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리[多富里]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 있는 법정리(里).
우계산, 황학산, 유학산 등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두 하천이 합쳐지는 곳이다. 한천(漢川)이 백운산(白雲山)[713.4m]과 황학산(黃鶴山)[762m]을 타고 내려 다부리의 북쪽으로 흐른다. 소야 고개[246m]가 한천과 팔거천(八莒川)의 분수계를 이룬다.
조선 시대 때 다부원(多富院)이 있었으므로 다부(多富)리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인동군 석적면(石積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거문, 원증 일부를 병합하여 다부라 하고 칠곡군 가산면(架山面)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연마을로는 다부, 진목, 샛골, 큰마마을 등이 있다. 다부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다부리의 그것과 같다. 진목마을은 다부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샛골마을은 다부와 진목의 사이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마마을은 다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다부리의 면적은 7.9㎢이며, 인구는 234가구, 419명으로 남자가 238명, 여자가 181명이다(2013년 12월 현재). 쌀농사 이외에 양봉을 비롯하여 복숭아 등의 과수 재배, 느타리버섯 등의 시설 재배를 많이 한다.
호국로와 국도 5호선[경북 대로]이 만나는 곳에 다부원(多富院)이 있고, 여기에서 경북 대로를 따라 북동쪽에 진목정(眞木亭)이 있다. 다부원에서 황학산과 백운산 사이 다부천(多富川) 계곡을 오르면 유전동 마을, 섬마을, 거문간(巨門干) 마을이 있다. 다부원은 조선 시대 영남 대로의 요충지였다. 소야원은 여관이 설치되어 있었던 역이며, 관원과 행상이 드나들면서 장이 형성되었다. 또한 인근의 가산 산성과 천생 산성은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시사한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은 다부원 일대가 6·25 전쟁의 격전지였음을 말해 준다. 매년 정월 대보름 첫 시(時)에 다부리 동제(洞祭)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다부 초등학교가 있고, 동진 정보 통신 등의 산업체가 입지하고 있다. 진목정은 다부원 동북쪽에 있다. 등짐장수들이 참나무 고목 아래에서 쉬어 가곤 했던 곳에 형성된 마을이다.
거문간 마을은 신라 시대 초소였던 큰 돌문[巨門]이 있었던 골짜기[干]란 뜻이다. 다부 2리 마을 회관 위쪽에 대구 예술 대학교가 있다. 거문간 마을에서 질매재를 넘으면 지천면 황학리에 이른다. 중앙 고속 국도가 한천과 나란히 달린다. 지방도 79호선[호국로]이 왜관에서 장현을 넘어와 중앙 고속 국도, 대구-안동 간 국도 5호선, 대구-구미 간 국도 25호선[낙동 대로]과 각각 연결된다.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6.25전쟁 때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월 공세로 한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저항선을 적에게 붕괴당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