤄진 `실낙원`은 구약성서를 소재로 삼아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낙원추방을 묘사하고 있다.
밀턴은 젊은 시절부터 장편 서사시를 쓸 계획이 있었지만 청교도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틈을 내지 못하다가, 만년에야 이 웅대한 시를 쓰게 되었다. 밀턴은 죽기 3년 전에 인간의 마음속에 낙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한 서사시 ‘복락원’을 출간해 ‘실락원’과 짝을 맞추었다./조선
[1656년] 핼리(Edmond Halley) 출생
1656년 11월 8일 ∼ 1742년 1월 14일
← (핼리 혜성, 1986년 3월 8일 칠레 라시야에 있는 유럽 남부 관측소의 슈미트 망원경으로 찍은 사진)
핼리는 현대사상의 기초를 확립한 과학혁명의 시기를 살다 간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다. 그는 핼리 혜성의 궤도를 처음으로 계산해냈다. 1673년 옥스퍼드대학교 퀸스 칼리지에 들어갔으며, 존 플램스티드가 연구를 하고 있던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하고 나서부터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를 출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86년 대양에 분포하는 탁월풍을 나타낸 기상도를 제작했고, 1693년 브레슬로 시의 사망률 통계표를 출판했다. 인구의 사망률과 나이를 관련시켜 설명을 시도한 그의 통계표는 나중에 생명보험회사의 보험통계표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1698~1700년 순수한 과학적 목적의 항해를 한 후, 1701년 대서양과 태평양 지역의 자기도(磁氣圖)를 처음으로 출판했다. 1531, 1607, 1682년에 관측된 3개의 혜성이 같은 혜성임을 밝혀내고 1758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정확히 예측했는데 혜성은 그가 예측했던 대로 되돌아왔고 그의 이름을 따서 핼리 혜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1520년] 덴마크, 스톡홀름 대학살 자행
1520년 11월 8일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을 침공해 스웨덴 귀족들을 대거 처형했다. 1397년 스칸디나비아 3국인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왕국이 단일 군주 아래 결속한다는 내용의 칼마르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스웨덴 국민들은 이 동맹에 불만을 품고 소(小)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의 반(反)동맹파를 결성했다. 반동맹파가 동맹 옹호자인 대주교 구스타프 트롤레를 투옥하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1519년 대규모 용병군을 이끌고 스웨덴을 침공했다. 1520년 9월 스투레의 군대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을 점령한 크리스티안 2세는 11월 8~9일에 80명이 넘는 스웨덴 귀족들을 처형했다. 스웨덴과 핀란드 전역에 걸쳐 계속해서 처형이 자행되자 학살은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사실상 모든 스웨덴인 파벌들이 칼마르 동맹에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1552년경 구스타프 1세 바사가 달라르나 지역의 농민들과 한자 동맹의 도움에 힘입어 스웨덴에서 덴마크인들을 몰아내고 칼마르 동맹을 해체했다. (사진은 구스타프 1세 바사, J. Binck의 작품을 기초로 한 초상화(1542), 스웨덴에 있는 University of Uppsala 소장)
[1519년] 코르테스 테노치티틀란 진주
1519년 11월 8일, 스페인 귀족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508명의 군인과 16마리의 말 그리고 14문의 대포를 이끌고 아즈텍 문명의 수도 테노치티틀란(현재의 멕시코시티)에 진입했다.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를 환영했지만, 아즈텍 제국이 멸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코르테스는 스페인의 하급 귀족으로 쿠바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519년 4월,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드 퀠러 (Diego Velazquez de Cuellar,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현재의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여 마야 제국을 점령했다. 이어 내륙으로 진격한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지배를 받던 틀락스칼라 부족과 동맹을 맺고 현재의 멕시코시티인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했다.
처음에 그를 맞이한 아즈텍 제국 몬테수마 2세는 그를 환영했다. 이 무렵 아즈텍 제국에는 여러 불길한 징조때문에 불안에 휩쌓여 있었다. 특히 아스텍 신화 중에서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신은 약 500년경에 떠나면서 흰 얼굴의 모습으로 멕시코를 정복하러 온다는 신화가 있었는데, 이 신화와 에르난 코르테스가 온 연도, 그의 생김새 등 비슷한 점이 많아서 몬테수마 2세는 두려워하다가 신으로 맞아 주기로 했던 것이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자 마자 바로 몬테수마 2세를 가두고 아즈텍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요구했던 것은 막대한 금이었다. 그의 강압 통치에 견디다 못한 아즈텍인들은 152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코르테스와 사이가 무척 안좋았던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코르테스를 제압하기 위해 1520년 4월에 판필리오 드 나바레스(Panfilo de Narvaez)에게 1000명의 병력을 주고 멕시코로 보냈다. 코르테스는 자신을 잡으러 오는 나바레스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5월 10일에 테노치티틀란을 떠났다. 그 직후 아즈텍 제국의 축제 기간이 돌아오자 갇혀 있던 몬테수마 2세는 축제를 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코르테스 대신 스페인인들을 지휘하고 있던 페드로 디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요청했다. 알바라도는 이를 허용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축제에 난입하여 아즈텍 상류층을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아즈텍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몬테수마 2세가 나서서 중재하려 했으나 몬테수마 2세마저 분노한 아즈텍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나바레스군을 패배시키고 나바레스의 부하들마저 자신의 부하로 편입시킨, 일단 몬테수마 2세까지 죽는 마당에 더 이상 테노치티틀란에 머무를 수 없었고, 달아나야 했다. 동맹 부족인 틀락스카라 영토로 도망간 코르테스는 도망치면서 대포와 황금 대부분을 잃었고, 오툼바 전투(battle of Otumba)에서는 부하 870명을 잃었다. 동맹부족의 지원과 쿠바에서 보내온 지원부대로 1521년 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했다.
아즈텍인들은 콰테목(Cuauhtemoc)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 전쟁을 준비했지만, 점령 기간동안에 스페인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에 대해 아무런 대응책을 갖고 있지 못해 싸우기도 전에 숱한 전사들이 죽었다. 게다가 아즈텍 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변 부족들이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고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즈텍 제국은 고립된 상태였다. 결국 코르테스는 1521년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로써 아즈텍 문명은 완전히 멸망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은 코르테스의 제안으로 현재 이름인 멕시코시티로 바뀌었다.
코르테스는 1523년에 멕시코 총독이 되었다. 1526년에 월권 행위로 파면되어 본국으로 압송되기도 했지만 1526년에 다시 돌아왔고 1540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갈때까지 멕시코 총독으로 있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음식 중에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디오들이 알려준 음료가 있다. 코르테스는 이를 유럽으로 가져가 쓴 맛을 없애기 위해 설탕을 타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음료가 아니라 고형의 간식거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초콜렛이다. 피의 정복 과정에서 발견한 달콤한 산물이 바로 초콜렛인 것이다./엔티엠뉴스
[1226년] 카페 왕조 출신 프랑스의 왕 루이8세 사망
별칭은 사자왕 루이(Louis le Lion), 사자심왕(獅子心王) 루이(Louis Coeur-de-Lion).
1187. 9. 5 프랑스 파리∼ 1226. 11. 8 오베르뉴 몽팡시에.
재위 1223 ∼ 1226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푸아투와 랑그도크에서 왕권을 확립했다. 1200년 5월 23일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딸 블랑슈와 결혼했는데 루이가 죽은 뒤 알폰소 8세는 섭정을 맡아 프랑스를 다스렸다. 1212년에는 생토메르와 에르를 손에 넣어, 왕의 세력 아래 있던 아르투아 백작령을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던 플랑드르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했다. 잉글랜드 왕 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원조를 요청하고 대가로 잉글랜드 왕위를 루이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자 1216년 잉글랜드로 원정을 갔다. 처음에는 승리를 거뒀으나 해전(海戰)에서 지고 귀족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1217년 킹스턴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이때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에게 1만 마르크를 몰래 지불했다. 즉위한 뒤 1224년에는 푸아투를 손에 넣었고 1226년에는 알비파(Albigenses:프랑스 남부 알비 지방에서 12∼13세기에 일어난 이단파)에 대항해 성전(聖戰)을 벌였는데 아비뇽에 있는 주요 요새를 장악해 승리를 거뒀으나 병에 걸려 파리로 돌아왔다. 카페 왕조 출신의 왕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많은 왕자령(appanage)을 하사했으며 국왕재산 양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자신의 재산관리를 강화했다. 그는 또한 충성의 맹세는 왕 개인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 자체에 대해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을 내세워 왕권강화를 이루었다. 그의 큰아들 루이 9세는 평화적으로 왕이 되었고 다른 아들들은 왕자령을 받았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5년 최준희씨 에디슨市서 한인최초 美 직선시장 당선
[1977년] 구름위집 하나님의 복된 선물과 혼인
1965년 미국의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 사망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2008년 러시아 핵잠수함, 동해상에서 사고
2002년 유엔 안보리, 이라크 무기사찰 결의안 만장일치로 채택
2000년 일본 적군파 최고 간부 시게노부 후사코 체포
1998년 이광모 감독 ‘아름다운 시절’ 도쿄영화제서 금상
1995년 한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에 피선
1990년 새민방 명칭 ‘서울방송’으로 결정
1981년 프렘 태국수상 내한
1980년 정부, 경제활성화대책 발표. 금리인하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가조인
1965년 미국의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 사망
1961년 서독수상에 아데나워 당선
1944년 독일, 신무기 V-2호 발명
1942년 미-영 연합군 북아프리카 상륙작전
1936년 프랑코, 스페인 총통 취임
1932년 미국 대통령선거. 루스벨트 제32대 대통령에 당선 확정(10일)
1915년 원산 상수도 준공
191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 설립
1905년 변호사법 반포(최초의 변호사제도)
1847년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프슨의 세계최초의 무통분만 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