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계엄(戒嚴)'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온다. 내 기억에 3번 나온다.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몸이 굳었다. 숨을 몰아 내쉬고, 책을 덮어야 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3장, 일곱개의 뺨. 91면)
이 문장은 소설을 더 읽지 못하도록 내 숨통을 막았다.
『소년이 온다』는 여러 시각에서 읽을 수 있으나, '계엄'이라는 화두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계엄군'이 들어오고(91면), '계엄 해제'가 되고(145면), '계엄 해제 이후'를 쓴다.
한번 '계엄'이 시작되면,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게 학살되는지, 모나미 볼펜으로 손가락이 비틀어지도록 고문 당하고, 트럭에 짐짝처럼 실리는 시체들, '계엄 해제'가 되고서도 "주말이면 축구하러 가던 운동장 뒤편 언덕에 신축 강당"(145면), 가장 친밀한 곳에서 가장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일찍 읽었다고 하는데, 나는 한번에 읽을 수 없었다. 읽다가 덮었다, 읽다가 덮었다, 읽다가 책을 덮고 눈물도 안 나오는데 마치 통곡할 때 압도하는 뻑뻑한 통증이 가슴을 조였다.
명색이 평론가인데 소설 책 한 권을 이리도 오래 읽다니. 몇 년이 지나 이제는 『채식주의자』로 한강 얘기를 조금씩 강연하곤 했지만, 『소년이 온다』로 글 써달라 강연해달라고 하면 피하고 피했다. 소설을 다 읽는 데,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한 번에 도저히 읽을 수 없어 몇 년이 걸렸다. 이후에 몇 번인가 읽었다. 처음에 연필로 밑줄을 치고, 다음엔 빨간 색연필로 밑줄 치고, 다음엔 파랑 형광펜으로 밑줄 치고.
이 새벽 5시에 깨어난 까닭은 고통과 치욕에 떠는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로 풀어쓴다면 꾀병 닮은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2024년 12월 3일에 윤석열이 다시 그 '계엄'을 저질렀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밤이었다. 이번 「계엄사령부 포고령」 에서 몇 문장은 분명히 윤석열 자신이 쓴 문장이라고 판단된다. 그의 말투가 그대로 문장에 실려 있다. 윤석열이 "처단 (處斷)하라"고 썼을 것이다. 이 처단은 '결단을 내리다'라는 뜻인데, 유의어는 거세, 처형 등이다. 단두대에 목을 자르는 이미지가 다가온다.
고통 당한 광주에서 그 사건을 겪은 작가 박상률 형에게 물었더니, 그냥 고개를 숙이신다. 너무 고통스러우 거 같다. 역시 그 지역 출신인 작가 김형수 형에게 말했더니 이상한 말을 한다.
"계엄령이란 단어를 듣고, 그 순간이 아니라 며칠간 몸이 굳었어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몸이 굳는 병이 있는지, 이게 무슨 증세인지?"
실은 나 역시 몸이 굳어 있다. 급히 하루키에 대한 글, 동학에 관한 글, 그리고 단행본 교정을 해야 하는데, 며칠째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온통 '계엄'이라는 단어에 시달리다가 이 글을 쓰면 스스로 치유되기를 바라는데, 늘 반가운 친구 평론가 박O연 교수는 어제 말했다.
"뭐라해야 할까. 수배 당해서 집 나갈 때 어머니가 써준 편지가 떠올랐어. 지금 생각하면 절절해서 읽을 수 없는 편지 말이야. "
1980년대, 우리 젊은 시절은 그냥 어둠이었다. 그냥 최루탄이었다. 캠퍼스와 거리는 매일 최루탄으로 범벅이었다. 이 시대의 여인들이 저렇게 많은 최루탄 가스를 마시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망측한 걱정까지 하곤 했다. 그때 수배 당하여 강화도인지 강릉인지 도망 다닌 짠실 누나가, 갇혔을 때 딱딱한 쓰레빠를 세워 내 코를 때려 바수었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얼굴이 화들짝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 '계엄'이라는 단어에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수배 당하고 집을 떠나면서 도피하면서, 영문을 모르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형사들이 거실에 들어와 앉아 있어. 사이다며 우유며 냉장고에 있는 거 먹으면서, 너 어디 갔냐고 아빠 엄마한테 자꾸 물어봐."
그 겨울 쓰레빠만 신은 채 집을 나가 학교 앞 사설 도서관에 숨어 있었다.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했을 때, 걱정하며 말하던 영복이 누나는 코로나가 무성하던 그대 5월에 돌아가셨다.
12월 3일 '계엄 해제' 이후의 온갖 고통은 계속됐다. 온갖 트라우마로 끔찍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심야에 몸이 굳어 TV를 보다가 계엄군이 국회 건물 창문을 깨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막내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가족이 아니면 절대 문 열어주지 마."
말해놓고서 나는 흙 먹은 얼굴이 되었다. 계엄군이 깜냥도 안 되는 나를 찾아올 리는 없건만, 왜 이리 엉뚱한 말을 했을까. 아들은 당연히 아빠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한다. 나라는 인간은 김민웅 형처럼 투사로 나선 인물도 아닌데, 이 무슨 정신적 증환인지.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 일본 형사들에게 털리고, 성림다밤에서 처음 불심건물에 걸렸다는 윤동주가 겪었던 "나도 모를 아픔"도 이런 유사한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윤동주 <병원> 1941.12 )
계엄이 해제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해제되지 않았다.
"묘지처럼 고요하고 환한 길을 트럭이 달려가는데, 잔디밭에 여대생 둘이 잠든 듯이 누워 있는게 보였습니다. 청바지를 입은 그들의 가슴에 노란 현수막이 덮여 있었습니다. '계엄 해제'라고 굵은 매직으로 적힌 글씨가 보였습니다."(5장 밤의 눈동자. 145면)
연말이라 많은 송년회와 식사 자리가 있다. 되도록 안 가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곳들이 있다. 몇 번 갔으나 도저히 반갑게 식사를 계속 하기 어렵다. 웃음이 못에 걸린 양 어색하기만 하다. 먹은 것들이 다 얹힌다. 그나마 큰 위로를 주었던 것은 막내가 하루 지나고 한 말이다.
"아빠, 함께 광장으로 가요. 여의도도 아빠랑 갈께요."
아들의 말이 아들 세대의 말로 들렸다. 촛불 집회 때 아빠를 따라 깃발을 들었지만, 아들이 먼저 광장에 나가겠다고 말한 적은 처음이다.
한 주 전만 해도 정치적인 문제라며 외면했던 대학생들이, 86세대라면 무조건 냉소했던 세대들이 이제 86세대의 고통을 아는 듯이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다. 이제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윤석렬과 그들을 옹호하는 버러지들을 젊은 세대들이 조금이라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 깨달음을 아들에게서 듣는 듯 했다.
학살하여 권력을 잡은 자,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절대 계엄을 해제하지 않는다. 곰팡이들은 절대 반성하지도 않고 번진다 스멀스멀 번진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폭력이라도 묵인하고 동조하면서 스멀스멀 번진다. 소설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현식 속에서 계엄을 겪고 있다. 다시 저 절규가 들려 올 수도 있겠다. 각오해야 한다.
"시민 여러분, 여의도 국회로 나와 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국회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직도 계엄이다】
계엄령이 선포하는 짐승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굳었다.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사십여 년 전 트라우마는 몸을 암석으로 굳혀 놓았다.
계엄은 계속되고 있다
수괴는 아직도 권좌에 앉아 있다
수괴의 공범자들이 아직도 권력을 잡고 있다.
(2024. 12. 8. 새벽)
* 사진은 한홍구 교수의 <계엄령을 사랑한 네 남자> 썸네일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h5bpNVH9Q&ab_channel=%ED%95%9C%ED%99%8D%EA%B5%ACTV
첫댓글 차마 믿을 수없는, 믿고 싶지 않은 현재진행형 계엄..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