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시련』 - 시편 73편 메시지 -
시편 73편은
“왜 경건하지 않은 악인들은 아주 잘되는데 경건한 자들은 빈번하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시편 기자는 자기의 체험을 진술하며,
자기의 영혼이 거의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즈음에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 궁극적인 승리와 확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습을 밝혀 나간다.
이 시편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 호소력을 가져왔다.
‘거의 미끄러질 뻔하고’, 그 걸음이 ‘거의 넘어지게 될’ 상황에 이른 많은 이들에게 ‘소망의 문’이 열리기를 바란다.
제 1 장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73:1-2)
- 우리는 신약,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기록을 만나게 된다.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와 똑같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었다.
인생의 파도에 얻어맞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더욱 개인적이고도 친밀하게 진리를 받기 위하여 시편으로 나아가곤 하였다.
그들은 시편에서 다른 사람들의 체험에 대한 기록을 읽고는 그들도 자기와 유사한 일을 겪었음을 발견한다. 바로 그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힘을 준다.
이 시편에서 제기된 문제
성경에 등장하는 이런 사람들은 넘어져 나둥그라지는 것이 무엇인지,
지독하고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 빠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시편 기자들은 완전주의적인 교훈을 제시하지 않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에 관하여 분명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서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정직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보여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에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73:1) 시편들은 일반적으로 결론부터 말한다.
어떤 체험을 겪고 나서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전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선하시도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같다. 그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 곧 마음이 정결한 자신의 백성들에게 항상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들이 체험한 것 같이, 그는 자기가 아주 심하게 흔들렸으며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고 말한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바로 고통의 이유였다.
그는 이 땅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죄를 피하였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기도하였다.
자기의 삶을 점검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속에서 죄가 발견될 때마다 슬퍼하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와 새롭게 하심을 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대단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지독하게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진정 괴롭게 하고 좌절시킨 것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악인이다. 그들이 경건하지 않은 것은 천하가 다 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번성하고, 갈수록 부자가 되며,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매임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
그는 그들의 모습을 거만과 속임수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거만하게 말하며”
이것은 오늘날도 그와 동일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모독적인 말을 내뱉는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11) 바로 그것이 이 시편 기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한 것이다.
2. 시험에 빠진 그리스도인
1) 첫째, 그가 보인 당혹감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나의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원리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절반은,바로 그 말씀이 우리가 항상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기본적인 입장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야기된다.
우리는 모든 일이 단순하고 명료하며 분명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들은 불가사의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우리 죄인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항상 복 주셔야 하며 징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보다 무한히 더욱 높다.
2) 둘째, 당황하는 것이 죄악적인 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거기에는 매우 위안을 주는 것이 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8) 낙심하는 것은 나쁘지만, 그러나 답답한 일을 당하여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혹감 그 자체는 죄가 아니나. 당황하는 것은 언제나 시험을 향해 문을 열어 놓은 것이라고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다.
3. 시험의 성격
시험은 아주 강력하여 가장 위대하고도 강한 성도도 흔들어 댈 수 있고, 넘어뜨리기도 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2),
아직 시험의 세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가장 어린 초신자이다.
시험의 세력과 권세는 아주 다양하고, 하나님의 능력 다음으로 세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서 난 자 중 주님만 그를 물리치셨다.
시편 기자에게 시험은 당하고 있던 괴로움과 악인들의 성공적이고도 행복해 보이는 생활을 대조함으로써 열린 문으로 들어 온 것이다.
주목해야 할 다음 요점은, 그것이 눈을 멀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이는 내가---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3) 그는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복을 받은 내가 저 경건하지 않은 악인들을 질투할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정말 마음 깊이 부끄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험은 우리를 찾아오되 그 세력은 어찌나 힘이 센지 그것이 요구하는 것만 바라보게 하고, 다른 것을 모두 잊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눈멀게 하는 시험의 효력이다!
사탄의 교활함을 잊지 말라. 사탄은 친구처럼 찾아온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사탄의 논리는 어찌나 교활한지 시험을 제시하는 논리가 아주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떤 답변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시험당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시험을 받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주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을 물리치셨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마귀는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할 것이다. “까마귀가 그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으나, 그대 머리카락 속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빌리 브레이) 문제는 그 생각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들에 찬동을 하면 죄가 된다.
4. 시험에 대처하는 법
시편 기자는 시험에 바르게 대처하였음을 확신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난 후 이제 나는 하나님이 언제나 선하심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러하시다” 시편 기자는 “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항상 선하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은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것같이 보이고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14)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한 가지 질문은, 그 모든 일을 만날 때에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에서 시험을 되받아 밀어내고 몰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시금석이다.
덧붙여 시편 기자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1) 선을 행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공정해야 한다.
이 약속들은 언제나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우리는 ‘내면적으로 진실해야’ 한다. 숨긴 죄가 없어야 한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만일 내가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약속들 중 어느 것도 활용할 권리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수와 성공적인 영적 삶의 비결이 바로 이 두 가지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1-2) 즉 하나님께 대하여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확신을 가져야 하며, 나 자신을 향해서는 어떤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한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내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마26:39)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세상 죄를 놓고 생각하니 답답하였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할 다른 길은 없사옵니까?’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자신을 낮추셨고, 즉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셨다.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옳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선하시나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