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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51
1월30일[연중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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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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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walejaFOQk
[서울대교구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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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 최절정기의 역동적인 사목활동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정말이지 신명 나는 날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구름 군중이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몰려온 군중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뵈려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밀쳐대니, 이러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도들과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주요 임무 중의 하나가 밀려드는 군중에 대처하기 위한 질서 유지였습니다. 아마도 요즘 같았으면 사도들은 눈에 띄는 모자와 완장을 착용하고 호루라기를 목에 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 앞으로 나서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회당장! 당시 상당한 보직이었고, 유명인사였습니다. 그가 무릎 꿇은 이유는? 자신의 딸이 중병에 걸려 촌각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중 한 여인이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놀랍게도 손을 대는 순간 12년 동안 앓고 있던 하혈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 안으로 들어가니 곡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입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죽은 딸의 침실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딸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아리땁고 화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하느님의 어떤 분이신지 명명백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죽음을 절대 원치 않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영원한 복락을 만끽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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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 주십시오."
<(2)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저는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마음씨가 착한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착하기만 했지 모질지 못한 데다 남들 시선 다 의식하고 살다 보니 늘 손해 보는 삶을 살아온 특별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마음씨 착한 청년이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지니고 저를 찾아왔지요. 고민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얼마나 마음이 짠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남 생각할 줄 아는 착한 젊은이였기에,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려는 청년이었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스트레스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젊은이, 자기 한 몸만 챙기지 않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젊은이를 오히려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시대 왜곡된 사회 풍조나 왜곡된 교육구조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연민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이 비정한 경쟁사회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아오느라 어깨가 축 처진 그 젊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빨리 이 열악하고 그릇된 교육풍토가 바로잡혀지도록, 정말 이해하지 못할 학벌주의와 지역 이기주의를 포함한 그릇된 관행들이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이 유난히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해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안타까워하시고 함께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의 고통과 좌절과 방황 앞에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가련한 우리 인간들을 향하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우리의 흐느끼는 어깨 위에 놓여 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딱한 처지 앞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십니다.
결국 사도직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섬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주님의 날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또 다시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도로 세상 앞에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는 사람으로 서길 기원합니다.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앞에 그런데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임을 알려주는 희망의 전달자가 되길 빕니다. 희망은 힘이 셉니다. 좌절은 희망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절망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오늘 하루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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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쉬운 사람>
10여 년 전에 저의 작은 형이 ‘투다리’라는 닭꼬치 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일을 좀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거의 항상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장사는 매우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도와주다 보니 가게가 매우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퀴퀴한 냄새는 둘째 치고, 이제야 밝히는데, 주방 여기저기로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형은 그것들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죽였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메슥거립니다.
한 번은 쥐를 잡으려고 약을 천정에 올려놓았는데 고양이만한 쥐가 그 약을 먹고 비틀거리다가 한 여자 손님이 소변을 보고 있는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 앞에서 손님을 쳐다보며 눈싸움을 하다가 시간이 꽤 흘러 쓰러져 죽었습니다. 손님은 나오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그 쥐와 눈싸움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가게를 좀 더 깨끗하게 하자고 했지만 형은 너무 깨끗해지면 손님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이 가게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손님을 포함해서 많은 손님이 이 지저분한 가게를 계속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하나 완전한 사람이 없고 그 부족함 때문에 완전한 사람 주위에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편한 것입니다.
어차피 술을 마시고 조금은 망가지는 사람들이기에, 너무 깨끗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형은 가게도 조금은 망가진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고해성사를 볼 때 매우 무서운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미사 빠진 것 때문에 그렇게 야단을 맞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분은 고해 중간에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하고, 대죄가 어떤 것들이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습니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저는 다시는 그분께 고해성사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부님들이 대부분 좀 무서운 분들 같아서 청년 때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학 가서 저의 지도 신부님을 만나고는 ‘사제가 저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너무 겸손하고 가난하시고 농담도 잘하셔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팬티가 보이도록 다 뜯어진 바지를 입고 오셔서 저희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옷을 입으시면서도 꼼꼼히 살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부족한 면이 저희가 편하게 그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성으로나 학적으로나 굉장히 뛰어나고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편하시면서도 배울 것이 많아서 그런지 저를 포함해 너무 많은 학생이 그분께 논문을 쓰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시나이산에 거하시는 줄은 모두가 알았지만, 그 주위의 불과 구름, 천둥과 번개 때문에 무서워 감히 범접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오로지 모세만 시나이산에 올라가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조차도 그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거룩하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께 어떻게 다가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피조물의 옷을 입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들고 또 하혈병이 걸린 여인까지 겁 없이 그분의 옷을 만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혈병이 걸린 여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안 되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왜 예수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 될 제자 셋만 데리고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들어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또 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밖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예수님을 또다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다가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같이 다니면서 그분께 말 걸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람들이 쉽게 다가와 죄를 용서받고 병을 고치고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에 무리가 되는 것들은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로서 가끔은 신자들이 저를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선교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다가오기 편한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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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뉴욕에서 ‘노량’을 보았습니다. 이로서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에 대한 영화가 막을 내렸습니다. ‘명량, 한산, 노량’입니다. 명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승선한 장군선이 물살에 떠밀려 큰 바위에 부딪쳐 부서질 위험에 처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장군선에 고리를 달아 물살이 약한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장군이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도 장군을 사랑하는 모습에 뭉클했습니다. 한산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학익진’입니다. 육지에서만 사용하던 진법을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도 사용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듯이,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으로 일본의 배를 포위하였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노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북소리였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순신 장군은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쳤습니다. 장군선에 울리는 북소리는 명나라의 군인과 조선의 군인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북을 치는 과정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계속 북을 치게 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승리하였습니다. 그렇게 7년 전쟁을 끝이 났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하는 모습이 3번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은 귀가 열려서 들을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 37)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24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에파타’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게파’이다. 게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이 교회를 무너트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000년 시간이 흘렀어도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굳건하게 바위 위에서 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으며 베드로 사도를 초대교황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일어나라)’ 죽었던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마르 5, 42)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024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탈리타쿰’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탈리타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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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쳐주신다. 이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39절).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딸은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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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모든 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들의 행동을 저마다 다른 단어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군중의 손길에는 ‘밀쳐 대다’는 표현을 쓴 반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이 있던 하혈하는 여인의 손길에는 ‘손을 대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의 믿음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한편 딸이 죽어 있는 회당장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웃는 사람들이 아닌, 믿음을 가진 이들 앞에서 회당장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
믿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믿음이 담긴 기도는 하혈하던 여인의 손처럼 예수님께 손을 대어 구원을 체험하게 하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믿음이 담긴 기도의 손길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회당장 딸의 손을 붙잡아 죽음에서 일으켜 주신 것처럼, 우리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기도는 예수님을 밀쳐대던 군중의 손길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던 사람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웃음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오늘 하루는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에 ‘믿음’을 실었으면 좋겠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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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1월 30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두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이신 예수님 뜻에 맡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생살여탈권 중에서 살리는 권한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죽이는 권한도 사용하시게 될 텐데, 그 권한은 스스로 살기를 거부하는 죄인들에게만 사용하실 것입니다.>“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24ㄴ-34)1)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라는 말은, 앞의 3장 10절에 있는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뒤의 6장 56절에있는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옷에(옷자락 술에) 사람들이 손을 대려고 한 것은, 그들의 병을 모두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밀쳐댔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만지려고 자기들끼리 서로 밀쳐댔다는 뜻입니다. <31절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 댄다는 제자들의 말은, 제자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뜻일 뿐입니다.>2)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라는 말은, 여자의 병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기 전까지, 여자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로 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주신 일은,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입니다.>3)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라는 말은, 여자가 ‘사람들 모르게’, 또 ‘예수님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자신의 병에 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여자가 예수님도 모르게 옷에 손을 대려고 했다고 해서,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지만, 치유의 은총이 옷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신 것과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신 것은, ‘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여자가 스스로 나와서 믿음을 고백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여자에게 일어난 기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신 기적은 없습니다. <모든 기적은 주님께서 원하신(의도하신) 일입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신 기적이라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연’입니다.>5)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여자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기적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나는 믿는다.”라고 말해야 합니다.>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기적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라고 전해집니다.><병을 고치기를 바라면서 간절하게 기도도 하고 온갖 치료도 하면서 애를 쓰지만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병자에게 가서, “너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는 “너의 기도가부족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말은 어리석은 말이고, 위험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남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병에 걸려서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분들도 많습니다. 믿음의 모범이신 성인들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믿음만 있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를 짓는 위험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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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복음서의 치유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실과 간절함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치유를 간절히 청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소녀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회당장은 믿음 안에서 죽음까지 이겨 내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고통 때문에 몸도 마음도 성하지 않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치유되지 못했던 자신을 예수님만큼은 낫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호기심으로 예수님께 다가서고 밀쳐 대기까지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하고 위로하십니다. 신체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시고, 몸과 마음이 성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게 된 다윗의 통곡은 반란자를 제거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찼던 그의 신하들과는 대조됩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들이지만,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했기에 다윗은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하며 슬퍼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자신의 죄과가 자손들에게까지 물려지는 아픈 현실을 하느님께서 살피시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의 마음이 읽힙니다.
우리도 치유받고 싶은 내면의 상처와 병들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얼마나 간절히 하느님께 치유를 청하며, 믿음을 갖고 회심과 보속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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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욕망의 잠, 질투의 잠, 시기의 잠, 분노의 잠, 쾌락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 우리 자신의 문제를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가져가야 합니다. 회당장은 유다인 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람임에도 나자렛 목수의 아들 앞에 가서 땅에 엎드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둘째,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시던 중에 하혈병을 앓는 여인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고쳐 주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회당장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지금 당장 자기 딸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립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초조함이 있어도 기다렸습니다.
셋째,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혈병을 앓는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의 죽음을 전합니다. 그 순간 야이로는 시간을 지체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야속하였을까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를 듣고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가 비웃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께서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이 말씀에 소녀는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날 때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져가십시오.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절망과 원망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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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래 전 기발한 보험회사 광고가 있었습니다. 이 광고에는 아이들의 여러 상황이 등장합니다. 슈퍼에서 물건을 다 넘어뜨리는 사고를 친 아이, 치과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누워있는 아이, 넘어져서 울고 있는 아이, 주사를 맞기 위해 기다리는 아이.
아이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엄마”입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당황한 아이를 돌보는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보험 혜택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광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 역시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엄마야!”라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꺼내곤 합니다. 바로, “엄마”라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탈리아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뮤지컬 혹은 영화의 제목으로 많이 알고 있는 “맘마미아”라는 말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당황했을 때 외치는 말인데, "엄마야”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모를 믿고 따를 때 그 부모는 아이들에게 참된 희망의 대상이 되고 든든한 벗이 됩니다. 반면 사춘기 소년 소녀들처럼 부모를 믿지 않고 의심할 때 관계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법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 신뢰가 있다면 간절함을 더욱 표하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두 가지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중 첫 번째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는 기적입니다. 부모로서 자기 자녀가 병들어 죽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12살된 소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아버지로서의 애통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읽으며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녀의 아버지는 자기 딸의 죽음 앞에서 회당장으로서 지켜야 할 종교적인 품위, 사회적인 위치와 체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이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애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는 다른 이들의 편견이나 비아냥을 듣지 않고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굳게 따를 수 있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오늘 복음의 두 번째 기적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하혈하는 여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기적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밀쳐대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의 옷자락을 잡는 여인의 손길을 즉시 알아차리십니다.
예수님을 밀치는 많은 군중의 손은 믿음이 없이, 혹은 의심을 한 채 청원하는 수많은 우리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반면 믿음으로 옷자락을 잡는 여인의 손은 간절함과 믿음으로 주님께 청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수많은 청원과 바램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절실한 마음이 가득한 기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당시 하혈하는 여자는 죄인 혹은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일이 금지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치유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손을 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아시고는 그 즉시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이 두가지 기적에서 볼 수 있듯이 온전하고 간절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주님은 당신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손을 꼭 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의문을 품거나 불만을 가지기보다는 더 간절함과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떄,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의문과 불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하느님께, “당신을 더욱 믿고 따를 수 있는 신앙을 청합니다” 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커다란 용기를 주실 것이며 견고한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이러한 믿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때로는 어려움을 극복하길 청하기보다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탓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기도해야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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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었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을 뿐,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버린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도 더러 있는 일입니다. 이제는 치료비가 너무 비싸서 치료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인은)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마르 5,27)
사실, 율법규정에 따르면, 그녀는 피 흘리는 부정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만지게 되면 그 사람마저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녀는 감히 이 두 가지의 금기를 깨어버릴 만큼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군중 속에 섞여 있지 말고, 그곳에서 나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따라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어야 하고, 주님의 가슴에 머리를 대어야 할 일입니다. 그 간절함과 설레임으로 오늘도 주님을 따라야 할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옷을 만질 때, 우리 안에 기적의 힘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 기적은 옷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하나의 상징이듯이,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나오게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에서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껴야 할 일입니다. 복음에서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껴야 할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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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34)
“사랑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라.”는 돈 보스코 성인의 이 말씀을 저는 참으로 좋아합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살짜리 회당장의 딸과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를 중첩해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든 체면과 위신, 명성과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을 뵙고 무릎을 꿇은 채,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5,23)라고 간절하게 간청하였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장애 혹은 병든 자녀를 둔 부모의 절박한 심정일 것이며, 이런 절박한 마음과 함께 자기 딸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은 바람과 자신의 희망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에서 예수님께 그토록 간절하게 청하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깊은 믿음을 보시고 그 회당장의 집으로 길을 잡은 예수님께 회당장과 달리 선뜻 나설 수 없는 딱한 처지와 신분이었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자는 다만 뒤로 가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5,28)라고 믿고 주님의 옷을 만진 순간,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5,29) 고 기록합니다. 믿는 만큼 받는다, 는 말처럼 그녀는 비록 회당장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처지도 아니었기에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나을 것이라는 그 믿음대로 치유를 받는 순간 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자비와 은혜를 체험한 순간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온 말은 무엇이었으며, 그녀의 속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는 단지 그 여자만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적 사랑을 체험하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향한 하느님의 은혜이며 사랑의 발로입니다. 사실 그녀는 열두 해 동안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용하다는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하였고, 시간도 재물도 다 쏟아부었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이 도리어 상태가 더 나빠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에게서마저도 버림을 받았을 만큼 불쌍하고 가련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다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기에 마치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자 하는 심정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마지막 희망으로 군중 속에 숨어 살며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이 나은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뭐라고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흔히 알고 하는 말 곧 바닥을 쳐야 한다, 는 우리네 인생의 경험처럼 밑바닥까지 내려가야지만 다시 솟아오를 수 있는 것이 신앙인가 봅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또 비워야 만이 채워질 수 있나 봅니다. 어설프게 죽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나 봅니다. 하혈병을 앓아왔던 여인은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모든 것을 잃었고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5,28)라는 처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그녀가 생각하던 대로, 믿는 대로 이루어 진다, 는 말처럼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누군가가 자기 옷에 손을 대고 치유의 힘이 뻗어나감을 직감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5,30)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옷을 누구나 만진다고 해서 치료가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단지 옷을 만진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손을 믿음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누구나 성체를 모시지만 믿음으로 모신 사람만이 그 성체의 힘을 느낄 수 있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34)
하혈병을 앓은 여인의 치유로 시간이 지연된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따님이 죽었으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5,35)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주저하며 망설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야이로에게 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말한다. 일어나라!”(5,41)라고 하자 그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그 소녀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였으며, 소녀의 치유는 하느님 사랑의 드러남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회당장과 하혈병을 앓았던 여자는 많은 점에서 대비되면서도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남성-여성, 깨끗함-더러움, 이스라엘인-이방인, 가진 자-없는 자, 딸을 위해- 본인을 위해, 앞에 나서서-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바라는 바를 표현하였지만, 그들에게서 공통된 점은 바로 자신들의 처지에서 솟아나는 절박한 심정과 그리고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표현한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심한 중병을 앓고 있는 딸을 둔 회당장과 그 여자는 어둡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고, 자신들이 믿는 바를 주님만이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의탁했다, 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고 구원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아왔던 그녀에게 하신 말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34)는 말씀 안에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구원이란 결국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신체적으로 건강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평안과 평화를 누리게 되며 이것이 곧 구원의 상태이며,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삶을 삶대로 만끽하는 것! 어쩌면 이런 연장선상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 하신 말씀도 비슷하다고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 곧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5,41)하신 말씀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삶을 충만히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의 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묶고-억누르고-눈멀게 하는 모든 것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전제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된 모든 면에서 먼저 죽어야 만이 참된 부활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혹여 여러분 주변에는 심신 장애아를 둔 부모님들이 계십니까?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이런 부모님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면서 무척 마음이 안타깝지만, 단지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심신 장애아를 자녀로 둔 부모님들께 위로와 함께 격려의 기도를 바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라’에게는 정신 장애뿐 아니라 시각 장애, 간질 등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좌절과 분노의 시간을 겪고 난 뒤 부정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일상생활 대부분을 아들과 함께 지내며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를 중심으로 한 인간성의 문제를 다룬 소설을 썼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회와 세계, 이를 초월하는 세계에 대한 내 생각은 모두 아들과 함께하는 삶에 기반을 두었으며 그의 삶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의 존재는 내 삶의 밝은 면뿐 아니라 어둡고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밝혀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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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스트리아 정신 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합니다.
“사람은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다’라고 느낄 때 사랑을 실감한다. 열등감을 품거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기에게 반문해 보십시오. ‘나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고 있는가?’ 혹시 다른 이에게 불편을 주었을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웠을 때 불편함을 더 많이 안겨 줍니다. 특히 ‘어쩔 수 없었다’라면서 정의를 내세우며 나의 정당성을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때로는 율법도 어기셔야 했던 예수님, 사람들의 반대에도 죄인들과 함께했던 예수님, 진정한 사랑을 위해 당신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평온함과 자연스러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의 삶입니다.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황금률도 겸손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그 삶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지요.
회당장이 아픈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아픈 딸을 향하여 나가시는 길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을 봤던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이제 회당장의 집에 다다를 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탈리타 쿰!’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알프레드의 아들러’의 말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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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길>
마르코 5,21-43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손길>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마르 5,41)
그분께서 내게
건네시는
사랑의 손길
내가 그분께
건네는
믿음의 손길
하나로
모아지니
희망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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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 뚜껑을 따뜻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를 차게 해서 아프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 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회당장이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지만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고, 그 고통 때문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발 앞에 엎드려,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내로라하는 이가 다른 사람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 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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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믿음>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 믿음의 전사-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에는 끝이없다."
오늘 1월30일 다산 어록의 말씀입니다. 날로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가 진짜 참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무실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살고 났는데 노추(老醜)의 욕심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허망할까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신뢰를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란 말도 생각이 납니다.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믿음으로 ‘성화(聖化)의 여정’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노후의 삶일까요. 일출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봄의 꽃향기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가을 단풍의 풋풋한 내음에 초연한 아름다움은 마음을 마냥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유종의 미란 말도 있듯이 젊음보다 인생 마무리의 노년이 참 중요함을 느낍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정확히 4시간 간격의 소변이요 하루 6차례의 소변을 보게 됩니다. “아, 몸은 살아 있어 평생 쉬지 않고 일하고 있구나! 태만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은 몸에 죄짓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더불어 생각난 시편 121장 다음 내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리라.”(시편 121,4-8)
믿는 대로 됩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믿음을 위해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이요, 믿음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 날까지 치열하고 가열찬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탈리아 언론인들을 향한 소통을 위한 세 요소에 공감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의 믿음을 북돕웁니다.
첫째 말마디는 “가까움(proxmity)”이다. 이민자들,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버려진 이들을 결코 잊지 말고 가까이 하라. 하느님의 세스타일은 ‘가까움(proxmity)’, ‘부드러움(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다. 그분은 늘 용서하신다.
둘째 말마디는 “마음(heart)”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며 가깝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용기(courage)’도 라틴어 ‘마음(cor)’ 어원에서 기인한다. ‘마음과 함께 시류에 거슬러 가라(go against the flow with the heart)’.
셋째 말마디는 “책임감(responsibility)”이다. 모두가 그 맡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선에 깨어있는 책임감이다. 언론인들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활동의 위대함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하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이다.”
사막교부의 일화입니다. 한 제자가 포멘 압바를 찾아 한 말씀 주십사 청하자, “교부들은 행위마다 참회로 시작했다.” 그 제자가 다른 말씀을 주십사 청하자, “네가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베풀수 있도록 노동을 하라. 자선과 믿음이 죄로부터 깨끗이 해준다.”
제자가 또 묻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부는 “믿음은 겸허하게 사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새삼 참 믿음의 본질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산(山)과 강(江)이라는 제 자작시도 한결같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모두가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예화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주제도 믿음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지 않았더라면 회당장은 주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자신의 믿음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니 딸의 죽음이 전화위복, 야이로의 믿음을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됨을 배웁니다.
야이로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이 감동적이요 이런 사람이 진짜 참사람입니다. 회당장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구원의 삼박자인 1.주님의 연민의 사랑, 2.따뜻한 스킨쉽, 3.권능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어렵고 힘들 때마다 아람어 “탈리타 쿰!” 외치면서 즉시 일어나 다시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그 여자가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했으니 역설적으로 하혈병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음을 봅니다. 역시 하혈병을 앓던 부인은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의 결과 치유를 받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자, 부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아뢰자 주님의 자비로운 응답 말씀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를 향한 치유 말씀처럼 들립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주님의 치유의 구원에 반드시 전제되는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세 스타일, 가까움, 부드러움, 연민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 역시 하느님의 이런 친밀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세 스타일을 지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다윗의 파란만장한 믿음의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대죄는 용서받았지만 믿음의 여정을 통해 보속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 엄혹합니다. 이 모든 비극과 불행을 겸손과 비움의 믿음의 계기로 삼는 다윗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가 참 경이롭습니다.
앞서는 절친인 요나단의 전사에 통곡하던 다윗이, 어제는 자기를 쫓던 아들 압살롬을 피해 올리브 고개길을 울며 오르던 다윗이 오늘은 압살롬의 죽음에 성문 누각에 올라 대성통곡합니다. 간장을 끊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런 비극의 와중에도 다윗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은 그 백절불굴의 믿음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역경을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았기에 다윗의 믿음의 여정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버텨내고 견뎌낸 다윗의 초인적 믿음의 여정이 영원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스승들이 예수님과 야이로 회당장. 열두 해 하혈병 앓다가 치유된 부인, 그리고 사무엘 하권의 다윗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이고 이 밖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믿음의 스승들을 무수히 만납니다.
특히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다윗의 주님의 믿음의 전사로서 치열하고 가열한 삶은 이분들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믿음의 여정에 믿음의 전사로서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우리를 도와 줍니다.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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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는 이의 아픔>
어제 시므이의 저주를 오지게 받고, 다윗은 자기의 불행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라고 얘기한 바 있지요.
이렇게 선을 기대했는데 전장에서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압살롬의 전사 사실을 보고하며 마침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맞서 일어난 자들의 손에서 오늘 임금님을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이것이 기대한 선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압살롬이 원수요 적이었다면 이것이 기쁜 소식이었겠지요. 그러나 압살롬이 못된 짓을 아무리 했어도 다윗에게 그는 여전히 아들이었기에 그 소식은 너무도 비통한 소식일 뿐입니다.
사실 다윗은 애초부터 압살롬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전쟁을 벌였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전쟁한 것이 아니라 걸어온 전쟁을 막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을 것이며, 아들이 죽는 그런 끔찍한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 뜻대로 되기만을 바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행복하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래서 뉘우치고 아들로 되돌아오기만을 바랐을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비의 사랑이고,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들에게 한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과 같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짓은 어쩌면 압살롬이 다윗에게 한 짓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가 때가 되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감히 하느님을 이겨 먹으려고까지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 공손히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라고요? 얼핏 보면 우리는 청하는 존재고 하느님은 칼자루를 쥐신 분 맞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하느님 사랑의 약점을 이용해 먹는 우리입니다. 내 뜻을 안 들어주시면 언제고 탕자처럼 떠나기도 하고, 떠나지 않더라도 원망에다 분노와 떠나겠다는 협박까지, 모든 카드를 써서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하려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 맘대로 살아 곧 죄를 지어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마음 아픔.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운명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마음 아픕니다.
사랑하는 그의 아픔 때문에 마음 아프고, 사랑하는 그의 배신 때문에 마음 아프고, 배신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마음 아프고, 원하지 말아야 한 것을 원하기에 마음 아픕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래도 압살롬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면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알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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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5,34)
<참믿음!>
오늘 복음(마르5,21-43)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길을 나서십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군중 가운데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낫게 됩니다. 그 여자는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하고 생각했고, 그 믿음이 그 여자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에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딸을 다시 살리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믿음의 기적'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고 있었던 여인의 믿음과, 야이로의 한 회당장의 믿음이 만들어 낸 기적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이고, 참믿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복음 안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 '신앙생활과 잘 믿는다는 참믿음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 때의 첫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겸손하게 나의 나약함(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돌아가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다시 세례 때의 첫믿음으로 돌아가는 것(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 믿는다는 참믿음의 모습'이고, '신앙생활인 믿음의 삶은 이것의 계속된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리타 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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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ZV0KupJF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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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 34)
올겨울은
유난히 더 춥습니다.
위태로운
우리의 삶에
좋은 일들이
더 많기를 이 겨울
예수님께 더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아름답지만
아픈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프고 아픈 이들을
믿음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치유는 삶을
지켜내는 힘이
예수님께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아픈 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다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치유의 방향은
믿음이며
믿음의 방향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병고는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더 간절해지는
주님 은총입니다.
다시 봄처럼
치유의 선물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5,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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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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