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경계
누군가에게 분명 이상적인 날이 있을 것이다. 생일이 될 수도 있고 크리스마스, 신년, 결혼기념일이 될 수도 있다. 그 날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는 날이다. 그렇게 그 날이 찾아오고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365일 중 하루일 뿐이야.”
이상의 실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수시와 정시의 마무리는 첫 목표이자 단추이자 학교 생활, 나의 10대의 결론일 것이다. 그렇게 마무리된 나의 10대는 홀가분하며 잠시 공부라는 큰 짐을 벗어 던진 그 즐거움은 새롭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이런 짓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야 되는 거지?”
체념하긴 이르다 하여 아직 이상의 실현을 놓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직 그 날을 즐기려 하고 나의 10대 마무리를 환상적이게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하지만 곧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나보다 그 날을 잘 즐기는 사람들과 10대의 마무리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꿈과 같게 한 이들이. 비교하고 말 것이다. ‘나의 이 날은 그들의 비하면 초라하군’, ‘나의 10대는 이렇게 처참하게 끝나는 군.’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누군가는 조금만 더 손을 뻗으라 외친다. 이내 너의 이상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너의 위치에서 그 행복을 충분히 느끼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있고 너무 눈이 부시면서도 거대한 것이 이상이라 부를 만하다. 손을 뻗어 본다. 손을 쫙 펴서 태양 앞에 가져가 본다. 내 눈으로 보기에 무언가 잡히는 것 같다. 저 태양이, 아무도 가지지 못한 태양이 지금 내 손안에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쥐어 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내 손안에는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을 나는 잡으려 하고 있다. 내가 손을 쥐어 보는 대도 태양은 내 손 밖으로 뛰어나오지 않는다. ‘아 이렇게 태양을 잡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 손을 꽉 움켜쥔 순간 내 손을, 더 나아가 온 세상을 태양 빛이 이미 감싸고 있다. 태양은 내 손에 쥐어 진 적도 없고, 내 손에 안에 있던 적도, 가려진 적도 없다. 열심히 뻗은 내 손에 닫지도 않았다. 그저 누구도 잡기 못하고, 누구도 영향을 주지 못한 그 상태 그대로 모두를 비치고 동시에 모두의 꿈으로 남아있다.
이제 사람들은 돌멩이를 줍는다. 그리고 손 안에 있다는 감촉을 느끼고, 가려보고 손으로 꽉 움켜쥐어 내 것이라는 큰 확신을 얻는다. 그리고 서는 던져버린다. 그 다음에는 더 예쁜 돌멩이를 줍고, 그 다음에는 여럿이 힘을 모아 아주 큰 돌을 들어본다. 다음은 무엇을 할까? 조각해보고, 쌓아보고, 던져도 본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최후의 순간에 그 주변에는 정말 다양한 돌멩이와 돌이 있을 것이다. 아주 예쁜 돌멩이, 너무 못생긴 돌멩이, 상처 내기 쉬운 날카로운 돌멩이, 여럿이서 함께 얻은 큰 돌. 혹은 정말 보잘 것 없는 돌멩이만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못나고, 너무 날카로워서 잡을 수가 없는. 그저 누가 길가며 버리고 간 돌멩이를 아주 조금 얻은 이들이다. 결국 그 최후의 순간에 사람들은 돌멩이를 줍기 전처럼 다시 하늘을 볼 것이다. 하늘에는 태양이 전과 다름없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다. 그렇게 죽기 직전의 힘없는 손을 태양을 향해 뻗는다. 힘껏 손을 피고, 꽉 움켜쥐기를 반복한다. “난 태양을 가지지 못했어. 이딴 건 전부 그냥 돌멩이일 뿐이잖아. 멍청한 것. 난 왜 돌멩이를 쫓았지? 마치 돌멩이를 가지면 만족할 것같이. 바보같이.”
공자여 알겠는가? 그대는 태양을 원하는 이들에게 돌멩이 줍기를 권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만의 태양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며.
모든 사람들이 태양을 가지기 원한다 말하기는 문제가 있다. 누군가는 작은 돌멩이를 가지고 싶을 수도 있고, 진주나 보석정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욕망에 브레이크는 고장나 있어 멈출 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비교에서 나온다. 내가 아무리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도 인스타를 키면 보다 더 즐거운 하루를 즐기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의 인스타에는 더욱 환상적인 순간을 보내는 이들의 눈물 담긴 영상이 나온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암울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도 인터넷을 보면 보다 암울한, 이상한, 불쌍한 하루가 있다. 파스칼이 말한 위대와 비참 사이에 있는 인간은 인간성 뿐만이 아닌 인생 그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정상의 행복도 불행도 아닌 저쪽으로 잠깐 치우거나, 이쪽으로 잠깐 치우치는 차이의 인생에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행복으로 나의 인생이 기울기 바란다.
그렇게 조금 더 큰 돌멩이를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날카로운 돌을 들었고 이것을 춘추시대라 할 만하다. 그 날카로운 돌로 사람을 해치고, 해침을 당해서 죽는다. 그런 상황에서 공자는 덕, 예라 불리는 가장 돌멩이 다운 돌멩이를 줍기 시작했고 그 다음은 공부라 하는 예쁜 돌멩이를 주웠다. 예전에는 날카로운 돌로 서로를 찔렀다면 이제는 누가 예쁜 돌을 주웠나 검사하여 비교로 사람을 죽인다. 공자를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쉬운 이유는 현대 사회에 그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덕과 예의 결핍이 얼마나 수많은 문제를 만드는 지 알 수 있는 것도 현대 사회이고, 공자가 주장한 배움과 공경의 아이러니가 제일 많이 나타나는 것도 현대 사회이다. 덕과 예가 없으니 교권이 추락하고 가정이 붕괴되어 가장 근본 되는 대화와 인간관계의 행복이 무너졌다. 배움을 강조하니 이제는 배움으로 사람을 죽이고, 공경은 형식이 되어 사람들의 숨통을 쪼인다.
아무리 올바른 입력을 해도 기계가 고장 났다면 결과는 실패다. 덕과 배움을 쫓은 공자의 말은 맞는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실현하기에는 인간이 망가져 있다. 사람은 드높은 태양을 쫓다가 넘어져 코피를 흘리는 그런 미련한 존재다. 그냥 그 뿐이다. 그 사실을 알았어야 한다.
마치 돌멩이를 주우면 태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이. 그런 공자의 태도가 나는 그저 기만으로 보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밑바탕부터.’ ‘덕을 쌓고 각 위치에서 군자답게.’ 좋다. 그렇다면 이 모자란 인간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성사하게 살 것이며 그 후 다시 주장할 그 이상의 것은 어찌 할 것인가? 당신이 말하지 않았는가? “백성은 도리를 따르게 할 수는 있지만 도리를 알게 할 수는 없다(8.9).” 사람들의 미련함을 말하지 않았는가? 헌데 태백편의 결론은 순임금, 우임금, 요임금의 덕을 높이며 본보기로 삼으라는 이야기다. 모두에게 인을 실천한 힘은 있다고 말하며, 백성들은 낮게 본다. 동시에 자신이 존경하는 임금들을 보여주며 마치 나에게 이리 소리 치는 듯하다. “이 사람들도 하지 않았는가? 너가 만약 배움의 즐거움을 알 수 있는 엘리트라면 덕을 행하고 나와 대화의 즐거움을 나누자.” 더 이상 내 머리속에 공자는 따뜻한 이웃집 할아버지가 아닌 높은 곳에 앉아 사회에 대해 푸념하는 한 노인의 모습이다.
대화의 즐거움은 존재하지만 그 즐거움을 알면 후에는 그 이상의 즐거움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고, 하나를 가르치면 그 후에 올 백의 쾌락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은 저 멀리 절대 닿을 수 없는 태양을 가지기 원하지만 현실은 태양이 너무 뜨거워 실내로 몸을 피할 뿐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좋다. 돌멩이를 주우라고? 좋다. 예쁜 돌멩이를 줍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그 돌을 나누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좋다. 그럼 그 후는? 이게 끝인가? 여전히 태양은 빛나고 돌멩이는 이제 미련해 보이는데 그 다음은? “배움, 배움만이 답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더욱 배우며 서로 인간의 인을 쌓죠! 인간으로 인하지도 못하면서 뭘 더 하겠나는 것입니까?” 왜 모르는 것인가? 태양은 내 눈앞에서 빛나고 있다. 내 안에서 저 태양을 잡으라고 부르짖고 있다는 말이다. 돌멩이 같은 것은 만족이 안된다는 말이다. 좋다. 위대한 공자님의 말씀이니 따라보자. 계속 공부하고 인간으로 덕을 쌓으려 노력한다. 여러 형식이 생기고 수많은 교육의 길이 열린다. 더 예쁜 돌멩이를 줍기 위해 내 몸과 정신을 던지고, 가족을 던지고, 생계를 던진다. 세상에는 수많은 예쁜 돌멩이가 빛나고 있고 그것이 사진과 영상으로 내 주변에 살아 움직인다. 도망칠 수가 없다. 나는 저 태양을, 적어도 보석을 바라보는데 내 손에 있는 작고 하찮은 돌멩이조차 잘 간수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면 과거의 위대한 선생은 분명 이리 말하겠지 “덕과 인도 행하지 못하면서 무슨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야!” 그게 아닌데. 나는 그저 보다 좋은 보석을 같고 싶을 뿐인데… 난 그저 나보다 빛나는 사람들의 돌멩이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뿐인데… 그렇게 누군가는 위대한 선생님의 말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그 말을 따라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도 전에 종이를 찢고 만다. 차가운 땅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저 멀리 태양이 빛나며 빨간 피를 더욱 비참하게 내리쬔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는 선선하고도 무한한 바람만이 부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